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아름다운 것은 왜일까. 눈 시리도록 환한 하늘. 그 푸른 하늘 가운데 말간 얼굴로 땅을 굽어다보고 있는 살빛 낮달. 어제 그리 바람 불고 비 오더니 하늘은 너무나 맑았다. 시새우듯 앞다퉈 꽃망울을 터뜨리던 목련 벚꽃 개나리 진달래가 요며칠 꽃샘바람에 무춤, 꽃잎을 오무리고 밀원을 찾아나선 나비는 어느 꽃에도 쉽사리 제 날개를 접으며 앉지 못했다. 처음이었다. 고개를 쳐들고 하늘을 바라본 것은. 살면서 하늘을 향해 얼굴 돌리는 일은 숱하게 많았겠지만 그때마다 번번이 무언가 눈앞의 것이 하늘을 가렸다. 그래, 눈앞의 것들은 많았다. 얄팍한 셈 속에서 연유한 이기심이거나 까닭없는 증오, 분노, 설움같은 것들. 다만 등등하게 일어서는 그같은 것들에 속수무책으로 자신을 내맡기고 있을 뿐, 하늘을 보고 있으되 하늘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준식을 내려놓은 버스는 트림을 하듯 거친 날숨을 몇 번 뿜어내더니 뒤뚱뒤뚱 몸을 흔들며 길 저편으로 사라졌다. 손차양을 만들어 거침없이 쏟아지는 봄햇살을 걸러내며 준식은 버스가 사라진 지점을 더듬었다. 야트막한 둔덕을 타고 나 있는 길 저편, 산부리를 돌아 움푹 들어간 곳에 마을이 있었다. 차를 타고서도 한참을 가야 마을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굳이 이쯤에서 내린 것은 왜였을까. 기사의 반백에 가까운 뒤통수를 바라보다 황급히 차를 세우고 짐을 부리듯 훌쩍 차밖으로 튕겨나온 준식이었다. 이 무심한 것아. 먹고살기가 아무리 팍팍하다고 해도 명색이 니 에민데 그래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냐. 땅 속 전화선을 타고 달려온 고모의 음성에는 술기가 묻어 있었다. 들여다 본들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이며 고모는 또 자신의 바뀐 전화번호를 어떻게 알았을까. 애써는 아니었지만 그들에게 닿아 있던 연줄을 그만 거둬들이고 싶던 준식이었다. 좀더 홀가분하게 주어진 생을 살고 싶었기에. 때문에 그는 선뜻 그러마고 대답할 수 없었다.
ꡒ그래도 이놈아 한때나마 아버지하고 살을 섞었던 사람이다. 니 핏속에 그 사람 피가 섞이지 않았다 해도 니가 모른척한다면 천벌 받제. 아믄.ꡓ
송수화기를 귀에 댄 채 준식은 다리를 죽 뻗어 멀찌감치 있던 리모트 컨트롤을 발가락으로 끌어당겼다. 그 와중에 리모트 컨트롤에 돋아 있던 자잘한 돌기들이 눌리며 텔레비전 화면이 제멋대로 뒤바뀌었다. 지지직거리며 살아나는 푸른빛들. 점점이 무리져 튀어나오는 그 빛들이 한밤 나른한 잠속으로 빠져들던 그의 의식을 아프게 쪼아댔다. 젠장. 모래를 씹는 것같은 불쾌한 저작감을 안겨주며 돌아다니는 입 속의 말이었다.
덕순이. 어머니라는 호칭보다 덕순이라는 이름이 더 쉽게 입에 붙는 여자였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동그란 얼굴, 살집이 많아 전체적으로 부푼 풍선처럼 보이는 그녀는 서른다섯의 나이에 아버지의 여자가 된 반편이었다. 중키였던 아버지의 어깨만큼 찼던 여자는 늘 헤픈 웃음을 입가에 달고 있었고, 먹을 것만 주면 덤불 속이고 실지렁이가 흐늘거리던 개천이고 가릴 것없이 몸 아끼지 않고 들어가던 저능아였다. 당시 열 살에, 마흔 살이던 아버지가 데리고 들어온 여자를 준식은 너무나 잘 알았다. 하교길에 친구들과 어울려 양지녘 한켠에 몸 풀고 앉아있는 덕순을 꼬드겨 가시 많던 탱자나무 울타리로 유인해 와 과자를 던져주기도 했었으니까.
열매를 따듯 가시가 억세게 돋아 있던 탱자나무 가지 사이로 손을 쑥 들이밀어 과자부스러기를 줍다 그녀는 그만 소리를 지르며 과자도 줍지 못한 채 손을 뺐다. 긁힌 상처에서 빠알갛게 피가 배어나오는 것도 아랑곳하지않고, 덕순은 과자가 못내 아쉬운 듯 끈적한 시선만 가시덤불 속 과자 위에 연신 풀어놓았다. 닿지 않는 과자를 향해 그녀가 허망한 손짓을 해댈 때 뜻밖의 먹이감을 보고 꼬물꼬물, 개미들이 꾀고, 누군가 불쑥 귀퉁이가 나가지 않은 온전한 비스킷 서너 개를 내밀며 주문했다.
ꡒ니 가슴 한 번 보여주면 이거 주지.ꡓ
서슴없이 옷깃을 열어젖히던 그녀의 손길에 드러나던 유방은 너무 커 밑으로 축 처져 있었다. 대책없이 드러난 그녀의 유방에 햇살이 올라타 어루만졌고, 아이들은 낄낄거리며 검지와 중지 사이에 엄지손가락을 끼워 덕순의 코앞에서 흔들어대며 이게 뭔지 알아?라고 놀려댔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커다란 유방은 무거운 것이 들어 있는 자루마냥 그녀의 배 위에서 출렁거렸다. 그때쯤 되면 조숙한 친구들의 맵게 여물지 못한 고추에도 짱짱이 힘이 들어가 있기 일쑤였다. 지나가는 어른들에게 들켜 앞서거니 뒤서거니 도망쳐 나와선 아직 살아있노라며 거침없이 바지를 벗고 보여주던 고추. 준식 또한 늘어져 있던 자신의 고추를 세우기 위해 사타구니에 힘을 모았다. 모두가 다 덕순을 범했으므로 자신 또한 범할 의무가 있는 것처럼. 그녀의 시커먼 거웃이 돋아 있는 음부를 떠올리며 밑으로 힘을 내려보냈다.
ꡒ오는 토요일이나 일요일, 댕겨가거라.ꡓ
아예 날짜까지 정해 못을 박듯 이르고는 고모는 묵음 속으로 사라졌다. 자분자분, 그간 어떻게 지냈느냐는 안부를 물어보거나 물어볼 사이도 없이 고모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버린 것이다. 지척에 두고 늘 얼굴 대하는 사람처럼 치레에 가까운 인사 따위는 생략해버린 고모는 성격이 더 급해진 듯 싶었다. 준식은 고모의 불퉁스러운 말을 실어나르던 송수화기를 한동안 움켜잡은 채 아무일도 할 수가 없었다. 마음 속에는 무언가 불온한 기운이 뭉쳐지고 있었고, 몰려오던 잠은 일찌감치 달아나버리고 없었다.
도시 인근 시골길은 더 이상 황톳길이 아니었다. 견고하고도 차가운 질감의 양회 세력은 고샅 깊숙이까지 침투해 들어와 있었고, 무심코 내려앉던 햇살은 화들짝 놀라 다시 사방으로 튀어올랐다. 때문일까. 양회길 양쪽으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있는 쑥부쟁이며 보라색 키 낮은 자운영이 더 정겨운 것은.
또래 계집애들은 이때쯤만 되면 학교 파하기가 무섭게 무리지어 다니며 나물을 캐러다니곤 했지. 사내아이들도 덩달아 계집애들의 꽁무니를 좇아 야산이며 논바닥을 헤매고 돌아다니다 땅거미가 질 무렵에야 어슬렁거리며 집으로 돌아갔다. 덕순이도 간혹 발탄강아지처럼 여자애들을 따라다니며 못 먹을 풀 따위들을 비닐주머니 가득 뽑아다가 자랑스럽게 자신의 이마께에서 흔들어보이며 제 마음에 맞는 아이를 골라 가지라고 건네주었다. 그녀의 배려 따위는 아랑곳없이 살천스러운 욕설과 함께 그 자리에 쏟아버려지던 덕순의 수고물들. 어스름이 깔리는 저녁 무렵, 쑥국 끓이는 냄새가 마을 고샅에 고일 때쯤 덕순은 마지못해 버려진 자신의 수확물 곁을 떠났다. 땅심을 잃어 축 늘어진 그것들을 한데 쓸어모아 놓고서. 그런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그녀가 호명했던 아이는 동무들의 놀림감이 되었다. 주운식은 덕순이랑 연애한다네. 연애한다네. 일정한 가락을 지키며 뽑아내던 소리들. 어찌된 일인지 덕순은 자주 자신을 지목했다. 볼품이라곤 없던 자신을. 어미 없이 거친 남자의 손에 의해 길러졌던 준식은 늘 땟국물에 절어 살아야 했고, 어쩌다 한 번 인근 도시 식당으로 날품을 팔러 다니는 고모가 와 대충 빨래며 밑반찬 등을 해주고 가는 것으로는 입성이며 용모 따위를 제대로 단속할 수 없던 준식이었다. 때문에 늘 손톱에는 때가 끼어 있었고, 머리는 귀를 덮었으며 옷에는 단추가 한두 개쯤 떨어져 실밥만 나풀거렸다.
멀리 눈에 익은 야트막한 야산이 보였다. 뒷쪽으로 제법 덩치 큰 산이 완만한 사선으로 엎드리다 문득 아쉬운 듯 한 덩어리 작게 뭉쳐 흘려 놓은 동산이었다. 솔숲을 이룬 그 산을 돌아서면 마을 초입이었다. 못생긴 소나무가 산을 지키제. 한결같이 소나무들이 굽어 있던 그 산을 마을 노인 누군가가 진눈꼽낀 눈으로 바라보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노역을 잊기 위해 들이킨 독술이 가져다 준 수전증에 손을 떨며 허전한 표정으로 그랬을 것이다. 아시안게임이다, 88올림픽 게임이다 해서 세계화가 어떻고, 한국적인 게 어떻고 하며 너도나도 도회로 빠져나가던 시절이었으므로 노인의 말 속에는 마을을 버리고 떠나는 사람들에 대한 부러움과 힐책이 함께 묻어 있었다. 평생 해 온 농사일로 손등이나 얼굴이 흙빛을 닮아 거무스름했던 그 노인은 지금 등 굽고 허리 휘어진 솔숲 안 어딘가에 묻혀 있을까.
준식은 그 다음해 마을을 떠났다. 올림픽게임이 치뤄진 다음해. 야산이 가까워질수록 준식의 걸음걸이는 눈에 띄게 느려졌다. 누군가 뒤에서 끌어당기는 것처럼 그는 지칫거리며 나아갔다. 가끔 신경질적으로 경적을 울리며 차들이 준식을 비껴 지나가고 나면 마을을 통과해 지나가는 좁은 도로에는 사람 하나 보이지 않고 햇빛만 지천에 가득했다.
양회가 닿지 않아 살빛 흙이 드러나 있는 길가에 엉덩받이 하나 없이 그대로 주저앉아 준식은 주머니를 뒤졌다. 모서리가 찌그러진 담뱃갑에서 담배를 꺼내 물기 전 그는 마른 침부터 뱉어냈다. 무언가 마뜩찮은 일을 당하였을 때 자신도 모르게 나오는 버릇이었다. 길 아래 논에는 지난해 베어 낸 벼 그루터기가 쭉정이로 변한 채 을씨년스럽게 방치돼 있고, 멀찌감치 떨어진 논에는 얼굴 익지 않은 여자가 수건으로 머리를 가린 채 열심히 무언가를 골라내고 있었다. 그 논 한구석에서 쓸모없는 쭉정이와 쓰레기가 탔다. 불은 늘 무서웠지. 준식은 대보름 저녁 쥐불 놓던 일을 떠올렸다. 깡통밑에 자잘한 구멍을 뚫고 그 안에 잘게 팬 나무조각들을 채워 씨불을 넣은 뒤 팔을 돌리면 불은 큰 원으로 돌았다. 니 불 내 불 함께 돌았다. 친구녀석들의 불을 시기하며 공기 통하도록 다시 챙겨넣던 나무 토막들. 불들이 도망가지 않게 조심하며 힘차게 돌리면 푸른 꽃처럼 살아난 씨불은 가끔, 제 모습을 감췄다가 어느 순간 불쑥 혀를 내밀어 제 정체를 드러내며 제 살점 하나를 뜯어 허공으로 날리기도 했다.
어쩌자고 이곳에 왔을까. 고모 손에 이끌려 동네 앞 야산을 휘돌며 떠나온 뒤 십삼년만의 귀향이었지만 설레임이나 호기심 따위는 없었다. 오히려 상반되는 감정들, 행여 누군가 자신을 알아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자꾸만 고개가 옆으로 돌아가고, 턱을 목으로 끌어당기곤 했다. 들숨에 빨려 들어온 담배연기가 마음 속에 뭉쳐지던 화기를 식혔다. 코로 입으로 뭉텅뭉텅 빠져나오는 담배연기는 체내를 빠져나오자 갈 곳을 정하지 못하고 결지어 몰려다니다 이내 흩어졌다.
어느 날 갑자기 준식에게 있어 덕순이는 더 이상 예전의 덕순이가 아니었다. 바보 덕순이. 누구누구랑 연애하는 덕순이. 멍청이 덕순이. 식충이 덕순이가 아니었다. 열 살 봄날에 하필이면 수두를 앓고 있는 때에. 그래 대문밖으로 얼굴조차 못 내밀고 있는 판국에.
멀리, 야산을 토해 놓은 큰 산줄기 위로 주황빛 놀이 타고 있었다. 땅거미가 지기 시작한 마을 고샅에는 아이들의 함성이 몰려다니고 준식의 귀는 그 함성의 미세한 파장까지 감지해내기 위해 소리를 좇아 줄곧 열려 있었다. 자신이 없어도 아이들은 얼마든지 놀 수 있었다. 부족하지 않게 편을 가르기도 하고, 허수한 느낌없이 한편으로 몰려다니며 자신의 부재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그 함성 때문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딱정이가 앉기 시작한 온몸이 가려워 준식이 이춤을 춘 것은. 검은 딱정이를 벗겨내면 얼굴이 얽는다는 소리에 준식은 이춤만 추었다. 위안거리라곤 키 낮은 작은 담과 열린 대문뿐. 꼽발을 들면 아이들이 몰려다니는 모습을 담 너머로 얼마든지 볼 수 있었고, 그나마 경첩이 떨어져나간 파란 철문은 아예 열어젖혀 돌멩이로 괴어 놓는 바람에 제 구실을 못하고 있었으므로 마당에 앉아 길 가 오가는 사람들을 보는 것으로 무료함과 야릇한 배신감을 달랠 수 있었다. 잡아. 그쪽이다. 여기도 두 마리 있어. 아이들은 개구리를 잡고 있는 듯했다. 잡혀 허망하게 버려질 목숨들. 아이들은 제 손에 걸려 파들거리는 놈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놀이의 재미를 가졌고, 돌멩이로 때려 한 번에 죽이는 아이가 그 날의 대장이 되었다. 고샅을 나가다보면 돌에 짓이겨 죽은 놈들을 한두 마리쯤 보게 될 만큼 아이들은 이미 살생의 쾌락에 깊숙이 빠져있었다. 꼬리를 말아올리고 제법 귀까지 쫑긋 세운 황구들은 두세 마리씩 어울려다니다 부패한 놈들의 사체에 코를 대고 킁킁대거나 어떤 놈들은 빵빵이 배가 불러보이는 데도 놈들을 씹을 때가 있었다. 하나의 생명을 빼앗는 데 아이들은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살생의 쾌감을 일찌감치 알아버린 아이들의 손에 죽어나가는 것들은 개구리말고도 많았다. 목이 꺾여 제자리를 도는 풍뎅이들. 얇은 막의 날개를 찢다 그만 뱃가죽이 두 동강 나 누런 내장을 쏟아낸 채 죽어버린 잠자리들. 개똥벌레, 무당벌레들. 끝까지 좇아가 밟아 죽이는 것들. 개미, 땅강아지. 작대기로 쉭쉭 몰다 흠씬 두들겨 죽이는 뱀. 어디 그뿐인가. 뉘집 개가 낳은 새끼가 예쁘다며 어미 몰래 서로 보듬으려 다투다 손독 올라 죽어버린 강아지들. 동네 앞 개천에서 고둥을 잡다 수초처럼 흐늘거리는 실지렁이를 건져 햇빛에 널어 하얗게 말라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며 키들거리던 한낮 모반의 시간들. 살생에 가담했던 몇몇 아이들은 일요일이 되면 교회에 나가 손을 모은 채 천진스럽게 두 눈을 감고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며 기도문을 외었다. 하지만 준식은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 뾰족한 첨탑 위에 내걸린 십자가를 보며 친구따라 몇번 나가본 적 있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높낮이 없이 느리게 이어지던 나이 든 목사의 설교는 물론이고, 기도하는 동안의 정적을 참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종교를 가진 것도 아니어서 준식이 저지른 살생의 죄는 그대로 생전의 업으로 쌓여만 갔다.
아이들 손에 죽은, 헤아릴 수 없는 영혼들이 고샅에 고여 있는 어둠에 숨어 슬금슬금 집안으로 처들어왔다. 기와대신 슬레이트를 얹은 방 두 개 짜리 낡은 집안에는 준식 혼자뿐이었다. 어느 틈에 고샅에서 쨍쨍이 튀어오르던 아이들의 함성도 멎고 마루턱에 걸터앉은 준식은 자신의 손끝에서 죽어간 영혼들에게 포위된 채 얼굴이 푸른빛으로 죽어갔다. 누군가 입을 꼭 틀어막고 있는 것마냥 소리는 목에 걸려 나와주지 않고 송곳으로 찌르는 것처럼 날카로운 통증을 수반한 요의만 금방이라도 바지에 지릴 듯 그악스러웠다. 바지에 저릴 수는 없었다. 몸 안 터럭들이 곤두서는 무서움을 참아내며 엉거주춤 선 채 바지춤에서 팽팽히 일어선 고추를 꺼낼 때 불쑥 아버지가 들어섰다. 이미 바랜 하늘색 바지춤 위로 고개를 드밀고 있는 고추를 먼저 보아버린 아버지 때문에 준식은 어찌할 바를 몰라 고추 끝만 틀어잡았다. 부출에 똥이 들러붙은 변소는 대문 옆에 있었고, 그 아래 웅크리고 있는 진한 어둠이 무서워 그저 마루 끝에 선 채로 용변을 해결하려 한 것을 만약 아버지가 알면 그 또한 지청구를 면할 수가 없었으므로 준식은 고추를 잡은 채로 어정쩡 서 있었다.
ꡒ이놈의 새끼. 고추가지고 장난치지 말라고 그렇게 일렀건만.ꡓ
수음으로 알아차린 아버지는 준식이 가지고 놀다 대문 옆에 버린 마들가리를 주워 준식에게 달겨들었다. 요의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준식은 아버지의 위협을 피해 후다닥 방안으로 뛰어들었다. 아버지는 마루 끝에 올라서지도 않고서 순순히 공격을 멈췄다. 다른 때 같았으면 잘못했노라며 두 손을 모두어 비손을 하는 와중에도 어디 가림없이 함부로 매질을 했으련만 어찌된 일인지 아버지는 처음부터 공격의 의도가 없었다는 듯 마들가리를 멀찌감치 내던져버리고 등을 보이며 돌아섰다. 핏덩어리를 놓아두고 도망가버린 논다니 계집의 자식이라 술 끝 주사가 준식에게 유난히 심한 아버지였다. 낡은 베이지색 점퍼를 걸친 아버지의 등이 왜소해보이고 추레해보였음은 왜일까. 이미 공격의 시기를 놓쳐버리고 허탈하게 돌아서는 아버지의 등에서 기 빠진 맹수의 서글픔만 망또처럼 걸쳐져 있었다.
무슨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지 저녁 내내 아버지는 한 잠도 주무시지 않았다. 한지 문을 투과해 들어오는 청람빛 어둠속에서 아버지는 연신 몸을 뒤바꿔 눕다가 종내는 눅눅한 이불을 걷고 일어나 앉아 은하수 담배를 끌어당겼다. 군데군데 옻칠이 벗겨져 흰 속살이 들여다보이는 밥상을 마주한 채 군동내 나는 묵은 김치 하나로 저녁을 해결할 때도 아버지는 아무 말도 없이 건성 밥만 퍼올렸다. 무언의 시간 속에 내포돼 있는 일상의 변화에 대한 움직임을 포착해 내기에는 준식은 너무나 어렸다. 아버지가 입질을 할 때마다 어둠속에서 담배불이 앵두만한 크기로 빠알갛게 일어났다 스러졌다. 그러다 살풋 잠이 들었던가. 우우― 친구들과 함께 꿈속에서 새끼 밴 고양이를 좇다 삐그덕거리는 소리에 준식은 눈을 떴다. 우두커니 앉아 담배만 빨던 아버지가 밖으로 나갔다. 지린내나는 이불을 소리 안 나게 걷고 일어나 앉아 준식은 눈으로 아버지 뒤를 좇았다. 비좁은 마당에 내려선 아버지는 늘상 열려 있는 철문 밖으로 소리없이 빠져나갔다. 아무도 없는 방안에서 준식은 무서움을 달래기 위해 수음을 했다. 이 밤에 아버지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어디로 간 것일까. 어둠의 사자처럼 어둠 속을 활보해 다니는 아버지를 생각하며, 하고, 또 하고, 얇은 피부가 딱딱하게 군살 박힌 손바닥과의 마찰에 얼얼하도록 고추를 붙잡고 끙끙거렸다.
발소리는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농밀한 어둠을 헤집으며 들려오는 소리들. 함부로 걷는 듯 조심성 없는 발소리가 발밑을 살피며 소리를 죽여 걷는 소리에 얽혀 방문 밖으로부터 들려왔다. 방문이 열리고 달빛 속에 드러난 두 사람의 그림자. 준식은 깨어 있다는 기척을 낼 수 없었다. 어둠 속에서 세세한 경계선이 사라진 두 사람이 이내 하나의 덩어리로 합쳐지고 있었으므로.
준식은 느릿느릿 일어섰다. 마치 바늘 끝으로 살짝 살갗을 건드리는 것마냥 햇빛이 뜨거워져 있었다. 봄햇빛에는 며느리 내놓고 가을볕에는 딸 내놓는 법이여. 기억의 한 장에서, 동네 초입, 야산 밑 누옥을 개조해 몇 년째 과자며 라면이며 술 따위를 파는 승촌수퍼 주인이 부채로 해가리개를 만들고 앉아 중얼거렸었다.
오줌싸개. 마을에서 준식보다는 더 흔하게 불리웠던 이름이었다. 적어도 자신의 놀이감 상대였던 덕순이가 자신에게 지어준 별명이었기에 더욱 치욕스러웠다. 순전히 그녀 때문에 얻게 된 호칭으로 인해 그는 아이들과 얼마나 많은 싸움질을 했던가.
그날, 어둠 속에서 다른 물체와 한 덩어리가 된 아버지를 훔쳐보던 준식은 또다시 요의를 느꼈다. 하지만 저 방바닥 밑,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질기게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바람에 준식은 꿈쩍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다 부족한 잠을 잤던가. 무언가 뜨듯한 느낌에 준식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모든 것이 끝나 있었다. 배뇨의 쾌감도 잠시, 준식은 살갗으로 느껴지는 축축하고 지린내 나는 느낌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였다.
ꡒ옴마야, 이게 뭐다여?ꡓ
새벽녘, 푸른 기운 속에서 아버지와 한 몸을 이뤘던 물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준식이 누워 있는 이불 속으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귀에 익은 음성, 혹시나 했었는데 틀림없는 덕순이었다.
ꡒ덕순이 니가 여기는 웬일이여?ꡓ
놀란 표정을 지으며 그녀의 호들갑을 되받아치는데 아버지가 옆방에서 건너왔다.
ꡒ옆방 치워놨응게로 인자부터 준식이 너는 저 방에서 자그라.ꡓ
이불이 훌렁 벗겨지고 흠뻑 젖은 요가 그녀의 손에 들려 보란 듯이 아버지와 준식 앞에 들이밀어졌다. 어떻게 손을 써 볼 수도 없이. 코앞에서 펄럭거리는 이불을 노려보며 준식이 이를 앙다물고 있을 때 아버지가 사태를 수습했다. 저것이 되게 앓은 뒤끝이라 힘이 없는개비여. 방은 다 치워놨다만은 사용치 않던 방이니께 냉기가 독하다. 아침녘에 불 좀 때줄 테니께 인자부터는 그 방에 가 지내거라. 한줌씩 털어넣던 약 때문이었을 것이다. 누렇게 찌든 요 위에 더 누런색으로 피어나 있는 오줌은. 덕순의 손에 이불 홑청이 벗겨져 금잔화 닮은 얼룩이 빠지고 다시 끼워졌는데도 그녀의 기억 속에 번져 있는 오줌자국은 결코 지워낼 수 없었다. 아버지가 집을 비운 틈을 타 이빨을 들이밀며 성난 고양이처럼 덕순이에게 덤벼들면 그녀는 겁먹은 얼굴로 손을 모두다가도 위기만 넘기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다시 준식을 오줌싸개라 불렀다.
ꡒ이게 누구야. 자네 준식이 아니여?ꡓ
동네 초입 야산부리를 돌자 확 나타난 나무 아래 소파를 내놓고 앉아 있던 문씨 영감이 반갑게 알은 체를 해왔다.
ꡒ몇 년만이여. 이것이.ꡓ
체크 무늬 모직 남방 셔츠를 입은 문씨 영감의 목소리는 아직도 우렁찼다. 십삼 년 전 고모 손에 이끌려 광주로 유학가기 전, 문씨 영감은 고단한 농사일을 달래려 흙으로 뒤발한 장화를 벗어 옆에 세워놓고 막걸리잔을 기울이며 지나온 신산한 삶에 대해 곧잘 이야기했다. 긴 타령조의 이야기. 통통 살이 오른 진분홍빛 지렁이가 긴 자국을 내며 땅을 기는 속도만큼이나 느릿하고도 음울하게 이어지던 말들. 아믄, 일본놈에게 붙어 마을 사람 못살게 하던 놈들은 뒤끝이 안 좋았제. 특히나 면장놈, 개구리눈 해가지고 추수 때만 되면 저 산에 올라 마을 사람들을 감시했어. 어디 알곡 한 톨 숨기나. 일일이 일본 순사놈한테 보고해선 빼앗아갔었제. 배고픔에 못 이겨 문씨 영감은 만주로 갔었다고 했다. 황막한 어감으로 다가오는 만주에 오히려 꿈이 있었노라고 헐헐, 이빠진 소리로 말했다. 아 글씨 만주를 가니 일본놈들이 석곡창이라고 집도 지어놓고 관청도 지어놓고, 또 땅도 배급 노나주더구먼. 게다가 적었지만 양식도 주었어. 죽어라 농사지어 일본으로 다 실어보내고 나서 배곯던 이 땅보다 훨씬 좋았제. 한 일이 년만 일본이 더 버텼더라면 이 땅은 일본놈들 차지가 됐을거구만. 모두 다 소문 듣고 만주로 옮겨갈려고 했으니께. 일본놈들이 노린 게 그거였어.
양팔을 벌리고 서 있는 것처럼 밑동 하나에 굵은 가지 두 개가 뻗어올라간 나무 아래 어디선가 주워온 소파를 내놓고 엉덩이를 묻고 있던 문씨 영감에게는 남다른 자랑거리가 있었다. 육이오 동란 때 군대를 갔던 그는 한때 전사자로 분류돼 결혼한 지 여섯 달밖에 되지 않은 아내에게 통지서가 날아갔던 것이다. 그때 그의 꽃같은 각시의 배에는 벌써 여섯 달 된 씨가 자라고 있었노라며, 은근히 자신의 튼실한 씨를 자랑했다. 조무래기들은 문씨 영감이 불사의 예언서처럼 흔들어보이며 자랑하던 전사통지문을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길쭉한 얼굴, 골 깊은 주름이 많은 문씨 영감이 기어이 준식을 불러세웠다.
ꡒ아따, 이 사람아. 자네 얼굴조까 보게 이리 가까이 오소 그래, 도회물 좀 먹었다고 신수가 훤해졌네. 자네 고모는 심심찮게 들르네만 자네는 어찌 사나?ꡓ
ꡒ그저 그렇게 살았습니다.ꡓ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한 번도 마을을 찾지 않은 데 대한 면구스러움 때문이었을 게다. 준식이 어정쩡 대답을 얼버무린 일은.
ꡒ이 사람아. 고향에도 들르고 하제 그랬나. 살면서 고향만큼 좋은 것이 어딨다고. 아 부모없는 사람은 고향이 부모나 마찬가지인 게야.ꡓ
덕순이 이야기로 번져가기 전에 준식은 문씨영감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서둘러 허리 굽혀 인사했다.
ꡒ그만 가볼랍니다.ꡓ
ꡒ이제부터는 좀 자주 다녀.ꡓ
나이 탓이었을까, 예전보다 문씨 영감의 몸피가 많이 줄어든 듯 싶었다. 작아진 몸 뒤로 자줏빛 우단 소파의 한 귀퉁이가 뜯어져 누런 스펀지가 부풀어올라 있었다. 건성, 자주 찾아뵙겠노라고 대답했지만 준식은 두 번 다시 오지 않겠노라고 내심 다짐했다. 가난한 삶의 근원지. 버리고 싶은 한때의 기억들. 모두 이곳에 맞닿아 있는 것들이었으므로.
ꡒ어서 가보소. 덕순이가 많이 아픈 모양이야. 며칠 전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한다고 하등마는.ꡓ
문씨 영감이 마른 손을 들어 먼지를 털어내는 시늉으로 준식을 재촉했다. 먹을 것만 주면 아무한테도 제 유방이며 거웃 무성한 아랫도리고 할 것 없이 보여주던 덕순이 아프다니. 못 먹는 것이 큰 병이여. 암 죽게 아파도 잘만 먹으면 거뜬히 나을 수 있지. 아픈사람이 못 먹는다는 것은 죽을 길에 접어든 거나 마찬가지제. 어릴 때 노인들이 화톳불 아래서 나누던 말들이었다. 타탁 탁. 물대신 불기를 뿜어올리는 마른 줄기에서 낮게 비명들이 터져나오고 뭉텅뭉텅 피어오르는 흰 연기가 마치 꿈결인양 희뿌옇게 노인들의 얼굴을 가렸다. 그런 날 다음이면 어김없이 밤하늘에서 살별 하나가 떨어져내렸고, 며칠 지나면 동네에서 사람 하나가 죽어나갔다. 아버지한테 죄스럽지도 않냐? 문씨 영감 앞을 서둘러 벗어나는데, 고모의 음성이 왕왕거리며 살아났다.
아버지. 아버지의 죽음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길 옆에 피를 흘린 채 얼굴을 땅에 박은 자세로 죽어 있는 것을 보고 마을 사람 하나가 연락을 해왔을 뿐. 길을 건너려다 달려오는 자동차의 속도를 이기지 못했을까. 죽어 함부로 방치돼 있던 야생 고양이나 개의 주검과 별반 다를 바 없던 아버지였다. 중학교 일학년 수학 시간 도중에 교무실로 걸려온 비상전화는 그 지루한 숫자들의 이합집산이 몰고 오던 졸음을 한꺼번에 걷어냈다. 준식아. 이 일을 어쩔끄나. 니 아부지가 죽었어야. 전화선을 타고 멀리 달려온 고모의 울음 반 말 반 소리가 수화기 속에서 웅웅거렸다. 망할 놈의 죽을 사자를 두 개 만나더니 그래 이렇게 허망하게 죽냐. 아버지 보다 일곱 살 위인 고모의 말처럼 마흔네 살에 마을 앞 도로에서 아무도 보는 이 없이 삼신줄을 놓아버린 아버지의 죽음이 믿어지지 않아 한동안 준식은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아이들과 담임선생의 동정어린 시선을 꽁무니에 매달고서 부리나케 책가방을 싸들고 준식이 마을로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잿빛 시멘트 포장도로 위에 다만 검은 자국으로만 남아 있었다. 그나마 아버지의 존재 사실 여부를 지우기 위해 누군가가 불그스름한 황토를 검은 자국 위에 흩뿌려놓았다. 그때, 햇빛은 살처럼 자신의 몸에 내려꽂혔다.
전쟁 이후 폐허가 된 땅에서 쑥부쟁이처럼 고모와 함께 질기게 살아남은 아버지. 그는 기름한 얼굴에 마른 몸피를 지닌 약골의 사내였다. 겨우 초등학교에서 글자만 깨우친 아버지는 마을 안 농사일이며 인근 도시의 공사판 잡일같은 손에 걸리고 이름 부르는 대로 따라가 닥치는 대로 일을 하던 잡부였다. 막걸리집 논다니 여자에게 스무 살 초반에 아이 하나 얻었지만 바람같은 삶에 길들여진 그녀는 제 자식도 모른 척하고 야반도주했노라며 고모는 게정을 부렸다. 따지고보면 아버지의 목숨값이나 준식 자신의 목숨 값이나 별반 다를 바 없으리라. 아버지의 알량한 새경 몇 푼의 댓가로 불하받은 생명이었으니.
보잘 것 없는 한 사내의 생은 아무런 치장도 없이 한줌의 재로 사라져갔다. 삶이 고단했다거나 정직했다는 한 마디 허사도 없이 그저 오던 대로 되돌아갔다. 아버지를 뒷산 솔숲에 뿌리고 돌아온 날 저녁에 덕순은 두살바기 미옥에게 젖을 먹이고 있었다. 음습한 방 한가운데서. 벽에 함부로 쳐놓은 대못에 바지며 점퍼같은 아버지의 옷들이 그때까지도 후줄근하게 걸려 있었고, 대문에는 조등이 미풍에 흔뎅거렸다. 부푼 풍선같은 덕순의 품에서 미옥은 자꾸만 칭얼거렸다. 채워지지 않는 허기. 미옥은 나면서부터 안으로 숨은 제 어미의 젖꼭지 때문에 편하게, 그리고 배부르게 젖을 빨아보지 못했다. 밋밋한 진갈색의 서랍장에서 아버지의 양말이며 낡은 유품들을 꺼내다 준식은 슬쩍 덕순을 훔쳐보았다. 그녀에게도 아버지와의 이별은 큰 슬픔이었던가. 자신이 낳은 딸, 미옥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두덩이가 두둑하게 부풀어 올라있었고, 연신 풀어내는 물코에 코가 빨갛게 부어 있었다. 가끔씩 투레질을 하는 것처럼 단속적으로 끊기는 덕순의 숨소리. 그러면서도 그녀는 배고파 칭얼대는 미옥을 위해 자신의 손가락 끝에 젖을 짜서 미옥의 입에 넣었다.
ꡒ이것아, 그래서 병이라도 얻으믄 어쩔라고 그래?ꡓ
씻지도 않은 손에 희뿌연 젖을 짜 자식의 입에 흘려넣고 있는 덕순을 향해 고모는 쯧쯧, 혀를 차며 말했다. 바보 병신도 지 새끼는 이쁜 법이지. 고모는 누렇게 바랜 아버지의 주민등록증을 바라보다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울음 속에 화음처럼 덕순과 미옥의 울음이 섞여들고, 삼중창의 기묘함에 준식은 저도 모르게 진저리를 치며 밖으로 나와버렸다.
마을 뒷편 큰 줄기를 이룬 산들이 독수리의 머리처럼 민둥산이었다. 울울하게 숲을 이루던 상록의 나무들이 검은 빛으로 죽어 있고, 군데군데 삐죽이 남아 있는 검은 뼈대들이 산에 일어났던 불길이 어떠했는가를 말해주었다. 하지만 순환되는 생사의 시간 속, 그 사슬 밑자리에 연보랏빛 진달래가 검은 지표 밑으로 뿌리를 내리고서 땅 속 생성의 기운을 힘차게 빨아들이고 있었다. 불길 속에서도 온전히 지켜낸 숨줄. 두려움과 상처를 떨쳐내고 피어난 꽃은 그대로 화엄이었다. 하지만 살아 있음이 축복이 되지 못하는 생물도 있음을 준식은 알았다.
덕순의 흐벅진 허벅다리와 그 위, 검붉은 그녀의 질을 보지 않은 사람은 마을 안에서 드물었다. 바보라고 놀림받는 그녀의 영혼이 특별히 신에 의해 점지된 무구의 것이었다면 불길을 이겨내고 화엄을 이뤄낸 꽃떨기와 무에 다를까… 말 그대로 그녀의 음부 속에 도사리고 있는 질을 마을 남자들은 거의 대부분 제 것 다루듯 했고, 준식이 끼어 있는 마을 아이들에게도 그녀는 어떤 땐 치마를 훌렁 걷고 다리를 벌려주곤 했다. 공용(共用)의 용기처럼 사용되던 그녀였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공공연하게 드러내놓지는 않았고, 아버지의 여자가 된 이후로 그들의 합일은 더욱 은밀해졌다. 그때부터였다. 아버지의 매질이 준식에게가 아닌, 덕순이에게 옮겨간 것은. 그녀의 몸에 찰싹 찰싹 들러붙던 마들가리는 덕순의 몸에 한 번씩 날아와 앉을 때마다 토실하게 살이 오른 검보라빛 뱀들을 한마리씩 새겨내곤 했다. 유난히 매를 무서워하던 그녀였다. 늘상 헤픈 웃음을 싣고 있던 그녀의 입가에 진득한 침을 고이며 길게 곡성을 뽑아낼 때쯤이면 기와를 얹은 흙돌담 너머 집들에선 집기를 내던지며 욕설을 퍼붓는 남자들의 소리와 앙칼지게 날이 선 여자들의 소리가 쨍쨍이 뒤섞여 넘어오곤 했다. 그녀의 질 속에 남겨진 다른 남자의 정액을 보는 아버지의 기분은 어땠을까. 잘 씻지 않아 구리구리한 냄새가 나는 그녀의 사타구니 안에 배어 있는 수상쩍은 비릿함. 하지만 그 밤, 그녀에게 가했던 형벌의 시간 뒤에도 아버지는 덕순이의 질을 오래도록 탐했고, 자신은 그 밤에 덕순의 질을 떠올리며 성난 고추를 붙잡고 지치도록 수음을 했다. 아버지의 눈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던 것은 그 탓이었을게다. 열두 살의 나이에 아버지의 여자를 범했다는 죄책감. 아버지에게 시집 오기 전까지 그녀의 집에서는 정충을 죽이는 피임약을 덕순이에게 먹였다고 했던가. 그 피임약을 아버지는 몰랐다. 그래 얻은 미옥이. 하지만 아버지는 미옥을 결코 자신의 아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ꡒ야 니 어무니 간다.ꡓ
조무래기 꼬마들이 냇가 바위틈에서 고둥을 잡다 허리를 펴고서는 무언가를 보자기에 싸들고 부지런히 마을 윗쪽으로 올라가는 덕순을 가리키며 말했다. 허리춤에 고무줄을 박은 검은색 면 홑치마를 흩날리며 그녀는 마을 위 대밭을 지났다. 가서 놀려주자며, 누군가의 은밀한 목소리가 아이들의 동의를 구했고, 게으르게 퍼져 있는 오후의 햇살을 첨벙거리며 고둥을 잡던 아이들은 일시에 적으로 간주하듯 준식을 돌아보았다. 단박 어떠한 신호를 보내지 않으면 그들 무리로부터 낙오됨을 알고 있는 터라 준식은 자신 스스로 그들과 혈맹의 단원임을 증명하기 위해 선봉에 나섰다. 덕순을 놀려주는 일이야 언제나 있었던 일이고, 한 번도 그녀를 어머니 또는 가족의 일원이라 생각지 않았으므로 신발을 주워 신고 냇가를 빠져 나올 때 발걸음에는 탄성까지 붙어 있었다.
덕순이 밟고 올라간 길을 그대로 따라가는 아이들 발밑 앞으로 그림자가 길게 누워 수선스러웠다.
ꡒ밤마다 느이 아버지하고 그짓 하제?ꡓ
쇠날처럼 날아오는 질문들. 음성들은 달랐다. 키들거리는 놈들 가운데 만만해 뵈는 녀석 하나를 골라 눈앞에 종주먹을 들이대며 죽인다고 협박해도 준식의 위협은 그들의 웃음 속에서 번번이 힘을 잃었다. 준식의 어머니는 바보 덕순이. 오히려 그들은 새로운 놀이 대상을 만났다는 듯 점점 준식과 간격을 넓힌 채 큰소리로 놀려댔다. 새들처럼 날아오른 아이들의 합창이 그늘 짙은 대밭에 날아가 앉았다. 오후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무리지어 다니는 개들 또한 아이들의 뜀박질에 덩달아 달리며 준식의 부아를 돋궜고, 여기저기 함부로 내갈겨진 소와 개들의 오물을 피해 돌멩이를 주워 그들을 향해 힘껏 내던지며 쨍쨍하게 솟아오르는 부아를 삭혔다. 그의 분노가 쨍쨍하면 쨍쨍할수록 아이들은 더욱 의기양양했다. 마치 불땀 좋은 불길이 잘 마른 나무를 만난 듯. 날아오른 돌을 피해 우르르 오던 길을 되짚어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씨근덕거리며 지켜보던 준식은 제풀에 꺾여 털썩 길가에 주저앉아 손 안에 들어오는 것들, 삐죽이 잡히는 풀잎이며 돌멩이들을 되는 대로 집어던졌다. 하지만 그것들은 얼마 날아가지 못하고 떨어졌다. 어느 틈에 재편된 구도, 덕순이는 아버지와, 아니 아버지는 덕순이와 한 편이었고, 아이들은 저들끼리 한 패였다. 혼자라는 것을 알기에는 열한 살의 나이는 너무 어렸고, 하염없이 쏟아지는 햇빛 속에서 처음으로 가출을 꿈꿨다.
만만해 뵈는 놈의 이름이 영두였던가? 키가 작고 부스럼 딱지가 머리에서 가실 줄 몰랐던 그 아이. 유난히 겁이 많아 마을 초입, 수령 사오 백년 묵었다는 당산나무 앞도 혼자 가길 꺼려했던 아이. 하긴 그때 우람하게 버티고 서 있는 당산나무를 두려워하지 않은 아이가 뉘있으랴. 조무래기 네 명의 아름으로도 안을 수 없던 당산나무 밑동의 표피는 노인의 주름처럼 깊은 골이 패어 있고, 나이테와 생명줄 물관이 있어야 할 내부는 휑하게 구멍이 뚫려 음습한 어둠만이 고여 있었다. 시간을 초월하듯 나이테를 지워버린 나무는 대신 많은 이야기들을 간직하고 있었다. 어느 날 마을에 소도둑이 들었지. 헌데 소를 몰고 도망가던 이 소도둑, 당산나무 목신에 붙들려 그만 미쳐버린 거야. 미쳐 나무를 빙빙 돌고 있었지. 그 뒤부터 꼬박꼬박 당산나무에 제를 올리게 된 거야. 이장 할아버지의 말이었다. 어찌된 일인지 그 나무가 죽어버렸다. 누군가 시간이 실종돼버린 그 밑동 안에 불을 놓은 것이다. 안으로 안으로 타들어가는 불길을 잡지 못해 마을사람들은 발만 동동 구르며 탄식을 했다. 까맣게 그을린 몸체만으로 이태를 버티다 나무는 스러졌다. 혹여 타버린 몸체 어딘가에 한 줄기 숨줄을 붙들고 있을지 모른다며 어른들은 이태 동안 당산나무가 연녹의 잎새를 피워올리기를 기다리며 제를 올렸다. 하지만 나무는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린 채 가지를 힘없이 부러뜨리며 사라져갔다. 누구였을까. 누가 당산나무 속에 불을 놓았을까. 의견은 분분했다. 아들 점지를 바라던 현자네가 딸을 낳은 홧김에 그랬을 거라는 이야기도 있었고, 덕순이가 그랬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또 아이들의 불장난이 씨가 됐다는 이야기도 떠돌았고, 하느님을 믿는 예수쟁이들이 그랬다는 소리도 나돌았다. 그래서였을까. 이태 동안 마을에 지독한 흉년이 든 것은. 마을 앞 저수지가 벌겋게 배를 드러내고 돌 틈 사이를 휘돌아 졸졸거리며 흐르던 실개천도 물줄기가 끊어지면서 피라미 송사리가 죽어나갔다. 사람들은 식구들대로 물동이를 동원해 물을 길어나르고 우물을 파고 멀리 물 있는 곳으로부터 물길을 만들어 물을 끌어오곤 했지만 언제나 그 양이 많지 않아 인심은 흉흉했다. 돌아선 인심을 이기지 못해 현자네는 결국 마을을 떠나야 했고, 뾰족한 첨탑에 십자가를 매단 교회당은 절대 마을로 들어올 수 없었다. 고집스럽게 그때의 기억들을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들. 옹이처럼 박혀 있는 그때의 기억을 사람들에게서 제거하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지금도 마을에는 교회가 없다.
멀리 낯익은 대문이 눈에 들어왔다. 십년 전 아버지의 죽음을 알리던 조등이 흔들거리던 대문. 떨어져나간 경첩을 손보지 않아 늘 열려 있던 대문. 대문 옆으로 돌과 황토를 서로 번갈아가며 쌓고 그 위에 기와를 올려놓은 담과 군데군데 허물어져 있는 돌담 위로 삭을 대로 삭은 슬레트 지붕이 보였다. 지금이라도 되돌아가면 그만이었다. 십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로 고향은 의미가 없는 땅이었다. 자신을 낳아 준 어머니가 자신을 버린 곳. 보잘 것 없는 사내에게서 분양받은 생명. 그 악연의 땅. 태생에 대한 자부심이 없었으므로 고향은 차라리 외면하고 싶은 곳이었다. 헌데 무엇에 이끌려 여기까지 왔을까. 정 하나 붙일 데 없던 도회생활에 익숙해진 지 오래. 작은 자동차 정비공장에서 일 배우며 잔손 거드는 일에 이력이 붙어가고, 지루한 햇볕만 지천으로 깔려 있는 고향보다는 차라리 지낼 만했다. 그러고보니 손에는 달랑 불 붙은 담배 한 개비 들려 있을 뿐 빈손이었다.
문짝이 떨어져나간 대문 안으로 들여다보이는 집안에는 사람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빈 집마냥, 양회벽은 부스러져나가고, 양철을 덧댄 처마 한 쪽이 뜯겨져 나간 채로 방치돼 있는 을씨년스런 풍경에 준식은 가슴 한 쪽이 시큰거렸다. 유난히 단 것을 좋아하던 그녀를 위해 사탕 한 봉지라도 샀어야 됐을 것을… 뒤늦은 후회에 준식은 손에 들린 담배만 볼우물이 패도록 깊이 빨아들였다.
그때 불쑥 방문이 열렸다. 짧게 자른 머리에 자잘한 굵기의 웨이브 파마를 넣은 육덕 좋은 여자. 빨간색 블라우스에 검은 바지를 입은 중늙은 여자. 손에 세숫대야가 들려 있었다. 불쌍한 것, 그래도 지 새끼라고… 개구리처럼 아랫배가 튀어나온 그녀는 고모였다. 손에 들고 있던 노란색 플라스틱 세수대야의 물을 마당에 휙 뿌리고나서는 고모는 칵― , 가래를 뱉어냈다. 마당으로 흩뿌려진 물방울들 주변으로 풀썩, 먼지들이 날아오르고 고모는 소매로 쓱 입가의 침을 닦으며 도로 방안으로 몸을 숨겼다. 덕순이. 그녀는 지금 자신의 딸 미옥이를 기다리고 있는가. 아버지 초상에 만났던 아이. 거무스름한 꽃으로 피어 있던 젖 꽃판 속에 숨어버린 유두 때문에 늘 허기져 울음이 시원치 않던 아이. 열네 살쯤 되었을까. 하지만 어디에도 여자아이의 흔적은 보이지 않고 수선스러운 사월의 햇빛속에서 집안은 죽은 듯 고요했다. 준식은 그 아이가 보고 싶었다. 서로의 무의식 속에 똬리져 들어앉어 있을 자궁에 대한 기억이 다른 이복의 동생. 동생이란 어감이 햇물과일처럼 시큰했다.
ꡒ고모.ꡓ
나지막하게 불렀다. 하지만 햇살 속에 그만 풀리고 마는 소리였다. 고모. 배꼽 주변에 힘을 끌어모아 다시 내뱉은 소리에 문이 열렸다.
ꡒ누구여?ꡓ
눈썹에 진한 문신을 새겨 넣은 고모의 얼굴이 열린 문 사이로 드러났다. 한 쪽이 갈매기의 날개처럼 각을 이루며 꺾어내리고, 다른 한 쪽은 궁륭처럼 휘어지는 짝짝이 문신. 더욱이 가장자리로 푸르스름한 기운까지 번져 있는 그 진한 문신 탓에 고모의 인상은 사나워 보였다.
ꡒ그래 와야제 아믄.ꡓ
고모의 어깨 너머 방안에는 어둠만이 장막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올케, 준식이 왔네. 그녀가 고개만 돌려 방 안, 고여 있는 어둠속을 향해 말했다. 방안으로 들어서자 구릿한 냄새가 먼저 준식을 맞았다. 햇살에 길들여진 눈이 방안 어둠에 길들여질 때까지 준식은 연신 눈을 껌벅거려야 했다.
ꡒ올케, 준식이 왔다니까.ꡓ
고모는 언제부터 그녀를 올케라고 불렀을까.
ꡒ그래 보고 있어.ꡓ
마른 소리가 들렸다. 귀에 익은 소리.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십여 년 전의 세계로 돌아간 듯했다. 어둠 속에 그녀가 보였다. 힘이 없는 듯 헐거워보이는 입술 사이로 희미한 웃음을 빼어물고 있는 그녀. 그녀를 덮고 있는 분홍색 얇은 이불 여기저기에 누런 얼룩이 묻어 있었고, 누벼진 세로 선에서는 실이 끊겨 실밥이 나풀거렸다.
ꡒ왔어?ꡓ
하얗게 침이 메말라붙은 그녀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살집 좋던 그녀의 얼굴에서 광대뼈가 도드라져 보이고, 삘기속같은 흰 서리가 그녀의 머리카락에 무성히 내려와 있었다. 덕순이는 자신의 생에 있어 한때 비밀스런 동굴이었고, 온갖 이야기를 잣는 물레였고, 상처를 내는 끌이었으며, 해독할 수 없는 암호였고, 분노의 샘이었고 막다른 골목에서 만나는 한 마리 맹수였다. 또한 아버지 몰래 훔쳐보곤 했던 그녀의 성기는 충격이었고, 유방은 설레임이었다. 헌데 그녀,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니 아버지가 자꾸만 오래. 그녀의 힘없는 말이었다. 아버지가 있는 세상. 그 경계에 있는가.
ꡒ불쌍한 것.ꡓ
고모가 고개를 돌리며 물코를 풀어냈다. 이놈아 그래 그렇게도 살기가 팍팍하더냐? 가족 몰라라 하며 사는 것들 잘 되는 거 못 봤다. 고모의 음성에도 물기가 배어 있었다. 예년의 살집은 어디로 갔는가. 이불 위로 돋아 있는 그녀의 몸피가 작아 보였다. 작아 보여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것만 같았다. 한 마리 나비처럼. 이불을 빠져나가 팔랑 팔랑 먼 곳으로 날아가버릴 것만 같았다.
ꡒ예전엔 참 좋았어. 그치?ꡓ
확인하려는 듯 덕순은 힘겹게 눈꺼풀을 밀어올리며 준식을 바라보았다. 그치라는 말에 힘주어 말하는 그녀의 물음에 준식은 고개만 끄덕였다. 하지만 좋았다는 그녀의 말에 준식은 동의할 수 없었다. 자신에게 상처였듯 그녀에게도 지난 시간들은 상처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두뇌 속 인식체계들은 그 모든 것들을 즐거움의 코드로만 입력시켰던가.
ꡒ다들 날 좋아했어. 나도 너희들이 좋았어. 그때.ꡓ
그녀는 말끝마다 되물었다. 하지만 준식은 입을 꾹 다문 채 조상처럼 굳어 있었다. 군데군데 드러난 흙벽을 가리기 위해 신문지로 도배한 벽은 그나마 끝이 들떠 흙부스러기가 떨어져내리고, 격자 무늬 창문은 여기저기 살이 부서져나가고 종이가 찢겨져 외부의 기운이 여과없이 들어왔다. 동네 남자들도 그랬지. 지나가다가도 나를 보면 꼭 말을 걸곤 했으니까. 이어지는 덕순의 말. 아무한테나 다리를 벌리며 히죽이 웃던 그녀의 모습이 울연하게 떠올랐다. 아랫도리 단속을 못한다며 그날은 아버지에게 흠씬 두들겨맞고 덕순은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손톱을 물어뜯으며 투레질 섞인 질긴 울음을 울었었다.
ꡒ헌데 니 아부지만 날 싫어했어. 그렇지?ꡓ
준식은 말없이 고개만 주억거렸다. 한 논다니에게서 얻은 자식 하나만으로는 인생살이가 팍팍하고 외로웠을 것이다. 자신의 것이 아닌 타인의 살이 그리울 때도 있었을 테고 체온이 필요했을 게다. 하지만 능력 없는 자. 가진 것 없고 볼품 없는, 더욱이 철부지 자식까지 딸린 나이든 남자에게 평생을 의탁해 올 여자가 뉘 있었으랴. 덕순이 말고. 그런 반편이 여자라도 잡도리해서 아버지는 헛헛한 이불 속을 달래고 싶었을 게다.
ꡒ니 아부지가 자꾸만 오래.ꡓ
입술을 달싹거리기도 힘겹다는 듯 그녀는 말 중간 중간에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의 음성 속에 숨어 있는 기다림. 그녀는 무엇인가를 기다리느라 쉬 이승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그 기미를 눈치챘는지 고모는 연신 눈가만 훔쳐내며 알아듣지 못할 혼잣말을 했다. 가끔씩 덕순의 힘없는 시선이 창호문 밖으로 멀리 투과해 날아가는 것을 준식은 목도했다. 개나리, 진달래, 벚꽃이 흐드러지는 화창한 봄날. 음울한 방안 이불 속에서 시름시름 시들어가는 덕순의 눈에 봄꽃들의 화사한 빛이 보일까.
ꡒ연락은 했어. 하지만 안 올 거야. 올케. 걔를 위해서 잊어. 잊는 거야. 아믄 이제 열네 살인데. 더욱이 기집애인데 앞길이 구만리라고. 올케와는 달라. 살 날이 살아온 날보다 더 많단 말이야. 그러니 걔를 위해서라도 잊어. 그래도 걔를 맡아 길러 줄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올케는 행복한 거야.ꡓ
아버지가 손짓하는 대로 쉬 가지 못하고 그녀가 기다림의 시간 속에 머무는 것을 준식은 알았다. 불결한 자신의 손가락에 초유를 짜내 오물거리는 아이의 입에 넣어주던 그녀. 모성의 본능이 그녀를 놓아주지 않고 있는가. 그래. 그 아이. 준식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피붙이. 그 아이가 벌써 열네 살이다. 태생의 비밀을 위해 아이를 데리고 덕순의 가족은 먼 곳으로 삶처를 옮겼었지. 자신을 낳아준 얼굴 모르는 여자는 자신을 버렸는데, 바보 덕순이는 언제 끝날지 모를 기다림의 시간 속에 멈춰서 있었다.
시간은 끊임없이 가고 있으되, 그녀가 머무는 세계 속의 시간은 하염없이 정지해 있었다. 문 밖에는 어느새 화창한 봄햇살이 걷히며 어둠이 찾아들고 있었고, 대신 형광등 불빛만 파르스름하게 방안을 떠돌았다. 고모는 그 사이 변소를 가고, 그녀의 입에 물을 흘려 적셔주고, 저린다는 그녀의 다리를 주물러 주었다. 조그마한 기척에도 덕순의 시선은 생기있게 창호문에 엉겨붙었지만 이내 힘없이 되돌아오고 말았다. 니 아버지가 내 손을 잡아끌어. 띄엄띄엄 내뱉는 그녀의 말이 파르스름한 형광등 불빛 아래서 흰나비로 날아다녔다. 사막같이 풀썩거리는 그녀의 육신 안에 와디가 숨겨져 있었나. 비밀스러운 강. 주르륵 마분지같은 그녀의 얼굴 위로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준식은 담뱃갑을 찾아 손에 들고 밖으로 나왔다. 타탁. 라이터에 불을 일으켜 담배 끝에 대고 빨고, 길게 연기를 내뿜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살빛 낮달이 금빛으로 빛났다. 청람색 밤하늘에 살별 하나 꼬리 이끌고 떨어져내리고 동네에서는 뉘 집 개가 컹컹 짖었다. 숨어 있던 쥐들이 눈을 빛내며 먹이를 찾아 어둠 속을 달리고 사람들은 하루 일상을 접고 잠자리에 드는가. 마을 안엔 괴괴함만이 감돌았다.
여전히 그녀의 시선은 창호문에 붙박혀 있을 것이다. 바보 멍청이 덕순이. 아버지의 영혼은 질기게 숨줄을 붙들고 있는 그녀 주변을 맴돌며 채근하고 고모는 졸음에 겨워 고개를 떨어뜨리다 어느 순간 화들짝 가슴에 붙어 있던 턱을 쳐들며 아이고 불쌍해라 하면서 눈가를 훔쳐낼 것이다. 그래도 저것이 니 아버지는 끔찍이 위했어야. 하나밖에 없는 아들놈인 너보다도. 지도 여자라고 살림도 하느라고 했어. 든든한 맘이야 니한테 거는 게 더 컸겠지만 그래도 정 붙이고 살다보니 니 아버지 허전한 맘도 잡아졌제. 십년 전 조등을 치우면서 고모가 했던 말이 되살아났다. 꽁초까지 타들어간 담뱃불이 손가락에 닿을 듯 뜨거워 준식은 바닥에 버렸다. 달빛만 교교히 흐르는 대문 너머로 준식의 시선이 가 서성였다.◇
◇은미희 95년 <한국여성문학상> 소설 우수상 수상.
96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 『광남일보』 <광남문학상> 수상. 99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소설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