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일본인교사 차별에 대응
비밀조직 만들어 활동하기도
광복이후 춘천농대 2회 입학
"현재 강원대 상상 초월 발전
초대 함인섭 학장 선양 소원"
일제강점기 말 춘천고에서 일본인 교사와 학생들의 한국인 비하에 맞서 대응하다 체포돼 옥고를 치른 10여명 중 유일한 생존자인 최항규(19회) 강원대 총동창회 고문.
최 고문은 인제군 상남면의 내린천 상류에 있는 첩첩산중의 산골짜기 마을에 홀로 살고 있었다. 차량 내비게이션에도 나오지 않는 길을 따라 2㎞가량 들어서니 최 고문의 보금자리인 아담한 주택이 계곡 인근에 자리잡고 있었다.
90대의 고령이지만 아직 안경도 쓰지 않고 글을 읽는다고 한다. 호흡기 질환으로 가끔 산소마스크를 사용한다고 밝혔지만 구순(九旬)에도 건강을 유지하고 있었다.
최 고문은 강원대 역사의 산증인이다. 최근 개교 72주년을 맞은 강원대와 역사를 같이하며 수많은 후배의 정신적 지주이기도 한 그를 만났다.
양구 출신으로 1942년 당시 5년제인 춘천중(현 춘천고)에 입학한 그는 일본인 교사의 차별과 멸시에 대응하기 위해 한국인 교사와 학생들이 가입한 비밀조직을 만들었다. 시비 과정에서 벌어진 싸움 탓에 광복을 한 해 앞둔 1944년 춘천경찰서 유치장에 들어갔다. 당시 최 고문 등 조직원들은 서울로 압송돼 4~10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수감 중 대부분의 학생들이 고문을 당했고, 구속 학생 모두 퇴학을 당했지만 8·15 광복 이후 복교 조치돼 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지요.”
춘천농대 1회 입학생으로 알려진 그는 “미 군정으로 춘천중이 6년제로 바뀌면서 한 해 늦게 들어갔지. 그래서 2회 입학생으로 기억하고 있어요”라고 웃으며 말했다.
춘천농대를 다닌 그는 광복 이후와 6·25전쟁으로 이어지는 어수선한 환경에서 제대로 공부할 수 없었다고 회고한다. 축구 특기생이다 보니 제대로 공부하지 못한 탓에 담당교수의 도움으로 졸업 논문을 작성할 수 있었다.
그에게 모교인 강원대는 놀라움의 상징이다.
“재학 당시에 비해 시설과 규모, 교육의 질 등 모든 부분에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발전했고, 수도권 어느 대학과 비교해도 뒤질 것이 없을 정도로 성장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어요.”
한 가지 바람을 남겼다. 모교의 현재가 있기까지 함인섭 초대 학장의 기여가 상당히 크다는 것. 함 학장이 농림부장관 당시 홍천의 적산 산림을 강원대 재산으로 등록하는 등 학교 발전에 남다른 애정을 보인 만큼, 선양사업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이분(함인섭 초대 학장)이 현재 춘천의 공동묘지에 묻혀 계세요. 이 분을 홍천 연습림으로 모셔 후배들이 어려운 여건에도 학교 발전을 위해 애쓴 함 학장님의 업적을 기렸으면 좋겠습니다.”
총동창회 총회 때마다 이 같은 건의를 꾸준히 제기하지만, 아직 충분한 여론이 형성되지 않은 점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 “어쩌면 우리 동문의 뿌리를 내리게 해 준 은인에게 후배들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우라고 생각해요.”
70년 넘게 동문회를 지킨 최 고문의 마지막 외침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