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달린다
빌립보서 3:10-16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창조절 제6주일이다. 가을볕이 참 좋다. 그래서 시어머니 입장에서 밭일을 할 때 “봄볕에는 며느리를 내보내고, 가을볕에는 딸을 내보낸다”는 속담도 있다. 그만큼 피부에는 가을볕이 더 안전하고 좋다는 의미다. 그런 가을을 즐기기 바란다.
항저우아시안게임이 오늘 폐막식을 한다. 마침 16일 간 일정이 우리나라 연휴 기간과 겹쳐 즐거움이 컸다. 무엇보다 한국 선수들이 선전하였다.
얼마 전까지 한국선수단의 금메달 밭은 복싱이나 레슬링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전혀 다르다. 힘과 투지를 강조하면서 헝그리 정신을 강요하던 종목에서는 더 이상 메달을 따지 못한다. 그것은 가난한 국가들의 몫이다.
이제 한국의 메달밭은 수영 등 선진국 형으로 바뀌고 있다고 한다. 즐기는 스포츠, 생활 스포츠로 탈바꿈한 것이다.
그래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축구대표팀 한·일전이다. 양쪽 모두 질 수 없는 경기다. 그래서 마지막 힘까지 죽기 살기로 싸운다. 꼭 이겨야 한다는 국민적 염원을 배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흔히 인생을 육상 경기와 비교한다. 나를 돌아본다. 여러 가지 인생의 주제에서 내가 여유있게 즐길 수 있는 종목은 무엇일까? 내 인생에서 내가 죽기 살기로 싸우는 것은 어떤 종목인가?
1)
오늘 본문은 마치 육상선수의 달리기 경기를 중계방송하는 듯하다. 바울의 달리기는 순탄치 않았다. 그는 뒤늦게 인생의 방향 전환을 한 사람이다.
인생이 경쟁이라는 관점에 따르면 사실 출발이 늦으면 아무래도 결과가 좋을 리 없다. 세상의 판단으로 틀린 말이 아니다. 더군다나 불신앙의 눈으로 보면 바울은 완전히 역주행을 하는 셈이다.
본문은 사도 바울의 자기 경험이다. 그는 평생 ‘희망으로 한결같이 부르심에 따라’ 복음증거자로서 달리기를 해 온 사람이다. 그의 성숙한 경험담은 달음질의 길 위에 있는 우리에게 좋은 교훈이 되고 있다.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감옥에 있을 때 쓴 편지이다. 감옥은 어떤 곳인가? 사방이 막힌 곳이다. 스스로 움직일 수 없다. 달음질 자체가 불가능 하다.
그럼에도 바울은 어떤 환경에 놓여있든지, 적어도 심정적 달음질을 계속하고 있다. 바울의 인생에서 그것은 믿음의 달리기요, 희망의 달음질과 같다. 바울은 달음질의 상황보다, 달음질하는 자신의 태도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명절에 강원도 평창에 갔다. 가을볕 아래 우리 집 마당에 대추가 잔뜩 열렸다. 알이 작은 사과처럼 참 굵었다.
누군가 그런다. 대추나무에 실한 대추가 많이 열리게 하는 방법이 있다. 물론 열매 맺는 다른 나무들처럼 비도 많고, 볕도 좋고, 환경조건이 맞아야 한다.
그런 환경뿐 아니라, 대추나무의 태도도 중요하다. 그러니 염소를 나무에 매어 놓으라는 것이다. 묶여 있는 염소는 특성상 잠시도 그냥 있지 않고 고삐를 당기며 나무를 흔들어 괴롭힌다. 그러면 대추나무가 잔뜩 긴장한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열매를 번식시키려는 필사적 노력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추가 많이 열린다고 한다.
심리적 태도는 얼마나 중요한가? 달리기에 투지와 인내가 꼭 필요하다. 바울을 보라. 바울은 감옥이란 환경에 좌우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답답한 상황이나 부대끼는 조건이 아니라 달음질하는 그 사람의 태도였다.
사도 바울을 꾸준히 달리게 한 에너지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바울의 특기는 ‘희망의 달음질’이었다. 희망이란 오늘과 내일이 모두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믿음에 기초한다.
바울이 제시하는 달리기 방법이 있다. 그것은 오늘 본문에서 제시한 ‘목표를 향한 달음질’이다. 요즘 말로 하면 목적이 이끄는 달리기이다. 내 관심사와 의지, 방법이 아니라 목적이 나를 움직이게 한다는 것이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12).
달리기에 목표가 없다면 얼마나 허망한가? 만약 희망이 없는 달음질은 얼마나 허무한가?
2)
출발점이 있으면 목적지가 있다. 누구도 예외가 없다. 사실 중요한 것은 출발이 아니라 어떻게 끝마치느냐이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한다. 한마디로 ‘나는 예수님에게 사로잡혔다. 나의 목표는 예수님이고, 내 인생의 목적도 예수님이다.’ 바울의 경우에서 보면 ‘하나님을 향한 목적이 이끄는 달음질’이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14).
사실 기쁨은 좋은 환경과 여건 속에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희망이 있다면, 목표가 있다면, 혼란과 고생 속에서도 기쁨을 느낄 수 있는 법이다.
우리는 모두 달리는 경주자이다. ‘린다’라는 닉네임을 가진 분도 있다. 누구나 자기 자신이 달리기의 주인공이다.
달려야 하는 것이 내가 주인인 내 삶 그 자체이다. 지나친 경쟁사회는 우리의 달리기를 부추키기도 하고, 왜곡시키기도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달릴 것인가? 지금 나는 제대로 달리고 있는 걸까? 누가 곁에서 목표지점까지 함께 동행한다면 얼마나 힘이 될까?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인생의 달리기에서 뜻, 목적, 방향이 있다. 구경꾼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님을 따르는 것, 예수님을 향해 달리는 것 그 자체가 희망이었다. 믿음으로 달리는 사람에게 어떤 경우라도 의미 없는 달음질은 없다.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의미를 예수님의 본을 따라, 예수님의 발자취를 닮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참다운 승리와 기쁨은 비록 고난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를 바라보고 달리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벧전 2:21).
성경이 가르쳐준 방법이 있다. 가장 좋은 것은 앞 사람을 따라가는 것이다. 시편에서 사슴을 예로 들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슴의 앞발로 생각하고, 믿음의 사람을 뒷발로 생각하여, 말씀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은 무려 40년이란 세월을 광야에서 보낸 후에 가나안에 들어갔다. 그들은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비록 늦은 것 같았지만 그들만의 때에 맞춰 천천히 하나님을 따라갔다. 유일한 방법이었다. 마치 엄마의 손을 잡고 걸음마를 배우는 어린아이처럼, 한발자국 한발자국 배우면서 하나님을 따랐더니, 드디어 가나안 땅을 차지할 수 있었다.
나는 어떤가?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하면서, 언제나 하나님보다 더 앞서 달려가려고 한다. 인생의 불행은 하나님과 보조를 맞추지 않는데 있다. 대개 사람들은 무엇이든 빨리 앞서가고 빨리 도달하려는 욕망 때문에 스피드를 내게 된다.
사실 누구나 제 인생대로 달리는 것이라지만 얼마나 힘이 드는가? 세상에 만만한 달리기는 하나도 없다. 그렇다고 지레 포기할 수는 없다. 넘어질 수는 있으나 좌절은 금물이다. 희망이 없는 인생은 없다.
언젠가 마라톤을 배우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운동이 걷는 것과 달리기라고 생각하였다. 이제 걷는 일은 습관이 들었는데, 그런데 달리는 법은 배우지 못하였다. 이제와서는 좀 늦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쉽다. 달릴 수 있을 때 익혀둘 것을 후회가 된다.
인생은 달음질이라는데 어떤가? 실은 살아있는 사람은 누구나 쉼없이 달리고 있다. 끊임없이 뛰고 있는 내 자신을 느끼는가?
사람이 일 년 365일 매일 매순간 달린다는 것은 기적 같은 일이다. 모두 왼쪽 가슴에 손을 얹어 보라. 심장이 뛰고 있다. 내가 멈추어 있는 그 순간에도, 잠을 자고 있는 그때에도 나는 달리고 있다. 심장은 약 1분에 70회 뛴다. 더 이상 달리지 못하면 죽은 셈이다. 그러니 살아있는 동안 누구도 좌절할 일이 못된다.
종종 남들이 달릴 때 나는 멈춰 서있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불안감의 원인이다.
성숙한 인생은 하나님과 보조를 맞추는 사람이다. 주의 발자취를 따름이 곧 나의 달음질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나를 바꾸고, 고치고, 길들여야 한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과 그 심장이 맞추어 달리는 것이다. 사실 바울이 모범적인 것은 빨리 달려서가 아니라, 한 목표를 향해 꾸준히 달렸다는 점이다.
3)
누구나 인생 길을 간다. 달리기도 하고, 잠시 멈추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자기 앞에 너무 커다란 걸림돌을 느끼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것은 목적지를 기억하는 것이고, 희망의 관점을 갖는 것이다. 나와 동행하시는 은총의 힘을 믿는 일이다.
어린 아기는 달리기 전에 걷는 법을 배운다. 물론 걷기 전에 배우는 것은 일어 서기이다. 이를 위해 근육을 키워야 한다. 아기는 무수히 넘어지고 나서 겨우 일어선다.
교육심리학자들은 어린이는 성장하면서 나이마다 배울 것이 따로 있다고 말한다. 흔히 말하는 선행학습의 부작용은 너무 빨리 배웠기 때문에 너무 빨리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자녀 걱정이 많은 가정이 있다. 자녀가 자꾸 엇나갔다. 걱정하는 부모를 지켜본 한 어른이 이렇게 말하였다.
“집 안에 DNA 어디 가느냐? 너무 걱정하지 마라.”
믿음에도 DNA가 있는 법이다. 가정마다, 부모입장에서 신앙생활에 힘써야 하는 이유다.
내가 오래동안 걷기도를 해왔다. 초기에 독립문에서 춘천까지 걷던 해였다. 이틀째 남양주 쯤 걷다가 신호등을 만나 기다리는데 다섯 살쯤 된 아이와 엄마가 곁에 와서 섰다.
내가 아이에게 인사했더니 엄마가 ‘등산가세요’ 한다. 그래서 말을 주고받다가 푸른 신호등이 들어와 길을 건너면서 작별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그때, 아이가 내게 이렇게 말한다. “아저씨 잘가.. 안 넘어지게.”
아이의 눈에는 내가 자주 넘어지는 아이 같은 존재로 느껴졌나 보다. 그해 최고의 깨달음이었다.
성경은 그것을 희망의 푯대인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보조를 맞추어 달리기를 하는 사람이다.
이러한 희망이 가능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약속과 이를 믿는 믿음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달음질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것이었다. 그의 걸음은 한결 같았다.
승자의 비결은 자기 속도를 유지하는데 있다. 남의 스피드가 어떻든 자기 페이스대로 달리고, 남의 장단이 어떻든 자기 장단에 맞추어 살아간다. 자기 페이스대로 달리는 것은 남을 경쟁 상대가 아니라 동반자로 생각할 때 가능하다.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내 달리기를 당당하게 여기는가? 고난 속에서도 좋은 경주자인가? 넘어지더라도 뒤를 보지 않고 앞을 보는가? 그리하여 마침내 면류관을 바라보며 희망의 달리기를 하는가?
교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남은 자, 창조적 소수, 기름 부음 받은 자, 진실을 나르는 희망의 달리기를 한다면 좋은 교회이다. 그런 순수한 고집이 목적지까지 이르게 한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그 발걸음에, 그 마음에, 그 희망에 보조를 맞추기를 바란다.
그리고 잊지 말라. 인생의 목적은 사랑하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길을 달려가는 나를 응원하시고 내 인생과 동행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