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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졌을 때 아모스는 북쪽의 예언자였다.
당시 북쪽 임금 예로보암은 우상 숭배에 빠져 있었다.
아모스는 그를 꾸짖는 예언을 전한다.
아마츠야 사제는 아모스에게 유다 땅으로 떠날 것을 권하지만 아모스는 더욱 강하게 말씀을 전하고 있다.
제2독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선택하시어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해 주셨다.
남은 일은 하느님을 찬양하며 사는 일이다.
복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신다.
주님만을 의지하라는 암시다.
가진 것이 없으면 애절한 마음이 된다.
그런 마음으로 평화를 전하라는 말씀이다.
제자들은 사람들에게 회개를 선포한다.
그들에게는 힘이 있다.
주님께서 당신의 능력을 주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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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독서
"가서 내 백성에게 예언하여라."
<아모스 예언서의 말씀 7,12-15>
그 무렵
[베텔의 사제] 12 아마츠야가 아모스에게 말하였다.
“선견자야,
어서 유다 땅으로 달아나,
거기에서나 예언하며 밥을 벌어먹어라.
13 다시는 베텔에서 예언을 하지 마라.
이곳은 임금님의 성소이며 왕국의 성전이다.”
14 그러자 아모스가 아마츠야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15 그런데 주님께서 양 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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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독서
"하느님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 1,3-14>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4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5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6 그리하여 사랑하시는 아드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총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셨습니다.
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풍성한 은총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8 하느님께서는 이 은총을 우리에게 넘치도록 베푸셨습니다.
당신의 지혜와 통찰력을 다하시어,
9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세우신 당신 선의에 따라 우리에게 당신 뜻의 신비를 알려 주셨습니다.
10 그것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계획입니다.
11 만물을 당신의 결정과 뜻대로 이루시는 분의 의향에 따라 미리 정해진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몫을 얻게 되었습니다.
12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가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13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말씀,
곧 여러분을 위한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안에서 믿게 되었을 때,
약속된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
14 우리가 하느님의 소유로서 속량될 때까지,
이 성령께서 우리가 받을 상속의 보증이 되어 주시어,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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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음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파견하셨다.'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 6,7-13>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7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8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9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10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11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12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13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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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 것도,
빵도 여행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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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의 묵상글 *
<오직 한 가지>
저 같았으면 한 몇 달 사목실습지로 파견되는 제자들을 위해 몇 가지 챙겨줬을 것입니다.
우선 안쓰러운 마음에 일인당 교통비 20만원씩, 식비 30만원씩,
또 혹시 모르니까 비상시 쓰라고 체크카드 하나씩,
또 연락이 되어야 하니까, 휴대폰 하나씩...
그것만으로 되겠습니까?
일일이 챙겨주지 않아도 각자가 다 알아서 챙겼겠죠.
노트북, 디지털카메라, 자동면도기, 편안한 신발, 우산, 갈아입을 속옷 10벌,
혹시 모르니까 밑반찬, 고추장, 읽을 책 몇 권...
그러다보면 큰 배낭 하나로 모자랄 것입니다.
끌고 다니는 초대형 여행가방도 안 되겠지요.
아마도 작은 승용차 한 대가 필요하겠습니다.
보십시오.
이것 저 것 챙기다보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그리고 장거리 여행 다니다 보면 가방 때문에 힘들어 죽습니다.
때로 가방에 든 소지품, 귀중품, 달러나 유로 때문에 신경이 쓰여서 여행도 제대로 못합니다.
이런 우리들의 내면을 정확하게 꿰뚫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복음 전도 여행을 떠나는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당부하십니다.
“길을 떠날 때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결국 예수님의 지론은 간단합니다.
청빈한 삶을 기반으로 한 강렬한 하느님 체험, 하느님을 향한 일편단심, 그것만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제자들을 향해 그토록 어려운 요구를 던지신 스승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그분은 보다 효과적인 복음 선포를 위해
일정한 거처 없이 이곳 저 곳을 떠돌아다니시던 노숙인이셨습니다.
그분 스스로도 자신을 향해 ‘이 세상 어디에도 머리 둘 곳조차 없는 이방인’이라고 자처하셨습니다.
찢어질 듯 가난한 분들 가운데,
극심한 고통을 겪고 계신 분들 가운데,
철저하게도 혼자인 이웃들 가운데
신앙이 아주 돈독한 분들이 많으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 세상 어딜 가도 의지할 곳 없다보니
오로지 마음 둘 곳은 단 한 군데, 하느님 뿐, 하느님만이 모든 것, 하느님만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셨습니다.
그분은 의도적으로 자신의 삶 전체, 자신이 지닌 에너지 100% 전체를
아버지 하느님께로만 향하기 위해 다른 방향의 통로들을 모두 차단하셨습니다.
예수님께는 하느님 아버지만이 전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극도의 가난을 솔선수범해서 실천하셨기에
이 세상 그 어느 것에도 마음이 쏠리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에게 부여된 힘과 능력 전부를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복음 선포만을 위해 아낌없이 사용하셨습니다.
천주교 박해가 잦았던 시절,
극동아시아 지역에서 선교하셨던 선교사들의 선교 활동은 평균 3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선교지의 상황이 열악했고,
시시각각 생명의 위협 앞에 노출되어있었다는 표시겠지요.
우리나라로 건너오셨던 선교사들의 상황은 더욱 심각했습니다.
당시 파리 외방전교회 본부에서 “한국으로 선교를 떠납니다.”라는 인사말은
“나 죽으러 갑니다.”는 말과 동일한 말이었습니다.
당시 선교사들은 한국으로 떠나오시기 전,
부모님이나 동료들에게 미리 지상에서의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비장한 마음으로 멋진 유서도 써놓고 선교지로 출발했습니다.
오직 하느님 한분만이 전부였던 그들이었기에,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다른 모든 것을 등 뒤로 내던진 그들이었기에,
아무것도 손에 쥔 것이 없었던 그들이었기에 가능한 삶과 죽음이었습니다.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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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
그림 감상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형제님께서 그림 전시회에 갔습니다.
그런데 많은 그림 중에서도 특히 폭풍우 치는 바다를 그린 그림 한 점에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어요.
왜냐하면 마치 자신이 폭풍우 치는 바다 한가운데에 내던져진 듯 생생한 느낌을 주는 그림이었거든요.
그래서 화가에게 다가가 물었지요.
“어떻게 이런 훌륭한 그림을 그렸습니까?”
그러자 화가가 조용히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오랫동안 폭풍우 치는 바다를 그렸지만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폭풍우가 사납게 몰려오는 어느 날 어부에게 배를 빌려 바다로 나갔습니다.
폭풍우는 거세게 몰아쳤고 금방이라도 배가 뒤집힐 것 같았어요.
나는 내 몸을 배 기둥에 묶었답니다.
너무나 두려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뱃머리를 돌려 육지로 돌아갈 것 같아서였지요.
결국 나는 배 기둥에 묶인 채 그 사나운 폭풍우를 견뎌냈답니다.
그리고 나서야 저 그림을 그릴 수 있었지요.”
자신이 직접 체험했기 때문에 생생한 작품을 남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냥 머릿속의 상상만으로 그러한 작품이 나올 수가 없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지요.
이렇게 내 몸으로 직접 체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마 예수님께서도 이 점을 제자들에게 체험시키시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당신께서 직접 전교여행을 하시다가,
오늘 복음과 같이 제자들만을 세상에 파견하셨던 것이 아닐까요?
즉, 자기들의 몸으로 직접 기쁜 소식을 세상에 알리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세상에 나가서 기쁜 소식을 알리는데도 어떤 원칙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첫 번째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입니다.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제자들을 부르실 때에는 개인적으로 한사람씩 만나서 그들을 따로 부르셨지요.
그런데 세상에 파견할 때는 둘씩 짝지어 보내십니다.
바로 가장 작은 공동체를 구성하신 것이지요.
사실 마음 맞는 사람끼리 다니는 것은 기쁜 일이지만,
마음 맞지 않는 사람끼리 다니는 것은 어떨까요?
최악입니다.
그렇다면 둘씩 짝지어 파견될 때 마음 맞는 사람끼리 묶어주셨을까요?
아닙니다.
누가 되든 상관없이 내가 맞춰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맞추어 나감으로 인해 더 큰 영적 성숙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영적 성숙과 함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제대로 알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교의 두 번째 원칙은
주님의 능력을 철저하게 신뢰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여행을 하는데 최소한의 것만을 가지고 다니라는 것이지요.
여러분 같으면 이렇게 떠날 수 있겠습니까?
완전히 거지 행색을 하고 돌아다니라는 것인데, 사회적 체면이 있지 그렇게 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바로 주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신뢰를 가지고 있는 사람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신뢰를 두고 있는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전교의 원칙은
환영과 핍박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환영도 받을 수 있고, 핍박을 받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그런데 환영을 하면 그 집에 그냥 머무는데,
받아들이지 않고 말을 듣지 않으면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하고 말씀하시지요.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린다는 것은
그 사람의 죄에 동참하지 않겠다는 뜻이 됩니다.
즉, 그들이 나를 핍박한다고 그들이 원하는 말과 행동을 해서 죄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죄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 역시 세상에 기쁜 소식을 전파하는 것을 직접 행동해야 할 때입니다.
그냥 저절로 사람들이 교회에 오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교회로 와서 함께 주님을 찬미 찬양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는 세 가지 전교의 원칙,
공동체 구성, 주님께 신뢰, 그리고 환영과 핍박을 받을 각오를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때 주님의 기쁜 소식이 이 세상 구석구석에 생생하게 전달될 수 있을 것입니다.
- 인천교구 간석4동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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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
<행복을 주는 사람>
어렸을 때부터 제 인생의 모토는 행복이었습니다.
조부모님의 죽음이 제 인생의 첫 기억이라
어차피 죽는 인생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어렸을 때부터의 첫 목표였고,
이것은 사실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변한 것이 있다면 행복해지는 방법입니다.
처음엔 돈도 많이 벌고 예쁜 여자와 결혼해서 행복하고 건강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
첫 번째 방법이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공부했고 기도했고 운동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사회 구조상 행복해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습니다.
군대 제대하고 대학 등록금을 벌기 위해 공장에서 운전기사 일을 하는데
한 번은 공장 봉고차의 범퍼를 약간 찌그러뜨린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혼나지 않기 위해 밤새 범퍼를 뜯어 찌그러진 것을 폈습니다.
한 번은 펑크 난 차를 계속 몰아서 타이어 자체를 갈아야 했습니다.
펑크만 때우면 얼마 안 되지만 타이어 자체를 갈면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사장님께 혼이 났습니다.
또 한 번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신호 위반을 하여 경찰에게 걸렸는데
벌금을 지불하기가 너무 아까워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군에서 제대할 때 함께 맞춘 반지를 보여주며
결혼한 사람인데 벌써 벌점이 15점이 있어서 이번에 또 벌점을 맞으면 한 달 면허 정지가 되기 때문에
회사도 잘리고 가족도 굶어야 한다고 말하자
경찰은 저를 잡고 있는 것이 미안했는지
가정도 있으시니 앞으로는 조심해서 운전하시라고 하며 저를 보내주었습니다.
그 십분 동안 한 거짓말이 제 평생 한 거짓말보다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짧은 직장 아르바이트 생활이었지만
사회 생활이 참 어렵다는 것을 조금은 맞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는 사제들의 삶은 참 자유로웠습니다.
돈 걱정도 안 하고, 쉬고 싶을 때 쉬고, 또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것도 좋았습니다.
결혼을 못 하는 것이 흠이었지만 그것을 매일의 십자가로 생각하기로 하고
인생을 하느님께 봉헌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러니 저의 솔직한 성소 동기는
저의 행복을 위한, 어찌 보면 매우 이기적인 것이었습니다.
저의 행복을 위해 사제가 되기로 결심하였으나,
사제가 되기 위한 과정을 밟아가면서 깨달은 것은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남을 행복하게 해야 한다.'는 진리였습니다.
아무 걱정 없이 잘 사는 사람일지라도
자녀가 잘못 되는 것을 보면 혼자만 행복할 수 없는 것처럼
어차피 사람은 관계 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나의 행복이 다른 사람의 행복과 무관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내가 행복하기 위해 사제가 되어야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행복하기 위해서 다른 이들을 행복하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물론 사람이 가장 행복할 때는
사랑하고 사랑받을 때입니다.
사실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받지 않을 수 없고
사랑받는 사람이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행복하려면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사랑은 마치 물과 같습니다.
나는 물이 지나가는 파이프입니다.
만약 내가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전달해주기를 원한다면
먼저 내가 물탱크에 닿아 있어야 합니다.
내 스스로 사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이 하느님이라는 교만을 지니고 있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만 사랑이 가능했다면
사람은 혼자 그리스도 없이 구원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생명의 물을 주시는 그리스도와 맞닿아 있지 않다면
우리 안에 사랑의 물이 흘러 들어올 수 없습니다.
흐르지 않는 물은 썩습니다.
사랑의 성령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공기와 같아서 멈추어 계신 분이 아니고 끊임없이 흐르는 분입니다.
따라서 사랑을 다른 이에게 주지 않는 사람에겐
그리스도께서 사랑의 물을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물을 다른 사람에게 줄 때는 내 자신도 사랑과 행복으로 가득 차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깨달은 행복론입니다.
내가 이웃을 사랑하려 할 때는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으로 가득 채우시고
내가 이웃에게 안 좋은 것을 주려고 할 때는 내 안이 안 좋은 것으로 가득 찹니다.
왜냐하면 나는 파이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당신의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지팡이 외에는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돈도, 신발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가난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남김없이 주라는 뜻입니다.
주는 것이 사랑이고
사랑은 남김없이 베풉니다.
사랑할수록 더 주고 싶은 것입니다.
미운 놈은 아무것도 주기 싫지만, 아니, 오히려 나쁜 것만 주고 싶지만,
사랑스런 사람에게는 눈까지 빼어주어도 아깝지 않은 법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가난함 자체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다 나누어줄 수 있는 사랑이 있기 때문에 가난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가난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가난해지니까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줄줄 아는 사람에게
하느님은 당신의 '모든 것'으로 그를 채워주십니다.
예수님은 다 나누어주고 얻어먹으라고까지 말씀하십니다.
자신들을 받아들이는 집에서 떠날 때까지 머물며
그 집 신세를 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얻어먹는다는 것 또한 크게 자존심이 상하는 일입니다.
다 나누어주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얻어먹고 살기 위해서는
마지막 남은 자존심까지도 버려야 합니다.
자신까지 버리는 사람만이 자기 것을 챙기지 않고
거침없이 하느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쏟아 부어 줄 수 있습니다.
사실 그래서 잘 주는 사람은 잘 받을 줄도 압니다.
미사 시간에 ‘평화를 빕니다.’라고 인사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이 집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인사하여라.
그 집에 평화를 바라는 사람이 살고 있으면 너희가 비는 평화가 그 집에 머물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다시 너희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하신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평화를 빌어주면서 내 자신이 평화로 가득 차고
또 내가 빌어준 평화들이 다시 돌아오기 때문에
겹으로 평화로워지고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미사 시간에 한 번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평화를 빌어줘 보십시오.
그리고 내 마음의 평화와 기쁨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한 번 느껴보십시오.
저는 확신합니다.
여러분이 더 평화로 가득 차게 될 것임을.
내가 다른 사람을 축복해주는 만큼
내 안은 축복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축복은 주님으로부터 와서 나를 통하여 다른 이에게 흘러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다른 이를 축복하는 것이 내가 축복 받는 것이고
다른 이를 사랑하는 것이 내가 사랑으로 가득 차는 것이고
다른 이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내가 행복해지는 길입니다.
어른 미사에서도 물론 느끼지만 어린이 미사에서 이것을 훨씬 많이 느낍니다.
어린이들은 보통 미사시간에도 목이 찢어져라 성가를 부르지만
평화의 인사 후에 ‘하느님의 어린양’을 노래할 때는 다른 때의 두 배의 목소리가 납니다.
그런 목소리가 어디서 나는지 모르겠습니다.
감사와 찬미의 목소리,
그것은 행복을 주신 하느님께 우리가 당연히 드려야하는 예배입니다.
이 ‘감사(Eucaristia)’가 바로 ‘미사’입니다.
이웃사랑의 계명을 통해 나를 행복하게 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감사가 곧 미사가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주어야 받는다는 진리는
이렇게 축복을 빌어주는 작은 것 안에서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피와 물이 흘러나온 것이 바로 이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위해 당신의 모든 것, 즉 생명과 성령님을 우리에게 부어주심으로써
오히려 당신 안에 생명과 사랑이 가득 차게 되신 것입니다.
흐르지 않으면 비어 있거나 썩어버립니다.
사해가 그것이고 그 반대의 예가 갈릴래아 호수입니다.
예수님은 받은 대로 베푸는, 아니 베푸는 대로 받아서 생명이 풍성한 갈릴래아 호수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보고 갈릴래아로 가라고 이르시는 것도 이 이유 때문입니다.
주는 것은 사랑이고 부활이지만
주지 않는 것은 썩는 것이고 죽음입니다.
이 진리만 깨닫는다면
우리는 주는 것 안에서 참 행복으로 가득 찬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 로마 유학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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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애경 수녀님의 '렉시오 디비나' 따른 묵상글 *
사람은 혼자 살 수 없습니다 .
이성 간이든 동성 간이든 특별한 훈련이나 목적을 위해 잠시 동안이라면 모를까,
인생 자체를 홀로 살 수는 없습니다 .
최초의 인간 아담도 하느님의 눈에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 ”(창세 2, 18)주셨고
예수님께서는 “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마태 18,20) 있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동안 제자들에게 복음 선포의 시범을 보여주셨지만
제자들은 아직 하느님 나라에 대해 충분한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실습을 통해 미래의 ‘복음 전파자’ 로 준비시키려는 것입니다.
이제는 제자들이 현장에서 배운 복음을 직접 전하라고
그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 (마르 6,7) 하셨습니다.
둘은 인간 관계의 기본이며 최소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서로 협력하는 것도 다투는 것도 두 사람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기에
공동체가 어떻게 될지는 두 사람에 의해 결정됩니다.
파견받은 제자들의 성향을 보면,
베드로는 어부인데다가 성격이 급하고 다혈질적이며 나서길 좋아하고 큰소리치지만
결국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던 사람입니다.
필립보는 예수님께 하느님을 보여 달라고 했고,
마태오는 제자이기 전에 세리라는 직업 때문에 소외 받던 사람입니다.
시몬은 열혈당원이라는 과격한 성향의 정치 집단의 일원이었기에
사람들이 상당히 싫어했을 것입니다.
토마스는 동료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믿지 않았고
오히려 그는 예수님의 상처를 직접 만져보고 옆구리에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다고 한 제자입니다. (요한 20,24 .25 참조)
이렇듯 몇몇 형제만 빼고 남남에 출신·성장·믿음이 다 다른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다양한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마르6,7) 하실 때
어떤 기준으로 보내셨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마음에 안 맞는 두사람이 짝이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만일 형제인 베드로와 안드레아가 짝이 되고,
야고보와 요한이 짝이 되었다면 죽이 잘 맞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열혈당원 시몬과 세리였던 마태오가 짝이 되었다면 관계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믿지 못하는 토마스는 상대하기 쉬운 사람이 아니었고,
특히 유다 이스카리옷과 함께 짝이 되고 싶어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마음 맞지 않는 사람과 짝을 맺어주시면 이것보다 더 힘든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마음이 맞아야만 영적 성숙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야 전교가 잘되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이 안 맞는 사람과 짝을 이루어 함께 일하게 하시는 것은
그를 위해 기도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배우라는 깊은 뜻이 숨겨져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까지나 제자들과 함께 있을 수 없기에
제자들을 파견하신 것입니다.
이 파견은 본격적으로 제자들을 세우시기 위한 작업이며
동시에 제자들이 앞으로 감당해야 할 과제이기도 합니다.
물론 성령을 통하여 영원히 함께 계시겠지만
제자들은 앞으로 홀로서기를 해야 하며
주님 외에는 어떤 것도 의지하지 말아야 함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을 믿고 의지하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것에 쉽게 의존합니다.
돈 많은 사람은 돈을 의지하고
머리 좋은 사람은 머리를 의지합니다.
부모가 잘사는 사람은 부모를 의지하고
권력 가진 사람은 권력에 의지합니다.
가진 것이 많으면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기에
주님을 의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파견받은 자는
주님이면 족하지 그 이상은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목적은
바로 하느님 나라를 전파하고 아픈 이들의 병을 고쳐주려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이 주인이시기에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관심과 보호를 받게 됩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하시면서
그동안 가르쳤던 것을 실제로 확인하시고자 선교의 원칙을 알려주십니다.
먼저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빵도 여행보따리도 돈도 지니지 말라고 하신 것은
선교 여행을 어떠한 자세로 임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제시하여 주신 것입니다.
단 제자들이 가질 수 있는 것은
신고 있는 신발과 한 벌의 옷과 지팡이뿐입니다.(8-9절 참조)
예수님께서 ‘복음 선포’를 위해 지팡이는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지팡이는 들짐승을 쫓고 수풀을 헤쳐 길을 내고 또 몸을 지탱해 주기 때문에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여행에서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것도 소지하지 못하도록 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제자들이 인간적인 수단, 곧 양식이나 돈과 같이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지 말고
전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께만 의지하도록 하시기 위함일 것입니다.
복음 선포자는 주님의 일을 하러 나가기 때문에
주님께서 친히 먹을 것과 잠잘 곳을 마련해 주신다는 믿음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복음 선포자의 길을 열어주시고 친히 돌보아 주시는 것입니다.
예언자 엘리야가 아합 왕에게 가뭄을 선언한 후
주님의 말씀대로 요르단강 동쪽에 있는 크릿 시내로 가서 머물렀을 때
까마귀들이 그에게 아침과 저녁에 빵과 고기를 날라다 주었습니다.(1열왕 17,5 -6 참조)
주님께서는 공중의 새도 먹이시고 들의 나리꽃도 아름다운 옷으로 입혀주시는데(루카 12,24-27 참조)
하물며 복음을 선포하러 가는 주님의 자녀들을 친히 돌봐주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간편한 차림으로 전도 여행을 나가도록 명하신 것입니다.
부르심을 받아 파견받은 사람들이 마음 써야 할 것은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통한 복음 선포입니다.
복음 선포에 온 힘을 기울인다면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먹이실 뿐만 아니라 넘치도록 영원한 상급을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능력을 믿고 신뢰하는 것,
이것이 파견받은 이의 또 다른 준비일 것입니다.
- 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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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
<“너 어디 있느냐?”>
오늘 말씀 묵상 중 문득 떠오른,
창세기에서 아담을 부르시는 하느님의 음성입니다.
아담뿐 아니라 우리 모두를 향해 묻습니다.
“너 어디 있느냐?”
아담은 지은 죄로 인해 대답을 못하고 숨었지만,
하느님의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부르실 때
한결같이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기분 좋게 대답했습니다.
과연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너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실 때
‘예, 여기 있습니다.’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겠는지요.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참 나를 살고 있는가 묻는 것입니다.
유대인 랍비 하녹이 전해주는 교훈적인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옛날에 매우 우둔한 사람이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옷을 찾아내는 것이 매우 힘들어서
밤마다 그는 거의 잠깼을 때의 어려움을 생각하고 주저하며 잠자리에 들곤 했다.
어느 저녁에 그는 큰 노력을 기울여 종이와 연필을 마련하고
옷을 벗는 대로 놓은 장소를 정확히 기록했다.
다음날 아침 그는 흐뭇한 마음으로 종이쪽지를 집어 읽었다.
모자는 거기에 있었고 모자를 머리에 쓴다.
바지는 그 자리에 있었고 바지를 입는다.
완전히 입을 때까지 그렇게 계속 했다.
모든 것이 잘 되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어디에 있지?
그는 크게 당황하며 물었다.
‘이 세상 안에 나는 어디에 있나?’
그는 찾고 또 찾았으나 헛된 탐구였다.
그는 자신을 찾아낼 수 없었다.
랍비 하녹은 자신의 견해를 덧붙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문제다.
결국 이야기 속의 사람은 우둔하지 않았으니,
그는 질문이 너무나 중요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건망증이라는 문제는 있었으나
그가 벗어놓은 모자와 바지, 그리고 다른 옷들이
이 세상에서의 그의 소재와 정체의 핵심으로 가게 하지 못했고
다만 그를 외적으로 닿았을 뿐임을 분명히 깨달았다.
근본적인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세상에서 나는 어디에 있는가?’
과연 여러분은 어디에 있습니까?
주님을 만나십시오.
살아계신 주님을 만날 때 제자리를 발견합니다.
제자리를 찾지 못해 참 나를 살지 못하고 방황하는 이들 참 많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 모두가 주님을 만남으로
참 자기를, 제자리를 발견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주님과 함께 살 때
주님께서 불러주신 제자리에서 참 나를 살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보십시오.
1독서의 아모스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주님을 만남으로 본연의 참 나인 예언자 아모스가 되지 않습니까.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 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양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
무명의 아모스가 마침내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예언자로서의 사명을 받았을 때
비로소 참 나로 존재하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만일 아모스가 하느님께 붙잡히지 않았더라면
그럭저럭 참 나를 살아보지도 못하고
이름 없이 살다가 세상을 마쳤을 것입니다.
어찌 보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우리들은
아모스 예언자처럼 하느님께 붙잡혀 참 나를 살 수 있게 된 사람들입니다.
에페소서의 바오로 역시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참 나를 발견하여
감사의 찬양을 바치지 않습니까?
복음의 별 볼일 없는 무명의 제자들 또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비로소 참 나로 존재하기 시작합니다.
주님은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둘씩 짝지어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이렇게 주님께 불림 받아야 비로소 참 나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자연인이란 참 막연합니다.
자기의 신원을 도대체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하느님 없는 인간,
물음만 있고 답이 없는 경우라 끝내 자기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존재해도 존재하지 않는 환상 속의 삶일 수 있습니다.
결코 참 나를 살 수 없습니다.
우리 교회의 무수한 성인들 모두 참 나를 살았던 분들이요,
이런 참 나의 성인되어 사는 게 우리 삶의 궁극 목표입니다.
주님을 찬미하십시오.
주님을 찬미할 때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고 참 나를 발견합니다.
얼마나 큰 하느님의 은혜를 입고 사는지 깨닫게 되어
감사하는 마음 가득하게 되고,
이 감사의 마음에서 끊임없이 샘솟는 하느님 찬미입니다.
하느님을 찬미할수록
점점 하느님의 사랑으로 정체성 또렷한 참 나가 됩니다.
이런 하느님 찬미의 기쁨으로, 행복으로 사는 자들이
바로 여기 수도자들입니다.
“날이면 날마다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 이름 영원토록 찬양하리이다.”
매일 끊임없이 하느님 찬미 노래로 수도원 성당을 가득 채우는 여기 수도자들입니다.
오늘 에페소 말씀,
온통 그리스도 안에서 놀라운 일을 행하신 하느님을 찬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께 드리는 찬양이요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하느님의 축복입니다.
오늘의 2독서 에페소서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라는 말마디가 무려 10회 나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축복이요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나의 발견입니다.
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내리셨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하셨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또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당신 뜻의 신비를 알려주셨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한 몫을 얻게 되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모두 약속된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가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여 ‘주님께 감사하라. 그 좋으신 분을, 영원도 하시어라, 그 사랑이여.’
끊임없이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하느님을 찬양하는 우리들입니다.
하느님 찬미의 자연스런 열매가 선교입니다.
무집착의 초탈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하느님 찬미입니다.
하느님 찬미로 텅 비워진 그 자리에 가득 차는 하느님의 능력입니다.
무아(無我)의 그 자리가 역설적으로 참 나의 진아(眞我)의 자리입니다.
하느님 찬미로 자기를 비우면 비울수록 참 나가 됩니다.
제자들은 완전 무소유로 텅 비워진 그 자리를 하느님으로 가득채웠습니다.
가장 가난하나 하느님을 소유함으로 가장 부자가 된 제자들입니다.
대부분 우리의 두려움과 불안은 집착에서 기인합니다.
하느님이 우리의 모두가 될 때
저절로 뒤따르는 무욕과 이탈의 삶이요
햇빛에 눈 녹듯이 사라지는 두려움과 불안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떠나 회개하라고 선포하면서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주었다 합니다.
하느님의 텅 빈 통로가 된 제자들을 통해 부어지는 주님의 권능이
구마 이적을, 치유 이적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처럼
완전 무소유가 현실적으로 힘들기에
무소유의 정신으로 사는 것도 좋습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는,
부자이면서도 가난한 무욕과 이탈의 정신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래야 진정 자유로운 참 나의 삶입니다.
끊임없이 하느님께 감사의 찬양을 바칠 때
주님을 만나고 참 나를 만납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면 할수록 정체성 또렷한 참 나를 살 수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깨어 무소유의 정신으로,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참 나되어, 자유롭게 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너 어디 있느냐?’ 물으시면,
‘예, 여기 있습니다.’ 대답할 수 있습니다.
이 거룩한 미사 시간
주님은 감사의 찬양을 드리는 우리 모두를 텅 비워 주시고
텅 비워진 그 자리를 당신의 생명과 사랑으로 가득 채워 주십니다.
아멘.
- 성베네딕도회 성요셉수도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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