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라니와 백로
예쁘고 날렵하고
우아한 자태와
고생대를 일깨우는
끔찍한 울음 소리
사이에서
난 좀 당황했었지
보이는 것들은
안 보이는 것들의
허상이야*
이들도
사랑을 나눌 땐
감미로운 교성을 낼까?
이들이 등장하는
만화영화 속
성우들의 목소리처럼.
*성경: "믿음은 바라는 것들이 실상이다"
검은 빵
검고 딱딱한 빵을 씹으며 희망을 노래했던 그 시인은 변절했지만 젊은시절 내내 나는
생라면을 씹으며 그의 시를 외웠었지 물론 아무도 듣지 않았어 우물쭈물 웅얼거리기
만 했었으니까
대학시절엔 아주 어둡고 우울하고 이기적이고 난해한 스승에게 현대시를 배웠지만
몸이 따라주지 않았어 막일에 지쳐있었고 열등감이 들통날까 눈만 부라리고 다녔지
사고무친 고학생이었던 내 피묻은 돈 떼먹은 녀석들은 지금 어디서 살까 살아있기는
할까 이제 이름조차 희미하고 얼굴 윤곽조차 흐려지네
어느덧 돌아가신 스승의 나이 근처에 이르러 스승의 시를 다시 읽으니 스승이 씹었던
캄캄한 시간은 씹을 엄두도 나지 않고 가슴만 먹먹해지는군
전활 걸었지. 요즘은 카톡이 대세라는데 공짜라는데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냐구?
그러게. 전활 걸었지. 연애 걸듯이 문자 찍는 건 아직 서툴러. 눈도 흐리고 대세와
는 늘 거리가 멀어. 연애처럼 잘 적응이 안돼. 전활 걸었지. 오래된 번호. 증발된
번호. 저승 간 번호에 전활 걸었지. 그곳에도 공짜가 있냐고
월간 <문학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