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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는 광복군첩보장교였다 !(펌)
1910년 일본육사에 이청천과 홍사익이 있었다.
그런데, 한일합방 소식이 들리자, 이청천은 학업을 중단하고 독립운동하러 떠났으며,
홍사익은 일본군에 남아 봉급의 절반을 독립군 가족들 생활비로 지원하며,
독립군을 지원하기로 약속하였다.
이청천과 홍사익간의 그 약속은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지켜졌다.
민족문화연구소는 독립군 가족에게 얼마나 생활비를 나누어주었는가?
일본군 중장까지 진급했던 홍사익 장군은 전범으로 체포되기 직전까지 평생
자신의 봉급 절반을 독립군 가족 생활비로 보냈다.
그리고, 일본 패망 직전 광복군 총사령관 이청천 장군과 더불어 일본군 공격작전을 시도하려 하였다.
과연 그는 엉터리 감별사들이 주장하듯 친일파였는가?
이어 박한용 연구원(민족문제연구소)이 "실제로 보면 알겠지만 군 계통에서 일선에서 독립군을 토벌했던 사람들은 하사관이라든지 소대장급들입니다"라고 지껄인다. 박한용의 이 말에 맞장구치며 넉달 후 7월 14일 열린우리당 신기남 의장은 "농사꾼이 논에서 잡초 뽑을 때 가리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친일진상규명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http://imnews.imbc.com//news/2008/politic/article/1101364_5670.html ). 그러자, 과거에 신기남 의원 부친 신상묵씨로부터 고문을 당했던 어른들이 신기남 의원은 일본 헌병 오장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증언하였으며, 아래의 그의 친일 문건도 공개되었다. 연해주의 조선족 역시 김희선 의원 부친 김일련은 만주국 특무경찰이었다고 증언하였으며, 그 사실 역시 문서로 확인되었다.
"악질적인 그런 헌병대 출신들도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하사관으로까지 할 수 있는 건 너무 확대하는 것 아니냐." "농사꾼이 논에서 잡초 뽑을 때 가리지 않는다"더니 자기네 조상들이 악질적인 헌병대 출신들로 밝혀지자 친일파 감별의 잣대가 확 바뀐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과연 좌빨들에게는 객관적인 기준이라는 것이 있는지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김대중(아래 사진의 붉은 원)의 모습에 대한 좌빨들의 해석은 무엇인가? 만주신문의 박정희 만주군관학교 지원 기사를 공개하며 박정희를 친일인명사전을 공개하였는바, 이 신문은 만주국 국민이 보는 신문도 일본인이 보는 신문도 아니라, 민족문제연구소측이 침략자로 규정하는 만철 기관지였다. 아마 민족문제연구소는 김구 선생과 그의 광복군 동지들의 증언을 더욱 신뢰해야 할 것이다. 만주군관학교에 입학 하려던 청년 박정희는 1939년 3월 어느날 김정균을 통해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났다. 김정균은 상해임정에서 비밀첩보원을 하던 김구 선생님의 수족과도 같은 분이었다. 그때 박정희는 20대 초반으로 아주 적극적인 사고를 지닌 청년이었다고 김정균의 일기는 적는다. 신영학을 통해 박정희를 소개받은 김정균은 이 청년이 뚜렷한 역사 의식과 조국 광복의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것을 보고는 김구 선생에게 소개를 하였다. 그때 박정희를 처음본 김구 선생은 박정희를 1시간동안 부동자세로 세워 두었다. 김구 선생이 본 박정희는 키는 크지 않았지만 부릅뜬 두 눈을 보고는 멈칫 놀랐다고 박정희가 나간후에 김정균에게 말했다고 한다. 김구 선생이 박정희 청년을 세워두고 외출을 하여 40여분만에 돌아 왔으나 박정희는 그때까지 부동 자세로 서 있었다. 그때 김구 선생은 박정희가 서 있는 자리에 비밀 표시를 해 두었다. 그랬는데 박정희는 그자리에서 1cm도 움직이지 않고 1시간을 서 있었다. 감탄한 김구 선생은 박정희 청년이 예사로운 사람이 아니라고 후에 그곳에 모인 광복군 동지들에게 말했다. 이를 계기로 김구 선생은 박정희를 예의 주시하였다. 그리고 모든 사료의 신빙성은 역사학적 해석의 과제이다. 김구 선생과 청년 박정희가 1939년 3월 어디서 상면하였는지 우리는 상세히 알 수 없으나, 그럼에도 이 자료가 민족문제연구소 주장보다 훨씬 신뢰성이 있다. 박한용 연구원은 지난 12일의 100분 토론 때 박정희가 광복군에 지원안하고 만주군관학교에 지원하였으므로 친일파라는 주장을 하였는데, 이는 코미디였다. 1939년에는 아직 광복군이 창설되지 않았을 때였다. 민족문제연구소 주장은 그 연대가 명백한 오류이며 1939년 3월 김구 선생이 박정희에게 만주군관학교 지원을 권유했다는 김구 선생 최측근의 기록이 훨씬 더 신빙성이 있는 것이다. 1967년 박영만(사망)씨가 쓴 소설 ‘광복군’이다. 광복군 출신인 박씨는 이 책에서 박정희의 일제 말기 행적을 마치 직접 본 것처럼 소상히 묘사했다. ‘광복군’에 따르면 만주국군 소위 박정희는 1945년 2월 만주광복군에 가담한 뒤 뜻이 맞는 한국인 동료들과 부대 안에 비밀조직을 만들고 훈련 때면 사병들에게 우회적 방식으로 일본식민지에서 벗어날 독립사상도 고취했다. 이어 광복군 제3지대장이던 김학규 장군으로부터 “부대를 장악하고 있다가 적당한 기회에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고 대기하던 중 일제가 예상보다 빨리 항복하는 바람에 거사 시기를 놓쳤다는 게 골자다. 박정희 동지는 격무 속에서도 원고를 자세히 읽어 주셨으며, 몇 군데 고쳐 달라는 당부까지 하셨다.”고 저자는 ‘광복군’ 서문에 썼다. 비밀광복군설에 반대하는 자들은 박 대통령이 책을 받으신 다음 ‘내가 어디 광복군이냐. 누가 이 따위 책을 쓰라고 했냐’고 화를 내셨다는 풍문을 인용한다. 그러나 대통령이 비밀광복군설 공개를 원하지 않으셨다고 해서 비밀광복군이 없었는가? 미 국방성이 몇 해 전에 광복군 OSS 상륙훈련작전 영상물을 공개한데 이어, 지난 해에도 미 국립문서보관서가 광복군 OSS 요원들이 있었음을 입증하는 자료를 공개했다.
여기 아래에 만주국군 소위 시절의 박정희의 사진이 있다. 독립운동 사료의 시각에서 보면 이 사진은 박정희가 광복군 OSS 첩보요원이었던 시절의 모습이다. 일본 편에서도 박정희를 일본군으로 간주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였다는 물증이 바로 박정희는 일본육사 다닐 때도 일본육사 정규생도가 아니라는 표시로 만주군 복장을 해야 했다는 사실이다. 영친왕은 일본육사시절 당연히 일본 사관생도 복장을 해야 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아래의 복장으로 유학생반에서 따로 수업을 받아야 했다. 박정희는 일본군은 아니었으되 일본군 내부를 깊숙히 알고 첩보전을 벌일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만주국 군복입은 박정희)
세상에 알려지기를 원치 않으셨을까? 그 단서는 1960년대에 항일 관련 여러 유적지 정비를 지시하며 하신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가 경제적인 부흥을 하려면 일본하고 경제적인 여러 가지 유대를 가져야 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제일 중요한 것은 정신적인 의식(意識)을 가지고 일본을 대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 역사상 일본이 우리를 침략한 역사의 교훈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누가 대통령이었다고 해도 경제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처럼 착각하는것은 그 당시로는 생각해 낼수 없엇을 것이다... 그것은 불가능할 만큼 6.25사변으로 폐허가 된 한국사회엿다.. . 만약 누가 대통령이라도 경제가 발전할 수 있다면 지금 왜 그토록 많은 빈곤국이 존재하는가? 자원 없고, 기술 없고, 자본 없고, 시장 경험 없는 나라에서는 경제 발전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국제정치학적 사실이다. 그리고 이것이 1960년대 초의 한국의 냉엄한 현실이었다. 1960년대의 일본은 군사 첩보전의 대상이 아니라 산업 첩보전의 대상이었다. 대다수의 후진국들이 영구 후진국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산업기술이 없기 때문이다. 산업기술을 선진국으로부터 이전해 오더라도 비싼 로열티를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불가능한 것이다. 어느 후진국에서 삼성에 비싼 로열티를 내고 반도체 기술을 이전해간다고 해도 비싼 로열티를 내면서 반도체 시장에 뛰어들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는 박정희 대통령이 매일 산업 첩보전으로 최첨단 기술을 이전해 오셨기 때문에 산업이 발전하고 선진국이 될 수 있었다. 만약 한국의 산업첩보 전략이 미리 알려졌었다면 일본은 물론 미국도 방어하였을 것이다. 일본은 경제적 이해관계 때문에 방어하였을 것이며, 미국은 국제정치의 역학관계 때문에 방어하였을 것이다. 아리카와 대좌가 남양군도로 출전하면서 박정희에게 이런 유언을 편지로 보냈다: <이 전쟁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일본은 망할 것이요, 조선은 독립할 것이다. 나는 죽으러 가나 자네는 자네 조국을 위해 살게>. (그 편지에서 말한 대로 그는 1945년 6월 오키나와에서 전사하였음.) 이 군사기밀을 아리카와 대좌가 박정희에게 누설하였으며, 이 정보가 광복군에게로, 광복군을 통해서 미국으로 전해져, 미국이 광복군과 합동으로 상륙작전을 준비하는 동시에 러시아에 태평양 전쟁 참전을 요구하였다. 원자폭탄 두 개를 투하하였으나, 일본이 그토록 쉽게 항복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천황이 항복으로 마음을 정하게 된 일차적 이유는 원자폭탄의 위력이 아니라, 관동군이 러시아군의 침공에 별 저항도 못하고 무너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시 일본 군부는 최후의 일인까지 결사저항 국민명령을 내리려 했는데, 천황이 선수쳐 항복선언을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박정희를 통해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이 입수하여 연합국에 전달한 관동군 고급군사기밀 첩보에 어떤 중대한 의미가 있었는지 분명하지 아니한가! 아래는 백범 김구 선생의 『 아. 그리운 조국 산하』에서 발췌한 단락이다: 이기청 (의병정신선양회 사무총장·방송인)도 증언하기를 5·16쿠데타가 일어나고 얼마 안돼서 한 젊은이가 마지막 임정요인이었던 백강 조경환 선생 면목동 집으로 찾아와 큰절을 하였다. 동행한 사람이 “대통령이십니다” 하기에 보니 박정희였다. 그는 "박 대통령은 '제가 만주에 있던 다카키 마사오입니다'하는데, 조선인 병사들을 일본에서 독립군으로 빼돌렸던 다카키의 이름을 익히 들었기 때문에 놀랍고도 반가웠습니다. 당시 상해 임시정부는 독립군을 보충해야 할 매우 어려운 상황이어서 박 중좌의 도움은 컸다고 합니다"라고 말하는데 사실이었다. 미 국립문서보관소가 최근 공개한 자료가 밝히듯이 미국 OSS는 그때 광복군에 200명을 더 모병해 줄 것을 요청하고 있었다 (http://www.sundayjournalusa.com/article.php?id=14994&page=4&s=&o=&k= ). 광복회 자료에 따르면 이때 탈출한 학병과 일본군 조선인들 중에서 탈출 학병 12 명과 징병학병 탈출 160 명을 광복군 제 1 지대 3 구대에 편성 배치하였고, 제 3 지대에도 50 여명의 탈출 학병들을 충칭으로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자료 역시 미국 국립문서보관서 기록과 일치하며, 박정희가 만주군 보병8단에서 근무한 시기와도 일치한다. 이 책 26쪽은 이렇게 기록한다. "1945년 2월 9일 만주군 제8단위문하기 위해 [신 태양 악극단] 찾아 왔다. 박 정 희 소위는 조선에서 新太陽樂劇團(단장 金 履 泰)이 보병 제 8단을 위문 공연차 왔을 때 樂劇團의 잡부로 변장하여 일하던 李 龍 基(光復軍特殊要員)와 접선하여 광복군 사령관 李靑天 장군의 밀서와 함께 光復軍 第3支隊 金 學 奎의 지령을 받았다." 이것은 1967년 광복군이 출간한 도서 "광복군"과 일치하는 증언이다. 그리고, 독립운동가 출신 송남헌은 좌파 진영에서는 누구보다도 독립운동사에 해박한 인물이었다. |
'박정희 소위는 조선에서 新太陽樂劇團(단장 金 履 泰)이 보병 제 8단을 위문 공연차 왔을 때 樂劇團의 잡부로 변장하여 일하던
李 龍 基(光復軍特殊要員)와 접선하여 李靑天 의 밀서와 함께
光復軍 第3支隊 金 學 奎의 지령을 받았다'.
출처...해방3년사 송남헌 저(金奎植 博士 秘書室長)
까치글방 발행 1권 26 page
허면 송남헌은 누구인가?
항일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경성방송국 라디오 단파방송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다. 대구사범학교 1기생으로 박정희의 대선배이며, 독립운동가 출신으로서 광복군에 대하여 해박한 송남헌은 공교롭게도
박정희 죽이기에 앞장서는 강만길이 추앙하는 좌파사학계의 거두라 할 수 있다.
송남헌 본인이 5.16군사혁명 직후 공산주의자로 분류 2년간의 옥살이를 하여서 박정희에 대한 원한이 있을 법한 사람이지만 송남헌 역시 박정희 소위는 독립군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박정희대통령이 독립군특수요원이었음을 어찌 부인하겠는가?
링크
☞ 박정희는 일본군이 아니었음을 입증한 김대중
만주국군 군관 박정희는 광복군 첩보장교였다
들통난 민족문제연구소의 혈서 기사 조작
조작으로 판명된 盡忠報國 滅私奉公 혈서설
북한 534부대 지휘관의 5.18사건 고백(1): 자폭서약
[펌]
※비밀광복군이란.....일제 식민지시대를 벗어나기 위하여 ....
적군에 들어가서 독립군을 비밀리 도왓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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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문제연구소는 1991년 설립된 단체로 역사를 바로세운다는 명목하에
'친일인명사전'을 만든 것으로 유명
이들이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지하당의 전신이란것 구차하게 반복안함.
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친북인명사전에오름)--남로당 박헌영 이름 따라 임헌영으로 개명했다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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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