송준명 프란치스코 신부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사제 성화의 날)
호세아 11,1.3-4.8ㅁ-9 에페소 3,8-12.14-19 요한 19,31-37
오늘은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입니다. 이날은 우리 신앙의 기본을 이루는 7성사 중,
가장 으뜸 성사요, 교회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거룩한 미사의 근간을 이루는 성체성사를 되새기는
가장 중요한 축일 중 하나입니다. 이 뜻깊은 날, 우리는 성체성사의 의미를 기억합니다.
성체성사의 의미는 “감사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감사함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과 피를
온전히 우리에게 주시어 태초에 있었던 하느님과 인간의 사랑의 관계가 온전히, 완전히,
영원히 회복됨에 대한 감사함입니다.
우리는 종종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에게 가장 감사했던 일과 날들을 기념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온 마음을 다하고 그 마음이 드러나는 행동으로 감사함을 표시합니다. 사실 아무리 진실한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더라도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그것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좋은 모습으로 드러내려 한다 해도 그 안에 진심을 담지 못하면 어색해질 뿐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그런데 이 글을 읽고 계신 분들께 깊게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정말, 정말로 성체성사를 세워주신 예수님께 진정 감사하고 계십니까?
미사 5분 전 고해실을 나서 제의방으로 향하면 아직 휑하게 비어 있는 성전 좌석이 눈앞에
들어옵니다. 5분 후 다시 그 자리에 서면 어느 샌가 꽉 차있는 신앙의 신비를 목격합니다.
목소리에 힘을 주어 복음을 읽고 강론을 합니다. 여지없이 4번째 줄 자매님이 3분 후 주보를
펼칩니다. 강론소리가 더 커지는 걸 막기 위해 고개를 숙입니다. 이제 성가책은 필요가 없습니다.
핸드폰만 열면 성가책이 나오니 편리해도 너무 편리합니다. 하지만 카톡도, 메신저도
여지없이 성가책과 함께 등장합니다. 성가도 부르고 문자도 하고 일석이조입니다.
저기 8번째 줄에 앉아 계신 형제님, 봉헌 성가할 때 들어와 다리 꼬고 앉아서 핸드폰하고 계신
분인데 영성체하러 나올 것 같다는 예감이 듭니다. 그리고 그 예감은 어김없이 적중합니다.
영성체 성가는 늘 오르간 독주로 이어지고 아멘 소리는 들리지 않은지 오래요, 그 아멘을 대체해 버린
목례하는 영성체, 무릎을 구부리는 영성체, 두 발자국 떨어져서 배달하라는 영성체 그리고
묵언수행의 영성체가 일반화된 우리 성당의 모습입니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공지사항에 얘기할까 말까 수없이 망설이지만,
이야기하면 꼰대라 말할까봐, 이야기하면 화냈다 얘기할까봐, 이야기하면 잔소리한다 투덜댈까봐
또 여지없이 좋은 게 좋은 거지, 성당 나오는 게 어디야 라고 스스로 위안하며
사목자로서 하지 말아야 할 불의한 타협을 시도합니다.
진정 신앙인이 성체성사를 대하는 것이 감사함의 의미를 담고 있다면, 그것이 마음을 담은 행동으로
드러나면 좋겠습니다. 지금과는 좀 다른 모습으로 바뀌고 달라지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목숨까지 바치셨는데 이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사실 안될 거라는 거 알긴 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다시 한 번 이야기해 봅니다.
조금은 바뀌어보....자....고....좀...제....발!!!
대전교구 송준명 프란치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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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순 바오로 신부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사제 성화의 날)
호세아 11,1.3-4.8ㅁ-9 에페소 3,8-12.14-19 요한 19,31-37
우리가 미사 안에서 만나게 되는 성체와 성혈의 의미는 하느님의 사랑 그 자체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으실 때는, 짐승의 피로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그것은 옛 계약, 곧 구약입니다. 구약에서 시작된 구원의 역사는 이제 예수님의 탄생으로
절정에 이릅니다. 그리고 더는 짐승의 피가 아닌, 예수님의 피로 모든 사람을 위한
새로운 계약을 하느님께서 맺으십니다. 새로운 계약, 곧 신약입니다.
계약이라는 조금은 경직된 형식의 언어가 사용되지만, 이 계약 안에는 사람을 향한,
나를 위한 하느님의 따뜻함이 담겨 있습니다.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
예수님의 자기희생과 내어 줌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성체와 성혈은,
하느님과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어 주는 큰 신비를 담고 있는 것이지요.
이 큰 사랑의 신비를 우리는 비교적 손쉽게(?) 미사 안에서 마주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내어 주시고자 구약의 긴 역사가 필요하셨습니다.
한두 세대가 아니라 수천 년의 기나긴 시간입니다. 아울러 사람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따뜻함이 필요하셨습니다. 사람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필요하셨습니다.
사람을 위해서,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기꺼이 헌신하겠다는 예수님의 자기 결심이 필요하셨습니다.
구약에서 시작된 긴 역사와, 죽음에 이르기까지 온갖 멸시와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의 철저한
자기희생이 없었다면 결코 가능할 수 없었던 사건입니다.
그 사랑의 절정을 성체와 성혈이 품고 있습니다.
주님의 몸을 우리는 어떠한 마음으로 마주하고 있는지요? 나를 향한 하느님의 따뜻함과
품어 줌의 절정, 그것이 우리가 참례하는 미사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그 사랑의 표지가 바로 우리가 미사에 참례하는 것만으로도
만날 수 있는 주님의 보배로운 몸과 피입니다.
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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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이 요아킴 신부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사제 성화의 날)
호세아 11,1.3-4.8ㅁ-9 에페소 3,8-12.14-19 요한 19,31-37
성체-사랑의 결정체
오늘 복음은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심을 밝히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영하는 사람은 당신 안에 머무르게 되고 예수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게 되니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살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신다는 것은 단순한 영함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먹는다는 것은 결국 살아간다는 것을 포함합니다. 예수님처럼, 예수님을 닮아 그렇게 살아간다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래서 성체를 영한다는 것은 벗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사랑, 심지어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 길을 걸으신 예수님의 그 사랑을 살겠다는 일종의 다짐이요 결심인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예수님을 영할 때마다 그렇게 매번 새롭게 다짐하고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쌓아가다 보면, 인내심을 가지고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서다 보면 내성이 생기고 습관처럼 몸에 배여 그렇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일들입니다. 자신을 핍박하고 상처 주는 이들을 위해 대신 값을 치르고 목숨을 내어놓는다는 것이 말입니다. 아니 어쩌면 우리 각자의 노력만으로는 다다를 수 없는 그런 신적 경지의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아예 시도조차 버거운 일들이며 설령 시도했다 해도 이내 후회하며 포기하게 만드는 그런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면서 도우심에 힘입어 그렇게 노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의 일상이 은총을 통해 그런 사랑을 살아갈 수 있으리라 희망하면서 말입니다.
비관하며 염세주의로 일관해서는 어쩌면 한 미나를 땅에 묻어둔 종의 운명(루카 19,20 참조)을
벗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부족하더라도 노력한 만큼 그만큼 더 후하게 쳐주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시기에 하나씩 인내심과 희망을 가지고 그런 사랑을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설령 공과 덕이 부족하다 해도 이런 우리의 부단한 노력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열매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체는 바로 이런 사랑의 결정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인 오늘 전통적으로 많은 본당에서 어린이들의 첫 영성체를
거행하게 됩니다. 첫 영성체하는 어린이들을 축복하며 떨리고 설렜던 우리 각자의 그때 그 모습들을
떠올려봅니다. 예수님을 처음으로 모시던 그 첫 마음으로, 첫영성체 후 드렸던 그 기도를 기억하며
우리의 신앙적 삶을 더욱 충실히 살아가야겠습니다.
마산교구 전병이 요아킴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참조
가톨릭사랑방 catholic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