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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왕건 <제 131회>
줄거리
왕건 일행과 아자개 행렬을 기습한 이흔암 일당은 소탕되고. 이흔암은 자결로써 최후를 맞는다. 아자개는 왕건의 환대 속에 고려로 귀부하게 되고 이 일로 인해 견훤은 충격을 받는다. 강경한 대응을 주장한 백제의 책사 능환과 인륜을 앞세워 능환의 강경책에 반대하는 최승우의 갈등은 점점 불거지고... 한편 대주는 아버지의 귀부에 갈등하다 결국 출가를 감행하고, 대주를 연모해 오던 박술희는 크게 상심한다. 왕건은 핍박받은 백성들과 원혼들을 위무함으로써 철원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송악시대를 개창하고자 팔관회를 열게되는데..
씬 도성 문 주변
지난회와 장면이 연결된다. 도성문쪽은 아수라장이다. 복지겸과 내
군들이 날아드는 화살을 막기에 급급하다. 왕건이 보고 있고, 입전
이 다가온다. 장일이 비틀거리며 지탱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입전 이보게, 장부장. 괜찮으시오?
장일 나는..... 괜찮소. 폐하를 뫼시시오, 폐하를!
입전 알겠소이다.
복지겸 내군들은 무엇 하느냐? 저쪽에 반군들이 있다! 반군을 막아라, 막
아라!
계속 화살이 날아든다. 내군들은 수없이 죽어가고 있다. 장일이 비
틀거리며 그에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 군사들이 시야에 가려진다.
씬 그 일각.
아자개 일행들이 뻥해서 보고 있다. 아자개와 계모, 대주들이 보고
있고, 유금필, 능산, 박술희, 최응들이 무슨 일인가 살피고 있다. 그
러다가 눈치를 챈다.
최응 이흔암이옵니다. 저기를 보시오.
그렇다. 그들은 이흔암이였다. 이미 숲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벌떼
처럼 말을 타고 달려내려온다.
씬 그곳.
이흔암들이 달려나오며 두 패로 갈라진다.
이흔암 나는 왕건에게 갈 것이다! 너희는 저 늙은이의 목을 베어라!
사내1 예, 장군!
사내1과 잔당들이 무리를 반으로 나누어 왕건과 아자개쪽으로 각
기 가고 있다. 보고있던 능산이 소리친다.
능산 이흔암이 반란을 일으킨 모양입니다, 형님. 이리로 오고 있어요.
유금필 술희 아우, 상부 어른을 모시게!
박술희 예, 형님!
그러나 이미 대주는 칼을 빼들었다. 그리고 말고삐를 쥔 채 아자개
의 마차 앞에 서있다. 반군들이 점차 가까워진다. 유금필과 능산이
달려나간다. 그리고 접전이다. 치열한 접전이 이어진다. 대주가 그
렇게 보고 있다. 그들 중 사내1은 유금필과 맞서고 있고, 다른 사
내들은 능산이 맡고 있다. 그 사이로 잔당1이 수하 둘을 이끌고 아
자개를 향해 급속히 돌진해오고 있다.
잔당1 이 늙은이야, 기다렸느니라! 목을 내놓거라!
대주 (보고있다 막아서며) 왠놈들이 내 아버님을 노리느냐!
잔당1 네가 대주라는 처자로구나! 오냐, 네 목도 베어주마!
대주 어서오너라!
그 때쯤 이미 사내1은 유금필의 말에 목숨을 잃은 뒤고, 다른 잔당
들은 능산에 의해 마구 쓰러지고 있다. 유금필이 보다 놀란다.
대주가 접전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몇합가지 않는다. 십여합도 채
아니되어서 잔당1은 목이 땅으로 떨어져 구른다. 아자개와 계모는
기겁을 하며 보고 있다가 안도를 한다. 유금필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미 이곳의 잔당들은 거의 소탕되었다. 유금필은 멀리 도성쪽을
본다. 그쪽은 아직도 소란스럽다.
씬 그곳 도성 앞
이흔암들이 이미 접전중에 있다. 이흔암도 무서운 실력이다. 내군
들이 낙엽처럼 쓰러진다. 왕건은 저만치서 보고 있고, 문무신료들
은 우왕자왕이다. 그러나 이미 패색은 짙었다. 점점 더 내군들의
숫자가 불어나며 이흔암 주변을 에워싼다. 내군들도 희생이 크지만
반군들은 워낙 수적으로 열세였다.
이흔암 왕건의 목을 베어야 한다! 왕건이 저기 있다!
복지겸 네 이놈!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 어찌 폐하를 시해하려 하는고?
이흔암 나는 원수를 갚으려 온 것이다! 어서 오너라, 복지겸!
복지겸 오냐,
그들은 다시 접전을 벌인다. 치열한 접전이다. 어느 사인가 이흔암
주변의 잔당들이 거의 죽어나간다. 이흔암은 당황하기 시작한다.
더군다나 복지겸과 장수장의 협공이다. 그뿐만 아니라 아자개 쪽에
서 김락이 다가오고 있다.
김락 네 이놈 이흔암! 어찌 폐하께 칼을 들 수 있단 말인가?
이흔암 김락이로구나! 어서오너라!
그러나 중과부족이다. 이흔암의 잔당들은 더욱 죽어나가고 몇 안
남았다. 그렇게 이흔암은 세 장수에게 포위되었다. 어쩔줄 모른다.
사태가 위급하자 이흔암은 그대로 왕건쪽을 향해 지쳐 들어간다.
그러다가 드디어는 장수장의 칼을 받는다. 어깨가 베이며 말 위에
서 떨어져 뒹구는 이흔암. 장수들이 왕건을 비로서 보며 어찌할까
영을 기다린다. 왕건은 말이 없다. 그러자 복지겸이 명한다.
복지겸 이 자를 포박하라!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흔암은 스스로 목에 칼을 찌른다. 모두들
흠칫하며 본다. 이흔암이 죽어가며 웃는다.
이흔암 네 이놈 왕건아, 참으로 너를 죽이지 못한 것이 유감이로구나! 원
수를 갚지 못해 억울하다! 억울하다!
이흔암은 그렇게 절명한다. 복지겸이 다시 명한다.
복지겸 시체들을 치우거라! 대오를 갖추어라!
왕건이 낮은 한숨을 쉰다. 뭔가 안타까운 것이다. 한쪽으로 시체들
이 치워지면서 아자개 일행들이 멀리서 오기 시작한다. 왕건이 비
로소 말에서 내리면 장수들도 일제히 말에서 내려선다. 예전에 연
습했던 것처럼 삽시간에 내군들이 정렬해 서고 문무신료들이 자리
를 잡는다. 아자개가 끝없이 늘어선 깃발과 군사들 사이로 마차에
서 내려 걸어오고 있다.
김행선 상부 어른께서 오시오! 모두들 크게 맞으시오!
그러자 군사들이, 충, 충, 충 하며 군호로써 맞기 시작한다. 왕건이
부인들과 함께 중앙으로 걸어가서 오고 있는 아자개를 예로써 맞
는다.
왕건 상부 어른, 어서오시오소서. 우리 고려에 오신 것을 환영하옵니다.
잠시 뜻밖의 소란이 있었사옵니다. 송구하옵니다, 상부 어른.
아자개 어흠, 본래 좋은 일에는 마가 낀다고 하였소이다. 어쨌든 소요가
다 지나간 것 같소이다 그려.
왕건 예, 상부 어른. (부인들에게) 어서 인사 드리시오.
부인들 상부어른, 인사드리옵니다.
왕건 저의 부인들과 문무신료들이옵니다. 모두 공경의 마음으로
상부어른을 모시옵니다.
신료들 (모두) 어서오시오소서, 상부 어른. 이렇게 뵈오니 영광이옵니다.
아자개 (감격이다) 고맙소이다. 고려국의 황제께서 이 늙은이를 이토록 환
대해주시니, 참으로 몸둘 바를 모르겠소이다. 내 내자올시다.
계모 폐하, 우리 내외를 불러주시어 고맙사옵니다.
왕건 제가 두 어른을 부모님처럼 평생 모실 것이옵니다. 편안히 여생을
즐기시오소서.
아자개 고맙소이다. 고맙소이다. 으음..... 대주야, 뭘 하느냐? 폐하께 인사
를 드리지 않고? 보개도 인사를 드려야지.
보개 보개라 하옵니다.
대주 (냉냉하다) 대주라 하옵니다.
왕건 이야기를 많이 들었소이다. 잘들 오셨소이다. 자, 김시중,
김행선 예, 폐하,
왕건 상부 어른은 짐과 함께 갈 것이야. 다른 분들도 잘 뫼시시오.
김행선 예, 폐하. 자, 상부어른, 어서 이 백마에 오르시오소서. 궁중에 연회
가 준비되어 있사옵니다.
아자개 고맙소이다, 고맙소이다.
복지겸 상부 어른을 뫼시어라! 폐하를 뫼시어라!
그렇게 그들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아자개와 왕건이 나란히
말을 함께해 간다. 그 뒤로 오씨와 수인이 계모와 대주들과 가고,
보개는 장수들과 어울려 간다. 그 긴 행렬은 그렇게 가고.......
왕건 참으로 어려운 결단을 해주셨사옵니다, 상부어른.
아자개 이게 다 술희 장군 덕분입니다. 내 자식과도 같은 사람이지요.
왕건 알고 있사옵니다.
아자개 폐하께서 황후가 아프신데도 불구하고 그 귀한 영약을 내게 보내
주신 것을 알고 있소이다. 그러니 어찌 이곳으로 오지 않을 수 있
겠소이까? 고맙소이다.
왕건 그리 말씀해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상부 어른.
아자개 아니올시다. 참으로 나는 늦복이 많은 사람인 것 같소이다. 늙으막
에 이렇게 죽을 목숨도 건지고 또한 자식들도 자꾸 생기니 말씀입
니다. 허허허..... 백제에도 있고, 고려에도 있고, 어딜 가나 내 자식
들이 있소이다, 허허허.......
왕건 그리 생각하여 주시니 참으로 고맙사옵니다.
아자개 좋다, 참 고려가 좋다. 좋아요...
그들은 그렇게 가면서 그 위로 들려오는 궁중 아악소리.
씬 철원 황궁 외경
씬 동 황궁 연회장
백여명의 악공이 온갖 악기로 궁중 음악을 연주하고 있다. 수십명
의 무희들이 처용무를 춘다. 아자개는 벌써 취기가 보인다. 무릎장
단을 치며 춤추는 무희들을 보고 있다.
아자개 좋다, 참 보기 좋다.
왕건 많이 드시오소서, 상부 어른.
아자개 암, 마셔야지요. (마시다가) 헌데,...... 그 뭐냐, 머루주는 좀 없소이
까?
김행선 술이 마음에 아니드시옵니까?
아자개 그런것이 아니라, 매일 술희 장군이 갖다주는 머루주만 마셔와서
다른 술은 입에 맞지를 않아요.
왕유 허면 머루주를 올리겠사옵니다.
박지윤 무엇들 하는고? 상부 어른께서 머루주를 찾으신다! 어서 대령하라!
오다련 허허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머루주가 아니라 술희 장군이
갖고 계시는 머루주를 찾으시는 것 같소이다.
계모 호호호호........ 그렇사옵니다.
박술희 그 머루주라면 이미 군사들에게 시켜 가져왔사옵니다. 이보시게 내
관, 우리 군사가 가져온 그 술을 내시게.
대전내관 예, 장군.
왕건 과연 술희 아우로구먼. 상부 어른께서 그것을 찾으실 줄 알고 다
준비를 하였다니 말일세.
아자개 암, 암.... 술희 장군 뿐이올시다. 술희 장군 뿐이지요.
왕건 이젠 낭자도 고려로 오셨소이다. 술희 아우와 백년가약을 맺어야
하지 않겠소이까?
계모 그래야지요. 이젠 그렇게 해야지요, 폐하.
대주 .......
박술희 참으로 고맙사옵니다, 어르신들. 이 은혜가 백골난망이옵니다.
태평 참으로 감축드리옵니다, 낭자. 두 분의 혼례는 이 나라에 큰 경사
가 될 것이옵니다.
대주 .......(전혀 반응이 없이 차갑다)
최응 그렇사옵니다. 경사중의 경사가 될 것이옵니다.
아자개 하하하....... 이런, 나는 저 어린 총각을 영락없이 의원의 하인으로
알았소이다. 알고 보니 이 나라의 높은 대신이였구려. 놀랍소이다,
그 어린 나이에 높은 벼슬을 하고 있다니.
최응 황공하옵니다, 상부 어르신.
아자개 여기 이 장군들도 고생이 아주 많았소이다.
유금필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어른을 뫼시고 오게 되어 참으로 광영이옵
니다.
능산 그러하옵니다, 어르신. 이 고려에서 천수만수 오래오래 사시오소서.
아자개 암, 그래야지. 오래 살아야지요. 아, 그토록 귀한 영약을 먹었는데...
모두들 하하하.... (웃는다)
씬 동 황궁 어느 전각 안
장일이 죽어가고 있다. 복지겸과 장수장, 신방들이 보고 있다.
복지겸 이보게 장부장, 정신 좀 차리게!
장일 송구..... 하옵니다,.... 장군.
복지겸 죽어서는 아니되네! 정신을 차리게, 장부장!
장수장 정신 좀 차리시오, 장부장.
신방 맹독이 묻은 화살이옵니다. 그 옛날 폐주가 당했던 그 독이옵니다.
어려울 것 같사옵니다.
장일 (죽어가며) 그래도..... 폐하를 위해 죽을 수 있어 행복하옵니다.
복지겸 아니되네. 죽어서는 아니되! 이보게, 장부장!
장일 사실 지난.... 폐주 때.... 너무도.. 많은... 죄를 지은 몸이옵니다. 그나
마 이렇게 죽을 수 있다는 것은 영광 중에.... 영광이옵니다. 폐하를
잘.... 보필하시오소서.... 폐하를 잘............
복지겸 이보게, 장부장, 장부장!
장일이 숨을 거두었다. 복지겸이 한숨을 쉬며 먼 산을 본다. 모두들
착찹하게 그렇게 본다. 그들의 착찹한 표정 위로
씬 다시 연회장
연회가 무르익고 있다. 모두들 흥에 겨운 표정들이다. 분위기가 풀
어져서 여기 저기 이야기들이 꽃피고 있는데 박술희와 대주는 아주
대조적으로 서로를 보고 있다. 박술희는 그것이 더 안타깝고..... 그
한쪽에서 능산이 유금필에게 말한다.
능산 형님, 내군의 복장군이 보이질 않습니다.
유금필 그러게 말일세. 아마 바쁜 일이 있는 모양이지.
태평 실은.... 일이 좀 생겼습니다. 내군의 장일 부장이 독화살을 맞았습니
다.
유금필 아, 이야기는 들은 것 같소이다. 참 어찌되었습니까?
태평 복장군은 아마도 그 일로 이 자리에 못 나온것 같습니다.
능산 이런...... 독화살을 맞았다면 목숨이 어려운 것 아닙니까?
태평 아마 그렇겠지요.
그들 이런, 이런..........
그 한쪽에서는 원로들의 환담이 계속된다.
박지윤 저희들은 어르신을 모셔오면서 참으로 걱정이 많았사옵니다. 백제와
는 더욱 더 사이가 어색해 질 것 같아서 말이옵니다.
계모 아이구, 그럴 것도 없습니다. 말만 자식이지 사실 우리는 남남처럼
산 지 오래되었습니다. 안그렇습니까, 나으리?
아자개 그건 뭐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요.
오다련 그 때문에 백제와 우리 고려가 사실 많이 긴장하고 있사옵니다. 전
투가 아무래도 벌어질 것 같사옵니다. 백제군이 지금 낙동강 전선에
와있고, 우리 군도 강을 경계로 대치하고 있는 중이옵니다.
아자개 그래도 서로 싸워서는 아니되지요. 더군다나 우리 늙은이들 때문에
싸움이 난다면 더 안되는 일이고 말이올시다. 그저 잘들 지내야지
요. 잘들........(술마시며) 참 맛있다, 이 머루주는 정말 맛있다. 고려
에 와서 마시니까 더 맛있어요, 아이구 맛있다.
왕건 많이 드시오소서, 상부 어른.
아자개 암요, 암요... 오늘 아주 많이 취할 작정이올시다. 허허허..... 아, 맛있
다.
그런 아자개의 표정에서....
씬 상주 낙동강 전선
수많은 군대가 양쪽으로 포진하여 있다. 엄청난 바람이 두 군대 사
이의 긴장을 깨고 있다. 여기 홍유와 배현경, 유긍달, 금식 장군들이
보인다. 그리고 멀리 강건너에는 애술과 김총장군이 보인다. 일촉즉
발이다. 그들은 모두 긴장해 있다.
씬 백제국 황궁 외경
견훤(E) 가셨단 말이지?
씬 동 대전
견훤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 능환과 최승우가 숙연하게 보고 있다.
견훤 고려로 들어가셨단 말이지.
두 사람 ......
견훤 아주 지금쯤 왕건이와 함께 거나하게 들고 계시겠구먼. 아주 잔치를
크게 벌이고들 있을게야.
능환 폐하, 이미 가신 분은 가신 분이옵니다. 또한 망령이 드신 분을 폐
하께오서 어찌하시겠사옵니까. 그야말로 그 일은 사람의 힘으로써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사옵니다.
견훤 ....
능환 문제는 이러고 있어서는 아니된다는 것입니다. 지금 수천의 대군이
폐하의 영을 기다리며 공격 의지를 가다듬고 있사옵니다. 아직도 늦
지 않았사옵니다. 어서 영을 내리시오소서.
견훤 영을 내려라? 이미 그 어른이 고려의 황도로 들어가셨는데 영을 내
리면 무엇하겠는가?
능환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돌아와서는 아니되옵니다. 연세드시고 망령이
드신 어르신을 납치해 간 고려를 응징하시는 것이옵니다.
최승우 이미 다 소용 없는 일이옵니다. 그야말로 또 한 번 우스운 손가락질
을 받을 수 있사옵니다. 지금 그대로........ 망령 드신 어르신이 그저
그냥 가신 것으로 하시오소서. 전투를 해봐야 희생만 따를 것이옵니
다. 명분 없는 싸움이옵니다. 아프시더라도 그만 군대를 돌리시오소
서, 폐하.
능환 (격노하여) 이보게 파진찬, 자네는 어디의 신하인가? 백제의 신료가
맞는가? 이래도 참으라, 저래도 그만두시라, 도대체 어찌 하라는 것
인가? 나라가 망신을 당하고 폐하의 위엄이 손상되었는데도 그저
참으라 하는 그대는 누구인가? 이 나라 신료가 맞는가, 파진찬!
최승우 이찬 어른, 그러나 명분이 없고 실리가 적은 싸움은 결과적으로 한
낱 분풀이에 지나지 않사옵니다. 그 분풀이에 백성들을 소모시킬 수
없사옵니다. 저는 지금 그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이옵니다, 이찬 어
른.
능환 닥치지 못할까! 자네는 변했어! 그 옛날 신라에 있는 최대의 최씨
천재 세 사람 중에 하나였다는 자네였어.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는
가? 왜 이렇게 겁쟁이가 되었어?
견훤 이찬, 왜 이리 흥분하는가? 그만 하라. 파진찬의 말이 실은 옳다. 승
산 없는 싸움에 군사들을 몰아 넣어 희생이 커진다면 그야말로 한
번 또 우스운 손가락질을 받는다. 그건 사실이야. 그리고, 누구를 원
망하겠는가? 다 내 탓이다, 내 탓이야......
최승우 참으로 망극하옵니다, 폐하.
견훤 군사를 돌리라 하게. 그 전쟁은 의미가 없어. 이번에는 왕건이에게
내가 졌어. 내가 진 것이야.
능환 (울며) 폐하, 아니되옵니다...... 공격을 명하시오소서. 상주를 불바다
로 만들고 계속 북진하여 고려를 질책하시오소서. 왕건이에게 폐하
의 위엄을 보이시오소서. 할 수 있사옵니다, 폐하.
견훤 (사이) 회군하라고 해!
능환 폐하.........
그 때 대전 내관의 소리가 들려온다.
내관 폐하, 대전 내관이옵니다. 웅주에서 장계가 올라왔사옵니다.
견훤 들어오라.
대전 내관이 들어와 장계를 전한다. 견훤이 보다가 표정이 좀 풀어
진다.
최승우 웅주라면 공직 장군이 보낸 것이 아니옵니까?
견훤 그렇다네. 고려의 이흔암이라는 장수가 가지고 있던 성을 접수하고
그 주변의 주현을 십여 고을이나 공략중이라네. 고려의 성 열 개가
한꺼번에 넘어오고 있다는구만.
최승우 감축드리옵니다. 과연 공직 장군이옵니다.
견훤 아니야, 공직 장군도 훌륭했지만 이것은 파진찬의 공이야. 그래, 역
시 강한 것보다는 때로는 또다른 전략이 필요할 수도 있어. 아버님
의 일이 벌어지고 있을 떄 한편으로 웅주를 공략한 파진찬의 전략
은 정확하고도 실리가 있는 것이였어. 그래, 흥분하여 이득이 없는
싸움을 할 필요는 없지, 그럴 필요는 없어.
최승우 망극하옵니다, 폐하. 신의 마음을 헤아려 주시니 참으로 몸둘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능환 .......
견훤은 아직도 그러나 괴롭다. 뒷짐을 지고 눈을 감은 채 참으로 생
각이 많다. 그런 그의 표정에서......
씬 인써트
공직이 많은 군사들과 함께 벌판을 누비고 있다. 호족들이 엎드려
항복하는 전경들이 지나친다.
해설 웅주의 항복. 그랬다. 이흔암이 성을 버리고 고려로 가버린 이후 그
지역 일대는 아무런 싸움도 없이 백제의 땅이 되어버렸다. 웅주(공
주)가 백제땅이 되자 그 영향력을 받고 있던 운주(홍성) 등 그 주변
의 주. 현들이 십여 고을이나 백제의 영역으로 넘어갔다. 이 또한
큰 힘 들이지 않고 백제가 얻어낸 성과였다. 그러니까 아자개의 귀
부라는 당대 최고의 실리를 거둔 왕건이였지만 그 반대급부로 이처
럼 많은 고을을 순식간에 잃어버린 것이었다. 그 때는 그런 때였다.
얼마든지 눈 앞의 이익에 따라 배신과 배반이 흔한 때였던 것이다.
씬 다시 백제국 대전
견훤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긴 생각 끝에 한숨을 돌리며 말한
다.
견훤 이보게 파진찬,
최승우 예, 페하.
견훤 아주 큰 일을 해냈어. 바로 이런 것이야. 싸우지 않고 땅을 얻을 수
있다니 더 이상 바랄게 무엇이겠는가? 공직 장군에게 파발을 보내
게. 술과 고기를 보내어 군사들을 위로하고 짐의 뜻을 전하게나, 파
진찬.
최승우 예, 페하. 그리하겠사옵니다.
견훤 그리고, 이제 짐은 부끄러움을 당할 만큼 다 당했어. 더 이상 이 일
에 끄달려 다니고 싶지는 않아. 아버님 일 말이야. (사이) 두 사람은
듣게.
두사람 예, 폐하.
견훤 이제 다시는 그 누구도 내 아버님 이야기를 꺼내지 말게. 자네들 둘
뿐만 아니라 전 신료들에게 그리 전하게. 앞으로 누구든 내 아버님
의 일을 들먹거리는 자 있거든 혹형에 처할 것이야. 참형 말이야.
알겠는가?
두사람 예, 폐하.
견훤 나는 이 일을 잊고 싶어. 이 일에서 빨리 도망치고 싶어. 그리고 다
시 백제국의 황제로써 올바른 나라 경영을 하고 싶다는 것이야. 나
자신부터 바로 세우겠다는 것이야. 알겠는가들?
두사람 예, 폐하.
견훤 그리고, 역시 자식이라는 것은 강하게 자랄 필요가 있어. 나는 지금
도 내가 아버님 곁을 떠나서 오늘날 대 제국을 세운 것을 참으로
보람으로 생각하고 있어. 결국은 아버님은 그걸 오해하시고 내가 계
모님이 싫어서 아버님 밑을 떠난 것으로 알고 계시지만 말일세. 어
쨌든 자식 교육은 강해야 해! 내 아들들은 역시 나처럼 기를 것이
야. 강하게 말이야. 아주 강하게.
두 사람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폐하.
견훤 이보게 이찬,
능환 예, 폐하
견훤 신검이는 우리 철기군에 배속시켜서 다른 장수들과 공히 똑같은 전
선에 투입을 하도록 해.
능환 예, 폐하.
견훤 그리고 양검이도 지방으로 내려보내. 무주에 가있는 용검이처럼 말
이야.
능환 예, 폐하.
해설이 진행되는 동안 그 인물들의 면면이 소개된다.
해설 견훤의 자식들, 견훤에게는 맏아들 신검, 둘째아들 양검, 그리고 셋
째 아들 용검이 있었다. 이 검자돌림의 아들들은 모두 정실인 황후
에게서 낳은 자식들이다. 그 다음, 후궁에게서 본 자식이 바로 훗날
견훤이 그토록 마음에 들어하여 왕위를 물려주려다가 실패한 배다
른 아들 금강이다. 이들 중 셋째 아들 용검은 그 동안 기회가 닿지
않아 소개하지 못했었다. 역사의 기록에는 황후가 누구였는지, 그리
고 금강이 누구의 자식이였는지, 또한 이들의 출생이나 사망연도가
어떠했는지 하나같이 분명하지가 않다. 백제가 멸망하고 그 기록들
이 망실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 진행중인 관계는 극중 운영을
위하여 설정된 것일 뿐이다. 아무튼 견훤은 이전에도 그랬지만 이때
부터 더욱 본격적으로 자식들을 전쟁에 데리고 다니며 앞세우거나
그도 아니면 지방 변방에 내려보내는 등 혹독한 자식 교육에 나서
는 일면들을 보인다. 역시 남성다운 면모를 좋아했던 견훤의 아들교
육이었던 것이다.
씬 황후전
박씨가 눈을 크게 뜨며 놀라서 묻는다.
박씨 뭐라고? 아니, 우리 양검이를 다시 또 강주로 보낸단 말인가?
제조상궁 예, 방금 전에 그리 영이 내려졌다 하옵니다.
박씨 또 시작이구먼, 또 시작이셔. 도대체 자식들이 그토록 못마땅하시다
는 말씀인가? 그럼 우리 맏이는...?
제조상궁 신검 태자마마께오선 철기군에 배속되셨다 하옵니다. 다른 장수분들
과 마찬가지로 곧 전선으로 투입되신다 하옵니다.
박씨 이런, 세상에. 폐하의 다음을 이으실 태자들을 저리 홀대하니 도대
체 황실이 어찌되겠는가? 다를 것이 없다니까. 상주의 아버님과 조
금도 다를 것이 없어요. 결국 나중에 후회하시게 되실 것이야. 자식
들을 저리 구박하니 어찌 나이들어 대접받기를 바라시겠는가? 어린
용검이는 무주에 가있는데 이번엔 둘째마저 변방 어디, 강주까지 내
려 보낸다고? 허허, 참.... 기가 막혀서. 그래, 이게 다 고비 그것 때
문이야. 못된 것들 같으니라고.........
씬 고비의 처소
고비가 아들 금강을 보며 말하고 있다.
고비 지금 나라가 말이 아닙니다. 상주의 할아버님 일로 폐하께서는 식음
을 전폐하셨습니다.
금강 아옵니다, 어마마마.
고비 이번에 또 양검 태자가 강주로 간답니다. 조금만 더 크면 우리 금강
태자도 아마 페하께서 그리 하시라 할 것입니다.
금강 예, 어마마마. 아바마마는 저희 자식들을 강하게 키우려는 것이옵니
다. 그것은 지극히 옳은 일이옵니다
고비 그렇게 말을 하시니 이 어미도 든든합니다. 하지만..... 하지만, 태자.
경계를 단단히 하며 살아야 합니다. 황후마마께서는 우리 모자를 곱
게 보지 않으십니다. 태자의 세 분 형님들도 마찬가지지요.
금강 그럴리가 있사옵니까?
고비 이 어미 말을 단단히 기억하세요. 상주 아버님이 저리 되신 것도 다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황후마마의 탓일 수도 있어요. 부자
간의 일을 처리하는데는 며느리의 역할이 아주 큰 것이지요. 황후마
마께서는 그걸 잘못하신 것 같아요. 늘 불만만 많으시지.......
금강 어마마마는 그저 다 모르는 채 하시오소서. 아무 말씀도 하셔서는
아니되옵니다.
고비 압니다. 물론 압니다. 하지만, 황후마마께서 늘 우리 모자를 어쩌지
못해 하시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참... 하긴, 이 어미도 이해가 가지
를 않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아들이 황제인데
그 적국의 나라로 가버린단 말입니까? 아무 이유도 없이요. 허, 세
상에.... 분명히 이변은 이변입니다. 아주 큰 이변입니다, 태자.
씬 철원 아자개의 집 외경
씬 동 집 마당
수많은 가노들과 하녀들이 오가고 있다. 넓고 큰 것이 마치 궁궐을
방불케 하는 집이다. 방 안 사랑쪽에서는 웃음 소리가 들려온다.
씬 동 집 사랑
아자개와 함께 그 아들 보개, 그리고 박술희, 유금필, 능산들이 앉아
있다.
아자개 그랬구먼, 그랬어. 그러니까 여기 유금필 장군하고 능산 장군하고
우리 술희 장군의 의형제들이시구먼.
유금필 그렇사옵니다, 상부 어른. 저희는 일찍이 지금의 페하를 큰 형님으
로 뫼시고 결의를 했사옵니다. 제가 둘째가 되었고 세번째가 여기
능산 아우이고, 그리고 술희 아우는 막내이옵니다.
아자개 하하하하하....... 막내가 좋지. 막내가 좋은 것이야. 아 자식 길러봐.
얼마나 막내가 이쁘고 좋은 것인지.
계모 왜 아니겠사옵니까? 그래서 그런지 술희 장군만 보면 천진난만해
보이는 것이 막내인 줄 알았습니다.
박술희 대부인 마님, 그렇지가 않사옵니다. 아, 제가 어찌 그렇게 어린애처
럼 보인단 말씀이옵니까?
보개 사실입니다, 박장군. 장군은 그렇게 보이십니다. 하하하......
아자개 아, 그래도 술희 장군이 얼마나 유식한데들 그래? 사서오경을 줄줄
꿰고 모르는 것이 없어요. 게다가 무예가 뛰어나서 싸움을 잘해, 성
격이 시원시원하고 좋아, 이만한 사내가 어디 있겠는가? 없지요, 암,
없지요.
계모 그렇고 말구요, 나으리. 아이고, 참....... 집 한 번 넓고 좋다. 마치 궁
궐같지 않사옵니까, 나으리.
아자개 아, 그럼, 그럼. 내가 누구인가? 이 나라 황제의 상부야, 상부. 헤헤
헤..... 아니 그런가들?
박술희들 예, 상부 어른.
아자개 참, 이제 얼마 안있으면 황도를 송악으로 옮겨간다고?
박술희 예, 이미 그리 정해졌사옵니다. 그 때 상부 어른도 함께 가시오소서.
소장이 뫼시겠사옵니다.
게모 아, 물론 박장군을 따라 가야지. 하지만, 우리 대주하고 혼인문제부
터 해결을 보아야 할 것인데......
유금필 여기까지 모두 오셨사옵니다. 그리고 다 고려국의 백성들이 되셨사
옵니다. 이제 혼인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능산 아, 그렇구 말구요. 빨리 떡과 술도 빚고 소 돼지 잡고 날도 잡아야
할 것이옵니다. 이 혼례는 아마도 폐하께서 직접 주관하실 것이 분
명하옵니다. 나라의 경사가 되는 것이지요. 아니그런가, 술희 아우?
박술희 (그러나 자신이 별로 없다) 글쎄올습니다, 형님.
능산 아 이사람아, 글쎄라니. 아닌 말로 자네는 있는 정성 없는 정성 다
했어. 그리고 오늘날 여기까지 이르렀어. 왜 그렇게 자신이 없는 표
정인가? 힘을 내게, 힘을 내.
박술희 예, 형님. ......(그러면서 한숨)
모두들 ......?
씬 대주의 방
대주가 홀로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
까? 길고 긴 한숨을 거듭 내쉬다가는 들고 있던 작은 붓을 먹물에
찍어 무엇인가를 또 써내려가기 시작한다. 그러다 생각하고 또 쓰고
그런 그녀의 눈에는 이슬이 맺히고 있다.
대주(E) 아버님, 어머님 보시오소서. 소녀 대주는 이제 떠나옵니다. 그 동안
부모님을 뫼시고 오라버니와 함께 평생을 사는 것이 꿈이었사오나
결국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렇게 고려로 오게 되었사옵니다. 하오
나 아버님, 오라버니는 아버님의 자식이며 또한 대 백제국의 황제이
옵니다. 자식에게 더 이상의 부담을 주셔서는 아니되옵니다. 이제
아버님은 이 고려에서 잘 지켜드리고 봉양해 드릴 것이옵니다. 그
걱정이 없기에 소녀는 떠나는 것이옵니다. (쓰다가 생각, 또 쓰고)
소녀는 박술희 장군과 혼인을 할 수가 없사옵니다. 이제서야 말씀드
리옵니다만 박장군은 참으로 장수답고 사내다우며 좋은 분이시옵니
다. 그러나 오라버니의 적국인 고려의 장수이옵니다. 소녀가 박장군
과 혼인하게 되면 또 한 번 오라버니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일이
되옵니다. 부디 이런 뜻을 잘 살피시고 박술희 장군에게 따뜻한 말
씀을 주시오소서. 소녀 삼가 엎드려 세 번 절하고 이 서찰을 아버님
께 남기옵니다. 부디 오래 오래 어머님과 오라버니들과 함께 백년강
녕 하시오소서.
대주는 그렇게 쓰기를 마치고 한숨을 쉰다. 그리고 글을 보다가 그
에 한줄기 눈물을 흘린다. 그런 그녀의 표정에서......
씬 동 집 마당(밤)
여전히 사랑채에서는 웃음 소리들이 들려온다.
아자개(E) 아, 들게, 들어.
유금필(E) 에. 상부 어른.
그 마당 한쪽에 누군가 한숨을 쉬며 서있다. 박술희다. 자꾸만 대주
가 있는 처소쪽을 본다.
씬 동 집 사랑
여전히 웃음소리들이 들린다. 잘 차려진 상을 놓고 아자개와 계모,
유금필과 능산이 마시며 웃고 있다.
아자개 앞으로도들 자주들 오시게나. 아, 내가 자식으로 삼은 우리 술희 장
군의 형제들이 아닌가?
능산 예, 상부 어른, 맞는 말씀이시옵니다.
아자개 내가 황궁에서도 이야기를 했지만 말년에 이만한 복이 있는가? 나
만큼 자식복이 많은 사람이 어디 있는가 말이야? 자네들도 다 내
자식이 아닌가?
능산 그렇사옵니다. 맞사옵니다, 상부 어르신.
계모 호호호호...참 잘하였사옵니다. 이 고려로 오시기를 정말로 잘하였사
옵니다, 나으리.
아자개 잘했구말구, 암, 암..........(하다가) 헌데 술희는 어딜 간게야? 아니 소
피를 보러 간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오래 걸리는가?
유금필 아까부터 표정이 좀 어두웠사옵니다. 아무래도 대주 낭자께오서 밝
은 대답을 아니 주니 참 답답도 할 것이옵니다.
능산 그럴 것이옵니다. 싸움터에서는 천하 맹장인데 대주 낭자 앞에서는
술희 아우가 오금을 못펴는 것 같사옵니다. 허허허허.......
아자개 그런게야. 아 좋은 처자를 보면 어느 사내가 그렇지 않겠는가? 특히
나 저런 나이 때 말이야. 하지만 잘 될게야, 암, 잘 될게야.
씬 동 집 마당
그렇게 박술희가 서있다. 대주의 처소쪽을 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포
기하고 다시 사랑으로 가려는데 대주의 후원쪽에서 사이문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자 흠칫 놀라듯 보는 박술희. 꿈같은 일이다. 대
주나 나오는 것이다.
박술희 (한참 넋놓고 보다가) 아니, 낭자..... 낭자?
대주 ........?
두 사람은 그렇게 섰다. 신기한 일이다. 차갑기만 하던 대주가 아주
인상적인 표정으로 박술희를 따뜻하게 미소로 보고 있다.
박술희 (믿기지가 않는듯) 낭자......... 지금 저를 보고 웃으시는 것이옵니까?
대주 (끄덕이며) 예, 장군.
박술희 (너무 좋다) 낭자! 이제야 마음의 문을 연 것이옵니까, 낭자? 그렇사
옵니다. 이 박술희는 그렇게 나쁜 사내가 아니올시다. 그저 낭자밖
에 모르는 그런 사내올시다.
대주 압니다, 장군. 다 알고 있었습니다. 저도 사람이옵니다. 어찌 장군의
그 속내를 모르겠사옵니까? 그 동안 참으로 송구했습니다.
박술희 송구...? (하다가) 아니올시다. 낭자께서 송구할 것이 무엇입니까? 이
렇게 마음을 열어주시는데 무엇이 더 송구할 게 있습니까?
대주 장군,
박술희 에, 예, 낭자, 말씀하시지요.
대주 (한참보다가) 아닙니다. 되었습니다.
그러고도 대주는 차마 가지 못하고 한참을 그렇게 본다. 여전히 눈
에 눈물이 글썽인다. 박술희는 영문을 모를 일이다.
박술희 왜....... 그러는 것이옵니까, 낭자?
대주 아니옵니다. 자, 그럼........
박술희 어디를 가시옵니까?
대주 그냥 가볼 곳이 있습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박술희 아, 예, 예......
어느새 대주는 말 위에 오른다. 그리고 또 박술희를 한참본다. 그리
고 웃음소리가 나오는 사랑 쪽을 보다가 천천히 열려진 문으로 나
가기 시작한다. 그제서야 박술희는 무엇인가가 이상하다.
박술희 안녕히..... 안녕히라고 했나? 왜... 어딜 가길래 안녕히라니? 안녕히?
(하다가) 아니, 낭자! 낭자!
다급하게 부르지만 이미 대주의 모습은 집 밖으로 멀어지고 있다.
허둥거리던 박술희가 뭔가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열려져 있는 사잇
문을 본다. 그리고 급히 뛰어들어 간다.
씬 그 곳
열려진 대주의 방안. 탁자 위에 서찰이 곱게 접혀 있다. 박술희가
그것을 집어든다. 그리고 펼쳐보다가 경악한다. 다시 달려나가며 소
리친다.
박술희 낭자, 낭자! 대주낭자! 낭자!
씬 동 집 마당
박술희는 계속 불러댄다. 웬 소란인가 싶어 사람들이 뛰쳐나오기 시
작한다. 모두들 의아해서 본다.
능산 아니, 술희 아우, 무슨 일인가? 왜 그러는가?
유금필 왜 그러는가, 술희?
박술희 .......(눈물)
아자개 아, 왜 그래 술희?
그러나 계모는 역시 눈치가 빠르다. 뭔가 이상한 것이다.
계모 손에 든 그것이 뭔가? 웬 서찰인가? 대주의 것인가?
박술희 예, 대부인 마님. 대주 낭자가 떠났사옵니다.
아자개 떠나? .....대주가....떠나?
박술희 예, 상부어른. 떠났사옵니다. 대주 낭자가 떠났사옵니다, 상부 어른.
그 서찰을 계모가 빼앗듯이 본다. 박술희는 그에 흐느낀다. 한참을
읽던 계모가 아이구 소리를 연발한다.
계모 아이구, 아이구, 큰일났네. 아이구 나으리, 얘가 떠났사옵니다. 산으
로 간답니다.
아자개 산으로? 그게 무슨 소리요? 그러면 스님이 되겠다는 이야기요?
계모 아 그렇답니다, 나으리. 아이구...(운다) 이걸 어쩌나, 우리 대주 어쩌
나.
모두들 .......?
보개 (그제서야) 데려와야지요. 찾아서 데려와야지요. 얘들아!
가졸들 예!
보개 대주 누이를 찾아야 한다! 서둘러라, 급히 쫓아라!
가졸들이 일제히 대답하며 흩어진다. 그러나 틀린 일이다. 모두들
아무 말을 못한다. 박술희는 그렇게 통탄하고 있고.... 그런 박술희
얼굴에서 디졸브 되며
씬 길
어둠 속 길을 대주의 말이 달려가고 있다. 카메라 불 지나쳐 그렇게
멀어져 가면
해설 대주. 실제 이름은 대도주금으로 견훤의 누이였다. 삼국 유사에는
견훤의 가계를 소개하면서 그녀에 관한 대목을 짧게 적어놓은 것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는 두 부인 사이에 맏아
들로 견훤을 두었다. 그리고 견훤의 형제로 능애와 용개, 보개, 소개
를 두었는데 다 훌륭한 장군이었다. 아자개의 딸로서는 대도주금이
라는 딸이 있었는바 또한 장군이었다, 라고 하였다. 기록으로 보아
대주라는 아자개의 딸이 상당한 무예와 장군으로서의 능력이 있었
다는 것을 엿볼 수가 있다.
씬 아자개의 집 사랑
모두들 서찰을 놓고 풀이 죽어 있다. 박술희는 한숨을 쉬며 제정신
이 아닌 것 같다.
아자개 이보게 술희. 너무 낙심하지 말어. 우리 대주는 올 것이야, 꼭 오구
말구. 아 여기도 쓰지 않았어? 술희를 좋아한다고 말이야. 올게야,
꼭 올게야.
계모 올 것이네. 나도 그렇게 믿네, 술희 장군.
박술희 예, 대부인 마님. 예.......... 저도 믿고 싶사옵니다. (큰소리 절규같이)
저도 믿고 싶사옵니다! 믿고 싶사옵니다!
그렇게 울부짖는 박술희의 표정에서 디졸브 되면.....
씬 철원 황궁 외경(낮)
씬 동 조당
왕건이 옥좌에 앉아있고 문무신료들이 다모였다. 김행선과 박지윤
부자, 오다련, 왕신, 복지겸, 입전, 원극유, 태평, 최응, 왕유, 유금필,
능산, 박술희들과 함께 많은 장수들이 모인다.
왕건 경들은 들으오.
모두들 예
왕건 짐은 누차 그 동안 우리 고려의 도읍을 송악으로 옮길 것이라 천명
하였소이다. 새로운 제국이 열리면서 그간에 여러 가지 많은 일들이
있었소이다. 그러나 이제는 소란과 소요가 가라앉고 나라는 활력과
그 기상을 되찾기 시작했소이다. 이제 모든 것을 다 정리하고 떠날
준비를 서둘러야 할 것이오. 아니그렇소이까?
신료들 지당하신 분부시옵니다, 폐하.
김행선 폐하께오서 이제부터는 환도하는 계획을 더욱 서두르시라 하시는
것으로 아옵니다. 이미 만반의 준비가 차질 없이 착착 진행되고 있
사옵니다, 폐하.
왕유 그러하옵니다, 폐하. 신이 아옵기로는 납화부(궁궐의 재물을 맡는
관청)와 남상단(나라의 공역을 맡아보는 관청), 그리고 장선부(황궁
수리, 기물 제조를 맡은 관청) 등의 관리들이 온 힘을 기울여 비어
있던 궁궐의 수리와 보수에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아옵니다. 걱정하
지 마시오소서.
박지윤 그러하옵니다, 폐하. 다행히 송악의 황궁은 그 동안 손을 잘 보아
놓았기 때문에 언제라도 가시기만 하면 되옵니다. 오히려 걱정할 것
은 송악으로 가기 이전에 이 곳 철원의 모든 일들을 잘 마무리 하
는 것이옵니다.
태평 그러하옵니다, 폐하. 이미 궁궐이 있고 또 보수가 끝나가고 있사옵
니다. 어찌되었든 이 곳 철원은 황도로서 수십년을 버티어 온 역사
가 있사옵니다. 이 곳 일을 잘 마무리 하시는 것이 보다 급한 일일
것이옵니다.
최응 신도 그리 생각하옵니다. 이곳에서는 수많은 목숨들이 죽어나갔사옵
니다. 또한 청주의 백성들이 피 땀 흘려 세운 도읍지이기도 하옵니
다. 인심을 잘 파악하고 다스리는 것은 폐하의 어지신 본분이시옵니
다. 헤아리시오소서.
왕건 옳은 말이오. 나도 그리 생각하고 있었소이다. 광평성의 원로들은
들으시오.
원로들 예, 폐하.
왕건 환도 준비는 다른 부서들에 맡기기로 하고 경들은 이 철원의 한 시
대를 잘 마감할 수 있도록 계획을 서둘러 주시구려. 짐은 수많은 목
숨들이 희생되고 또한 핍박받았던 과거를 위로하고 앞으로의 새로
이 시작되는 국가의 만년대계를 위하여 부처님께 기도를 드리고 싶
소이다. 경들은 짐의 이런 뜻을 잘 살펴서 환도하기 전에 팔관회 기
도회를 열도록 하시오.
모두들 예, 폐하.
왕건 이제부터 우리 고려는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될 것이오. 그리고 말로
서만이 아닌, 실제로 대 제국의 기치를 이제부터 천하에 내세우게
될 것이오. 경들은 모쪼록 새로운 국가의 시작에 심혈을 기울이도록
하오.
모두들 예, 폐하.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왕건 이번의 팔관회는 아주 성대하게 그 의식을 집전토록 하오. 아주 크
고 성대하게 말이오.
모두들 예, 폐하.
그런 왕건의 표정에서 더블되면서 화면은 팔관회로 이어진다.
씬 황궁 안 법당
엄청난 규모이다. 수 백명의 승려들이 바라춤을 추고 있다.(지난 백
고좌 의식처럼) 황제 왕건과 더불어 두 부인과 태자가 앉아있다. 문
무신료들이 가득히 참여하여 보고 있다. 그 화려한 모습 위로 해설
해설 팔관회. 왕건은 철원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모든 영령을 위로하
고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하며 또한 국가를 위한 기원의식으로서 이
팔관회를 열었다. 이 때가 왕건이 혁명을 일으킨 그 해 즉, 단기
3251년, 그리고 서기로는 918년 11월의 일이었다. 이 팔관회는 고려
가 존속했던 오백여년 내내 국가의 최고 의식으로서 해마다 치루어
졌는데, 이 때가 그 효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왕건은 이렇
게 해서 고려제국을 연 이후 있었던 많은 도전과 위협에서 벗어나
면서 비로서 안정적인 재도약을 설계하기 시작한다. 진정한 왕건의
시대가 문을 여는 첫 의식이었다.
<131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