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고장의 천렵(川獵) 이야기
나의 고향 자양(紫陽)은 산자수명(山紫水明)한 고장이다. 북에는 영남의 명산 보현산과 동에는 운주산이 자리 잡고, 기룡산, 백암산, 마당지산이 가까이에서 우리 고장을 감싸 안고 있으며 영일 죽장에서 발원(發源)하여 수십리를 흘러 충효에서 보현산 물과 합하여 자호천을 이루어 사시장천 맑은 물이 우리마을을 감싸안고 흘러 어릴 때부터 물을 가까이하여 지냈다. 맑은 물에는 물고기들이 많이 살고 있어 타고장 사람들이 부러워했다. 그런 고장이 댐 건설로 물속에 잠겨 그 옛날의 정겨운 모습은 찾아볼 수 없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내가 어릴 때는 물고기가 많아서 손으로 돌 틈에 숨어있는 메기 꺽지, 뱀장어 등을 많이 잡아 버드나무 가지에 꾀어들고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돌아온 일들이 추억으로 남는다. 그러나 우리 고장에는 가물치, 잉어, 쏘가리는 살지 않았다.
기록에 의하면 선조님들께서 귀한 손님을 청하여 천렵을 하신 기록 등이 남아있다. 그래서 천렵에 대한 이야기를 찾아 적어 보고자 한다.
옛 사람들의 천렵 풍속도
1.천렵의 이야기 들
제1화 : 통덕랑공 5형제분의 천렵 이야기
옛날의 철렵도 - 참고화
아래귀미 마을 앞의 깊은 소가 있다. 이곳에서 배를 타고 천렵을 하였다.
이 사진은 수몰 후의 모습이다.
통덕랑(휘 석승 20世)공의 묘비 글에 의하면 ‘일찍이 秋 7月 기망(旣望 16日)에 아우와 함께 맏형과 仲兄과 叔兄을 모시고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을 請하여 二水(자호천)의 아래에서 배를 띄워 놀기도 하고, 또 伯兄과 叔兄을 모시고 아우는 앞에서 이끌어 함께 운주산(雲住山)에 오르니 참으로 장관(壯觀)이었다.’ 고 기록되어있다. 그르니 오형제 분이 병와를 초청하여 앞강 자호천에 배를 띄우고 강가에 차양(천막)을 치고 물고기를 잡아서 매운탕을 끓여서 대접을 하셨다는 기록이다. 그때는 자호천에 물이 많아서 배를 띄워 선유(船遊)를 할 수 있었고. 오형제분이 우애가 깊으셔 같이 모여 손님을 접대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참고>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 – 영천 고경 출신으로 조선후기 경주부윤, 제주목사, 영광군수 등을 역임한 문신. 청백리.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중옥(仲玉), 호는 병와(甁窩)·순옹(順翁). 효령대군(孝寧大君)의 10대손이다,
제2화 : 사돈(査頓) 청한 천렵 이야기..
이곳 도로 밑의 ‘삿갓바위’ 근처에는 물고기가 가장 많이 있는 곳이다
댐 건설할 때 도로를 내기 위해 옛날 ‘소금강’이라 불렀던 곳이 파괴 되어 볼품이 없게 되었다. 건너편 윗뒤귀미 들가에는 아름드리 버드나무가 줄지어있어 그 그늘이 천렵 장소로 적합했다.
그물 던저 물고기 잡는 모습
할머니 말씀에 의하면 문성 사돈을 청하여 자호천에서 천렵을 해 드렸다는 일화를 말씀 하셨다. 하양할아버지께서 어느 해 여름날 문성 사돈을 초청하여 윗뒤귀미 버드나무숲 아래에다 자리를 잡아 멍석을 깔고 동내 청년들이 물고기를 잡고 해서 동내 어르신을 같이 모시고 하루를 즐기셨다는 이야기 셨다. 그때 월연에 게셨던 덕산(휘 진호)할아버지가 우리 외할아버지의 동서이시고 해서 더욱 좋은 분위기로 하루를 즐겨 쓰리라 짐작이 된다. 외할아버지께서는 문성 집앞에 못을 파서 논에 물도 대지만 그 못에서 낚씨를 하셨다고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제3화 : 안동 지례마을의 천렵 이야기
지례마을이 임하댐 건설로 수몰지역이 되어 지촌종택만 위쪽에 이건하여 ‘지례예술촌’으로 활용되고 있다.
저 멀리 지례마을이 있었던 곳에 임하댐 물이 꽉 차있다.
안동에 근무할 때의 이야기이다 하루는 모시는 위 상사님이 안동 지례에 가는 데 동행을 하라 하셨다. 그래서 영문도 모르고 따라갔다. 알고 보니 그 마을의 원로 되시는 분이 중심이 되어 옛 풍습대로 귀한분을 초청해 천렵을 한 것이다. 지례마을 앞에는 태백산맥에서 발원하여 영양 청송을 거처 흐르는 반변천에 많은 물이 흐르고 있으니 맑은 물에 사는 민물고기가 많은 곳이다. 특히 지례는 의성김씨의 지촌선생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사는 마을로 옛 부터 이름난 곳이며. 많은 인재가 배출된 곳이다.
그날 도착하니 천막을 치고 옛 그대로 물고기를 잡아 매운탕을 끓여 대접을 하였다. 나도 적은 집 김서방의 고향이기도 해서 김서방을 물으니 잘 알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우리고장에는 천렵 풍속을 보지 못했는데 지례에는 그때 까지 전승하고 있어 자랑할만한 가문이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남서방이 어릴 때 초등하교를 다녔던 외가 곳이기도 했다
제4화 : 청년딸래들의 천렵 이야기
청석골의 자호천변에서 천렵 및 화전놀이
1953년 봄에 발령을 기다리고 있을 때의 이야기이다. 마침 영천에 사는 월연 딸래가 고향 방문을 하였다. 귀한 걸음이라 그 마을 분들이 중심이 되어 화전놀이 겸 천렵을 하자는 제의가 왔어 우리 인구 청년 딸래 모두가 참여하기로 하였다. 그르니 인구, 월연 장밭 셋마을의 젊은이 모두가 참여하는 큰 행사가 되었다. 그날 딸래들은 백암산의 진달래꽃을 따고 청년들은 어구로 물고기를 잡았다. 딸래들은 화적을 꿉고, 남자들은 물고기를 장만하여 매운탕을 끓여서 밥과 매운탕으로 식사를 하고 반주를 마시는 정다운 자리가 되었다. 식사 후에는 모두가 노래를 합창하니 백암산 청석골이 메아리 되어 아름다운 화음이 온 강을 덮었다. 그러고 보니 그같은 모임은 시작이요 끝이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즐겁고 뜻있는 행사를 하였다고 생각된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버려서 더욱 안타갑다.
2.천렵의 탐구
1)정리
여름철 피서법의 하나로 냇물에서 고기를 잡으며 즐기는 성인 남자놀이.
2)내용
봄부터 가을까지 즐길 수 있으나 여름철에 더 많이 놀이되며 주로 남자들이 즐긴다. 여름철 피서법의 하나로 산수 좋은 곳을 찾아 찬물에 발을 담그고 노는 탁족(濯 足)과 함께 행하기도 한다.
냇물이나 강가에 그물을 치고 고기를 잡으며 헤엄도 치고, 또 잡은 고기는 솥을 걸어 놓고 매운탕을 끓여 먹으며 하루를 즐기는데 때로 농악이 따르기도 한다. 천렵할 때는 바람이 조금씩 불어야 고기가 잘 잡힌다고 한다. 정학유(丁 學 游)의 「농가월령가(農 家 月 令 歌)」 4월령에 그 내용이 소상히 나타나 있다.
“앞내에 물이 주니 천렵을 하여보세
해 길고 잔풍(殘 風)하니 오늘 놀이 잘 되겠다.
벽계수 백사장을 굽이굽이 찾아가니
수단화(水 丹 花) 늦은 꽃은 봄빛이 남았구나
촉고(數 罟)를 둘러치고 은린옥척(銀 鱗 玉 尺) 후려내어
반석(磐 石)에 노구 걸고 솟구쳐 끓여내니
팔진미(八 珍 味) 오후청(五 候 鯖)을 이 맛과 바꿀소냐.”
원래 천렵은 고대 수렵사회(水 獵 社 會)와 어렵사회(魚 獵 社 會)의 습속이 후대에 여가를 즐기는 풍속으로 변모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오늘날도 천렵은 더위를 피하거나 여가를 즐기기 위한 방법으로 놀이되고 있으나 과거에 비하여 그 양상이 많이 달라지고 있다.
3)특징 및 의의
천렵은 더위를 피하거나 여가를 즐기기 위해서 뜻이 맞는 사람끼리 냇가에서 고기를 잡으며 하루를 즐기는 놀이이다. 무더운 여름 특히 초복과 중복과 같은 복날을 전후하여 천렵을 많이 했다. 초복과 중복은 대체로 음력 6월에 드는 것이 보편적이어서 가장 무더울 때이다. 잡은 고기로 탕을 끓여 먹으며 땀을 많이 흘리는 여름철 보양을 하면서 더위를 식히고자 하는 천렵은 물을 중심으로 놀기 때문에 물놀이의 하나라 할 수 있다. 또한 뜨거운 물고기탕을 먹으며 피서를 한다는 점에서 이열치열以 熱 治 熱이 겸해지는 피서법이기도 하다.
천렵은 역사의 이른 시기 사냥과 고기잡이를 하던 습속이 후대에 오면서 여가를 즐기는 풍속으로 변모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무더운 날씨에 농사일을 하던 고달픔을 잊고 마음껏 하루를 즐기는 천렵은 물맞이, 탁족, 모래 뜸질 같은 풍속과 함께 여름철에 더위를 피하기 위한 것이다.
3.우리고장의 대표적인 물고기들
1)피라미(피리)
2)퉁가리(퉁갈래)
3)모래무지
5)꺽지(꺽더구)
6)돌고기(꼴조디)
7)붕어
8)메기(미기)
9)은어
10)기름종개(기름쟁이)
11)미꾸라지
12)수수미꾸리(노고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