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재호 루카 신부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마태오 5,1-12ㄴ
예수님께서 ‘행복 선언’을 하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가난, 슬픔, 온유함, 의로움, 자비, 깨끗한 마음, 평화, 박해받음이
행복의 기준이 될 수 있을까요?
성경에서 말하는 행복이 무엇인지를 잘 드러내는 곳은 시편 1편입니다.
이 시편에 따르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은 행복하며, 그런 사람은
마치 시냇가에 심긴 나무와 같다고 합니다.
이 나무는 시냇가까지 뿌리를 뻗은 만큼 수분을 언제든지 얻을 수 있습니다.
반면 악인들은 바람에 흩날리는 겨와도 같습니다.
곧 돈, 명예, 권력이 있고 없고에 따라 행복할 수도 있고, 불행에 빠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뿌리가 없으니 그들이 성취한 행복은 그만큼 가볍습니다.
이처럼 시편 1편은 진정한 행복을 누리려면 뿌리가 있어야 한다고 알려 줍니다.
당장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라지지 않는 곳에 뿌리를 둔 이들이 행복한 것입니다.
이 시편에 비추어 행복 선언을 다시금 바라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여덟 가지 내용은
행복을 위한 조건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행복을 위한 유일한 조건은 행복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뿌리로 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외부에서 오는 가난, 슬픔, 박해가 있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온유함, 의로움, 자비, 깨끗한 마음을 잃지 않는다면,
우리는 시냇가이신 하느님께 우리의 뿌리를 뻗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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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마태오 5,1-12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하느님 나라의 참된 모습을 제시해 주시는 예수님의 행복 선언입니다.
이 세상의 논리와 정의를 뒤집는 예수님의 새로운 복음을 단적으로 나타내 주는
상징적 선언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새로운 정의와 행복을 가져다주십니다.
시편 저자들과 예언자들이 노래했던 행복은, 율법을 지키고,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하느님께 의지하는 정의로운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께서는 자비로운 이들, 박해받는 이들에게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가난한 이들은 자기 스스로에게 의지하지 않고 하느님께 의지하기에 행복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선언하신 가난과 고통 그 자체에서가 아니라,
거기에서 비롯되는 자유와 위로에서 하늘 나라를 체험하는 존재들이기에 행복합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늘 고통받는 이들, 예수님으로부터 해방을 찾는 이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메시아가 주실 정치적 해방과 육신의 치유를 갈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반대로 예수님으로부터 참된 행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동안 그들에게 부족했던 것들, 그들이 그토록 갈구했던 것들이
진정한 의미의 행복이 아니고, 세상의 질곡으로부터 참다운 가치,
참다운 하느님의 나라로 눈을 돌릴 수 있는 것이 바로 참행복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새로운 세상을 발견하고,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우리는 세상의 모든 어려움을 이겨 내고, 이 세상을 하느님의 나라로 만들어 가는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광주대교구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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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양 요셉 신부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마태오 5,1-12
복되다, 그 임께 몸을 숨기는 사람이여
오늘 예수님께서는 참된 행복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어느 시대에나 사람들은 행복해지기 위해서 많은 노력들을 기울입니다.
특히 우리 시대는 그 어떠한 시대보다도 여러 면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며
행복해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좋은 것을 찾아 잘 먹고 잘 입으며 자녀 교육을 통해서 행복을 추구하고자
모든 것을 헌신하고 있지요.
그런데 힘들게 노력하는 것에 비해서 참으로 외롭고 힘든 시대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늘 불안하고 허전하며 평화롭지 못하고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는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가 노력하는 만큼의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길은
과연 어디에 있는지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 시대보다도 훨씬 전인 지금으로부터 이천 오백 년 전 그리스 로마시대는
특히 인간의 행복에 대해서 아주 깊이 연구하고 활발하게 토론했던 시기입니다.
그 당시의 그리스 철학자들은 인간의 행복론에 관하여 깊게 연구했고 책 또한 많이 썼지요.
그 당시 우리가 기억할 수 있는 행복론에 대한 대표적인 학파로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에피쿠로스학파는 쾌락주의를 추구하는 학파로,
또 스토아학파는 금욕주의를 추구하는 학파로 알려져 있는데
중요한 것은 두 학파 모두가 인간의 궁극적인 행복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또 그것이 어떻게 지속될 수 있는지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좀더 파고들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니지만 흔히 쾌락주의의 선봉자로 알려진 에피쿠로스학파는
인간 행복의 출발을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에서 시작하였습니다.
좋은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추구해 보고 그것이 나쁘면 다시 더 좋은 것을 추구하는 식으로
인간의 욕구에 따라 움직였지요.
그래서 좋은 음식을 먹고 더 좋은 옷을 입으며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이 있다면 더 좋은 것을
추구하는 등 행복의 출발을 육체적인 쾌락을 만족시키는 오감에서부터 시작했지요.
그에 비해서 스토아학파는 인간의 참된 행복은 좋은 것을 먹고 입는 등
오감을 만족시키는데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욕망을 자제하여
정신과 영혼을 풍요롭게 할 때 행복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금욕주의가 발달했지요.
이렇게 각자 다른 관점으로 출발한 두 학파 중에 오래지 않아 에피쿠로스학파가 없어지고,
스토아학파는 그리스도교 신학과 철학의 바탕이 되어 천주교 신학의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많은 수도자들과 신학자들이 스토아학파에 영향을 받아서 오늘날의 신학을 형성하였지요.
궁극적으로 사람은 입고 먹는 등 인간의 본능을 충족시키는 데에서는 행복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인류 역사 속에서 많은 철학가나 신학자들에 의해 내려진 결론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를 살면서 가끔 저는 마치 2500년 전으로 다시 돌아간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에피쿠로스학파 사람들 같은 사람들로
온통 넘쳐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지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좋은 것을 먹고 좋은 옷을 원하며 더 좋은 것, 또 더 좋은 것을
끝없이 찾아 헤매면서 행복해지기를 꿈꾸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쪽에서는 끊임없이 소비하고 또 한쪽에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을 추구하고 있지요.
그렇게 먹고 입고 소비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더 많이 벌어야 하고 더 많은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밤낮없이 노력하면 행복할 줄 알았던 사람들에게
오히려 늘어난 것은 걱정거리요, 두려움이라는 사실입니다.
너무 먹고 마신 결과 많은 사람들이 고혈압과 비만, 당뇨병 등으로 생명이
위태롭게 되었지요. 그래서 이제는 먹는 것을 자제하느라고 전쟁을 겪고 있습니다.
마치 수도자들처럼 살아야 병을 극복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졌고
국민 건강을 위하여 정부 차원에서 비만과 싸우는 나라들이 늘어가고 있지요.
또 많은 재산과 사회적 성공이 행복을 가져다 주리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추구했지만
결과적으로 얻은 것은 끝없는 피곤과 불안감뿐입니다.
그 결과 "이래서 되겠는가? 정말 삶의 참된 행복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하는 심각한 성찰이 터져 나왔지요.
1960년대 미국의 히피족이나 요즈음 우리 시대의 웰빙 문화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장사꾼들의 잇속이 개입되어 이 웰빙 문화가 좀 천박해졌지요.
실은 정신과 영혼의 안락함을 위해서 추구한 것이 웰빙 문화로
요즈음 많은 사람들이 덜 먹고 덜 입으며 자연으로 돌아가려고 애쓰며
요가와 기 수련을 통해 참된 행복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자녀 교육을 통해서 행복을 보장받으려고 본능적으로
매달리고 있지요. 그러나 그 결과 또한 기대했던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헌신해서 자녀 교육에 바쳤는데
얻은 것은 외로움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렇게 투자하고 노력했지만 노후에 노력한 만큼의 뒷바라지를 받기는커녕
늙어서도 계속 자식 뒷바라지를 해야 하고,
물려줄 재산이 없으면 소외되어 길거리에 나가 앉는 경우가 그 어느 시대보다도 많은
불행한 시대가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입니다.
그러면 참된 행복은 도대체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추구하는 재산이나 건강, 자녀 교육에서는 인간의 참된 행복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일까요? 아니지요. 거기에 행복이 있습니다.
그것이 삶의 기본인데 그것을 떠나서 어디서 행복을 추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행복이 있는 그 곳에서 우리는 왜 불행만을 만나고 있는 것일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재물과 건강과 자녀 교육에 있어서 하느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이 없어졌기 때문이지요.
하느님 사랑과 사람에 대한 근본적인 사랑이 없이 단지 현세적인 안락함만을 위하여
재물을 추구하고 건강을, 자녀 교육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인격과 도덕이 밑받침되지 않은 재물은
이웃에게 아픔을 주고 본인에게는 갈증만을 줄 뿐입니다.
부모 자식 간에도 효가 바탕이 되지 않은 재물은 언제든지 그 관계를 해칠 수가 있지요.
건강도 마찬가지고 자녀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 교육에 있어서 하느님 사랑과 인간 사랑이 없이 이기적이고 출세 지향적인
아이로 키우는 것이 어떠한 결과가 가져오는지를 우리 시대는 너무나도 잘 알게 되었지요.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인간 사랑이 바탕이 된 재물은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모두를 잘 살게 하지요. 또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자녀 교육은
인류를 평화롭게 하고 번성시키는데 기여합니다.
건강도 마찬가지이지요.
우리 시대에 참된 행복을 찾기 어려운 이유는 가장 중요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잊은 채 살아가고 있지요.
오늘 예수님께서 참된 행복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그 핵심은 궁극적으로 하느님께만
미래의 희망을 두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추구하는 재산과 건강, 자녀 교육과 출세는
참된 평화와 영원한 삶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대의 인간의 삶이 힘겨운 이유는
그 방향과 기본 출발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바탕이 되지 않았기에 열심히 노력할수록
오히려 어려움만 가중되고 있는 것이지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뒷받침되지 않은 재산,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뒷받침되지 않은 출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뒷받침되지 않은 권력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피눈물을 자아내고 있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참된 행복은 하느님 안에 있음을 누누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먹고 마시며 소비해 가는 행복 추구로는 결국 우리 모두가 다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도 오염되고 파괴된 지구가 가리키고 있는 생명시계가
절망의 끝인 12시를 향해 달음질치고 있다고 하지요.
스토아학파의 자기 절제, 정신과 영혼을 키우는 노력들이
우리에게 참된 행복을 가져다주는 바탕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참된 행복은 하느님 안에서 질서를 잡을 때 비로소 가능합니다.
재물과 건강, 모든 출세와 자녀 교육도 그 때 더 풍요로울 수 있음을 기억하고,
하느님께서 주신 참된 행복을 찾아 누리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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