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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에 관한 남회근 선생의 법문을간단히 말한다
대만 달마서원(達摩書院)출판사에서 2013년 4월 초판 1쇄한 『천참남회근선생학술성취문집(淺參南懷瑾先生學術成就文集)』에서 뽑은 「천담남로사관어인지적개시(淺談南老師關於認知的開示)」라는 글이며 필자는 곽위혁(郭偉革)입니다/송찬문 역주
1. 인지(認知)의 중요성
필자는 한 편의 짧은 글에서 이렇게 찬탄한 적이 있습니다.
“남공상사(南公上師)와 장상덕(張尙德) 선생님은 바로 고난이 심하고 아득한 우리들 이 시대에 태어난 걸출한 인물들입니다. 그분들은 모두 중화민족의 가장 암울하고 가장 비통한 시대에 태어나, 두 분 다 무수한 천재인화(天災人禍)의 타격을 겪으면서 행하기 어려운 것을 능히 행하고, 참기 어려운 것을 능히 참으며, 증득하기 어려운 것을 능히 증득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학문이 깊게 되어 유불도 삼가와 제자백가 그리고 서양문화 이 모두에 조예가 깊고, 불법의 수증에 있어서는 더욱 불가사의한 경지에 도달한 대선지식입니다. 사람을 더욱 감동시키는 것은 그분들은 이미 칠팔십 세가 넘은 고령임에도 여전히 시시각각 국가의 통일, 민족의 진흥, 중국문화의 부흥, 중국과 세계문명의 개혁개방 그리고 전 세계 정화(精華) 문화의 정합(整合) 등 위대한 공정(工程)을 위하여 전심전력하고 침식(寢食)을 잊고 밤낮으로 자신을 잊고 일하신다는 점이요, 그분들은 언제나 문장으로 이론을 내세우고 아울러 학당과 서원을 건립하여 자비와 지혜를 함께 운용하고 마음과 힘을 기울여 시대의 우수한 인재들을 배양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분들의 성취와 공헌은 세상에 널리 이름이 나 있습니다. 그분들의 집요한 정신은 사람들을 지극히 감동시킵니다. 그분들의 하시는 바는 모두 이미 자아를 초월하여 자신을 완전히 무량한 중생들에게 바치고 이 시대에 바치는 지고한 경지에 도달하였습니다. 그분들은 지극한 진선미(眞善美)의 화신이요, 우리들의 진정한 귀의처입니다. 동시에 그분들은 ‘천하의 근심은 먼저 근심하고 천하의 즐거움은 뒤에 즐거워한다.’는 정신과, ‘천지를 위해서 대신하여 인애와 공정(公正)의 도를 행할 마음을 세우고[為天地立心], 백성을 위해서 복지와 안신입명(安身立命)의 기초를 세우며[為生民立命], 옛 성인을 위해서 끊어진 학문을 계승하고[為往聖繼絕學], 만세를 위하여 태평을 연다[為萬世開太平].’는 대장부의 기개는 더욱 우리 세대와 만민이 존경하고 우러러볼만 합니다!”
남회근 선생님을 찬탄한 뒤 필자는 늘 호기심에서 다음과 같이 생각하였습니다. 남선생님의 그렇게 많은 저술과 그렇게 많은 학문은 도대체 그 중심 사상이 무엇일까? 남선생님이 금생에 이 세상에 오신 주요 목적이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그 해답을 얻지 못하였을 때 어느 날 『법화경』을 읽어가다 “사리불이여, 무엇을 일러 모든 부처님 세존이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으로 세상에 출현하신다 하는가? 모든 부처님 세존은 중생에게 부처님의 지견(知見)을 열어주어 청정(淸淨)함을 얻게 하고자 세상에 출현하시며, 중생에게 부처님 지견(知見)을 보여주고자 세상에 출현하시며, 중생에게 부처님의 지견(知見)을 깨닫게 하고자 세상에 출현하시며, 중생에게 부처님의 지견(知見)을 성취하는 길에 들어서게 하고자 세상에 출현하시느니라.”는 구절에 이르렀을 때 홀연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남선생님의 이 일생의 주요 임무는 바로 우리들로 하여금 잘 인지(認知)하라는 것이며 남선생님의 수행과 학문의 핵심도 이 ‘지(知)’라는 것입니다. ‘지’라는 한 글자는 태산보다도 무겁습니다! ‘지’라는 한 글자는 뭇 오묘함의 문입니다[知之一字, 衆妙之門]! 오직 잘 인지하여야 비로소 남선생님의 저작들을 읽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직 잘 인지하여야 비로소 남선생님의 세상을 구제하는 심경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직 잘 인지하여야 비로소 남선생님의 지혜의 암호를 해독할 수 있습니다. 오직 잘 인지하여야 남선생님의 사상 보물창고를 열 수 있습니다. 동시에 또 오직 잘 인지하여야 비로소 진정으로 진정한 수행 길을 밟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반드시 또한 무엇보다도 먼저 남선생님에게서 인지를 학습하여야 합니다!
2. 지(知)에 대한 남선생님의 법문
여기의 지(知) 자의 주요 의미는 능지(能知)ㆍ소지(所知)와 지성(知性)을 포함합니다. 인지에 관한 남선생님의 법문은 대단히 많습니다. 필자는 남선생님의 저작들에 유의해보니 기본적으로 모두 이 방면의 법문이 있습니다. 어떤 것은 직접적인 법문이며 어떤 것들은 간접적인 법문입니다. 그런데 선칠(禪七) 법문 가운데 인지에 관한 법문이 더욱 명료하고 또한 더욱 직접적인데 진정으로 직지인심(直指人心)입니다. 필자의 열독 범위와 인식 능력의 제한으로 필자는 주로 『원본대학미언(原本大學微言:한국어판은 대학강의)』, 『원각경략설(圓覺經略說:원각경강의)』, 『금강설십마(金剛經說什麽:금강경강의)』, 『선여생명적인지초강(禪與生命的認知初講)』, 『남회근여피득ㆍ성길(南懷瑾與皮得ㆍ聖吉―關於禪ㆍ生命和認知的對話)』, 『습선녹영(習禪錄影)』과 『답문청장년참선자(答問靑壯年參禪者)』 등의 저작들에 근거하여 인지에 관한 남선생님의 법문에 대하여 한번 간단명료하게 설명하겠습니다.
(1) 지(知)ㆍ능지(能知)ㆍ소지(所知)에 관한 법문
『원본대학미언』 제2편과 제3편 가운데 지(知)ㆍ능지(能知)와 소지(所知)에 대한 남선생님의 상세한 법문이 있는데 모든 수행의 기초로서 잘 읽어보고 맛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요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천고에 밝히기 어려운 것은 오직 자기의 ‘지(知)’
『대학(大學)』은 말합니다, “지지이후유정(知止而後有定), 정이후능정(定而後能靜), 정이후능안(靜而後能安), 안이후능려(安而後能慮), 려이후능득(慮而後能得).” 이것은 ‘대학지도(大學之道)’의 ‘칠증(七證 : 일곱 개의 수증 단계)’입니다. 이것은 증자가 공문심법(孔門心法)에서 증득을 추구하고 실험하는 수양공부를 일부러 제시해놓은 것일 뿐 아니라, 주(周)나라와 진(秦)나라 이전 유가와 도가가 나누어지지 않았던 중국 전통문화에서의 교화와 학문과 수양의 특색을 대표하기도 합니다.
만약 우리가 중국의 불가와 도가의 발전사 대략에 관해 이해하고 있다면, ‘지(知)ㆍ지(止)ㆍ정(定)ㆍ정(靜)ㆍ안(安)ㆍ려(慮)ㆍ득(得)’이라는 이 ‘칠증’의 설이 진(秦)나라 한(漢)나라 이후로는 도가의 신선도 수련에 인용되었다는 사실을 알 것입니다. 동한(東漢) 이후에 이르러 불학이 중국에 전해 들어오면서 소승선정(小乘禪定)의 나한과위(羅漢果位)를 수습하고, 대승도(大乘道)의 보살위(菩薩位)를 수증하는 지관(止觀)의 방법을 강구하면서도 ‘지(止)ㆍ정(定)ㆍ정(靜)ㆍ려(慮)’의 설을 차용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치 하늘을 떠받들고 있는 기둥이 무너지지 않고 만고에 우뚝 서 있는 것처럼 줄곧 지금까지 2천여 년 동안 전해내려 왔습니다. 증자가 『대학』을 저술한 때가 기원전 470년 무렵이었는데, 이 시기는 그리스에서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막 태어났던 때였습니다. 불학이 중국에 전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 대략 서기 65년 이후이니, 증자가 살았던 시기와는 약 5백여 년이라는 거리가 있습니다.
『대학』에서 열거한 이 일곱 개의 수증단계 가운데 첫 번째는 바로 ‘지(知)’입니다. 우리는 이 ‘지’자의 뜻이 ‘안다’임을 물론 알고 있습니다. ‘지각(知覺)’이니 ‘지식(知識)’이니, ‘지기(知己)’니 ‘지심(知心)’이니 하는 말, 심지어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내가 알고, 네가 알고, 그 사람이 안다.’하는 말도 모두 이 알 ‘지(知)’자를 빌려나온 말들입니다. 안다면 아는 것이지 또 무슨 문제가 있을까요?
만약 당신이 자세히 살펴보면 문제가 참으로 많습니다! 우리의 생명에는 왜 모든 일과 모든 물건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는 작용이 하나 있을까요? 옛날부터 다들 나면서부터 아는 것이라고도 여겨왔거나,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우리에게는 ‘영성(靈性),’ 또는 ‘마음[心]’이 있기 때문에 모든 일과 물건[事物]을 알 수 있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현대인들은 생물체에는 뇌의 작용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영성’이라고 말하든 ‘마음’이라고 말하든 ‘뇌’라고 말하든, 이 모두는 인류의 문화 문명 소산으로서, 인류 자신이 인정하는 학설일 뿐입니다. 도대체 ‘능지지성(能知之性)’의 제1원인이 어디로부터 왔으며 어떻게 생겨났는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과학, 철학 상의 하나의 큰 문제입니다.
이것은 송대(宋代) 이학가(理學家)들이 주장했던 ‘성리(性理)’나 ‘이성(理性)’의 지(知), 그리고 명대(明代)의 저명한 이학가인 왕양명(王陽明) 선생이 특히 『맹자』의 학술이론으로부터 제기했던 ‘양지(良知)’ ‘양능(良能)’의 설 등과 함께 사실은 아직도 모두 인류문화에서 지금까지 해결하지 못한 기본 문제로 존재합니다.
중국 철학사 입장에서 보면, 특히 불가의 철학이 중국으로 전해진 이후로 ‘지(知)’와 ‘각(覺)’을 같은 뜻으로 제멋대로 해석하는 일이 흔했습니다. 그렇지만 논리적(추리적)이고 과학적인 분석에 의거해서 보면 이 두 글자의 뜻은 제멋대로 모호하게 함께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심리학적으로, 또 의학적으로 지각과 감각은 반드시 뚜렷하게 구분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초당(初唐) 시기에 선종 제6대 조사인 혜능(慧能)대사의 제자였던 하택신회(荷澤神會) 선사는 아주 직접적으로 제시하기를, “지(知)라는 한 글자는 뭇 오묘함의 문이다[知之一字, 衆妙之門].”라고 했는데 ‘지(知)’는 바로 덕(德)으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인정하여 말한 것입니다. ‘지(知)’는 바로 도를 밝히고 도를 깨닫는 가장 기본적인 작용입니다. 지(知)가 없는 것은 나무토막이나 돌멩이처럼 도(道)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현대인의 입장에서 말해보겠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식물인간이 되었다면 그가 보이는 반응들은 ‘지(知)가 있다’라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지(知)가 없다’라고 해야 할까요? 혹은 단지 생리적인 반사작용일 뿐일까요? 이 역시 논쟁의 여지가 많은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이 ‘영지지성(靈知之性)’이 도대체 여전히 존재할까요 존재하지 않을까요? 이것도 하나의 중대한 문제입니다. 이러한 문제들 까지는 얘기하지 않더라도, 과연 이 ‘지(知)’가 바로 인간 생명의 제1원인일까요? 하택 선사가 말했던 “지(知)라는 한 글자가 뭇 오묘함의 문이다”와 왕먕명의 ‘양지’ ‘양능’설에서 말한 ‘지성(知性)은 완전히 옳을까요?
우리가 인용한 불가와 도가의 이야기들은, 그들은 모두 ‘지(知)’가 결코 심성(心性) 도체(道體)의 최고의 묘법[無上妙法]이 아니라고 보았음을 설명해줍니다. ‘지(知)’는 도의 본체가 아닙니다. 바꾸어 말하면 ‘지’는 ‘능(能)’이 아닙니다. ‘지(知)’는 하나의 능지(能知)에 의하여 일어난[所] 하나의 최초의 작용일 뿐입니다.
2. 지(知)와 지(止)의 상호작용 관계
‘지지(知止)’라는 이 두 글자가 함께 연결되어 있으면 다음과 같은 문제가 생겨납니다. 먼저 “알아야(知)”만 비로소 “멈출(止)”수 있는가? 아니면 먼저 “멈추어야(止)”만 비로소 “알(知)” 수 있는가? 그 답은 이렇습니다. 먼저 “알아야(知)”만 비로소 “멈출(止)”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성적인 지지(智知)가 주관이 되는 것이요 주도자입니다. 그렇다면 이 ‘안다[知]’가 바로 주인이요, ‘머문다[止]’는 손님이요 객관으로서 지휘[領導]를 받는 작용입니다. 예를 들어 앞에 불이 있는 것을 보면 걸어가다 전진을 멈춥니다. 이게 바로 ‘안다(知)’가 주인이고 ‘멈추는(止)’ 작용은 손님인 경우입니다. 또 예를 들면 배부르게 먹어서 더 이상 먹고 싶지 않고 비장과 위장이 만족했을 경우, 그 반응이 의식이나 뇌로 전달되어 반드시 멈추고 먹지 않기로 합니다. 이것은 ‘멈춘다[止]’가 주인입니다. 배가 불렀으니 이제 더 이상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안다[知]”고 할 때의 이 ‘안다[知]’는 손님이 됩니다. 주자(朱子)가 『대학』을 주석하면서 이 요점에서 ‘멈춘다는 지(止)’ 자에만 착안하고 ‘안다는 지(知)’에는 특별히 주의하지 않았습니다. 아니면 무심코 대충 넘어가 버렸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 부분은 관건이 있는 곳이기 때문에 결코 모호하게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먼저 이 관건을 이해하고 나서 “지지(知止)”, 혹은 “지지이후유정(知止而後有定)”을 다시 연구해보면 조리가 정연하게 됩니다. 바꾸어 말하면 추리의 순서에도 맞고, 또 ‘내명(內明)’의 성리(性理)의 길을 비교적 쉽게 이해합니다. 이런 결론은 당연히, ‘안다는 지(知)’는 주인이고 선도자이며, ‘멈춘다는 지(止)’는 손님이요 주도자가 조작(造作)한 일종의 경계라는 것입니다.
이른바 “지지(知止)”의 ‘내명’의 학문이란 모든 사람이 먼저 자신의 심리상태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욱 분명하게 말하면, 자신의 생각과 정서를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위로는 천자(제왕)으로부터 아래로는 평민(서민)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생각과 정서는, 잠에서 깨어나서부터 다시 잠들 때까지 이 하루 동안의 생명 역정에서 얼마나 많은 생각과 잡념과 환상(幻想)을 거치는지 완전히 헤아릴 수 있고 기억할 수 있을까요? 특히 그 중에서 일어나서 떠다니다 사라지는 갖가지 크고 작은 정서들에 대해서는 더더욱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복잡다단한 생각의 갈피들은 우리가 잠들었을 때도 마치 다면경(多面鏡)처럼 서로 이리저리 꺾여 비추고 갖가지 이상하고 난해한 꿈으로 변화하여 나타나곤 합니다! 그 누가 이 마음의 생각의 갈피들을 아주 맑고 고요하며 평안하게 언제나 하나의 청명(淸明)하고 청정(淸靜)하며 조용한 경계 가운데 놓아 둘 수 있을까요? 아마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라 하겠지요? 그 해답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자기가 어떻게 ‘지지[知止]’해야 할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늘 말합니다. “영웅은 천하를 정복할 수는 있어도 자신을 정복할 수는 없다. 성인의 도는 가장 먼저 자기를 정복하려 하고 천하를 정복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천하를 정복하기는 쉽지만 자기를 정복하기는 어렵다.” 자기의 생각을 항복시켜 평정(平靜)으로 돌아가려면 그 초보로, 노자(老子)가 말한 “호흡에 의식을 집중함으로써 온몸이 유연해져 갓난애 같을 수 있는가?” 정도까지 도달할 수 있어야 점차 ‘지지(知止)’ 단계에 도달하고 더 나아가 ‘명덕(明德)’의 과지(果地)에 진입할 수 있습니다.
3. 먼저 할 바와 나중에 할 바를 아는 지성(知性)
당신더러 깊이 생각하고 반성하라고 해도 됩니다. 그런데 그가 또다시 어려운 문제를 내주면서 당신에게 말합니다. 당신은 진정한 ‘성의(誠意)ㆍ정심(正心)ㆍ수신(修身)’에 도달하고 싶으십니까? 그러려면 반드시 ‘치지(致知)’에서의 ‘지(知)’를 알아야 합니다! 또 여러분이 ‘치지(致知)’에서의 ‘지(知)’를 알고 싶다면, 반드시 ‘격물(格物)’해야만 가능합니다! 뒤집어 말하면 여러분이 진정으로 ‘격물(格物)’했다면, ‘지지(知至)’에서의 ‘지(知)’를 틀림없이 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지(知至)’의 ‘지(知)’를 알고 나서야, 처음에 말했던 ‘지(知)ㆍ지(止)’로부터 ‘려(慮)ㆍ득(得)’에 이르는 과정을 통해 확연히 깨달았던 ‘명덕(明德)’의 묘용(妙用)을 비로소 알게 될 것이고, 비로소 진정으로 ‘지(止)’하여 ‘성의ㆍ정심ㆍ수신’의 품덕(品德)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야 비로소 자기 자신을 아는 밝음[自知之明]을 지니게 되고 자신의 입신처세의 방향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제가(齊家)’를 하든 ‘치국(治國)’을 하든 ‘평천하(平天下)’를 하든, 아니면 이 한 생애를 산속에서 은거하며 천수를 다 누리고 죽든, 평생에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격물지지(物格知至)’에서의 ‘지(知)’와 맨 첫 부분인 ‘지지이후유정(知止而後有定)’에서의 ‘지(知)’는 서로 같은 것일까요 다른 것일까요? 두리뭉실하게 인정해서는 안 되며 이 속에는 생각해보지 않으면 안 될 점이 많이 있습니다.
이제 먼저 이 ‘지(知)’자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물론이지요! ‘지’는 곧 인성(人性)에 본래 있는, 알 수 있는 지각(知覺)작용입니다. 만약 그렇게만 이해한다면 그 ‘지’의 작용은 ‘뭇 오묘함의 문[衆妙之門]’이 되기에는 부족합니다. 우리는 현대인의 습관대로 과학적인 연구 분석을 통해 검토해 보겠습니다. 예를 들어 갓난애가 태아 단계에 있을 때에는 ‘지’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이 문제는 현대 생물학과 의학에서도 추적하고 있는 문제인데, 현재까지는 아직 진정으로 확실한 정론(定論)이 없습니다.
사실은 갓난애가 태(胎)에 머물고 있는 동안에도 이미 ‘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태아의 이런 ‘지성(知性)’을 본능적인 반응, 혹은 생리적인 반응이라고만 부릅니다. 갓난애가 출생한 다음 이러한 지성은 생리적 물리적 반응의 뚜렷함에 훨씬 못 미치는 것 같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감각 작용의 뚜렷함에 못 미칩니다. 그것은 갓난애가 막 태어났을 때와 성장 단계에서는 후천적인 지성의 의식 분별 작용이 아직 성장 숙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소지(所知)’ 성(性)이 단지 생리적 물리적인 감각 면에 편중되어 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가령 배가 고프거나 아프거나, 혹은 뭔가 불편하면 울게 됩니다. 사실 감각이 있음을 아는 것은, 감각이 안다고도 말할 수 있는데, 모두 지성의 ‘소지(所知)’의 작용입니다. 다만 우리 같은 성인들은 순전히 생각이나 사유에 속하는 작용을 ‘지성’이라고 부릅니다. 심지어 지성의 비교적 선량한 일면은 ‘이성(理性)’이라고 부르고, 감각 기관 및 신경 작용에 속하는 생리 반응은 ‘감각(感覺)’이라고 부릅니다. 감각할 때에 만약 식별하는 작용을 일으켰다면 ‘지각(知覺)’이라고 부릅니다. 감각이나 지각 과정에서 동시에 또 이른바 칠정(七情) 육욕(六欲) 등의 작용이 일어났다면 이러한 일시적인 심정 상태를 ‘정서(情緖)’라고 부르고, 이러한 정서가 비교적 긴 시간 동안 지속될 때는 ‘감정(感情)’이라고 부릅니다. 일시적인 정서이든 지속적인 감정이든―현대인들은 ‘감성(感性)’이라고도 부릅니다―세월이 흘러 쌓이다 보면 또 그 사람의 습성(習性)을 형성하게 되고 인격의 일부분이 되어버립니다. 이렇게 복잡하고 미세한 각종의 심리상태는, 사실은 모두 넓은 의미의 ‘지(知)’와 관련된 하나의 묘용(妙用)입니다.
만약 한 층 더 깊이 연구 토론해본다면, 모든 생물 가운데 동물은 지성이 있을까요? 답은 ‘있다’입니다. 다만 인간의 지성과 비교해 봤을 때, 많은 종류의 생물 가운데서 그것이 지성의 작용면에서 얼마의 성분을 차지하고 있느냐의 차이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지지성(靈知之性)’을 지닌 온갖 것들을 ‘중생(衆生)’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 명칭은 『장자(莊子)』라는 책에서 제일 먼저 나왔는데, 뒷날 불학을 번역하면서 이 명칭을 오래도록 빌려 쓰고는 되돌려주지 않은 탓에, 마치 불학의 독창적인 고유명사인양 변해버린 겁니다. 그렇다면 예를 들어 세균이나 미생물 그리고 식물 등도 모두 지성이 있을까요? 이에 대한 답은 이렇습니다. “그것은 뭐라고 딱 잘라 말하기 어렵습니다.” 현대과학의 분류법에 의하면 그런 것들은 끊임없이 생성되는 기능 작용만이 있는데, 화학적 물리적 작용에 속합니다. 하지만 좀 더 자세히 연구해보면, 자연 물리적 화합(化合)이 끊임없이 생성되고 있음은 형이상의 본체 기능의 생지(生知), 혹은 감지(感知)인데, 뒷날 과학과 철학이 새로이 만나게 될 때 다시 얘기하도록 하지요!
4. 능지(能知)와 소지(所知)를 명확히 구별한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전히 먼저 지성(知性)의 ‘지(知)’의 문제로 돌아가겠습니다. 앞에서 우리는 말하기를, 갓난애가 처음 태어났을 때 선천적인 ‘지(知)’성을 본래에 갖추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태아는 늘 안온한 상태에 처해 있으면서 명암이 나누어지지 않는 희미한 경계가 자연히 하나 있습니다. 물론 성인이 된 뒤 이미 의식이 형성되어 시비호오(是非好惡)를 분별할 수 있는 그런 작용은 아닙니다. 바꾸어 말하면 갓난애는 성장 과정에서 뇌문(腦門)의 두골(頭骨)이 합하여진 뒤에, 즉 의학에서 말하는 신문(囟門)이 밀폐된 뒤에 성인들의 생활 동작의 영향, 그리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외부 환경 등의 훈습(薰習) 작용을 받으면서, 그 자아가 태어남과 함께 온 지성의 ‘지(知)’가 점차 분화하고 변화함으로써 후천적인 의식을 형성하며, 아울러 생각하는 지각 작용도 갖추고, 그와 동시에 또 접촉하고 느끼는[觸受] 감각 작용을 갖추게 됩니다. 지각과 감각이라는 두 종류의 작용이 엇섞이기 때문에, 의식과 생각이 있게 된 뒤의 ‘소지(所知)’성(性)을 형성합니다.
이 ‘소지’성에서의 ‘지(知)’에 대해서는 잠시 경계선을 하나 그어 놓겠습니다. 이와는 별도로, 태어날 때 함께 온 선천적 본능인 지성의 ‘지(知)’를, 즉 후천적인 성장 뒤에 알고 분별하는 선악시비 등의 습염(習染)이 더해지지 않은 그 ‘지’를 ‘능지(能知)’의 ‘지(知)’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왕양명이 대학과 맹자의 학설에 취했던 이른바 ‘양지(良知)’ 양능(良能)’에서의 ‘능지(能知)’와도 서로 같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이 ‘능지’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 현실적인 생명의 단계에만 한정하는 것으로서 갓난애로 태어나면서부터 지성을 본래 자연히 갖추고 있기에 이름 붙인 ‘능지’의 ‘지’이지, 최초의 원시 생명, 그러니까 철학에서 말하는 형이상적 본체의 기능인 ‘지’를 총괄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점을 특히 분명히 해두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형이상적 본체론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태어나면서부터 함께 온 이 선천적인 ‘능지’의 ‘지(知)’와 후천적인 의식이 형성된 이후의 ‘소지’의 ‘지(知)’를 이해하였다면, 이제 다시 ‘대학지도(大學之道)’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읽어보십시오. 증자가 맨 먼저 제시한 “지지이후유정(知止而後能定)”에서의 ‘지(知)’는, 사람들이 성인(成人)이 된 뒤의 ‘소지’성의 ‘지’로부터 수양을 시작하여, 점차 단계적으로 닦아 나아가 “려이후능득(慮而後能得)”의 “명명덕(明明德)”의 ‘내명(內明)’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려이득”뒤에 이어서 ‘명명덕(明明德)’의 ‘외용(外用)’인 ‘친민(親民)’의 학문을 개발하여 ‘제가ㆍ치국ㆍ평천하’의 공적을 세우고자 한다면, 반드시 먼저 ‘성의ㆍ정심ㆍ수신’의 학문수양에 도달해야 할 때, 다시 또 “치지재격물(致知在格物)”에서의 ‘지’를 제시했습니다. 이 ‘지(知)’는 ‘지지(知止)’에서의 ‘지(知)’와는 그 효용이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知)’에는 ‘능지(能知)’와 ‘소지(所知)’의 구분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상고 문자는 습관적으로 간략히 써서 한 글자로 여러 겹의 개념들을 뭉뚱그려 말했음을 자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간략화 도리를 잘 모르고 있다면, 당신이 『대학』 같은 고서의 고문을 읽어볼 경우 무슨 ‘지(知)’니 무슨 ‘지(知)’니 하면서, ‘지(知)’에서 시작해서 ‘지(知)’로 끝나서 오히려 읽으면 읽을수록 그 까닭을 알 수가 없게 만듭니다! 그냥 모르는 것이 더 좋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능지ㆍ소지’의 ‘지(知)’는 우리가 생각할 수 있고 지각 할 수 있는 ‘지(知)’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기능일까요? 일으키는 작용에 있어 차별적인 효용이 있기 때문에 변별하는 명칭으로 각종의 다른 명사가 있겠지요? 그렇습니다. 당신 말이 맞습니다. 그래서 『대학』이 맨 처음에 제시하는 ‘지지(知止)’의 ‘지(知)’는 뒤에 이르러서는 “려이후능득(慮而後能得)”의 ‘려(慮)’자로 바뀌어 사용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고문의 ‘려’자는 후세에 사용된 ‘사(思)’자이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사려(思慮)’의 ‘사(思)’가 바로 지성(知性) 기능의 선도적인 작용입니다.
중국의 상고 이래의 전통문화 가운데서 주(周)나라 진(秦)나라 이전에는 제후국의 문자 언어가 아직 완전히는 통일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이 태어날 때 함께 온 이 ‘능지’의 ‘지’에 대해 그 용도가 달랐고, 사용하는 문자 부호 역시 제각기 달랐습니다. 어떤 데서는 그것을 ‘신(神)’이라고 부르는가 하면 어떤 데서는 ‘령(靈)’이라고 불렀고, 또 어떤 데서는 ‘사(思)’라고 불렀습니다. 심지어 한(漢)나라 위(魏)나라 이후 불학이 번역되면서는 그것을 ‘지(智)’라고 부르기도 하고, 혹은 아예 범어(梵語)의 발음 그대로 번역하여 ‘반야(般若)’라고도 부르기도 했습니다.
요컨대 우리가 먼저 이상의 자료들을 인용한 것은, 바로 이러한 도리들이 ‘치지격물(致知格物)’의 ‘지지(知至)’와 모두 극히 중요한 관계가 있다는 점을 당신이 이해하기를 바라서입니다.
5. 치지(致知)와 격물(格物)
우리는 대학의 도는 “재명명덕(在明明德)”의 관건이 있는 ‘치지재격물(致知在格物)’과 ‘물격이후지지(物格而後知至)’ 이 두 구절의 내함을 밝히기 위해, 이미 많은 시간을 들여서 먼저 ‘지성(知性)’의 작용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특히 ‘능지(能知)’와 ‘소지(所知)’의 개념 정의도 제시했습니다. 이제는 다음과 같이 종합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대학』 시작 부분 제1절인 “지지이후유정(知止而後有定)”에서부터 “지소선후, 즉근도의(知所先後 則近道矣)”까지는 모두, 인간이 성장한 이후에 의식 사유 분별인 소지(所知)를 이용하여 닦기 시작하여 “명명덕(明明德)”의 ‘내명’의 학문수양 경지까지 도달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렇더라도 여전히 개인적인 ‘자립(自立 : 自利)’의 학문에 속합니다. 만약 ‘내명’의 학문을 이미 얻고 나서 작용을 일으켜 더욱 나아가 ‘친민(親民)’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세우는[立人]”, 즉 세상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덕업(德業)을 이루고자 한다면, 반드시 진일보 수양하여 ‘능지(能知)의 성(性)’의 대기(大機) 대용(大用)을 철저히 이해해야 비로소 가능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증자는 또 ‘치지재격물(致知在格物)’과 ‘물격이후지지(物格而後知至)’라는 관건적인 지표(指標)를 제시했습니다. 그러나 이 두 구절의 요점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치지’와 ‘격물’ 두 명사의 정의에 대해 이해해야 합니다.
첫째, 이른바 ‘치(致)’자는 “도달한다”는 ‘도(到)’자와 동의어입니다. ‘지(知)’는 바로 ‘지성(知性)’의 ‘지’입니다. 이 두 글자를 한데 모아 ‘치지’라는 한 개의 명사를 구성했는데, 그 함의는, 먼저 자기의 이 ‘능지(能知)의 성(性)’의 원뿌리를 돌이켜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치지(致知)’라고 부르는 것인데, ‘지지(知至)’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도리는 원본의 『대학』 첫 단락의 결론 중에 이렇게 아주 뚜렷합니다. “차위지본, 차위지지지야(此謂知本 此謂知之至也).” 그런데 주자는 일부러 이 두 구절의 결론을 뚝 떼어다가 뒤쪽에다 갖다놓고 단독으로 하나의 장(章)으로 편성한 다음, “우(右)는 전문(傳文)의 5장이니, ‘격물치지’의 뜻을 해석한 것이나 지금은 없어졌다[右傳之五章, 蓋釋格物致知之義, 而今亡矣].”라고 했습니다. 이 어찌 자기 자신을 속이고 남도 속이는 엄청난 거짓말이 아니겠습니까?
다음으로 우리는 다시 상고 문자들을 인용하여 ‘격(格)’의 뜻을 설명하겠습니다. 가령 ‘유신래격(有神來格)’, ‘유묘래격(有苗來格)’ 등등에서 ‘격’자는 ‘오다, 도달하다’는 뜻이지, 우리가 알고 있는 “가로막다”는 뜻의 ‘격’자이거나, “격자무늬”라고 할 때와 같은 ‘격’자의 의미가 아닙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지성(知性)의 ‘지(知)’에 도달하면, 정말로 ‘능지’의 원뿌리에 도달할 수 있다면, 마찬가지로 만사만물(萬事萬物)의 성리(性理)를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만사만물의 성리의 본원(本元)은 ‘명덕(明德)’의 ‘능지(能知)의 성(性)’과 일체양면(一體兩面)이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것이 바로 증자가 가리켜주는, 유가 공문(孔門)의 ‘심물일원론(心物一元論)’의 근본 학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후세 유가들도 “민오동포(民吾同胞)”, 사람마다 모두 동포이며. “물오여야(物吾與也)”, 만물은 모두 나와 밀접하게 이어져 있는 관계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물(物)’과 ‘격(格)’ 두 글자를 한데 연결시켜서 하나의 명사로 만들어 ‘물격(物格)’이라고 부른다고 하는 겁니다. 마음속의 물욕(物欲)을 쳐서 없애야[格去] 비로소 ‘물격’이라고 함을 완전히 가리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바꾸어 말하면, ‘치지격물’의 이치에 대해서는 공자의 손자이자 증자의 문인인 자사가 『중용』에서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해석해 놓았습니다. “오직 천하의 지극한 정성이라야 자기의 본성을 다 알 수 있다. 자기의 본성을 다 알 수 있다면 모든 사람의 본성이 본래 평등하고 스스로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사람의 본성을 다 알 수 있다면, 더 나아가 만물의 자성과 인성도 더불어 일체(一體)로서 차별이 없다는 것을 다 알 수 있다. 만물의 자성을 다 알 수 있다면 , 마음과 물질은 근원이 동일하여 인성과 물성이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 묘용을 알 수 있으니, 비로소 사람의 생명 기능의 가치를 완성할 수 있어서 천지가 만물을 생겨나게 하고 길러주는 공덕에 참여하여 도울 수 있다. 천지가 생겨나게 하고 길러주는 공덕에 참여하여 도울 수 있다면, 천지와 함께 존재하면서 나란히 서 있을 수 있다[唯天下至誠, 爲能盡其性. 能盡其性, 則能盡人之性. 能盡人之性, 則能盡物之性. 能盡物之性, 則可以贊天地之化育. 可以贊天地之化育 ,則可以與天地參矣].”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진인지성(盡人之性)’은 아직은 단지 자신의 ‘내명’ 학문수양에서의 한 단계 공부에 불과합니다. 여기서 더욱 나아가 반드시 ‘진물지성(盡物之性)’인 ‘격물치지’에 이르러야만 비로소 내성외용(內聖外用)의 학문이 됩니다.
만약 우리가 위에서 말한 ‘치지ㆍ격물’ 두 명사의 뜻을 이해했다면, ‘치지격물’라는 지표가 모두 ‘성의(誠意)ㆍ정심(正心)ㆍ수신(修身)’을 위해서 요점을 제시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대학』이 성인(成人)의 학문 요점이 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그래서 증자는 뒷글의 결론에서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천자(天子)로부터 일반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똑같이 저마다 자신의 수양을 근본으로 해야 한다. 그 근본이 어지러운데도 말단이 다스려지는 경우는 없었으며, 두텁게 해야 할 것을 얇게 하고 얇게 해야 할 것을 두텁게 한 경우는 아직 없었다. 이것을 일러 근본을 안다고 하고, 이것을 일러 지성이 도달하였다고 한다[自天子以至於庶人 壹是皆以脩身爲本 其本亂 而末治者否矣 其所厚者薄 而其所薄者厚 未之有也 此爲知本 此爲知之至也].”
이런 이치에 대하여 아주 간단하고 명백하게 이해하고자 한다면, 제가 또 다른 집안에서 빌려 와 설명하고자 하니 여러분은 양해해 주기바랍니다. 그러나 일반 세속의 학자들은 저의 이런 방식을 대단히 싫어하고 반감을 갖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학문파별적 아집견[門派之見]이 너무 깊기 때문입니다. 다행이 저는 학자라고 할 수도 없고, 또 한평생 학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隨心所欲]’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것도 “다른 산의 돌을 가지고 옥을 갈아 흠을 없애는[他山之石 可以攻玉]” 이치입니다. 그렇다면 ‘치지격물ㆍ물격지지’의 내함은 결국 무엇일까요? 불학의 한 구절만 인용하면 알 수 있는데, 바로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으로 “자기의 마음이 만물의 현상에 미혹되지 않아 업을 짓지 않을 수 있다면 여래와 같아진다[心能轉物, 卽同如來].”입니다. 다시 말해 선종 대사들이 말한, “마음과 만물이 둘이 아니라 혼연일체로서 본래 안팎의 구분이 없다[心物一如, 渾然全體, 本無內外之分].”입니다. 만약 반드시 전통 유가의 학술이론, 그리고 상고 시대 유가와 도가가 본래 분가하지 않았을 때의 학설을 근거로 한다면 정말 얼마든지 있습니다. 게다가 적지도 않으니 나중에 따로 말하겠습니다.
‘심물일원’의 ‘도’는 ‘능지(能知)’나 ‘소지(所知)’로 꿰뚫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역계사전』에는 “음양(陰陽)으로 헤아리지 못하는 것을 신(神)이라 한다[陰陽不測之謂神].”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도’라는 것이 절대적으로 알 수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공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은 상급이요, 배워서 아는 사람은 그 다음이요, 강요하여 배우는 사람은 또 그 다음이며, 강요하여도 배우지 않으면 백성 중에서도 하급이 될 것이다[生而知之者 上也 學而知之者 次也 困而學之 又其次也 困而不學 民斯爲下矣].” 이로부터 알 수 있듯이, 증자가 『대학』을 저술하면서 특히 ‘치지격물(致知格物)ㆍ격물지지(物格知至)’를 제시하여 반복 종합적으로 신신당부하고, ‘내성(內聖 : 內明) 외왕(外王 : 外用)’의 ‘명덕(明德)’을 숭상하면서 ‘수신’에 중점을 두었던 의도가 사실상, “나의 도는 하나로 꿰뚫었다[吾道一以貫之].”는 공문 심법의 전승을 이어받았다는 것이었습니다.
6. 자성(自性)을 어떻게 ‘지선에 머무르게’ 하는가
인성은 본래 본능(本能) 자체가, 스스로 그 덕을 밝힐 수 있고 본래 자체가 지선(至善)을 갖추고 있는데도, 왜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여 사람의 행위로 변할 때는 또 선(善)과 악(惡)의 대립이 있어서 그 작용이 완전히 다른 것일까요? 이 문제를 유가의 관점에서 설명한다면, 그것은 인성이 주로 후천적인 환경의 영향을 받아 바뀌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공자도 말하기를 “사람은 태어날 때에는 선량하고 순결한 본성에 가깝지만, 점차 습관이 더해지면서 그 본성과는 멀어진다[性相近也, 習相遠也].”고 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타고난 인성은 본래 저마다 선량한데 다만 후천적인 영향, 즉 생리적 환경적 갖가지 영향을 받아 나쁜 습성[習氣]에 물들다보니 선과 악이 뒤섞여 흐릿한 습관으로 변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학문의 도리란 바로 자성(自性)의 오염된 습성을 수시로 어디서나 씻어냄으로써 자성을 ‘명덕(明德)’과 ‘지어지선(止於至善)’의 경지로 다시 되돌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자성을 ‘지어지선’의 경지로 되돌려 보낼 수 있을까요? 오로지 자성이 본래 갖추고 있는 ‘능지(能知)의 성(性)’의 기능작용[功用]을 이용하여, 자기의 마음이 일어나고 생각이 움직이는 것 하나하나마다와 행위 하나하나마다가 선(善)인지 악(惡)인지를 수시로 반성하고 살펴보아 또렷이 알고 처리하되 각각 씻어냄으로써, 자성으로 하여금 순수하고 깨끗한 ‘명덕(明德)’의 본래 모습으로 되돌아가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언어적 표현 입장에서는, ‘그 성이 스스로 밝고 깨끗한[性自明淨]’ 지성의 작용을 논리적인 이론개념으로는 ‘능지(能知)’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지성을 마음이 일어나고 생각이 움직이는 데 써서 외부로 향하여 사람이나 일이나 물건에 대하여 분별 작용하는 것을 ‘소지(所知)’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어, 인성(人性)은 태어나서부터 늙어 죽을 때까지 배가 고프면 먹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추우면 추위를 피하고 따뜻하게 해야 한다는 것도 압니다. 예쁜 것 아름다운 것을 보면 자기가 소유하고 싶어 하지만, 좋지 않는 것 싫어하는 것을 보면 얼른 내다버리고 싶어 합니다. 그 모두가 천성적인 ‘지성’의 ‘능지’의 작용입니다. 하지만 그 사이에도 구분은 있습니다. 배부름, 따뜻함, 굶주림, 추위, 좋음, 싫음은 천성적인 ‘능지의 성’의 감각 부분이 반응함으로써 알게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감지(感知)’ 혹은 ‘감각(感覺)’이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 불학 명사로는 ‘촉수(觸受)’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맛있다 맛없다, 이것은 요구해도 된다 안 된다, 이렇게 하면 된다 안 된다를 아는 것은 ‘능지’의 성이 일으킨 ‘소지’의 분별작용에 속합니다. 그러한 작용은 ‘지각(知覺)’이라고 부릅니다. 지각은 사유나 생각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서 한시도 나누어질 수 없습니다. 지각 작용이 자세히 분별ㆍ추적ㆍ분석ㆍ귀납ㆍ회상ㆍ구상할 때는 또 ‘생각[思想]’이나 ‘사유(思惟)’ 같은 다른 이름으로 불러야 합니다.
그러나 ‘능지’이건 ‘소지’이건, 『대학』에 나오는 명사로 표현하자면, 그 둘 다 스스로 그 덕을 밝힐 수 있는 ‘명덕(明德)’ 자성이 일으키는 작용에 속한 것입니다. 만약 ‘명덕(明德)’ 자성을 밝히게 되면, 그것은 본래 자체가 “적연하여 부동하지만 일단 감응하면 천하의 모든 이치에 통하게[寂然不動, 感而遂通]”됩니다. 이른바 ‘능지’와 ‘소지’는 ‘명덕(明德)’이 일으키는 작용인 파동에 불과합니다. ‘지성(知性)’ 역시 하나의 자성적 존재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비유하자면 파도가 고요하고 맑아서 수원(水源)이 맑게 들여다보이는 그것이 바로 ‘지어지선(止於至善)’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지본(知本)’이요 그래야 비로소 ‘지지지야(知之至也)’입니다.
그러나 보통사람들은 생명을 지니는 그 순간부터 시종일관 ‘소지’의 분별 작용이 일으키는 파동(波動)으로 인해 잠시도 평안이 없습니다.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소지’의 ‘습성[習氣]’을 수집 누적하여서 ‘의(意)’를 형성합니다. 이것을 ‘의식’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 다음에는 스스로 명확히 구분할 수 없기 때문에 ‘의’가 바로 ‘지성’이라고 여깁니다. 사실 ‘의’는 ‘지성’의 ‘소지’가 누적되어 형성된 것입니다. ‘지성’이 수집 누적되어 ‘의’가 형성된 다음에는 마치 스크린 위에서의 배우와 장면은 그 표정이나 만남과 이별 등의 줄거리를 각각 연출할 수 있는데, 허깨비 같기도 하고 진짜 같기도 합니다. 사실 그런 줄거리 변화들은 모두 스크린 뒤에서 한 통의 필름을 상영하는 것일 뿐입니다. 필름이란 바로 ‘의’와 같습니다. 스크린 위에서 갖가지 인물의 활동은 ‘소지’의 갖가지 투영(投影)과 같습니다.
‘의기(意氣)’를 말하자면 문제가 참 많습니다. ‘의’는 ‘능지’와 ‘소지’가 외부 물질 환경 등의 영향을 받아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형성해 놓은 자아 지성의 견고한 영상(影像)인데, ‘형태(形態)’라고도 부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논리적인 구분에 의거해서 말한다면 그것은 유심론적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작용을 일으킬 때에는 항상 필연적으로 동시에 생리적인 내부의 정서와 관련되어 양자가 서로 결합하기 때문에 ‘의기(意氣)’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한 부의 수천 년 인류역사ㆍ인류사회라는 것도, “요란스레 네 노래가 끝나면 내가 무대에 오르지, 타향도 오히려 고향이라 여기면서[亂哄哄你方唱罷我登場, 反認他鄕作故鄕].” 십중팔구는 모두 우리의 ‘의기’가 만들어낸 실수입니다. 송대(宋代) 이학가 육상산(陸象山)은 이런 명언을 남겼습니다. “소인은 이해를 놓고 다투고, 사대부(지식인)는 의견을 놓고 다툰다네[小人之爭在利害, 士大夫之爭在意見].” 확실히 이것은 매우 견지가 있는 관점입니다.
사실 우리가 평소 사람됨이나 일처리에서 대부분의 행위와 언어는 모두 일시적인 기분인 ‘의기’에서 일을 처리하지, 맑고 밝은 이지적인 ‘명덕(明德)’ 지성에서 하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일마다 이성에 맞게 처리한다는 것은 사실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진실로 ‘대학지도(大學之道)’의 기본적 수양인, 이른바 ‘정(定)ㆍ정(靜)ㆍ안(安)ㆍ려(慮)ㆍ득(得)’의 학문 공부에 도달하지 않은 한은 말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자기 이성의 진실한 모습이 무엇인지에 대해 자기가 알 길이 아예 없습니다. 그래서 노자(老子)는 이런 소감을 표현하는 말을 했습니다. “남을 아는 자는 지혜롭고, 자기를 아는 사람은 명철하다[知人者智 自知者明].” 그래서 증자는 “지지이후의성(知至而後意誠)”이라는 중점을 특히 지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誠)’이라는 글자를 하나 사용함으로 인해 후인들의 오해 또한 적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선종의 낙포(洛浦) 선사가 말한 “한 조각 흰 구름이 골짜기 입구에 걸쳐 있어, 얼마나 많은 새들이 밤에 둥지로 돌아가는 길을 잃었던가[一片白雲橫谷口, 幾多歸鳥夜迷巢].”란 말 그대로입니다. 그러므로 대학의 ‘성의ㆍ정심ㆍ수신’의 관점에서 『이십육사(二十六史)』상의 지도자들(제왕들)과 보통사람들의 창업(創業) 및 수성(守成)에서의 성패득실을 살펴보면 연극을 얻어 보게 될 것입니다!
심(心)ㆍ의(意)ㆍ식(識:지성)의 차이에 있어, 지성과 의지 혹은 의식의 작용에 대해서는 대략 구분지어서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이른바 ‘의(意)’는 심리의 일종의 활동 작용으로 이해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의’가 바로 ‘심(心)’인데, 단지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용어가 다를 뿐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심’과 ‘의’는 동일한 것이 아닙니까? 만약 적당히 뭉뚱그려서 말한다면 ‘심’과 ‘의’는 동일한 것으로 생각과 정서의 총화(總和)나 다름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엄격하게 구분지어 말한다면 ‘의’는 ‘심’을 개괄할 수 없습니다. 이른바 ‘심’의 현량(現量) 경계는 우리가 의식 사유를 일으키지 않을 때, 특히 지성의 분별 사량 작용을 움직여 사용하지 않을 때는, 잠이 든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혼미한 상황도 아닌 것이 마치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 같지만, 또 맑고 밝게 존재하고 있는, 그것이 바로 ‘심’의 현상(現象)입니다. 예를 들어 명대(明代) 창설(蒼雪) 대사의 시에서 말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남대사에서 향 피우고 정좌하고 있노라니
종일 정신이 집중되어 온갖 생각 사라지네
마음을 멈추고 망상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생각하고 헤아릴 일이 없기 때문이라네
南臺靜坐一爐香 終日凝然萬慮亡
不是息心除妄想 只緣無事可思量
사실은 우리 마음속에 아무런 일이 없어서 의식이 작용을 일으키지 않아, 그 즉시 ‘소지(所知)’의 분별활동을 잊어버림이 마치 텅 비어 멍해진 것 같은 상태가 바로 ‘심(心)’의 현상입니다. 보통 일반인들, 특히 평소에 아주 바쁜 사람들은 우연히 극히 짧은 시간 동안 때로는 그런 상황을 만날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 일반인들은 오히려 공포를 느낄 것입니다. 자신의 뇌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가, 혹은 심장의 활동이 정지한 것은 아닌가? 하고 의심하고는, 짧은 의학 상식으로 이리저리 혼자 고민하다가 결국은 의사를 찾아서 혈압을 재고 심전도를 검사할 것입니다. 대부분은 자기가 공포심을 일으켰기 때문에 정말로 병이 나고 맙니다. 사실 이것은 일종의 자기의 심리적인 병에서 기인한 겁니다. 만약 그런 상황에서 태연하게 머문다면 도리어 큰 휴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평소 그런 경험이 없었고, 또 자기 자신에 대해 인식하지 못해서 믿음이 없으면, 극히 짧은 순간은 곧바로 과거가 되어 버리고 그런 현량 상황을 장구히 유지시킬 수가 없습니다.
잠을 자고 있거나, 외부의 자극을 받거나, 통증으로 현기증이 나고 혼미할 때에는 그런 ‘심량(心量)’의 경계가 나타나기는 불가능합니다. 심지어 꿈속에서도 불가능합니다. 꿈꾸는 것은 ‘의식’이 일으키는 반면 작용이지 ‘심’의 작용이 아닙니다. 꿈속에서 갑자기 심력(心力)이 강해지면서 꿈이라는 것을 깨닫고 얼른 깨어나기도 하는데, 그것이 바로 ‘심’의 경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보통 사람들은 습관상 꿈에서 깨어나면 ‘의식’을 운용하여 생각하고 헤아려[思量]봅니다. ‘소지’의 습관으로 꿈 경계를 추억하거나 ‘소지’를 가지고 새로운 지식을 추구하기 때문에 영원히 휴식에 머무르지 못합니다.
이렇게 대략 나누어 해석해 놓은 것이 이해된다면, ‘심(心 )ㆍ의(意)ㆍ지성(知性)’ 세 가지는 서로 다른 독자적인 영역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공교롭게도 위진(魏晉) 이후 불학이 중국에 전해져서도 마찬가지로 ‘심(心)ㆍ의(意)ㆍ식(識)’이라는 세 단계를 구분해서 말합니다. 이는 정말 “현명한 사람의 소견은 대체로 같다[賢者所見略同]”는 한 마디 옛말에 들어맞지 않습니까? 요컨대 다시 비유를 하나 사용하여 설명하겠습니다. ‘심(心)’은 마치 하나의 쟁반 같고, ‘의(意)’는 쟁반 위의 한 알의 둥근 구슬 같습니다. ‘지성(知性)’은 마치 쟁반과 구슬이 내뿜는 빛이 안으로는 자기 자신을 비추고 밖으로는 외물을 비추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만 이 쟁반은 또 피와 살로 만들어진 가죽 주머니 속에 담겨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사람의 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굳이 비유한다면 그렇다는 것이지 결코 실제 참모습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중국소설에서 옛사람은 이미 아주 재미있는 비유를 들었는데, 바로 『서유기(西遊記)』에 나오는 네댓 명의 인물이 그것입니다. 작가는 심신의식(心身意識)을 소설로 변화시켰습니다. 즉, 심원의마(心猿意馬)를 인물로 변화시켰는데, ‘심(心)’을 나타내는 인물이 손오공(孫悟空)입니다. ‘의기(意氣)’를 나타내는 인물은 용마(龍馬)입니다. 저팔계(豬八戒)는 사람의 큰 ‘욕망(慾望)’을 나타내는데, 특히 여색과 음식을 좋아합니다. 재수 없는 사오정(沙悟淨)은 주관이 없는 ‘정서(情緖)’를 나타내기 때문에 여행 짐만 맬대로 짊어질 수 있어서 이 가죽 부대를 매고서 원숭이 저팔계를 따라 달려갑니다. 그 전체의 심신 생명을 나타내는 인물이 바로 삼장 법사입니다.
우리는 ‘심ㆍ의ㆍ지성’라는 세 개의 층차 작용 역시 ‘명덕(明德)’의 ‘내명’의 범주에 속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 ‘심ㆍ의ㆍ지성’은 반드시 외물인 사람의 몸을 빌려야만 비로소 물리적인 현실 세계에 대해 작용을 발생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가 통상 사람의 생명 전체를 ‘심신(心身)’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주 정확한 견해인 셈입니다. 이 생명은 신(身)과 심(心)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신체(身)”는 생리적이며 물리적인 것으로서 끊임없이 생겨나는데, ‘생(生)’의 기능이 드러납니다. “마음(心)”은 심리적이며 정신적인 것으로서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생겨나고 계속 이어지는데, ‘명(命)’의 기능을 형성합니다.
소결(小結)
1. 위에서 설명하여 보인 지(知)ㆍ능지(能知)와 소지(所知)는 모두 지성이 드러낸 기능으로 그 작용 시간은 입태(入胎) 이후부터 사망까지입니다. 입태 전과 사망 후의 지성에 대하여는 아직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형이상의 도체인 지성에 대하여는 아직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지선(至善)이나 지지지(知之至)에 도달하여야 비로소 지성입니다. 그러므로 유가의 수증 중점은 현재의 생(生) 현재의 세상을 닦는 데 치우쳐 있으며 좋은 사람이 됨을 가장 중시합니다. 그 수증 이론과 실제 수지 방법은 모든 사람들에게 대단히 적응되며 그 적응 범위가 대단히 넓어서 “천자(天子)로부터 일반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적용됩니다.
2. 유가는 양곡가게와 같아서 사람마다 그에서 떠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유가는 현세만을 중시하기 때문에 그 견지와 수증에는 한계성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역대의 대 유학자들 중에는 비록 청명재궁(淸明在躬)한 인물이 드물지 않았지만 진정으로 도를 증득한 사람은 새벽 하늘의 별처럼 드물었습니다(견도見道와 수도위修道位를 아직 뛰어넘지 못했습니다).
3. 점수와 돈오의 각도에서 분석해보면 유가에는 비록 “삼아, 나의 도는 하나로 꿰뚫었느니라.”를 곧바로 가리켜 보여서 증자로 하여금 심성을 돈오하게 하는 공안이 있었지만 이런 상황은 극히 드물었고 특별한 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가가 걸어간 것은 점수 노선으로, 비교적 평범하고 실제적이며 온당합니다. 불가처럼 곧바로 가리켜 단박에 뛰어넘는, 대단히 유쾌하며 심금을 울리고 사람 마음을 격동시키는 일이 없었습니다. 일반 수행자는 반드시 위에서 설명한 지(知)ㆍ능지(能知)와 소지(所知)를 확실히 이해한[了悟] 뒤라야 한 걸음 더 나아가 지성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근기가 좋은 사람이라면 직접 지성을 깨닫는 것으로부터 들어가 깨달은 뒤에 닦음을 일으켜도 됩니다.
4, 보충설명: 남선생님이 위에서 인용한 “지(知)라는 한 글자는 뭇 오묘함의 문이다[知之一字, 衆妙之門].”에서의 ‘지’는 지성을 가리키지 능지와 소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지성은 능지와 소지를 포함하는데 하나는 본체[體]요 다른 하나는 작용[用]입니다.
5. 남선생님이 『원본대학미언』에 그렇게 많은 심혈을 기울인 것을 보면, 『대학』이 현대인들 특히 수행자들에게 중요한 작용을 한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잘 학습하여야 합니다.
(2) 지성에 관한 법문
남선생님이 말한 지성(知性)은 자심(自心)ㆍ자성(自性)ㆍ청정심(淸淨心)ㆍ도(道)ㆍ부처[佛] 등이라고도 부릅니다. 불가의 명심견성(明心見性)도 이것이요, 유가의 존심양성(存心養性)도 이것이요, 도가의 수심양성(修心養性)도 이것이요, 맑고 밝음이 자신에게 있다는 청명재궁(淸明在躬)도 이것이요, 듣는 작용을 안으로 돌이켜 자성을 듣는다는 반문문자성(返聞聞自性)도 이것이요, 수행자들이 가장 좋아하고 가장 감격하는 것도 이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남선생님의 법문은 하나하나 셀 수 없을 만큼 많지만, 주로 『원각경략설』ㆍ『금강경설십마』ㆍ『선여생명적인지초강』ㆍ『남회근여피득성길―관어선생명화인지적대화』ㆍ『습선녹영』, 그리고 『답문청장년참선자』 등의 저작 속에 집중되어 있는데, 그 하나하나마다 훌륭하며 사람들의 흥취를 끌어서 정말 사람들이 더 이를 데 없이 좋다고 극구찬양하게 됩니다.
1. 남선생님이 바로 가리키는 지성을 맛보기
(1) 부처님은 말씀하시기를 일체의 대승도 보살은 이 환관(幻觀)으로부터 수행을 닦기 시작하여, 점차 나아가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진보한다고 하십니다. “저 허깨비를 관하는 자는 허깨비와 같지 않으며[彼觀幻者, 非同幻故]”, 환화임을 ‘알 수 있는 이것’, 환관을 ‘일으킬 수 있는 이것’은 환화와 다릅니다. 치통을 예로 들면 아픈 감각은 환입니다. 그러나 아픔을 ‘알 수 있는 이것’은 결코 아프지 않습니다. 아픔과 ‘이것’과는 조금도 상관이 없습니다. 이로부터 체험해보아야 합니다. 주의해야 합니다! 이것은 크나큰 법을 전하는 것입니다! (원각경 강의)
(2) 우리들의 심념은 흐르는 물과 같아서 영원히 흐르고 있는데 잡념 망상을 멈추게 할 수 없으니 어떻게 할까요? 잡념 망상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공중의 먼지와 같습니다. 마음이 고요해지면 당신은 잡념 망상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그 ‘앎[知]’이 바로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의 ‘조(照)’입니다. 이 ‘앎’ 자체에는 잡념망상이 없습니다. 그것은 허공처럼 무량무변(無量無邊)합니다. 이 ‘앎’은 형상도 없고 명칭도 없습니다. 그것을 ‘부처[佛]’라 불러도 되고 ‘도(道)’라 불러도 되고 ‘원각(圓覺)’이라 불러도 됩니다. 그러나 일반인들은 알지 못합니다. 설사 당신이 알고 깨달았다 할지라도 공부가 도달했고 더 이상 일이 없다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취모용료급수마(吹毛用了急須磨)”, ‘취모’는 대단히 예리한 보검입니다. 털을 하나 뽑아 칼날 위에 놓고 입으로 한번 훅~ 불면 털이 끊어집니다. 계속 주의를 기울여 수행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심념은 쓰고 나면 버려서 언제나 지(止)의 상태에 있고 정(定)의 상태에 있어야 합니다. (원각경 강의)
(3) “시방삼세 일체 여래는 본래 일으킨 인지(因地)에서 성불의 수단으로, 모두 원만히 비추는 청정한 각상(覺相)에 의지하여, 영원히 무명(無明)을 끊고, 비로소 불도를 이루느니라[一切如來本起因地, 皆依圓照清淨覺相, 永斷無明, 方成佛道]”, 무릇 성불하고자 하면 반드시 이 원각수행법에 의지하여야 성불할 수 있습니다.
‘본기인지(本起因地)’, 성불의 수단은 어디로부터 찾아야 할까요? 우리 자신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우리들 보통의 범부에게는 한 가지 물건이 있는데, 생각할[思想] 줄 알고 번뇌를 일으키는 바로 그 물건입니다. 사람의 일체의 활동은 모두 이 물건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이 물건을 찾아내야 합니다. 이 물건은 성불의 ‘본기인지’가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떻게 찾아야 할까요? 아주 간단합니다. 바로 사람의 한 생각, 즉 일념(一念)사이에 있습니다. 무엇이 우리들의 제1념일까요? 우리가 이 문제를 드물고 신기하다고 느낄 때에 이미 제2념이 되어버립니다. 여러분은 아침에 일어났을 때 제일 첫 번째 염두(念頭)가 생각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기억할 수 있습니까? 생각해 낼 수 없습니다. 자, 상관없습니다. 그럼 여러분은 내일 아침에 잠에서 깨었을 때 첫 번째 염두가 무엇을 생각할지를 알 자신이 있습니까? ‘본기인지’는 바로 이곳에서 찾아야 합니다. (원각경 강의)
(4) 우리들은 보통 도를 닦아 최후에 이르면 움직이지 않는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생각을 움직이지 않거나[不動念] 혹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바로 정(定)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태여 부처님을 배울 필요가 있겠습니까? 돌덩이를 배우거나 죽은 사람을 배우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부동(不動)’이란 형용사로서, 움직이면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動而不動]. 예를 들어 제가 말을 했는데 여러분은 들었습니까 안 들었습니까? 들었습니다. 이것은 ‘동(動)’ 아닙니까? 여러분이 들은, 제가 말하는 소리나 내지는 밖의 차 소리가 바로 움직이는 현상인 동상(動相)입니다. 만약 높은 산꼭대기에 갔다면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는데, 그 때 여러분들은 들었을까요 안 들었을까요? 들었습니다. ‘소리가 없음’을 들었습니다. 이것이 소리가 없는 현상인 정상(靜相)입니다. 동상도 듣고 정상도 들었습니다. 동상과 정상을 여러분들은 분명히 압니다. 이때에 생각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動靜二相, 了然不生]. ‘동(動)’이 오면 ‘동(動)’인줄 알고 ‘정(靜)’이 오면 ‘정(靜)’인줄 압니다. 동정(動靜)을 알 수 있는 ‘그것’은 ‘동’과 ‘정’에 있지 않으며 ‘동’과 ‘정’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은 영원히 불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움직이지 않는다[常不動]’는 말로써 ‘그것’을 형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불생불멸(不生不滅)이요 부증불감(不增不減)이요 불구부정(不垢不淨)입니다. (원각경 강의)
(5)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은 2십여 세의 젊은이들이나 연세가 많은 6,7십여 세의 노인들이나 모두 일생동안 환상(幻想)을 썼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의 생각[思想]ㆍ감각ㆍ정서 등의 속임을 당했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허환부실(虛幻不實)한 것입니다. 그 중에 오직 한 물건이 시종 변함이 없고 노쇠함도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여기에 앉아 있으면서 마음속에 번뇌가 없고 생각이 없어서, 자기가 본래에 청정하다는 것을 아는 ‘이 물건’은 움직인 적이 없습니다. 이것이 ‘불여환자(不汝還者)’, 되돌려 보낼 곳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먼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처럼 인정한 뒤에 번뇌생각을 없애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허깨비 경계입니다. 당신이 그것을 상대하지 않아도 그것은 자연히 가라앉아 맑아져갈[澄淸] 겁니다. 이처럼 청정해가다 보면 가끔 망상이 날아드는데 그럼 어떻게 할까요? 상관없습니다. 날아오고 날아가든 여전히 그 경계 속에 있습니다. (원각경 강의)
(6) 우리가 만약 이런 생멸현상에 굴림[轉]을 당하면 바로 범부입니다. 만약 이 끊임없이 생멸하는 가운데에 한 개의 불생불멸한 것이 있어서 생겨나도 생겨나지 않고[生而不生], 소멸해도 소멸하지 않으며[滅而不滅], 움직여도 움직이지 않고[動而不動], 형상이 없음[無形無相]을 발견하면, 불경에서 말한 ‘무생법인을 증득하여 보살지에 올라[證無生法忍, 登菩薩地]’, 생멸을 끊어 없앨 필요 없이 생사 가운데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원각경 강의)
(7) 승려 갑(甲) : 망상을 아는 그것에는 망상이 없습니다.
남선생님 : 그 말은 맞습니다! 또 한 가지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호흡이 들어오고 나갈 때 지금 수식(數息) 법문을 이용하여 수식(隨息) 지식(止息)에 도달하였기 때문에, 비록 마음과 호흡 이 두 개가 전일하여서 그 망상이 오더라도 자기가 상관하지 않고 망상을 압니다. 그 밖에 한 가지 가장 큰 것이 곁에 있는데, 그것은 아는 그 지성입니다.
우리가 정좌하고 공부하여 그런 경계에 도달하면 식(息)도 멈추고 망념이 우리들과 상관없다는 사실도 알고는 그것을 생각하지 않기로 합니다. 염두도 상대하지 않고 호흡도 고요해졌습니다. 이때에 전체 경계는 어디에 있을까요? 지(知)의 지성에 있습니다. 이 지(知)는 밖에도 있지 않고 안에도 있지 않으며 중간에도 있지 않습니다.
당신은 이해했습니까? 이 지성은 본래 자성의 지성입니다. 본래 자성의 첫 단계의 기능인 ‘견문각지(見聞覺知)’라는 이 지성은 밖에도 있지 않고 안에도 있지 않으며 중간에도 있지 않습니다. 이것은 망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망상을 알고 이 기식(氣息)을 알며 이 망념도 압니다. 이것은 여여부동(如如不動)한 채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이 자성입니다. 이렇게 아십니까? 모두 이해하였습니까? 그렇다면 축하드립니다! 이해했습니다.
승려 임(壬) : 그럼 능지(能知)와 소지(所知)는요?
남선생님 : 당신도 능지와 소지를 상관하지 마세요! 또 그런 것을 더해서 뭐 하게요! 모든 불학을 전당포에 가서 잡혀버리세요! 상관하지 마세요! 어쨌든 자신은 그때에 이 지(知)를 아니까요! 지(知)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지요? 이 지(知)를 파악했으니 당신은 가뿐하고 유쾌합니다. (청장년참선자의 질문에 답함)
(8) 그러므로 안나반나를 닦는 데 있어 우리가 방금 토론했던 중점은 바로 이 지(知)라는 것을 여러분들은 모두 압니다! 이 지성은 기식(氣息)에 있지 않으며 지수화풍에도 있지 않으며 허공에도 있지 않습니다. 있는 곳도 없고 있지 않은 곳도 없습니다. 그래서 선종 조사에게는 다음과 같은 한 마디 말이 있습니다. “지(知)라는 한 글자는 뭇 오묘함의 문이다[知之一字, 衆妙之門].” 이 지(知)는 어디에서 올까요? 와도 어디로부터 옴이 없고 가도 어디로 좇아 감이 없습니다[來無所從來, 去無所從去]. 『금강경』에서 부처님이 당신에게 말씀하십니다. “어디로부터 옴도 없고 어디로 감도 없는 것을 여래라고 이름 한다[無所從來, 亦無所去, 是名如來].” 이 지(知)는 당신이 일부러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본래에 존재합니다. 우리는 다들 평소에 그것을 사용하고 있겠지요! 물론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분에게 더 이상 캐묻지 않겠습니다. 더 이상 물었다가는 사람들을 너무 깔보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들은 당연히 압니다. 우리는 차가 오면 차를 마실 줄 알고 밥이 오면 밥을 먹을 줄 압니다. 피곤하면 피곤한 줄 압니다. 잠을 자면 잠을 잔 줄 압니다. 편안한지 편안하지 않은지 모두 압니다. 이 지(知)는 본래에 여기에 있으니 당신이 일부러 닦을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소나 말이나 개로 변한다면 역시 소나 말이나 개로 변한 줄 압니다. 다만 자성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데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청장년참선자의 질문에 답함)
(9) 이론 면에서 투철하게 이해하기만 하면, 이 움직이지도 고요하지도 않은 여여(如如)한 경계 속에서 움직여도 무방하며 움직여도 움직임이 아닙니다. 여러분들 중에는 지금 이미 그 그림자를 체험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림자라도 괜찮습니다! 그림자를 찾아낼 수 있다면 틀림없이 그 주인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당신이 그림자조차도 찾아내지 못할까 걱정되는데, 어떻게 주인을 찾아낼 수 있을까요? (습선녹영)
(10)
가을바람에 낙엽들 어지럽게 쌓이기에
다 쓸어내면 또 오고 그러기를 천백 번
한번 웃고 그만두고 한가한 곳에 앉아
내버려두니 땅에 떨어져 저절로 재가 되네
秋風落葉亂爲堆 掃盡還來千百回
一笑罷休閑處坐 任他著地自成灰
망상은 추풍낙엽과 같아서 한번 쓸어내도 또 오고 쓸어내도 또 옵니다. 그리고 가을바람 속에서는 쓸어낼수록 많습니다. 늙은이는 쓸어내기가 귀찮아져 하하 한번 웃고는 그만두기로 하고 쓸어내지 않습니다. 낙엽이 떨어지면 저절로 재로 변할 것이며 자연히 비워지게 되는데 당신은 그것을 쓸어내서 뭐하겠습니까? 그것이 땅에 떨어져 저절로 재가 되도록 내맡겨둡니다. 이런 도리들을 저는 다 말한 적이 있습니다. 망념을 일부러 없애려고 하지 마십시오. 당신이 망념을 없애려고 하는 그 마음도 망념입니다. 망념은 본래에 공(空)한 것이요 본래에 허망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망념이라고 부릅니다. 당신은 그것을 없애서 뭐하자는 겁니까? 저는 줄곧 여러분들더러 망념이 오고 감을 알 수 있는 그 마음을 체험해보라고 했습니다. 그 마음은 망념이 아니며 그것은 결코 움직인 적이 없습니다. 당신이 이미 망념인 줄 알았다면 망념은 벌써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래도 당신은 망념을 없앨 방법을 생각하다니 배부르게 밥 먹고 할 일이 없는 것 아닙니까? (습선녹영)
(11) 석가모니불은 49년 동안의 설법에서 ‘나가 없다’고 ‘무아(無我)’를 말했으며 공자도 “자기의 의견을 고집하지 않았고, 꼭 그래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았고, 자기의 선입견을 고집하지 않았고,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毋意 毋必 毋固 毋我].”고 말했습니다. 당신은 그분들에게 물어보십시오, 당신은 무아인데 어떻게 설법할 수 있습니까? 만약 ‘아’가 있어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고 말한다면 상락아정도 공(空)이 아니니, 자기를 가지고 놀고 있는 것 아닙니까? 젊은이들이 하는 이런 말은 맞습니다. 대단히 간단합니다. 이것은 나라는 ‘아(我)’입니다! ‘아’는 어디까지나 ‘아’입니다! 말해보면 아주 간단한 것 같아 나는 바로 나입니다. 당신은 어디에 ‘나’가 있습니까? 곳곳마다 ‘나’가 없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변화하는 것은 ‘나’가 아닙니다. 당신은 항상 변하고 있지요! 매초 매분 매일 매월 모두 변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이 육신은 당연히 ‘나’가 아닙니다. 이것은 냄새나는 뼈, 냄새나는 고깃덩이로 ‘나’가 아닙니다. 그럼 당신은 말하기를 “나는 생각하기 때문에 나가 있습니다.”라고 합니다. 이 생각ㆍ사유ㆍ감각은 곧바로 사라져버립니다. 뿐만 아니라 가련하게도 나는 마땅히 주인이지만 자기 뜻대로 하지 못하고 외부의 환경이 변하자마자 생각이 곧 변합니다. 일체의 감각ㆍ생각은 변화하고 있으며 진아(眞我)가 없습니다. 진짜 나는 어디에 있을까요? 능히 감각할 수 있고 지각할 수 있으며 생각할 수 있는 ‘그것’은 남자도 아니요 여자도 아니며, 늙지도 않으며 젊지도 않습니다. 그 본래를 찾아내야 합니다. 그러므로 당신더러 산란(散亂)하지 말라, 망상하지 말라고 합니다. 자기 뜻대로 할 수 없는 이런 사념(思念)ㆍ감정ㆍ생각들을 모조리 내던져버리라고 합니다. 다 내던져버려서 깨끗하고 적나라하게 하여 몸을 잊어버리고 일체를 잊어버리면 영명한 자성이 하나 있는데, 이 자성이 바로 백장 선사가 말한 “영명(靈明)한 광명이 홀로 빛나며 6근6진을 멀리 벗어나 있다....심성은 물듦이 없으면서 본래에 그 자체가 원만히 성취되어 있다. 다만 허망한 인연을 떠나면 바로 여여한 부처이다[靈光獨耀 逈脫根塵.... 心性無染 本自圓成 但離妄緣 卽如如佛].”입니다. (습선녹영)
(12) 이제 우리는 꿈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생각을 말하면서 꿈까지 말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생각은 그렇게 많은데도 자기가 또렷이 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다들 정좌하면 자기의 생각이 그렇게 많다는 것을 알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여러분들이 여기서 듣고 있을 때, 또렷이 제 말을 듣고 있는 것이 하나 있음을 압니까 모릅니까? 있습니까 없습니까? 틀림없이 있습니다! 아는 것이 하나 당연히 있는데 그 지성(知性)은 생각이 아닙니다. 지금 저는 말하고 여러분은 듣습니다. 동시에 여러분은 제가 하는 말의 도리를 분석도 하고 있습니다. 맞지요? 많은 작용을 일으킵니다. 맞지요? 그렇지만 당신에게는 자기가 분석하고 있음을 알고 자기가 말을 듣고 있다는 것을 아는 이 물건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움직인 적이 없습니다. 이 물건은 또렷이 압니다.
그러므로 이 물건은 당신이 일부러 힘쓸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이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은 자신이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자연스레 압니다. 분명히 이해하였지요? 적어도 한 두 사람은 분명히 이해하셨지요? 만약 여기 모든 분들이 분명히 이해하였다면 대단한 일입니다.
우리는 자기에게 생각이 있고 감각이 있음을 아는데, 이것이 지성이며 그것은 움직인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잠을 자고 깨어났을 때 첫 번째가 이 물건인데, 그것을 ‘잠에서 깨어났다’라고 부릅니다. 아주 빠르게 두 번째 물건인 생각이 옵니다. 그렇지요?
맞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당신은 그것을 꽉 움켜쥐고 있으십시오.
자기의 생각은 왜 그렇게 많을까요? 이것을 망상이라고 부르고 부상(浮想)이라 해도 좋습니다. 우리가 아는 이 망상은 3단계로 나눌 수 있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입니다. 과거는 사라져버렸으며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현재라고 말하면 현재는 이미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고요해졌을 때 망상이 많은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그 지성이 망상을 바라보았으면 곧 이것을 꽉 움켜쥐십시오. 앞생각은 이미 지나갔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현재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세 토막으로 나누어 항상 이렇게 반성 체험하면서 시간이 오래가다보면 당신은 공령(空靈)해질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이 공령함을 꽉 움켜쥐고, 만약 다리를 틀고 정좌한 채 오래 꽉 움켜쥐고 있을수록 좋습니다. 이것을 오래 꽉 움켜쥐고 난 뒤 당신의 몸과 마음, 뇌의 힘, 체력 등등은 모두 변화하게 됩니다. (남회근과 피터 세인지 ― 선과 생명과 인지에 관한 대화)
2. 남선생님에게서 관심(觀心)을 배운다
위에서 말한 법문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지성을 이해함으로써 진정한 실제 수행의 길을 걸어갈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만약 아직도 찾아내지 못했다면 관심으로부터 착수하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그렇게 하면 빨리 지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물론 지성을 찾아낸 사람은 수행이 이제 막 시작한 것이니 더욱 잘 마음을 관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공부가 진보향상하기 어려우며 부지(不知)와도 그리 큰 구별이 없습니다. 남선생님이 말하는 관심의 요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여러분이 찾을 수 없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모두 원만히 비추는 청정한 각상(覺相)에 의지하여[皆依圓照清淨覺相]”, 이는 법을 전해 준 것입니다. 그리고 수행의 방법도 여러분들에게 알려드렸습니다. 어느 때나 원만히 관조(觀照)해야 하는데, 무엇을 비추어 볼까요? 자기의 마음이 일어나고 생각이 움직이는 것[起心動念]을 돌이켜 비추어 보아, 자기의 생각염두(思想念頭)가 어떻게 오고 가는지를 또렷하게 알아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원만히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치우쳐 비추어 보는 것이 아닙니다. 정좌할 때에는 관조가 아주 또렷하다가도 자리에서 일어나면 곧 어지럽고 흐릿해집니다. 그렇다면 원만히 비추어 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바쁘고 어지러운 가운데도 언제 어디서나 자기의 염두를 관조해야 합니다.
염두를 관조하라 함은 결코 당신더러 생각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아이구, 내가 왜 또 생각했지?” 하면서 마치 생각[想]이 당신하고 원수나 진 듯이 하는데, 염두(念頭)가 오더라도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람의 생각 염두는 머무르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믿지 못하겠다면 여러분 머무르게 해 보십시오. 머무르게 할 수 있습니까? 사람의 생각 망념은 머무르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보내려고 해도 보낼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망상은 한사코 생각하고자 합니다. 정말 밉습니다! 그렇지요? 사람의 생각은 그렇게 이상합니다. 주의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무명(無明)입니다. 염불을 예로 들면 아미타불, 아미타불,.... 이렇게 염불해 가다가 도중에, “어? 밖에 비가 오는군! 문을 닫았는지 안 닫았는지 모르겠네? 큰일이네! 망상이 또 왔네. 이래서는 안 돼지! 이래서는 안 돼!”, 이런 식으로 우리들은 하루 종일 후회 망상 속에서 맴돌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망상 무명을 어떻게 청정하게 할 수 있을까요?
그럼 어떤 사람이 고요하게 앉아 움직이지 않고 있다고 합시다. 이렇게 하면 곧 청정함을 원만하게 관조하는 걸까요? 조금도 그렇지 않습니다. 몹시 바쁩니다.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이 대단히 많습니다. “내가 여기 이렇게 오래 앉아 있는데 기(氣)가 왜 아직 발동을 안 하지? 내가 속은 것 아니야? 나는 왜 아직 깨닫지 못했을까? 여래의 큰 법이 설마 이런 것일까?” 이런 식이라면 원만히 비추어 보는 것[圓照]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글자를 하나 바꿔서 원망하면서 비추어 보고 있는 것[怨照]이라고 해야 합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그렇지요?
여러분들이 망상이 온 것을 살펴 알아차렸을[察覺] 때가 바로 청정함입니다. 왜냐하면 망상이 이미 떠나가서 당장에 청정해졌기 때문입니다. 본래 청정하므로, 망상을 비워버리겠다는 생각을 다시 할 필요가 없습니다. 망상은 비우지 않아도 스스로 비워집니다. 이처럼 일념으로 청정히 해가고 원만히 관조해 가면서, 서서히 닦아 가면 무명을 영원히 끊고 성불할 수 있습니다[永斷無明, 方成佛道]. (원각경 강의)
(2) “선남자여, 비춤이 있고 감각 지각이 있음을 모두 장애라 한다. 그러므로 보살은 항상 깨어있으면서 어떤 경계에도 머물지 아니하며, 비추는 자와 비추어지는 것이 동시에 적멸하느니라[善男子, 有照有覺, 俱名障礙, 是故菩薩常覺不住, 照與照者, 同時寂滅].” 이 단락은 수행에서의 공부 방법과 경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조(照)’와 ‘각(覺)’이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조(照)와 각은 수행공부에서의 심리상태입니다. 각(覺)에는 감각과 지각이 포함됩니다. 신체상의 기맥변화를 예로 들면, 기(氣)가 어느 곳에 이르렀고, 어떻게 통했다! 고 느끼는 것은 감각상태입니다. 이러한 감각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틀리다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이 이러한 감각에 끌려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감각들이 있다고 해서 대단해진 걸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이런 것은 생멸법으로 일어남이 있으면 사라짐이 있습니다. 변화하기 마련입니다. 두 번째는 지각상태입니다. 정좌하다 보면 청정한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마치 공(空)해져버린 듯 하여 편안하고 자재한 느낌이 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러한 고요함ㆍ공령함ㆍ편안함의 지각상태는 어느 종교에나 다 있습니다. 예를 들면 기독교인이 세례를 받고 교회당 안에서 꿇어앉아 아주 정성스럽게 기도를 하면 성령이 강림함을 느끼게 됩니다. 이 역시 중국인들이 말하는 ‘지성스러우면 영험하다[誠則靈]’의 이치로서 우리들의 각조(覺照)가 작용을 일으킨 겁니다.
그럼 ‘조(照)’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공부하면서 관조(觀照)한다고 말합니다. 조(照) 자 위에 관(觀) 자를 하나 더한 것인데, 관(觀)과 조(照)는 같은 것일까요 다른 것일까요? 반야심경은 첫 부분에서 “관자재보살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觀自在菩薩行深般若波羅蜜多時, 照見五蘊皆空)”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관’은 관이고 ‘조’는 조로서 양자는 다릅니다. 관이란 눈으로써 보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정좌할 때 자기의 생각이 자꾸 일어났다 사라지고 오고 가는지를 아는 것을 ‘관’이라고 합니다. 염불할 때에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해 가다가 문득 “에이고! 내일 아침 여덟 시에 일어나야 하는데 시계바늘을 맞추어 놓는 걸 잊어버렸군. 아이고! 이거 또 잘못되었군. 내가 어떻게 염불하다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지. 아미타불, 아미타불... 하지만 생각 좀 해도 상관이 없지. 아이고! 또 잘못했군.” 이것이 관(觀)의 경계입니다. 공부가 조(照)의 단계에 이르면 관할 필요가 없습니다. 마치 태양이 떠오른 것과 같습니다. 전체가 잡된 생각이 없고 망념이 없습니다. 송나라 명나라 이학가들은 이를 ‘청명재궁(清明在躬)’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조(照)의 경계입니다. 관(觀)과 조(照)의 이치는 유식학인 『유가사지론』에서는 ‘심(尋)’과 ‘사(伺)’라고 합니다. 관(觀)이라는 글자에는 찾는다는[尋找] 의미가 있습니다. 사(伺)는 찾을 필요는 없고 기다려보고 있으며 비추어보고 있는 것입니다.
“유조유각(有照有覺)”, 정좌하고 염불할 때 한편으로는 염불하면서 한편으로는 마음속으로 염두를 살펴보고 있는 것입니다. 즉, 잡념이 있는지 없는지를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초보적인 각조일 뿐입니다. 공부가 참으로 각조의 경계에 도달하면 꿈속에서도 각조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수행인은 꿈속에서의 마음이 일어나고 생각이 움직임도 평소 깨어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또렷이 알 뿐만 아니라 주재할 수 있습니다. 낮에는 어지러운 생각을 감히 못하고 나쁜 일을 감히 생각 못하다가도 꿈속에 이르면 모두 나타나게 되어 주재할 수 없다면, 이러한 수행은 소용이 없습니다. 설사 꿈속에서 주재할 수 있다 할지라도 한 걸음 더 나아가 꿈이 없는 경계에 이르러야 합니다. 수면 중에서도 심성의 근본을 알 수 있어야 비로소 ‘유조유각’의 경계가 됩니다. 이러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보살 경계의 단지 초보가 될 뿐, 원각 자성에서 보면 ‘유조유각’은 역시 장애가 됩니다. “그러므로 보살은 항상 깨어있으면서 어떤 경계에도 머물지 아니하며, 비추는 자와 비추어지는 것이 동시에 적멸하느니라[是故菩薩常覺不住, 照與照者, 同時寂滅]”, 그러므로 진정한 등지(登地) 이상의 보살은 ‘상각불주(常覺不住)’, ‘상각’은 영원히 맑게 깨어있는 겁니다. 이 각(覺)이 바로 보리요 보리는 바로 깨달음입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한 개의 각이 영원히 있어서 감히 움직이기조차도 못하고, 움직이자마자 깨닫지 못한다면, 그것은 머무름이 있는 것이지 머무르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보살의 경계는 영원히 맑게 깨어있으면서 머무르지 않습니다. 각의 경계에도 머무르지 않고 한 개의 각조의 경계도 안고 있지 않습니다. 각조의 경계가 하나 있다면 머무는 바가 있는 것입니다. 선종의 육조는 『금강경』에 나오는 “머무른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야 한다[應無所住而生其心]”는 한 구절에 도를 깨달았습니다. ‘응무소주이생기심’은 수행의 한 방법입니다. 만약 원각 경계의 입장에서 보면 “본무소주이생기심(本無所住而生其心)”으로 고쳐야 마땅합니다. 도를 깨닫고 나면 본래 머무는 바가 없습니다. 이 마음은 본래에 머무는 바가 없어서 사물이 오면 응하고 사물이 지나가면 붙들지 않습니다. ‘조여조자(照與照者)’에서 첫 번째 ‘조’자는 능조(能照)이고 그 다음 ‘조’자는 소조(所照)입니다. 예컨대 망념은 소조입니다. 능조와 소조가 동시에 적멸하고 동시에 공(空)해져야 도를 얻은 경계가 됩니다. (원각경강의)
(3) 심(尋)과 사(伺)의 관계
대승불학에서는 지정(止定)의 수양에 있어서 어떤 원칙을 내세울까요? 현장 법사가 번역한 불학에는 유각유관(有覺有觀)이라는 용어 대신에 더욱 정교하고 세밀하게 표현한 유심유사(有尋有伺)라는 말이 있습니다. 심(尋)은 예를 들면 재빠른 고양이가 쥐를 잡으려고 찾고 있는 것입니다. 사(伺)는 황룡혜남(黃龍惠南) 선사가 말한 것처럼 마치 재빠른 고양이가 쥐를 잡으려고, 눈동자는 조금도 깜박거리지 않고, 네 발은 땅에 버티고 섰고, 온 털은 한 방향을 향하였고, 머리와 꼬리는 곧게 세우고 기회를 엿보다가 재빨리 움직이는 것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심(尋)은 손전등을 들고 이리저리 찾는 것이고 사(伺)는 모든 불빛이 일제히 하나의 사물에 비춰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첫 단계에서는 유심유사의 심리상태를 이용하여 마음의 맑고 고요한 경지를 붙잡아야 합니다. 점차 능숙해지면 두 번째 단계인 무심유사(無尋有伺)의 심경에 도달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도달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무심무사(無尋無伺)의 단계에 이르면 의식이 맑고 밝아지며 마음이 거울 같은 경지에 도달하게 됩니다. (대학강의)
3. 항상 외우라고 남선생님이 일깨워 주는 두 개의 중요한 진언
(1) 첫 번째 진언
선남자여, 망념이 허깨비임을 알면 곧 망념이 떠나니 다른 방편을 쓰지 아니하며, 허깨비를 떠나면 곧 여래의 각성이니 점차도 없느니라.
善男子,知幻即離, 不作方便,離幻即覺,亦無漸次.
유의해야 합니다! 이 단락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는 선종의 심인(心印)이자, 밀종의 대수인(大手印)으로서 보현여래(普賢如來)ㆍ금강살타(金剛薩埵) 심법(心法)이기도 합니다.
우리 이제 눈을 감고 체험해 봅시다. 모든 생각과 감각은 가짜입니다. 끊임없이 오고가는 이런 망념들은 모두 가짜입니다. 여러분은 마음속에 망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發覺]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발견했을 때에 망념은 이미 사라져버렸습니다. “망념이 허깨비임을 알면 곧 망념이 떠나니[知幻即離]”, 망념이 스스로 가버렸으니 여러분이 다시 망념을 없애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시 무슨 방법을 써서 그것을 없애려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방편을 쓰지 아니하며[不作方便]”, 다른 방법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이른바 염불ㆍ진언은 모두 더 더하는 방편입니다. 염불도 생멸법이자 몽환이요 허공꽃이므로, 이런 것들을 전혀 쓰지 않는다는 겁니다.
“허깨비를 떠나면 곧 여래의 각성이니[離幻即覺]”, 망념 환상(幻想)을 떠나서 지금 청정해졌음을 ‘아는 것’ 이것이 여래각성(如來覺性)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지금 말을 하고 있는데, 여러분들은 눈을 감고 들어보십시오. 귀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 소리는 허깨비입니다. 이미 사라졌습니다. 다시 무슨 방법을 써서 소리를 없앨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자연히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러나 소리임을 아는 앎의 성품[知性]은 공하지 않고 본래에 있습니다. “점차도 없느니라[亦無漸次]”, 여러분이 수행을 하든 하지 않든 그것은 여전히 똑같이 듣습니다. 이 물건에는 무슨 초지, 2지, 3지... 10지의 보살계위(菩薩階位)가 없습니다. 또 무슨 초과, 2과, 3과, 4과의 성문사과(聲聞四果)가 없습니다. 본래에 일체 중생의 자성이 부처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요, 이것이 바로 정토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제게 달려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이 도리는 제가 이해합니다, 하지만 천천히 닦아가야겠습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는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 말이 맞아요. 완전히 맞습니다. 천천히 닦아가세요. 하늘 가 바다 끝까지 닦아가세요. 언젠가는 마침내 닦아서 도달할 테니까요!” 그 사람은 기백이 없기 때문입니다. 도달했다고 하면 도달한 것이지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신심이 있으면 곧 도달합니다. 무엇을 믿는 것일까요? 나인 이것은 청정한 원각이요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임을 믿는 겁니다. 그래서 석가모니불은 태어나자마자 곧 불법을 다 말해버린 것입니다. (원각경 강의)
(2) 이어서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공부방법일 뿐만 아니라 성불하는 데 가장 좋고 가장 빠른 방법입니다.
어느 때나 마음에서 망념을 일으키지 말며, 모든 망심에 대하여 쉬어 없애려 하지도 말며, 망상 경계에 머물러 있더라도 분별하여 분명하게 알려함을 더하지도 말며, 분별하여 분명히 알려함이 없을 때에 진실을 가리지도 말지니라.
居一切時, 不起妄念; 於諸妄心亦不息滅; 住妄想境不加了知; 於無了知, 不辨真實.
이 단락은 대승도의 평시 수행 법문입니다. 이 법문을 수행하기에 앞서 먼저 마음이 곧 부처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일반인들은 부처님을 배우고 도를 닦으면서 모두 한 물건을 희구하여 마음 밖으로 찾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가장 큰 병폐를 범하는데, 바로 이 마음이 부처임을 감히 승인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여기에 중생의 큰 병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불보살의 경계를, 대단히 높아 도달할 수 없고 깊어서 헤아릴 수 없는 것으로 환상(幻想)합니다. 이른바 ‘높이 성인의 경계로 미루어버립니다[高推聖境].’ 사람은 환상이나 추억의 지배를 받습니다. 눈앞의 현실을 직면하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평등한 마음이 부처님이라고 평범하게 인정할 수 있다면 구태여 밖으로 바삐 서둘러 구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 도리를 인식한다면 “어느 때나 마음에서 망념을 일으키지 말며[居一切時, 不起妄念]”일 수 있습니다. 이 마음이 어느 때나 허망한 환상을 일으키지 않고 평정한 상태면 됩니다. 정말로 이렇게 할 수 있다면 이게 바로 보살로서, 무슨 주문을 외운다든지 관상을 한다든지 부처님께 예배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때에는 창설(蒼雪) 대사가 말한 바와 같습니다.
남대사(南臺寺)에서 향 피우고 정좌하고 있노라니
종일 정신이 집중되어 온갖 생각 사라지네
마음을 멈추고 망상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생각하고 헤아릴 일이 없기 때문이라네
무엇이 부처일까요? 마음이 곧 부처입니다[心即是佛]. 무엇이 도일까요? 평상심이 곧 도입니다[平常心即是道]. 어떻게 평상(平常)해질까요? 평상은 바로 어떤 방법도 더하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을 멈추고 망상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생각하고 헤아릴 일이 없기 때문이라네’, 대단히 평범한데 이것이 진정한 관심(觀心)법문이요 바른 수행 길입니다. 이 역시 선(禪)이요 여래선이 표방하는 법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할 수 없는데요. 역시 망상이 있는데 어떻게 해요?” 한다면 “모든 망심에 대하여 쉬어 없애려 하지도 말며[於諸妄心亦不息滅]”, 망상이 오거든 오도록 내버려두면 됩니다. 망상은 스스로 떠나갑니다. 서둘러서 빗자루 들고 그를 쫓을 필요가 없습니다. 망상은 저 홀로 왔다 저 홀로 갑니다. 제가 『능엄경 대의 풀이[楞嚴大義今釋]』에서 공부하는 방법을 보여주는 열일곱 수의 시를 썼는데 그 중의 한 수는 이렇습니다.
가을바람에 낙엽들 어지럽게 쌓이기에
다 쓸어내면 또 오고 그러기를 천백 번
한번 웃고 그만두고 한가한 곳에 앉아
내버려두니 땅에 떨어져 저절로 재가 되네
우리들의 망념은 가을 낙엽과 같아서 이리저리 날리고 떨어집니다. 그것을 비우려고 하거나 쓸려고 하면 곧 어긋나 버립니다. 당신이 첫 번째의 망념을 없애버리면 두 번째의 망념이 또 나타납니다. 앞전의 나뭇잎을 깨끗이 쓸고 나면 새로운 나뭇잎이 또 떨어집니다. 이렇게 하다가는 하루 종일 바빠서 쉴 수가 없습니다. ‘한번 웃고 그만두고 한가한 곳에 앉아’, 내가 쓸지 않고 상관하지 않기로 한 것만 못합니다. ‘내버려두니 땅에 떨어져 저절로 재가 되네’, 망상은 비우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자연히 비워집니다. 당나라 시대의 시인인 두보(杜甫)의 두 구절의 시가 있는데, 이를 가지고 망상의 자성이 공(空)함을 형용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오고 가는 것은 들보 위의 제비들이요
서로 친하고 가까운 것은 물속의 갈매기들이네
自去自來樑上燕 相親相近水中鷗
부처님은 우리들에게 ‘모든 망심에 대하여 쉬어 없애려 하지도 말며’라고 제2단계를 일러주셨는데 무슨 이치일까요? 여러분들이 고요하게 앉아있을 때에 망상이 오면 자기가 다 압니다. 망상임을 알았을 때에는 이미 망상은 사라져버리고 없습니다. 그렇지만 망상임을 알 수 있는 그 ‘앎’은 움직인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어느 때나 망념을 일으키지 않습니다[居一切時不起妄念].
이어서 부처님은 우리들에게 제3단계를 일러주십니다. “망상 경계에 머물러 있더라도 분별하여 분명하게 알려함을 더하지도 말며[住妄想境不加了知]”, 부처님을 배우는 우리들은 흔히 이렇게 생각합니다. “망상은 옳지 않다. 망상이 오면 내가 어쨌든 지켜봐야지. 망상이 없는 것이야말로 도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우리가 틀렸다고 말씀하십니다. 예를 들어 제가 지금 말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망상 아닐까요? 망상입니다. 망상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망상하려면 망상하십시오. ‘불가료지(不加了知)’, 망상이 올 때에는, 이것은 무명이야! 인연이야! 업력이야! 하면서 연구하지 말기 바랍니다.
제4단계는 “분별하여 분명히 알려함이 없을 때에 진실을 가리지도 말지니라[於無了知, 不辯真實]”입니다. 당신이 멍하게 그렇게 앉아 있으면서, 들리는 것은 듣고 보이는 것은 보되, 아주 평안하고 자재하고 마음 편안히 아무 생각 없이 머물러 있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됩니다. “이것은 청정한 경계가 아닐까? 이것은 공이 아닐까? 이렇게 하는 것이 맞을까? 그렇게 간단해? 그럴 리가 없는데?” 이렇게 가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자기가 또 자기를 속이게 됩니다.
무엇이 부처일까요? 마음이 바로 부처입니다. 무엇이 도일까요? 평상심이 바로 도입니다. 이렇게 간단합니다. 일체 중생은 어째서 알 수 없을까요? 평상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대단한 사람은 틀림없이 아주 평범한 사람입니다. 진정한 평범함이야말로 진정한 위대함입니다. 일반인들이 부처님을 배우고 도를 닦아도 왜 성취할 수 없을까요? 평상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보세요, 부처님을 배우는 사람은 대단히 바쁩니다! 여기 와서는 부처님에게 절하고, 저기 가서는 경전강의 듣고, 또 공양 올리고, 또 절하고, 또 방생하고, 또 헌납하고, 바쁜 나머지 자기 집안사람들도 돌보지 않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없는 게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너무 바빴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평상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원각경강의)
4. 지견을 깨뜨려 없애고 지성을 초월해야 한다
지성을 인식하고 난 뒤에야 수행이 비로소 걸음을 떼기 시작하며, 그에 따라서 오는 것이 이 지성을 어떻게 초월할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선생님은 『선과 생명의 인지 강의』에서 이렇게 가리킵니다. “지성(知性)의 이 ‘지(知)’는 최후의 궁극이 아닙니다! ......그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아는 자리는,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는데, 그것은 반야에 속하며 아주 높은 경계입니다. 『금강경 강의』에서 견(見)과 지(知)를 말할 때 『능엄경』의 경전 어구를 인용하여 멋진 법문을 하였습니다.
(1) 『능엄경』에는 도를 보는[見道] 견을 말하고 있는데 다음의 네 마디 말이 있습니다. “견견지시(見見之時), 견비시견(見非是見). 견유리견(見猶離見), 견불능급(見不能及).”
“견견지시(見見之時)”에서 첫 번째 견(見)은 우리가 눈으로 본다는 견입니다. 마음과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두 번째의 견(見)은 도를 본다는 견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첫 번째 견은 소견(所見)의 견이요, 두 번째 견은 능견(能見)의 견입니다. 우리가 눈으로 사물을 보는 것이 소견인데, 이것은 현상을 보는 것입니다. 소견을 돌이키면 자기가 도를 볼 수 있습니다. 명심견성(明心見性)에서의 견은 소견의 견이 아니므로 눈으로 하나의 현상을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혹자는 하나의 경계를 보기도 하는데, 이것은 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견견지시(見見之時)”, 도를 본다는 견인, 명심견성의 견을 자기가 돌이켜 볼 때, “견비시견(見非是見)”, 이 능견인, 도를 본다는 견은 눈으로 사물을 본다는 소견의 견이 아닙니다. 그래서 “견비시견”이라 말합니다. 그럼 도를 볼 수 있는 견은 설마 또 하나의 경계가 있을까요? “견유리견(見猶離見)”,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 들을 수 없는, 일체가 다 공한 뒤에 나는 도를 보았다고 말하고 하나의 견이 존재한다면 여전히 소견으로서, 이 견 역시 떨쳐버려야 합니다. “견유리견”이니 떨쳐버려야 하며, 공(空) 또한 비워야 합니다. “견불능급(見不能及)”, 진정한 명심견성의 견은 눈으로 보는 견이 아니요 마음의 눈으로 미칠 수 있는 능견의 견이 아닙니다. 한 무더기 견을 말했는데 얼마나 이해하기 어렵습니까!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명심견성의 견은, “산을 보니 산이 아니요, 물을 보니 물이 아니다. 청개구리가 물에 풍덩!하고 뛰어든다...는 그런 경지가 절대 아닙니다. 일체를 보되 보는 바가 없고. 일체의 산하대지와 우주만유를 모두 허공에 분쇄하고 대지도 가라앉혀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선종을 담론할 수 있고, 명심견성에 약간의 그림자가 있게 된 겁니다. 기억하십시오! 그 정도에 도달했더라도 약간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2) 『능엄경』에는 또 매우 중요한 몇 마디 말이 있습니다. “지견입지(知見立知), 즉무명본(卽無明本), 지견무견(知見無見), 사즉열반(斯卽涅槃).” 지(知)와 견(見)은 뒷날 불교의 한 전문 용어가 되었습니다. 지(知)란 아는 것입니다. 불경의 이치를 모두 알았다고 할 때의 그 지(知)입니다. 견(見)도 하나의 현상이나 경계를 본 것으로, 바로 지견(知見)입니다. 당신은 이치를 이해하고서 수행하고 정좌해야 합니다. 정좌하고 있으면 일체가 다 공합니다. 그렇지만 아직 지성이 있어서 자기가 청정한 상태로 앉아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의 청정함이 존재한다면 옳지 않습니다. “지견입지(知見立知), 즉무명본(卽無明本)”, 바로 무명의 근본이 됩니다. 하나의 청정함이 존재한다면 그 속에는 청정하지 않는 힘이 하나 간직되어 있는데, 바로 번뇌의 힘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지견입지, 즉무명본”입니다. “지견무견(知見無見)”해야 최후에는 공(空)을 보고, “사즉열반(斯卽涅槃)”, 견의 가장자리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3) 지(知)가 곧 무명의 근본이다
이전에 여러 대법사들은 경전을 보면서 선종의 노선을 걸어가 뒷날 도를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선을 배운다고 해서 반드시 정좌하고 참선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꼭 정좌하고 공안을 참구하고 화두를 참구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송나라 때 온주(溫州) 서록사(瑞鹿寺)에 우안(遇安) 선사라는 분이 있었는데, 그는 날마다 불경을 보면서 염불을 했습니다. 그는 위에서 말한 『능엄경』의 그 구절을 보게 되었는데, 홀연히 어떤 영감이 떠올라서 원래의 구절인 “지견입지(知見立知), 즉무명본(卽無明本), 지견무견(知見無見), 사즉열반(斯卽涅槃).”에 대해 구두점을 다르게 찍어 “지견립(知見立), 지즉무명본(知卽無明本), 지견무(知見無), 견사즉열반(見斯卽涅槃).”이라 해 놓고는 자신은 이로 인해 대철대오 했습니다. 뒷날 그는 자칭하기를 ‘파능엄(破楞嚴)’이라 했습니다. 구두점을 다르게 찍어 새롭게 읽고 나서 스스로 홀연히 깨달음이 열려서 대철대오하고 명심견성한 것입니다. “지견립(知見立)”, 지(知)가 있고 견(見)이 있습니다. 청정함이 하나 있고 각성(覺性)이 하나 있다면, “지즉무명본(知卽無明本)”, 이 지(知)는 그 자체가 바로 무명의 근본입니다. 바로 번뇌입니다. “지견무(知見無)”, 일체가 다 공합니다. 이치도 공하고, 생각도 공하며, 공도 공합니다. “견사즉열반(見斯卽涅槃)”, 이것을 보는 것이 바로 오도(悟道)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도를 깨달았는데, 스스로 『능엄경』의 구절을 쪼개서 이해하여 들어간 겁니다.
(4)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매일 정좌를 하기에, 그에게 어떠냐고 물어보면 대답합니다. “좋습니다! 아주 청정합니다.” 상(相)에 집착한 것입니다! 청정하다는 상에 집착하고 있습니다. 상은 도가 아니며 도는 상에 있지 않습니다. “지견립(知見立), 지즉무명본(知卽無明本), 지견무(知見無), 견사즉열반(見斯卽涅槃).” 당신은 하나의 청정함이 도라고 세운다면, 게다가 등에서는 독맥이 통하고, 앞에서는 임맥이 통해서 수도꼭지를 가져다 틀어 물을 대 넣듯이 모두 통했다고 내세운다면, 그것은 도를 이룬 것이 아닙니다. 모두 상에 집착한 것입니다. 일단 상에 집착하여 지견이 세워지면, 지(知)는 곧 무명의 근본입니다. 지견이 없어야 이것을 보는 것이 곧 열반입니다.
소결
1. “자기의 마음을 모르고 법을 배우면 이익이 없다(不識自心, 學法無益)”, 이것은 오조가 육조에게 한 가르침입니다. 이 말은 대단히 엄중합니다. 지성(知性)을 인식하기 전에는 모두 함부로 수련하는 것이어서 도무지 이익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남선생님이 그렇게 자비로워 그 번거로움을 싫어하지 않고 지성에 대하여 다각도 다층면의 법문을 진행한 목적은 우리들로 하여금 길을 에돌아가는 일이 적고 스스로 사서 고생하는 일이 적도록 하는 데 있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 관건의 문제를 대단히 중시하지 않으면 안 되며, 아울러 지성심으로 남선생님의 법문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남선생님의 이러한 시원시원한 법문이 없었다면 우리는 어둠속에서 얼마나 오래 더듬어 찾아야 할지 모릅니다.
2. 이미 부처님을 배우고 있거나 지금 배우고 있거나 장래에 배울 친구들은 절대 기억하십시오. 반드시 갖은 방법을 생각해내어 먼저 지성을 찾아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설사 채식하고 계율을 지키며, 염불하거나, 진언을 수지하거나, 경전을 읽거나, 방생 등을 하더라도 수행은 여전히 바른 길에 들어서지 못한 것입니다. 오직 착실하게 염불하십시오. 그런데 오늘날 착실하게 염불할 수 있는 사람도 이미 봉새의 털이나 기린의 뿔처럼 드뭅니다.
3. 불법의 수증강요(修證綱要)는 자기 마음을 인식한 뒤에 관심(觀心), 지(止), 관(觀)과 선나(禪那) 등을 포함한 유효한 방법을 채용하여 이장(理障)과 사장(事障) 이 두 가지 장애를 끊어 없애거나 항복시키면서 진정으로 대철대오의 길로 들어 걸어가는 것입니다. 이 강요를 위반한다면 대부분 맹목적인 수행이 될 것입니다. 남선생님은 말하기를 언제나 마음을 관찰하는 사람은 성취하지 못할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지성을 잘 인식하고 마음을 잘 관찰해야 합니다.
4. 남선생님이 관심에 대하여 한 법문은 대단히 많습니다. 『반야정관략강』ㆍ『여하수증불법』과 『정혜초수』 등등이 있으니, 뜻이 있는 분은 참고하고 읽어볼 수 있습니다.
5. 인지한 뒤에는 중점이 확실히 아는 데에 있으며, 중점은 장상덕 선생님 말씀처럼 세세생생 자신을 중생에게 바치고 어떤 조건도 없이 중생을 위하여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구두선으로 변하기 쉽습니다. 수행은 조금도 없으면서 허풍은 하늘만큼 쳐서 남도 자기도 잘못되게 합니다.
6. 인지의 최고 경계는 ‘앎이 없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3) 인지와 인지과학에 관한 법문
남선생님은 이미 백세가 가까워진 노인이지만 사유의 민첩한 정도, 시대와 함께 나아감, 그리고 새로운 지식의 흡수 능력은 정말 젊은이보다도 좋습니다. 정말 우리들로 하여금 부끄러워 얼굴에 땀이 나게 합니다. 서양의 생명과학과 인지과학에 대한 연구는 이미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는데, 그에 대해 우리들은 모두 아직 잘 모르고 있지만 남선생님은 그 모두를 대단히 잘 알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장 앞에서 걸어가고 있으면서 생명과학과 인지과학에 대하여 많은 구체적인 전망 의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말 사람들이 감복하고 찬탄해 마지않게 됩니다. 남선생님의 이 방면에 대한 법문은 주로 근년에 출판된 『선여생명적인지초강(禪與生命的認知初講: 한국어판 선과 생명의 인지 강의)』, 그리고 『남회근강연록(南懷瑾講演錄)』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1. 이번의 제목이 무엇인지 다들 기억하십니까? ‘선과 생명과학의 인지[禪與生命科學的認知]’입니다. 이 제목에는 세 가지 큰 주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무엇이 선이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한번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많은 분들이 대 박사님이고 대 교수님인데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둘째는 무엇이 생명과학이냐는 것입니다. 오늘날 생명과학이란 말이 매우 유행하고 있습니다. 셋째는 새로 일어난 인지과학(認知科學)인데, 무엇이 인지(認知)일까요? 이상 세 가지 큰 주제는 백여 만자의 책을 쓸 수 있습니다. 본래는 이것을 얘기하려고 했는데 시간이 모자라기 때문에 한 단락 한 단락씩 나눠서 얘기를 하겠습니다.
어제 저녁에 무엇이 불법인지를 말했습니다. 불법은 대 과학이요 대 철학입니다. 종교가 아닙니다. 종교가 아니면서도 또 종교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이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을 위하여 세상에 출현하여 설했던 대소승 불법이 그 방대하기가 아득한 바다와 같더라도 선과 생명의 인지 문제를 강해하는데 지나지 않습니다. 다시 귀납하면 바로 전 인류가 추구하고자하는 우주기원의 문제입니다. 도대체 인류생명의 기원은 유물일까요 유심일까요? 그런데 오늘날의 과학은 우주세계까지 발전했습니다. 특히 아인슈타인 이후에 과학자들은 양자역학(量子力學)이라는 문제를 말합니다. 나노(nano) 과학기술과 정보의 발전, 인문적 관리의 발전, 컴퓨터 인터넷의 발전 같은 것들은 모두 양자(量子)의 문제로부터 온 겁니다. 물론 이면에는 또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사실은 불학 속에 다 있는데 단지 여러분이 꺼내지 못할 뿐입니다. 만약 여러분 대 박사님들, 대 교수님들이 배워서 할 줄 알게 되어 이 문제를 과학과 결합시켜 내서, 여러분이 현직에서 퇴직한 뒤에 이 새로운 과학기술 방면으로 발전시켜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류에 공헌하는 것입니다! (선과 생명의 인지 초강)
2. 오늘날 미국에서 유행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선(禪)이 아닙니다. 도가와 밀종입니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 것이 두 가지의 새로운 과학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입니다. 하나는 인지(認知)과학이라고 하는데, 유식학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정신생명이 이해되지 않고, 태어남은 어디로부터 오며 죽음은 어디로 가는지 그리고 우주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과학자들이 추구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생명과학 연구입니다. 미국은 서양문화 영향을 깊게 받았습니다. 기독교는 원래 전생과 후세를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영화나 소설도 나왔고 인과가 있고 전생과 내생이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애를 쓰고 추적해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을 생명과학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물론 물리작용에서 온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말하기를 이곳 묘항(廟港)이 대략 완성된 것은 100%의 공정에서 3분의 2밖에 완성된 것이나 다름없다고 합니다. 진정한 완성은 아직 멀었습니다. 지금은 기숙사도 없고 연구실이나 사무실 등 아무것도 없습니다. 진정으로 연구하려면 최신의 뇌 부위 관련 의료기기 등도 사야합니다. 그리고 의사와 결합시켜서 과학적으로 연구해야 합니다. 날마다 여기서 정좌 좀 하고 이런 옛것들을 듣는 것이 아니라, 오래된 옛 문화를 현대의 것으로 변화시켜 인류세계로 하여금 새로운 문화 발전 과정 속으로 걸어 들어가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이것이 제가 이상(理想)으로 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 막 첫걸음을 떼었습니다. 두 번째 걸음은 어떻게 밟아나갈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그 어려움이 어디에 있을까요? 첫 번째가 인재이고, 두 번째가 돈입니다. 어떤 사업을 하던 인재가 돈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엄중한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인류의 문화는 21세기 이후에 도대체 어느 길을 향하여 걸어가야 할까요? 지금은 중국이 아닙니다! 전체 인류의 사상문화와 정신생명은 모두 공백 상태입니다. 제가 근심하는 심정은 이 방면에 있습니다. 한 사람의 진정한 발심이 필요한데, 한 개인을 위해서거나 어떤 점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불학입장에서 말하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입니다. (선과 생명의 인지 초강)
3. 오늘날 과학은 필연적으로 철학과 만나야 할 때에 도달하였습니다. 이것은 전 인류문화의 추세라는 사실을 저는 지금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과학은 원래 철학과 나누어졌습니다. 그러나 과학의 최후의 결론은 철학에 의지해야 합니다.
지금 미국에서 가장 유행하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새로 일어난 인지과학입니다. 인지과학은 어떤 것일까요? 중요합니다. 이 과학의 발전은 빠르게 전 세계에 유행할 것입니다. 인지과학은 새로 일어난 것으로, 진정으로 과학을 배우는 고위층은 알 것입니다. 인지과학이 발전해 가면서 두 가지 것이 대두하였습니다. 하나는 인도문화에서 기원된 티베트 밀종이요, 하나는 중국의 도가입니다. 이 두 개의 문화가 머리를 들었습니다.
인지과학이란 무엇일까요? 제가 여러분들에게 한번 소개하겠습니다. 먼저 철학이란 무엇인지 이해해야 합니다. 구(舊) 철학에서 첫 번째 중점은 본체론, 두 번째 중점은 인식론, 세 번째 중점은 가치론이었습니다. 이것은 서양문화에 근거하여 여러분들에게 소개한 겁니다. (남회근 강연록)
4. 저는 늘 말하기를, 인류문화가 오늘날까지 발전하였지만 그 나이는 영원히 30세일 뿐 성장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문제들을 몇 천 년 동안 모두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오늘날 과학이 우주를 탐색하면서 기본적으로 여전히 이 문제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새로운 과학이 출현하였는데, 우리들 일부 고위층도 알고서 특별히 이것에 유의하라고 분부합니다. 바로 인지과학이나 생명과학 등등입니다. 인지과학은 무엇을 연구하는 것일까요? 생명은 어떻게 온 것인지 생명과학까지를 포함한 인식론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추세입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뛰어난 인재들인데 여러분들이 기업을 관리하는 것도 개인의 인지문제에 해당합니다. 앞으로 상공업의 발전은 우리 국가와 사회, 심지어는 개인이 어떤 길을 걸어가야 좋을지에 있습니다. 예컨대 다들 부동산업을 말하는데 우리들 여러 명의 학우들은 부동산업을 하고 있지만 저는 반대합니다. 저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왜 부동산업을 합니까? (남회근강연록)
3. 간단한 결어
남선생님의 인지사상은 대단히 깊고 넓으며 미묘하여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필자는 한낱 보통사람으로서 설사 필생의 정력을 다 쏟아 붓더라도 그 대략을 이해할 수 없는데 하물며 그 정묘한 곳까지 깊이 들어간다는 것은 더더욱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본 글은 단지 필자가 단기간에 남선생님에게서 인지를 학습한 하나의 심득보고일 뿐입니다. 만약 남선생님의 인지노선이, 지지(知止)―능지(能知)ㆍ소지(所知)―지성(知性)―요지(了知)―지일개부지(知一個不知)임을 요행히 헤아려 맞추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대단히 영광이며, 나아가 이 때문에 여러분들이 인지에 대하여 중시하게 되고 아울러 여러분의 인지를 위하여 약간 읽어볼 수 있는 편리를 제공했다면 더욱 대단히 기쁜 일입니다.
인지와 서방의 인지과학과의 관계 문제에 관하여 필자는 생각하기를, 서양의 인지과학은 그 기초가 제6의식에 세워져 있으며, 만약 대승의 유식사상이 더해지고 주도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인지과학이 되기는 완전히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승유식학이 만약 일부 스님들ㆍ거사들과 학자들 사이에서만 맴돌고 있다면 인지과학으로 변할 방법이 전혀 없으며, 세상 사람들 모두가 그 이익을 누리게 할 방법이 전혀 없으며, 동서양의 정화 문화의 정합을 위하여 마땅한 공헌을 해야 할 방법도 전혀 없으며, 하나의 큰 시대의 조류를 바꾸는 일도 한 마디 헛된 말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서양의 인지과학과 대승유식사상을 유기적으로 하나로 결합시켜서 현대인들이 듣고 보기 좋아하는 방식으로 널리 보급해야 비로소 진정한 인지과학을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깊게 들어가게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미래시대에 영향을 미치고 세계문화의 대융합, 세계민족의 대단결, 세계인민의 대안락 등을 위하여 획기적인 공헌을 할 수 있습니다! 이 방면에서 남회근 선생님과 장상덕 선생님이 대표적인 유식학 거장이며 자신들의 노력을 통하여 유식신학(唯識新學)의 수증체계를 형성함으로써 유식학의 현대화를 위하여 충분한 기초를 놓았습니다. 이것은 장래 진정한 인지과학의 건립을 위하여 핵심적인 주도 작용을 일으킬 것이며, 미래 시대에 대한 거대한 작용은 더욱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지를 학습하고 인지과학과 유식신학을 수학(修學)의 중점으로 삼아야 마땅합니다.
필자는 이미 불혹(不惑)의 나이를 지났습니다. 예전의 구름을 뛰어넘는 장대한 뜻도 이미 꿈ㆍ허깨비ㆍ물거품ㆍ그림자ㆍ이슬ㆍ번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렇지만 필자가 불법을 수학하는 과정에서 늘 발견하는 사실은, 정묘하고 실용적인 불법이 일반대중들과는 거리가 멀며, 불법을 널리 전파해야 할 장소가 대부분 명승관광지로 변했거나 주로 죽은 자의 영혼을 위하여 봉사하는 장소로 변해버렸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늘 손목을 쥐고 탄식하면서 항상 이런 문제들을 사고하였습니다. 무엇이 진정한 불법인가? 어떻게 진정한 불법을 널리 전파하여 무수한 사람들이 이생에서 이익을 누리게 할 것인가? 어떻게 현대인들이 번뇌를 대치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인가? 남선생님을 통해서 인지와 관심(觀心)을 학습하고, 장상덕 선생님의 법문을 통하며, 2, 3년의 단기간 동안 인지의 실증으로 대번뇌를 항복시켜 쾌락지수가 전면적으로 높아지는 절실한 체험을 통하여 저는 이미 그 해답을 찾아냈습니다. 그래서 필자는 후반생 동안 인지를 더 한 층 깊게 학습하고 실증하는 데 힘쓰며 진보가 있기를 바랄 것입니다. 나아가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함께 남 선생님의 인지와 사상을 지도로 삼고, 장 선생님의 직접적인 지도 아래서, 인지를 중심으로 하고 관심을 수단으로 하며, 유식신학을 지침으로 하며 번뇌의 항복을 목표로 하며, 현대인이 듣고 보기 좋아하는 방식을 진입점으로 하는 학습수증 체계를 한 걸음 한 걸음 수립하기를 희망합니다. 뜻이 있는 사람은 함께 노력하기를 원합니다!
그때는 불법이 장경각에서 나가게 할 것입니다!
그때는 정묘하고 실용적인 불법이 집집마다로 걸어 들어가게 할 것입니다!
그때는 진정한 불법이 세계의 새로운 조류를 이끌어 나아가게 할 것입니다!
장래 세상에 선남자 선여인이 만약 인지를 제일 중요한 일로 여길 수 있고, 정지정념(正知正念)을 시시각각 보호 유지할 수 있으며, 때때로 마음이 광명정대하고 머리가 명석할 수 있으며, 날마다 새롭게 진보할 수 있으며, 즐거움과 경안(輕安)으로부터 고귀함과 장엄함을 향하여 걸어갈 수 있다면, 남 선생님과 장 선생님은 우리들 무리와 함께 또 다른 공간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춤을 추고 노래하고 읊조리거나
꽃을 집어 들자 미소 짓거나 혹은 돌아갈 것입니다!
(남회근 선생 선과 생명의 인지 강의 부록에서 전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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