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오늘은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주님께 감사한 이유는 끝도 없이 많으니
이 날을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게 하시고
이 예배로 더욱 감사가 넘치게 하옵소서.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주님의 보혈을 의지하오니
저의 부정성과 탐심을 덮어 주옵소서.
아들의 이름을 힘입어 아버지 품속으로 나아갑니다.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8.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버지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9.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가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10.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11.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의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12. 그의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의 이는 우유로 말미암아 희리로다
13. 스불론은 해변에 거주하리니 그 곳은 배 매는 해변이라 그의 경계가 시돈까지리로다
14. 잇사갈은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앉은 건장한 나귀로다
15. 그는 쉴 곳을 보고 좋게 여기며 토지를 보고 아름답게 여기고 어깨를 내려 짐을 메고 압제 아래에서 섬기리로다
16.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 같이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17. 단은 길섶의 뱀이요 샛길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를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18.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19. 갓은 군대의 추격을 받으나 도리어 그 뒤를 추격하리로다
20. 아셀에게서 나는 먹을 것은 기름진 것이라 그가 왕의 수라상을 차리리로다
21. 납달리는 놓인 암사슴이라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도다
(본문 주해)
8~12절 : 야곱이 그의 넷째 아들 유다를 축복하는 내용이다.
유다를 형제들이 찬양할 것이고, 원수들의 목을 움켜 쥘 것이며, 형제들이 그에게 절할 것이라고 말씀한다. 한 마디로 높임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왕의 이미지-사자, 규(홀), 지팡이-를 중첩하여 사용한다. 즉 유다 지파에 왕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언제까지인가? 실로가 오시기까지이다.
실로는 역사적으로는 유다의 자손에서 난 다윗을 가리키며, 구속사적으로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메시야를 가리킨다.
장차 유다 지파를 통해 오실 메시야 즉 주님이 이 땅에 참된 왕으로 오실 때까지 유다의 왕권이 계속될 것이라고 말씀한다. 따라서 유다 지파의 지상 왕권은 그리스도의 영원한 왕권을 예표하고 그 왕권이 실로가 오시기까지 계속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나귀는 평화로울 때 타고 여행하는 동물이었다.
원래 나귀는 뽕나무 같은 곳에 매지 포도나무에는 매지 않는다. 그런데 포도나무가 지천으로 깔려서 거기다가 맨다는 것은 그만큼 풍족하다는 것이다.
또 포도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기쁨의 상징이었는데 그 포도주가 물처럼 흔하다는 말이다. 이가 우유로 인하여 희다는 표현 또한 풍요를 말하고 있다.
그래서 11~12절은 실로가 오셨을 때의 풍요와 기쁨과 평안에 대한 예언을 하고 있다.
13~21절 : “스불론은 바닷가에 살며, 그 해변은 배가 정박하는 항구가 될 것이다. 그의 영토는 시돈에까지 이를 것이다.
잇사갈은 안장 사이에 웅크린, 뼈만 남은 나귀 같을 것이다.
살기에 편한 곳을 보거나, 안락한 땅을 만나면, 어깨를 들이밀어서 짐이나 지고, 압제를 받으며, 섬기는 노예가 될 것이다.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 구실을 톡톡히 하여, 백성을 정의로 다스릴 것이다.
단은 길가에 숨은 뱀 같고, 오솔길에서 기다리는 독사 같아서, 말발굽을 물어, 말에 탄 사람을 뒤로 떨어뜨릴 것이다.
주님, 제가 주님의 구원을 기다립니다.
갓은 적군의 공격을 받을 것이다. 마침내 적군의 뒤통수를 칠 것이다.
아셀에게서는 먹거리가 넉넉히 나올 것이니 그가 임금의 수라상을 맡을 것이다.
납달리는 풀어 놓은 암사슴이어서, 그 재롱이 귀여울 것이다.”(새번역)
야곱의 여섯 아들들에 대한 예언이다.
스불론은 지중해와 갈릴리 바다 사이에 거주함으로써 야곱의 예언은 이루어진다.
잇사갈은 나귀처럼 건강하지만 우매하여 지배받는 지파가 되어버린다.
단은 독사와 같이 맹렬하여 적은 숫자로도 많은 대적을 물리친다.
갓은 요단강 동편에 있어 많은 침략을 받지만, 한결같이 공격자들을 격퇴함으로 예언을 성취한다.
아셀은 지중해 해변에 거주함으로 소출이 풍부하여 왕실에 식품을 공급한다.
납달리는 가나안 군대가 그들을 공격했을 때 사슴처럼 자기를 방어해 그들을 격퇴하는 데 성공한다.
이처럼 야곱은 후손들이 장차 직면하게 될 고난을 예견하면서 그들의 구원을 염원한다. 이는 곧 출애굽의 암시이기도 하다.
18절에서 “주님, 제가 주님의 구원을 기다립니다”(새번역) 하며 야곱이 갑자기 구원을 간청하는 기도를 드리는데, 이는 단 지파가 직면하게 될 어려움을 예견하며 하는 기도로 보인다.
(나의 묵상)
유다가 받은 축복 기도가 참으로 귀하다.
유다는 장자도 아니고 차자도 아닌, 넷째 아들이다.
그런 그의 지파에서 장차 다윗 왕이 나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다는 예언이다.
유다가 이런 특별한 축복을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유다의 어떤 특별한 행실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이며 은혜라는 것을 안다. 그것은 요셉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뜻이기도 하다.
유다가 미디안 상인에게 요셉을 팔자는 제안을 함으로써 죽게 될 동생을 살리는 결과가 되기는 하지만 그리 탁월한 선택은 아니었다. 그도 분명히 요셉을 미워했기 때문이다.
유다는 처음에는 신앙적이지도, 믿음의 정절을 지키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 그냥 그런 사람이었다. 느닷없이 형제들을 떠나 결혼하고 아내와 자식을 잃고, 뜻하지 않게 며느리를 통해 두 아들을 얻게 되는 모든 과정(창38장)을 보면 유다는 오히려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에 가깝고 타협적이며 흠모할 만한 것이 없는 자의 모습이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함으로 변화가 찾아왔다.
가장 어려웠던 흉년의 시기에 유다는 앞서서 일을 진행하고 중재하며 희생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버지의 마음을 살필 줄 아는 성숙한 자식으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이런 행위 때문에 유다 지파에 규가 떠나지 않는 축복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행위구원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를 아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유다가 어떤 믿음으로 살지, 어떻게 변화되어 갈 것인지를 아시고 그를 높이신 것이다. 요셉이 고난 중에 어떤 선택을 할지 아셨기에 그를 더욱 형통하게 하신 것과 같다.
그렇게 유다를 선택하신 하나님께 유다가 반응하면서 그의 인생에 변화는 시작되었다.
하나님은 원래 유다가 별 볼일 없는 신앙인이기 때문에 그를 별 볼일 없는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으셨고, 장자가 아니고 넷째 아들이라도 장자의 것을 능가하는 복을 주셨다.
아브람이 변화되어 아브라함이 되고, 야곱이 변화되어 이스라엘이 되는 것처럼, 유다가 변화되어 형제들의 찬송을 받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지파에서 메시야가 나타나는 가장 큰 복을 주신 것이다.
별 볼 일없는 정도가 아니라 영원한 죽음만이 마땅한 나를 주님께서 택해 주셔서 구원하여 주신 것만도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런데 그저 교회 전통이나 남들에게서 들은 교리를 답습하며 답답한 신앙생활을 하며 살지 않게 하시고, 날마다 주님과 교제함으로 아들의 생명으로 살게 하시니 이것이 바로 주님의 보혈이 내게 헛되지 않은 증거인 것이다.
유다의 과거, 현재, 미래의 삶을 아시는 하나님이 나의 과거, 현재, 미래의 삶도 아신다.
내 과거의 부족한 모든 것을 다 쓰시는 하나님께서 오늘의 나로 인도해 주셨고, 장차도 인도해 주실 것을 믿는다.
유다 지파로 오신 예수님을 나는 더 이상 멀리서 경배하지 않는다.
이미 주님은 내 안에 계시고, 나는 주님 안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셉이 희생으로 가족을 살린 것처럼, 유다가 희생으로 베냐민을 살린 것처럼,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온 인류를 살리신 것처럼 그런 은혜, 그런 변화를 내게도 주실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나는 유다의 복을 받은 자로서, 이 아침에도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이 최고의 복을 노래한다.
(묵상 기도)
주님,
야곱이 아들들에게 저주인지 축복인지도 모를 말들을 쏟아내는 이유는
아비로서의 사사로운 감정을 담은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아들들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잘들 살아야 됨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저의 삶이 자녀들에게 이 말을 열심히 하는 모습이 되게 하옵소서.
유다의 복을 제게도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땅에서 주님을 누리고 사는 동안
점점 주님을 닮아가게 하옵소서.
그래서 희생으로서 섬기는 모습이
제게 낯선 것이 아니라, 몸에 배어 익숙한 것이 됨으로
참으로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이 되게 하옵소서.
이미 주신 그 사랑에 감격하여 드리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성령님, 의지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