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문명과 한국의 사회운동
이시재(李時載)
가톨릭대 사회학과 교수.
맑스와 로스토우, 그리고 IMF
시장경제의 시대
불완전한 그리고 지속불가능한 시장경제
‘방법’으로서의 시장경제
생활ㆍ생명공동체 건설을 위해
맺음말
주제토론
1. 맑스와 로스토우, 그리고 IMF
맑스와 엥겔스가 빠리에서 『공산당선언』(The Communist Manifesto)을 발표한 지 150년이 되었다. 금년 5월 빠리에서는 『공산당선언』 발표 150주년 기념행사의 하나로 ‘자본주의의 대안은 무엇이며, 인간해방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데리다(J. Derrida), 발리바르(E. Balibar), 네그리(A. Negri) 등 세계적인 논객들이 발표ㆍ토론하는 국제학술회의가 열린다고 한다. 1989년 이래 동구의 공산주의체제가 몰락하고 자본주의 시장체제가 전세계를 통합해가고 있는 이 시점에 『공산당선언』을 다시 언급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맑스ㆍ엥겔스가 인식했던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본질은 무엇이며, 오늘날 그것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그리고 새로운 문명의 패러다임을 추구하는 변혁운동에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생각해보는 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작년 말 외환 및 금융위기로 인해 우리나라 경제가 IMF의 관리하에 들어감으로써, 우리는 그들이 요구하는 경제구조 개혁과 제반 변화를 통해서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 IMF가 요구하는 변화는 기본적으로는 자본의 자유로운 활동과 이동을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며, 이를 저해하는 제반 규제를 철폐하자는 것이다. 또한 IMF는 자본의 자유로운 활동과 이동을 촉진하기 위해 정치ㆍ사회ㆍ문화 등 비경제적인 영역에 이르기까지 전반적인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금융ㆍ재정정책은 물론이요 국회에서 처리되는 여러가지 법률의 내용과 노사정 협의의 일정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IMF의 제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되는 상태에 처해 있다. 이러한 변화는 경제적 효율을 향상시킬 뿐만 아니라 ‘정의’의 외양을 갖추고 있어서, IMF 요구의 도덕적 우월성이 주장되기에까지 이르렀다.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지닌 이러한 특성에 대해 맑스와 엥겔스는 이미 150년 전 『공산당선언』에서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세계변혁의 주역으로서 부르즈와지의 역할을 강조하였으며, 부르즈와가 지구의 방방곡곡에서 생산도구와 생산관계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관계를 ‘혁명화’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부르즈와지는 세계시장의 개발을 통해서 모든 나라의 생산과 소비에 보편적(cosmopolitan) 특성을 부여함으로써, 민족적 편견을 넘어서서 또 광범한 통신수단을 동원하여 “가장 야만적인 민족들까지 포함하여 문명세계”로 끌어들이는 ‘문명화’의 역할까지 담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부르즈와지는 “자기 자신의 이미지에 맞춰 세계를 만들어내”는 자민족중심주의적인 특성까지 갖고 있다.註1)
그들의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대한 인식은 하나의 세계시장이 완성되어가고 있으며 국민국가의 역할이 약화되어가는 현시점에서 더욱더 커다란 설득력을 지니게 되었다. 그들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보편성을 주장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갖는 ‘문명화’의 기능까지 설파함으로써 시장경제가 역사적 진보를 선도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공산당선언』에서는 국가의 존재 또한 두드러지지 않았다. 이 점도 IMF가 마치 국민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자본의 자유로운 활동과 이동을 요구하는 것과 상응한다.
『공산당선언』은 그후 서구에서 50년 이상 노동운동과 혁명운동의 이론을 제공하였으며, 20세기 초반에는 러시아혁명을 비롯하여 중국혁명, 동구의 혁명 등을 불러일으킨 최대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1989년 동구의 사회주의가 붕괴하기 전까지는 비사회주의권의 혁명가ㆍ사회운동가ㆍ학생운동가 들에게 거의 유일한 대안(alternative)이 사회주의혁명이었다.
『공산당선언』의 안티테제로서 미국 경제학자 로스토우(W. Rostow)는 ‘비공산당선언’이라는 부제가 붙은 『경제성장의 제단계』를 1960년에 발표하였다.註2) 케네디정권의 경제고문이기도 한 로스토우의 성장단계론은 ‘개발의 10년’(1960년대)의 이론적 기초가 되었으며, 이 모델에 따라 한국ㆍ타이완ㆍ홍콩ㆍ싱가포르 등 아시아 신흥공업국의 경제발전전략이 수립되었다. 맑스ㆍ엥겔스 유물론의 단계론적인 역사관을 의식한 듯, 그는 경제성장의 단계를 1 전통적 사회 2 이륙(離陸)을 위한 선행조건 3 이륙 4 성장에의 전진 5 고도대중소비시대로 나누었다. 전통적인 농업경제가 일단 공업화의 이륙(takeoff)을 이루게 되면 지속적인 성장이 가능하며, 고도대중소비시대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맑스ㆍ엥겔스 이론에서 혁명이 고통받는 노동자들에게 희망인 것처럼, 로스토우의 성장단계론에서 ‘이륙’(비행기의 이륙에서 따온 말)은 저개발국가의 정치지도자나 민중들에게 마력을 지닌 담론이었다. 전통적인 빈곤의 순환구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이륙이 필요하였다. 로스토우는 이륙을 위한 선행조건으로 전통적인 사회의 변화, 투자율의 상승, 사회간접자본의 확충, 농업에서 공업으로의 산업구조의 변화, 정치적 통합과 민족주의 등을 들고 있다.
로스토우의 성장단계론도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전통사회를 비롯한 사회 각 영역의 변화를 요구하였다는 점에서 맑스와 엥겔스가 주장하는 자본주의의 ‘문명화’론과 맥이 통하는 바가 있었다. 빈곤을 넘어선 지속적인 경제성장과 고도대중소비에 대한 약속은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당위였다. 그것은 또한 서구화ㆍ근대화 등 문명사회로 나아가는 길이기도 하였다. 맑스ㆍ엥겔스와는 달리 로스토우는 성장단계론에서 급격한 계급변동을 설정하지 않았다. 그는 경제성장은 강력한 국민국가와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의 강화를 통해서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점도 맑스ㆍ엥겔스의 변혁론과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로스토우의 성장단계론은 우리나라 1960년대 경제발전전략의 성전(聖典)과 같은 것이었다. 정부는 이륙의 전제조건을 갖추기 위해, 외국에서 많은 자본을 들여와 저축ㆍ투자율을 높였으며, 근대화의 이름으로 사회적인 변화를 추구하였다.
이러한 로스토우의 성장단계론은 1970년대에 ‘종속이론’(dependency theory)이 등장하면서 많은 비판을 받게 되었다. 성장단계론은 이륙을 위해 많은 희생을 강요하며, 이것이 바로 아시아ㆍ라틴아메리카 등에서 개발독재를 허용하는 논리로 사용된 것이 사실인데, 종속이론과 세계체제이론에서는 성장단계론이 경제성장을 약속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세계적 규모의 자본축적 과정이며, 중심부 자본주의와 주변부 자본주의 사이의 지배-종속 구조가 바뀌진 않는다는 것이다.
성장단계론이 발표되고 30년 이상 지난 후 돌아보면, 아시아의 NIES(신흥공업경제지역) 이외에도 중국ㆍ베트남 등 사회주의권 국가, ASEAN(동남아국가연합)의 여러 나라들은 거의 전부가 이륙단계를 거쳐 성장을 위한 전진을 거듭하고 있다. 또 성장단계론에 충실했던 NIES모델은 다른 지역의 개발도상국가뿐만 아니라 동구 사회주의 시장경제에서도, 높이 평가받게 되었다. 1997년의 금융ㆍ외환위기 이전만 하더라도 NIES 제국은 이미 고도대중소비시대를 구가하고 있었다. ‘비공산당선언’이라고 불리는 성장단계론은 현재까지 ‘성공’이 입증된 셈이며, 변화되어야 할 전통사회ㆍ농업사회가 전면적으로 바뀌었고, 그 결과 경제ㆍ기술관료의 층이 확대되고 중앙정부의 권력이 강화되었다. ‘저발전의 발전’(development of underdevelopment)을 핵심 명제로 내세운 종속이론은 한국을 비롯한 NIES의 등장으로 급격히 설명력을 상실하였고, 급기야 ‘종속적 발전’(dependent development)이라는 변종 종속이론이 등장하기까지 했다.註3)
한편에서는 1989년 동구 사회주의국가들의 몰락 이후, 사회주의에 대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승리를 주장하는 담론이 풍미하였다. 사회주의의 몰락이 바로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라고 주장할 수 있나라는 의문이 있으나,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몰락한 뒤 시장경제가 전지구를 지배하게 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역사의 종언’註4) 으로 표현된 자본주의의 역사적 ‘승리’는 동시에 유토피아의 상실이라는 씁쓸한 뒷맛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1997년 여름 홍콩의 중국반환에 이어 타이ㆍ인도네시아ㆍ홍콩ㆍ한국 등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 닥친 금융ㆍ외환위기는 동아시아 경제성장의 비밀을 한꺼번에 폭로한 것처럼 보인다. 이제까지는 냉전체제 속에서의 번영이라는 특수한 환경에 가려, 동아시아의 성장이 종속의 고리를 벗어난 듯한 인상마저 주었다. 이번의 경제위기가 동아시아의 성장잠재력을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까지는 되지 않겠지만, 동아시아의 성장과 이륙, 그리고 고도대중소비시대의 도래도 결국 선진자본주의에 대한 종속의 고리 안에서 가능한 것이었다는 점이 밝혀진 셈이다. 또 주권국가와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경제발전모델은 더이상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기준에 맞지 않다는 것도 이번 사태를 통해서 밝혀졌다. 우리는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떠나서 경제발전을 생각할 수도 없지만, 동시에 종속을 통한 발전의 한계가 무엇인지도 분명히 알게 되었다.
2. 시장경제의 시대
1997년 12월 3일, 우리는 IMF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그로부터 우리는 승리한 시장경제의 교설(敎說)을 들어야 하는 뼈아픈 체험을 하고 있다. 그 교설이란 시장에서 자본ㆍ노동ㆍ상품ㆍ써비스가 모두 온전한 상품으로서 기능할 수 있도록 모든 경제외적인 거추장스러움은 제거돼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에 대해서는 국적을 묻지 말 것이며, 투자의 성격을 따져서는 안된다. 노동은 온전한 상품으로서 항상 매매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정부는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만을 담당하고 시장이 스스로 형성하는 질서를 왜곡해서는 안된다. 자본의 활동에는 국가의 비호도 없으며 족쇄도 있을 수 없다. 그렇게 해서 경쟁력이 없는 기업과 노동은 시장에서 퇴출되어야 한다. 시장의 교설은 냉혹하였다. 이것은 들어도 좋고 듣지 않아도 좋은 것이 아니었다. 이에 따르지 않을 경우 한국경제와 국가는 파국에 이를 것이기 때문에 아무 소리 말고 따르지 않으면 안되는 명령과 같은 것이었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작년 12월 19일 당선되자마자, 대통령당선자의 자격으로 경제단체장들을 모아놓고, ‘IMF와의 협력이 국가운명을 좌우한다. 시장경제에 명운을 걸겠다’고 천명하였고, ‘국내외 기업을 동등하게 대우하고 외국 투자자본에 대해서는 최상의 조건과 안전을 보장한다’는 약속을 하였다. 그는 또 ‘국산품만 쓰는 것이 애국이 아니다’라고 언명하여 국산품 애용을 애국이라고 생각하던 국민들을 놀라게 하였다. 대통령당선자의 이런 언명은 화급한 외환위기를 막기 위한 임시방편이 아니었으며, 그후의 정책노선을 보더라도 대통령의 시장경제에 대한 신속한 이해와 민첩한 대응임에 틀림없다.
시장경제는 인류역사상 고도의 소비생활을 일반대중에게 가져다준 가장 효과적인 제도이다. 1989년 동구 사회주의국가들이 차례로 무너지게 된 것은 동서 냉전체제에서 구축된 핵무기를 포함한 무기의 힘 때문이 아니었다. 서구의 고도화된 소비생활, 그리고 그것을 전달한 정보혁명에 의해 동구는 내부적으로 붕괴해갔다. 동구권에도 사회주의 교역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시장기구만큼 효과적으로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했다. 동구와 소련은 정치적인 개방을 통해서 변화를 추구하고 시장경제를 도입하였으며, 중국ㆍ베트남 등은 국가가 중심이 되어 시장경제를 받아들이고 있다. 사회주의 블록이 실질적으로 사라진 지금, 시장경제는 세계를 통합하는 유일한 씨스템이며, 역사상 처음으로 ‘시장경제의 시대’가 명실상부하게 도래하게 된 것이다. 시장경제는, 헌팅턴(S. Huntington)이 주장한바 냉전 이후에 나타날 민족과 문화의 갈등으로 특징지어지는 ‘문명의 충돌’조차도 무색케 하는 힘으로 전세계를 휩쓸고 있다.
근대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사회편성원리 그 자체이며, 거기에는 자유로운 경쟁원리, 민족과 국가, 그리고 문화의 벽을 넘는 개방성과 보편주의 원리가 포함되어 있다. 근대 민주주의뿐만 아니라, 근대 시민사회註5) 도 원래는 시장경제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자유로운(free)註6) 노동과 상품교역의 자유가 없다면, 민주주의도 시민사회도 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시장경제제도는 하나의 제도에 머물지 않고 시장문화를 만들어내고 또 시장적인 인격을 형성한다. 시장적 문화양식의 핵심은 벨(D. Bell)이 지적하듯이 경제화(economizing)이며, 구체적으로는 최소비용, 최대이익, 극대화와 최적화 등이다. 고용과 자원의 이용에서 이러한 원리들이 평가의 기준이 되고 있다. 이러한 문화가 만들어내는 중추적 구조는 관료제와 역할의 전문화ㆍ분업화이며, 이 문화가 지향하는 가치의 척도는 효용성이다. 시장문화는 궁극적으로 인간을 물화(物化)하고, 개인을 수단화하며, 기능중심적 일만을 강조하고, 기술주의적 기업경영을 가져온다.註7)
시장문화는 대대적인 광고활동을 통해 끊임없는 생산성의 증대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자원의 낭비와 폐기물의 배출이 불가피하다. 시장문화는 인간에게 새로운 욕구를 끊임없이 만들어내어 시장생산을 위한 유효수요를 창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의 문화는 그것이 갖는 고도의 기능성과 합리성 때문에 시장 밖의 여러 사회조직의 원리로 전용되고, 자본주의 사회의 지배적인 문화형태로 발돋움해가고 있는 것이다. 대학과 병원, 복지시설, 사회운동단체 등 시장 밖의 제반 기구들도 시장의 원리를 도입하여 경쟁과 적대관계를 증폭시키고 있다.註8)
프롬(E. Fromm)은 인격에 침투한 시장체제를 ‘시장적 성격’으로 규정한다. 시장적 성격은 인간이 자신을 상품으로 경험하고, 자신의 가치를 사용가치로서가 아니라 교환가치로서 경험하는 데 바탕을 둔다. 살아 있는 인간은 ‘퍼스낼리티(personality) 시장’에 나온 상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註9) 시장적 성격에는 최대의 능률을 가지고서 움직이고 일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목적이 없으며, 사랑도 미움도 없다는 것이다.
시장문화는 동아시아의 성장경제지역에 급속하게 침투하고 있다. 일본을 필두로 동아시아의 신흥공업국들, 그리고 근년에 시장경제에 참여한 중국ㆍ베트남 등 사회주의권 국가에 이르기까지 시장문화, 혹은 비즈니스 컬처(business culture)는 새로운 ‘진보’문화의 양상을 띠고 있다.註10) 한데 현실의 시장경제는 국가주의와 결합하여 근대화의 수단이 되거나, 종교ㆍ봉건제ㆍ파시즘 혹은 사회주의와 결합하여 그것들의 도구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동아시아의 근대화국가들 가운데는 시장체제를 받아들이고 있지만, 권위주의적인 권력구조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인간의 역사에서 시장(market, marketplace)은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고, 시장은 인간이 생산물을 교역하고 나누는 중요한 문명의 발명품이다. 그러나 전형적인 자본주의 시장이 도래하기 전에는 시장은 사회구조와 문화의 ‘도구’로 이용되어왔다. 폴라니(K. Polanyi)는 자율적인 가격형성과 수요-공급 메커니즘이 형성되기 이전의 사회에서는 ‘경제가 사회적 관계 속에 매몰되어 있다’고 주장하였다. 경제적인 재화(財貨)의 교환ㆍ축적ㆍ양도 모두가 사회구조가 정한 바에 따라서 이뤄지고, 경제가 사회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경제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오직 자율적인 가격형성 메커니즘이 시장을 통해서 형성되면서, 반대로 “경제가 사회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가 경제체제에 매몰되어(embedded) 있다”註11) 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말하는 ‘대전환’(great transformation)에 다름아니다. 시장 혹은 경제의 사회로부터의 이상(離床, disembedding)을 통한 시장지배사회가 도래하는 계기가 바로 여기에 있다.
3. 불완전한 그리고 지속불가능한 시장경제
시장경제는 우리 일상생활의 중요한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데 매우 효율성이 높은 제도이다. 시장경제는 세계 도처의 자원을 이용하여 우리들에게 갖가지 물질과 써비스를 제공해주고 있다. 특히 도시생활을 하는 우리들에게는 의식주의 모든 영역에서 시장공급은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그러나 시장경제가 공급해주는 재화와 써비스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차원에서 비판이 제기되어왔다. 그중 하나는 시장경제가 우리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수 있는 기구이긴 하지만, 우리들의 욕구라는 것은 과연 어떻게 형성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즉 시장은 광고ㆍ디자인ㆍ정보조작 등을 통해서 생명과 생활에 전혀 필요하지 않고 오히려 해가 되는 가상욕구(假象慾求)까지 만들어내어, 그것을 소비하도록 강요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끊임없이 수요를 창출함으로써 확대재생산을 계속해나가는바, 수요가 공급을 자극하고 생산을 촉진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공급측이 수요를 만들어내어 물품을 팔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들이 갖고 있는 상품소비의 욕구가 과연 우리 스스로 만들어낸 것인가 대해서 의문이 생겼다는 것이다.
또 소비자들이 상품을 소비함으로써 상품의 사용가치보다는 상품이 상징하는 사회적 기호를 소비하는 것으로, 소비과정에서 발생하는 욕구와 충족 사이의 소외현상이 지적되고 있다.註12) 이러한 소비활동은 소비자로 하여금 상품을 많이 구입하는 것이 욕구를 많이 충족하는 것이며 따라서 행복을 가져온다는 믿음을 갖게 하여, 소비자는 항상 생산자측의 조작대상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삶은 자연과 환경, 인간관계와 공동체가 공급하는 자연자원과 사회자원도 이용하여 영위되고 있다. 우리들의 모든 생활, 생명활동─사랑과 죽음을 포함하여─이 모두 소비에 속한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생활활동은 그것의 영어 표현인 ‘life’가 상징하듯이 전체적으로 그 본질과 핵심에 있어서 생명(life)활동을 지시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생명활동 가운데 친구들과 만나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아름다운 숲속을 거닐며 맑은 공기를 마시며, 새소리를 듣는 것과 같은 행위도 ‘소비’에 속하는 게 되지 않을까? 상품화의 영역이 아무리 확대되어도 시장이 공급하는 소비품목에는 한계가 있다. 소비의 본래 의미는 삶의 즐거움이며, 기쁨을 가지고 산다는 것이다. 현대사회의 문제는 바로 우리가 소비의 역전된 형태만 알고(기호소비자로서!), 생의 향수(享受)로서의 소비의 원래 뜻을 상실한 데 있다.註13)
우리의 생활ㆍ생명활동 전체를 조망할 때, 시장이 공급할 수 있는 것은 제한되어 있으며, 시장이 공급하지 못하는 부분이야말로 ‘그림자활동’註14) 같이 시장적인 평가를 받고 있지는 못하지만, 생명ㆍ생활활동에서 본질적인 부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폴라니가 주장하듯이 노동과 토지는 원래 상품이 될 수 없으며, 허구적 상품과 허구적 가격을 갖고 있을 따름이다. 토지와 노동은 시장법칙에 따라 생산될 수 없는 것이다.註15)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노동ㆍ토지ㆍ원료 등 생산조건이 지속적으로 공급되어야 하나, 이미 자원의 유한성과 환경오염에 대한 시민들의 저항 때문에 생산조건의 공급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최근 정보산업이 발전함으로써 에너지와 물질 소비가 적은 생산방식이 채택되어 생산조건 공급의 유연성을 제고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지구적 규모의 지속적인 경제성장에는 한계가 있다. 『성장의 한계』(The Limits to Growth, 로마클럽 1972)와 『우리 공동의 미래』(Our Common Future, 세계환경발전위원회 1988)의 저자들은 지구환경의 지속성과 미래세대의 삶의 기회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개발과 성장에 일정한 한계를 설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장은 외부로부터 자원ㆍ환경ㆍ토지ㆍ노동력을 생산과정에 투입하고 그 결과로서 폐기물 등을 내보내 환경과 자원 문제를 시장체제의 외부성(externalities)으로 다루고 있다. 시장은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외부로부터 자원과 노동력, 토지를 ‘상품화’하지 않으면 안된다.
또 시장경제는 노동력의 재생산을 가족공동체ㆍ사회ㆍ정부 등 비경제적인 기구에 의존함으로써 스스로는 노동력의 재생산기능을 갖고 있지 못하다. 가족 가운데 실업자가 발생하면 가족 전원이 고통을 당하고 형제자매가 돕고 또 정부가 나서서 고용보험 실업수당을 제공하고 있으나, 이것들은 시장체제와는 전혀 별개로 존재하는 것들이다. 시장경제는 고용문제의 부담을 시장 외의 기구에 전가하고, 국내외적으로는 불평등을 확대하고 있다.
시장경제는 확대재생산을 자신의 생명으로 하는 한, 자원의 한계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또 사람들은 시장경제가 지구 자원을 소진할 때까지 작동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결국 시장도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스스로의 기능을 한정하고 유한한 자원의 재생산구조와 맞추어갈 필요가 있다.
4.‘방법’으로서의 시장경제
시장경제에 대해 이렇게 비판만 하다 보면, 오늘 우리가 자원이 부족한 이 나라에 태어나서 이만큼 살게 된 것도 자유시장의 덕분이라고 느끼게 되는 실감도 부정하기 어렵다. 이것이 시장이 갖는 현실적인 의미의 무게이다. 한편, 우리가 지향하는 사회가 과연 시장사회로 완결될 수 있을까 하는 점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대답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통제되지 않는 시장경제체제는 자연과 생태계를 무자비하게 파괴할 것이며, 지구적 차원의 지속가능성을 보증할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시장지배에 대한 대응양식의 하나로 우리는 ‘방법으로서의 시장경제’의 가능성을 내다보아야 하지 않을까? IMF를 우리 경제의 구조변화를 위한 ‘머슴’으로 간주하자는 주장註16) 이 있는데, 이와 유사한 발상으로 시장기구를 우리의 생명과 생활 영위의 방법으로서 이용하고 동원할 수는 없는 것일까? 백낙청(白樂晴)의 지적에 따르면 IMF를 머슴으로 부려먹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주체가 견고하게 서 있어야 하는데, 시장경제체제를 ‘방법’으로 이용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무엇을 축으로 미래를 구상하고 새로운 문명을 세울 것인가 모색하지 않으면 안된다.
삶의 축을 바꿀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는 지금 폴라니가 말하는 또 한번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사회편성의 원리를 시장체제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생활의 시점(視點)에서 구상하는 것을 중심내용으로 하는 삶의 축의 대전환이 필요한 것이다. 시장경제체제로부터 생명과 생활의 체계를 이상(離床)시켜 시장중심체제에서 생활 및 생명 중심체제로 바꾸는 것이다. 시장경제가 우리들 삶의 전체 세계를 편성하기보다는 우리가 생명ㆍ생활을 중심으로 ‘질서’를 재편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시장경제는 우리들의 삶을 풍요하게 해줄 수 있는 ‘외부성’으로서,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기도 하고 선택하기도 하고 때로는 제어할 수도 있어야 할 것이다. 생명과 생활은 전체성과 미래성, 지속가능성을 내재하고 있어야 하지만, 시장은 외부성을 수탈하면서 자기씨스템을 증식시키는 메커니즘을 갖고 있을 뿐이다. 생활과 생명활동에서 시장은 수단이며, 삶의 방편의 하나이다. 우리가 시장의 객체이며 대상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서는 생활을 편성하는 원리와 동력을 우리의 세계 속에 내장하고 있어야 한다. 통제되지 않는 시장체제는 생명과 생활의 지속가능성을 보장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생활과 생명을 지키기 위해 시장메커니즘을 통제하려는 시도는 국제적으로 이미 상당한 성과를 얻고 있다. 시장체제의 무차별적인 자연수탈과 비인간화를 막기 위한 국제적인 협약도 1972년의 유엔인간환경회의를 필두로 매년 증가해왔다. 평화와 안전보장, 환경과 식량, 개발과 복지, 인권, 노동, 아동, 여성 문제 등과 관련된 다국적 협약이 지구적 차원의 조직원리(governance)로서 규정력을 얻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국제적인 협약은 대체로 국가권력과 시장에 의한 인간ㆍ자연ㆍ자원의 수탈과 파괴를 막기 위한 것이다. 자본의 국제이동이 갖는 제반 문제가 전지구적 문제로서 등장하는 것과 보조를 맞추어 자본의 국제활동을 통제하는 전지구적 조직원리(global governance)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초국적기업이 그렇듯이 정부나 세계조직, 혹은 물리적인 강제에 의하지 않고도 생명과 생활을 지키는 국제적인 양식과 도덕을 준수할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다.
1997년 12월 쿄오또(京都)에서 열린 유엔기후변화회의도 지구온난화를 가져오는 에너지 소비에 일정한 제한을 가하여 지구생태계의 지속성을 유지시키려는 노력의 하나이다. 이것은 시장체제가 지닌 지구환경 파괴의 가능성을 사전에 막고자 하는 각국의 노력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1992년의 유엔환경개발회의를 기점으로 이러한 국제적 협정 체결에서 비정부기구(NGO)의 역할이 점차 확대되어가고 있다. NGO는 뻬이징의 여성회의, 코펜하겐의 사회정상회담, 이스탄불의 유엔주거회의는 물론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등 다국간 회의가 있을 때마다 NGO 중심의 병행회의, 혹은 대항회의를 열어서 국가간 협정 체결에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국가간의 이해대립이 첨예할 때는 오히려 NGO의 발언이 힘을 얻는 경우조차 있었다. 작년 9월에 체결된 대인지뢰전면금지조약에는 몇개의 대국을 제외한 100여개 나라가 참여하였다. 이 조약은 무대의 이면에서 헌신적으로 활동한 NGO 지도자들이 없었던들 성립할 수 없었다. 이상과 같이 시장체제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시장 밖에서 생명과 생활, 평화를 지향하고 통제하기 위한 지구적인 노력이 제도화되어가고 있다.
5. 생활ㆍ생명공동체 건설을 위해
모두(冒頭)에 논한 맑스와 로스토우의 이론들은 다같이 한때는 지배적인 사회변동의 이론이었으나, 이제 더이상 새로운 사회변동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이 두 가지 이론은 각각 미래에 대한 뚜렷한 구상과 방법을 갖고 있었으며, 이 이론을 역사 속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주체세력을 상정하였다. 19세기에는 노동자 해방의 희망이, 그리고 1960년대에는 대중소비시대의 도래라는 희망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들의 정열과 헌신을 동원하는 힘이 되었다.
21세기의 새로운 문명을 추구하는 데서 우리가 지금 무엇을 지향해야 하며, 또 무엇을 대상으로 스스로를 지켜나가야 하는가가 분명해졌다. 우리는 생활과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시장경제를 이용할 수도 있어야 하겠지만, 그것을 통제하는 능력을 갖추지 않으면 안된다.
사회운동은 역사를 만들어가는 행위이며, 시장경제의 자기관철을 저지하여 생명과 생활을 지키는 인간집단의 개입이다. 자본주의가 지속가능할 것인가 아닌가는 시장법칙의 자기관철 못지않게 인간집단의 개입이 어떤 방향에서 어느 정도로 이루어지는가에 달려 있다.
시장경제를 논할 때, 우리는 시장-국가-시민사회라는 3원구조(三元構造) 속에서 시장과 시민사회, 국가를 파악하겠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지난 1세기 동안 우리나라 역사는 나라세우기, 즉 민족국가 건설의 역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민족국가의 건설은 민족의 독립과 경제성장을 가져온 그 역사적인 임무를 다하였다. 그러나 민족국가의 연장선상에서 세계화ㆍ국제화를 추진하면서 우리는 민족국가를 단위로 하는 사고방식의 문제점이 금방 드러나게 된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나는 ‘시장의 시대’의 안티테제로서 ‘시민의 시대’를 주장하고자 한다. 이것은 민족이나 국가 단위보다는 시민사회를 중심으로 미래를 구상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시장경제를 방편으로서 다루는 주체도, 또 그것을 ‘머슴’ 부리듯 다루는 주인도 시민사회가 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나는 ‘시민의 시대’의 전개과정에서 국가와 민족이라는 정치공동체가 기능부전을 일으켰으며, 한국의 가족주의도 큰 방해물이라는 것을 언급한 바 있다.註17) ‘시민의 시대’는 우리가 밖을 향해서 보편성을 추구해야 하며, 안으로도 보편적 시민의 성장을 추구해야 함을 함의하는 것이다.
시장기구에 대응하는 시민의 시대에는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 시장은 비시장사회를 ‘착취’하지 않고는 스스로를 재생산해낼 수 없다. 그렇다고 시장이 생산ㆍ소비활동에 활력을 가져다주는 효과를 인정하지 말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장화의 결과물로서 발생하는 환경파괴, 공공성의 파괴, 인권유린, 사회적 연결망의 파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우리는 만들어야 한다. 말하자면 비시장적 연대를 구축하는 일이다.
1990년대 한국 사회운동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노동운동은 1987년 이후 한때 고양기를 맞이하였으나, 장기적인 침체상황에 빠져 있고, 학생운동도 대중성을 상실해가고 있다.
도시빈민운동ㆍ민족운동 등 이른바 민민운동도 장기적인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소비자ㆍ환경ㆍ여성 등 시민운동 세력이 전반적으로 크게 성장하였다. 사회운동의 이념과 주체가 이렇게 바뀌어가게 된 데에는 1993년 이후 ‘문민’정부가 등장하고 정부가 사회운동에 대해 선별적으로 지원한 것의 영향도 크다. 실제로 시민운동은 문민정부하에서 정부와 기업의 호의적인 지원에 힘입어 크게 성장하였다.
그러나 각각의 사회운동을 지지하는 사회세력의 지형이 크게 바뀌어갔다는 점을 무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일부 노동계층은 주관적인 중산층의식을 지니게 되었고, 학생세력도 다원화하였으며, 민족통일에 대해서도 다양한 의견이 나타나, 각각의 사회운동을 지지하는 세력들의 분포에 큰 변화가 있었다. 1990년대에 새로이 등장한 시민운동은 그것의 실천방향이 어떠하든간에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중산층ㆍ화이트칼라층 등이 중심이 되었으며, 실제로 1987년의 6월항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도 사무직노동자 등 중산층 혹은 하급중산층이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한국의 시민운동은 다른 사회운동과 마찬가지로 1980년대 이래의 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발전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특수한 이익집단의 이해를 지지하는 일보다는 사회 전체의 공공성을 추구해왔다. 그러나 한국의 시민운동이 싸우고 있는 주제와 대상의 대부분은 환경파괴와 공해 문제, 여성의 인권유린, 소비자보호 등 우리의 민주화가 아직도 제도적으로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들로서, 한국의 시민운동은 여전히 민주주의의 문제로 씨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의 사회운동은 이와같이 노동운동ㆍ학생운동ㆍ민민운동ㆍ시민운동 등으로 나뉘어 각자 자기의 위치에서 운동을 추구해왔는데, 노동운동과 시민운동 간에는 연대를 위한 모색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크게 성공한 경험은 갖고 있지 못하다.註18) 우리나라의 노동운동은 공익을 추구하기보다는 ‘시장’ 내에서의 이익집단이라는 성격이 강하여, 시민운동과 연대하는 데 상당한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1998년 현재 IMF체제하에서 상황은 급격하게 변하였다. 시민운동을 뒷받침해왔던 중산층이 급격하게 위축되었다. 고용조정 과정에서 생산직노동자들이 가장 큰 타격을 받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지만, 사무직노동자들이 갖고 있던 상대적 특권도 일거에 사라져버렸고, 생활의 위기감 정도는 큰 차이가 없다. 시민운동에 대한 정부나 기업의 지원도 사정이 크게 바뀌어가고 있다. 시민운동은 과연 누구를 대표하고,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자신의 정체성을 둘러싸고 고민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1997년 초 노동운동은 노동법개정 반대운동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 노동운동은 문민정부의 추락을 가져온 출발점이었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1997년 봄의 노동운동은 문민정부의 독선과 비리에 비판적인 국민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노동운동은 그러한 국민적인 세를 업고 대통령선거에 대표를 내보냈으나 97년 봄만큼의 지지도 얻을 수가 없었다. 이것은 바로 노동운동이 전체 사회의 공익을 위해서 싸우고 또 그것을 통해 연대할 때 국민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해준다.
IMF사태 이후 노동운동은 이제 생존과 생활 그 자체의 위협을 받고 있으며, 고용을 유지하는 것이 최대의 과제가 되었다. 노동조합운동이 아무리 저항하더라도 구조조정이란 구실로 수백만의 노동자들이 직장을 잃게 되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실업자동맹이 결성되는 등 실업자들도 엄연한 사회세력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사태의 전개로 노동자나 실업자나 시민이나 비슷한 운명에 처하였으며, 이제는 노동운동이라고 해서 노동시장 상황 내에서의 위상 제고에만 신경쓸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노동운동도 ‘공공의 광장’에서 사회적 정당성을 획득할 필요가 있으며, 시민운동도 노동자나 실업자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노동운동도 다른 시민운동과 마찬가지로 시장경제의 횡포에 저항하는 세력이며 또 시장경제의 피해자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노동운동ㆍ환경운동ㆍ여성운동ㆍ교육운동ㆍ복지운동 등 비시장적인 사회적 요구와 생태적 요구에 부응하는 사회운동 세력들이 연대를 구축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모듬살이(혹은 공동체)의 근거로서 생각해온 민족국가의 기반이 현재 시장경제의 침투에 의해 형해화하고 있다. 나는 민족국가를 이토록 무장해제해도 좋은지 의문을 갖는다. 외국자본의 국내활동을 국민국가가 통제하기 어려운 상황이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 국민국가가 그 구성원의 생활과 미래를 전적으로 책임질 수 없는 상황이 도래하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모듬살이의 기초를 다져야 할 것인가. 사회운동은 당연히 시민사회 혹은 ‘사회’를 근거로 공동성을 확립해야 한다. 생활ㆍ생명의 공동성을 기초로 하는 새로운 공동체를 구상할 수 있다. 이 공동체는 인간의 생명과 생활뿐만 아니라, 생태계와도 공생할 수 있는 관계 속에서 발전되어야 한다. 생활ㆍ생명공동체는 시장체제를 매개로 외부에 대해 열려 있으면서도 생활ㆍ생명을 중심축으로 자기동일성을 추구하는 체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기반으로 우리는 시장이 가져온 피해를 집합적으로 해결해나가는 노력을 할 수 있으며, 이를 토대로 생활과 생명을 방어할 수 있을 것이다.
6. 맺음말
나는 ‘민주발전과 경제회생’을 내세우고, 경제회생의 방법으로 민주발전, 혹은 민주발전의 틀 속에서 경제회생을 추구하는 새 정부의 방향에 대해 많은 기대를 갖고 있다. 민주발전이 경제회생의 걸림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민주발전을 통해야만 경제문제가 해결된다는 해법은 종전의 성장이데올로기와는 정면으로 대립되는 것이다. 시장체제의 자기관철이 민주주의와 배치될 때는 민주주의의 원칙을 버리지 않겠다는 의지, 그러한 의지를 가진 정부 안에서 비시장적 연대의 가능성을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민의 시대는 민주발전과 같은 궤도 위를 달리는 동반자이다. 아시아의 성장국가들은 대체로 시민사회가 허약한 가운데 경제발전을 도모해왔으며, 그 결과 IMF 같은 시장세력의 공격 앞에서 무력성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가 경제를 발전시키려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들의 생활과 생명의 발전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우리들의 생활과 생명의 희생을 요구하는 경제발전이란 있을 수 없다. 한국의 사회운동은 시장 밖에서 시장의 움직임을 제어하고 시민의 성장을 도모함으로써, 그리고 그 결과로서 민주발전을 이룰 수가 있는 것이다.
--------------------------------------------------------------------------------
주제토론
정현백(鄭鉉栢)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이필렬(李必烈) 방송통신대 과학사 교수
정현백 이시재 선생님께서 오늘날 시장경제에 대한, 혹은 시장원리에 대한 대안적인 시민의 원리, 시민운동을 많이 강조해주셨는데요, 여태까지 시민운동에 대해서 이리저리 생각하고 있던 제게 많은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볼 때 이시재 선생님의 발제문에 대해서 저는 큰 이견을 가지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한국의 시민운동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점과 관련해서 논의가 좀더 진척됐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1987년 이후 우리나라의 정치적 지형에 약간의 변동이 있으면서 이런 기존의 개념에다 새로운 생태문제라든가 환경문제ㆍ여성문제 등이 많이 추가되었기 때문에, 사실 지금까지 이시재 선생께서 하신 얘기는 상당히 원칙적인 수준에 머물렀던 것 같아 거기에서 좀더 고민해볼 수 없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저는 크게 세 가지 얘기를 하겠습니다. 발표문의 전체 기조는 시장의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시민의 시대로 들어가야 한다, 국가의 기능은 약화되어야 한다는 것인데요, 저의 첫째 질문은 시민운동이 과연 그렇게 효율적인가 하는 겁니다. 두번째 문제제기는 그렇다면 시민운동과 노동운동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되어야 할 것이냐 하는 거고, 세번째는 이미 최원식 선생의 기조발제에서부터 계속 화두로 던져지는 민족문제, 민족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저는 독일 유학시절에 신사회운동, 그러니까 여성운동ㆍ환경운동ㆍ반전운동ㆍ반핵운동 등 매우 활발한 그 운동들을 보며 상당히 감동을 받았습니다. 예를 들면 서독의 본에 50만이나 1백만의 사람들이 모여서 핵미사일을 설치하지 말라는 데모를 할 때 저도 거기에 참여하기도 했어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느꼈던 것 중의 하나는, 이 감동적인 시민운동이 독일 자본주의의 틀을 바꿀 수 있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실제 수십만명이 모여 시위를 했지만 어김없이 핵미사실은 배치됐고 핵발전소는 건립됐기 때문이죠. 과연 우리는 신사회운동, 혹은 시민운동에 대한 관점을 어떻게 설정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부딪치게 됩니다. 우선 유럽이나 미국의 신사회운동은 사회복지를 통해서 경제적인 불평등이 어느정도 해소된 전제 위에서 일어났습니다. 또한 이 나라들의 시민운동은 공통적으로 좌파정당의 한계에 실망한 가운데서, 그리고 노동조합운동도 상당 정도로 관료화하고 제도화한 상황에서 일어났다고 할 수 있는데, 우리 상황은 아직도 보수정당 정치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고, 노동운동도 오히려 탄압을 받기 때문에 지속적인 역동성을 여전히 갖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고요. 또 하나는 이미 발표문에서 언급된 대로 우리는 대단히 가족중심적인 사회이고 서구와 같은 공공성의 개념이 발달해 있지 않기 때문에, 사실 시민운동을 어떻게 대중화할 것인가가 상당히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대표적으로 성공한 시민운동단체가 저는 경실련ㆍ참여연대ㆍ여성단체연합ㆍ공해반대운동연합 등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들 단체가 포괄하고 있는 회원의 수에는 한계가 있고요, 그렇기 때문에 여태까지 우리의 시민운동은 캠페인 위주의 운동에 치우쳤던 것이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언론을 중심으로 한 운동을 전개했는데, 물론 이런 캠페인적 사회운동도 의미가 있지만 이것이 유럽과 마찬가지로 사회의 거대한 씨스템을 바꿀 수 있을까에 대한 기본적인 회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시민운동이 불필요하다는 얘기는 아니고요, 최근의 담론이 시민의 시대, 시민운동을 얘기하며 시민운동에 지나치게 기대를 걸면서 사실은 노동운동이 가진 다양한 문제점에 대한 논의나 그것에 대한 관심이 전반적으로 지식인의 담론에서 약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을 말하고 싶었던 겁니다. 즉 시민운동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지나치게 그쪽으로 몰려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에 대한 점검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하고 싶고요.
두번째로 지적하고 싶은 것은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의 관계 설정을 새로 해야 한다는 겁니다. 작년 노동법파동 때 볼 수 있었듯이 우리 노동운동은 여전히 강한 활력과 전투성을 갖고 있어요. 더구나 최근 유럽에서의 노동사 연구에서는 그들이 대중문화 속으로 소시민화하거나 체제내화한다고 해서 그들의 전투적인 성향이 보수화되는 것은 아니라는 연구결과들이 나오고 있는데요, 그래서 저는 여전히 이런 부분에 관심을 두면서 사회운동이 오히려 신사회운동 혹은 시민운동이 노동운동을 지원해주는 방식이 개발되어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을 했어요.
마지막으로 민족주의의 탈피 문제인데, 이시재 선생님은 시민의 시대에 들어오면 민족주의는 탈각되어야 한다는 얘기를 했는데 그 부분에 상당히 동의를 해요. 아까 박혜경 선생님이 민족주의라는 것을 상징적인 기호인가로 얘기하셨는데, 그러나 민족주의는 현실적으로 상존합니다. 민족주의는 건강하면서 병적이고, 동시에 병적이면서 건강한 거죠. 시민의 시대에 들어가면 민족주의가 사라질 수 있을 것인가, 혹은 사라져야 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좀더 고민할 필요가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 지식인 문화의 국수주의가 사실은 전지구적인 자본주의를 평가하고 관찰하는 데 실패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더구나 서구에서는 민족주의를 아주 불신하고 굉장히 약화시키려고 해요. 그러나 독일 같은 데서 보면 역시 대안으로 유럽공동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한데, 우리는 민족주의를 탈각시킬 경우 가능한 대안적인 공동체가 뭔가 하는 것도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따라서 완전히 민족주의를 탈각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도 않고, 그렇기 때문에 대안적인 민족주의를 모색해야 하는데, 그것의 구체적인 성격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까 최원식 선생님께서 소국주의를 말씀하셨는데, 이 소국주의가 과거처럼 허황한 꿈을 꾸지 말고 이제 냉수 먹고 정신 차리자는 얘기인지 아니면 민족주의 자체를 탈각시키자는 얘기인지도 불분명해서 그 부분에 대한 전체적인 논의가 다시 있었으면 좋지 않을까 합니다.
이필렬 저는 기본적으로 발표 내용 중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가 위기의 원인이다, 이런 식의 지적에 대해서는 특별한 이견을 가질 사람은 없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하는데요. 그렇지만 문제의 원인을 시장이라는 굉장히 포괄적인 장치에 돌린 다음에, 이 시장을 통제해서 하나의 삶의 방편으로 끌어내는 것이 위기 해결의 열쇠이고 이것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시민중심의 비시장적인 연대가 중요하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약간 불만족스러운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우선 시장에 대해 분석하면서 지금까지 자본주의 시장체제의 지속과 확대를 가능하게 해준 산업화의 중심수단, 다시 말하면 과학과 기술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회과학자들이 우리 사회의 위기, 특히 환경위기를 분석할 때 흔히 과학이나 기술을 중립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넘어가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래서 보통 과학과 기술이 환경위기의 원인제공자이기도 하지만 위기를 인식하게 해줄 수 있는 수단이고, 해결을 가능하게 하는 도구이다, 이 정도로 취급하는 것이 보통인데요. 그래서 과학과 기술 자체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과학과 기술의 행위주체인 과학자나 공학자들의 연구방향이나 사회적인 행태에 대해서는 거의 의문이 제기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정은 과학과 기술을 상당히 비판적으로 봐야 할 환경단체 쪽에서도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은데요. 예를 들어 소각장에서 다이옥씬이 나온다, 또는 핵발전소에서 방사능이 누출됐다고 할 때 환경단체에서 대응하는 방법은 대항 전문가를 내세워 관계당국의 주장을 반박하는 그런 식입니다. 몇년 전 월성 원전에서 중수가 누출된 적이 있는데요, 물론 지금도 항상 누출되지만, 거기에 대해서 한전이나 과기처에서는 누출된 방사능이 아주 미량이기 때문에 환경이나 인체에는 해가 없다는 식의 주장을 합니다. 그러면 그에 대해 환경단체에서는 미량의 방사능도 위험하다는 과학적인 근거를 찾는다든가 또는 그런 주장을 하는 과학자를 찾아내 거기에 대응을 하는 것이죠. 그 이상의, 다시 말하면 그런 미량의 방사능은 누출된다 하더라도 과학적으로 별로 문제되는 것이 아니다, 해가 없는 것이다 하는 접근방식 자체에 대한, 그러니까 그런 접근방식이 가질 수 있는 사회적인 위험에 대한 문제제기는 별로 하지 않는 거죠. 그것이 사회에 훨씬 더 큰 위협을 가져올 수도 있는데도 말이죠.
제가 보기에는 고속전철도 마찬가지인데요. 어제 SBS 뉴스에서는 우리 국민의 28%가 계속 건설하는 것을 찬성하고 72%는 반대한다는 결과가 나왔는데, 그게 처음 시작될 때는 과학자나 공학자, 또는 언론이나 일반 시민들 모두 우리나라에 아주 거창한 것이 들어올 것처럼 떠들어댔단 말이죠. 그래서 그때는 아마 반대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을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 당시에도 고속전철에 대한 기술적 분석이나 비판적 접근이 없었던 것은 물론이에요. 지금도 대다수의 국민들이 반대를 하지만 그 반대의 근거는 경제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사회과학을 하시는 분들이 그런 점에 좀더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하는 바람이고요.
그 다음에 제가 발표에 대해 갖는 의문은 시장을 통제하기 위한 비시장적인 연대라는 점에서 굉장히 많은 사회운동들이 연대를 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다고 보시는 것 같은데, 과연 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이 연대를 할 수 있는가 하는 겁니다. 환경운동은 스펙트럼이 매우 다양하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중심이념은 부의 확대재생산을 저지하고 그럼으로써 경제의 팽창이 아니라 어느정도 경제의 수축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비시장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요, 이에 반해서 노동운동은 과연 그럴 수가 있는 것인지? 노동운동은 부의 편중에 반대하고 부의 재분배를 실현하려고 하지 부의 확대재생산까지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결국은 노동이라는 것도 자본과 운명을 함께하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그런 상황에서, 성격이 그렇게 다른 노동운동과 이런 생태주의에 입각한 환경운동이 연대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 것이냐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는 겁니다.
여성운동에 대해서도 비슷한 얘기를 할 수 있는데요, 물론 여성운동과 환경운동의 연대에 대해서 얘기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만일 여성운동의 주류가 산업사회 자체의 여러가지 것들, 그러니까 산업 자체의 기초라든가 문화, 이런 것들을 의문시하는 것이 아니라 산업사회 내에서의 여성의 차별, 특히 그중에서도 경제적인 차별을 철폐하는 그런 쪽으로 나갈 경우에는 환경운동과 연대하는 것이 과연 가능하겠느냐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요컨대 어떤 운동이든 경제중심주의에서 벗어나지 않을 경우에 과연 환경운동과의 연대가 본질적으로 가능하겠느냐는 것이 제 의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시재 감사합니다. 코멘트가 좋으면 답변도 좋아야 하는데 모르겠습니다. 정현백 선생님이 말씀하신 세 가지 질문 가운데 시민운동이 효율적인가 하는 것이 있는데, 그건 효율적이라서 하고 효율적이지 않아서 안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시민운동의 현상을 보면 효율적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시민운동으로 사회를 완전히 바꿀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시민운동이 효율적이지 않은 것은 시민운동이 갖고 있는 내적인 문제일 수도 있으며, 낮은 효율성 때문에 시민운동을 낮게 평가하거나 부정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그런데 시민운동이, 지금 경실련이나 환경운동연합 같은 조직을 보고 이것 가지고 뭐가 되겠느냐 생각하시면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환경운동에 관계하고 있으면서 느끼는 바로는, 실제로는 조직되지 않은 시민들의 무수히 큰 모집단이 있고, 그중 극히 일부가 운동을 조직하고 여기에 참가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시민운동이 책임을 지고 대표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들이 아니라 조직화되지 않은 시민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의 시민운동이 어떤 문제를 들고 나오면 언론이 다루고 정부나 기업에서도 신경을 쓰는 이유는 시민운동조직의 힘 때문이라기 보다, 조직되지 않은 시민들의 세력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정현백 선생님은 노동운동이 좀더 핵심적인 것이 아니냐는 말씀을 하시는데, 그 부분도 저는 동의합니다. 그러나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은 운동의 장(場)ㆍ대상ㆍ지향성이 다르기 때문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하냐를 따지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물론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이 지향하는 바가 다르지만, 공통의 목표를 나누어 가지고 연대할 수 있는 여지는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필렬 선생님께서는 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이 근본적으로 결합하기 힘들다고 하는데, 이론적으로는 그런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독자적인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연대를 모색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사례들도 있습니다. 환경운동연합이 서울지하철노조와 결합을 해서 운동을 한 경우가 있습니다만, 거기에는 매개구조가 필요합니다. 환경운동과 노동운동이 결합하기 위해서는 공공성이라는 매개구조가 필요하며, 시민적인 지지를 얻어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외국의 사례에서도 환경운동과 노동운동이 결합해서 정치를 바꾸는 경우가 있는데, 지방자치단체의 대표를 바꿈으로서 환경정책이 크게 바뀌는 예를 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매개구조가 필요하다, 그런 매개구조 없이 직접 결합하는 것은 매우 힘들지 않느냐 생각하고요. 그래서 이런 공공성을 매개로 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이 전략적인 연대와 결합을 해야 하고, 그렇게 해야만 환경운동도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고 노동운동도 사회시민권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데 우리나라의 환경운동이나 신사회운동이 갖고 있는 독특한 역사적 경험이 있습니다. 그것은 서양과 다릅니다. 우리의 시민운동은 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발전해왔으며, 그것이 우리의 시민운동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여러 외국의 시민운동에 비해서 정치적이며, 전체 사회의 공공선을 추구하는 데서도 더욱 적극적입니다. 한국의 시민운동이 아직 충분히 대중성을 확보하고 있지 못하고 있고, 그 책임의 일부는 시민운동조직 자체에 있습니다만, 이는 한국의 시민사회가 아직 그만큼 성장하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한국의 시민운동은 거대한 대중을 동원하는 것보다는 새로운 변혁을 위한 어떤 모델을 만들어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변혁모델을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그것이 전체 사회의 변화를 위한 출발점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대안적 모델을 제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과제가 아닌가라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에 민족주의 문제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사실 우리는 환경운동이나 이런 시민사회운동이 민족주의의 덫에 걸려서 자기의 아이덴티티를 상실한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민족주의에 대해서 경계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공동체, 어떤 모듬살이를 기반으로 사회를 구성하고 인간을 결집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저는 삶의 터전을 이루고 있는 생명공동체ㆍ생활공동체가 필요하고 그것이 민족주의 같은 폐쇄된 공동체가 아니라 열린 공동체로서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민족주의 같은 정열을 끌어낼 수 없을지는 몰라도 생활의 근거지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바로 현실의 문제에서 출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시민운동, 시민의 사회를 천명하면서 민족주의, 혹은 민족 단위로 문제를 파악한다면 이것은 매우 심각한 자가당착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음으로 이필렬 교수님이 제기하신 과학의 문제입니다. 제가 다루지 않은 문제를 말씀해주셔서 대단히 고맙게 생각하는데요. 지금 환경단체가 과학의 문제를 잘못 짚고 있다는 말씀으로 생각됩니다. 사실 지금 우리가 다루고 있는 과학의 문제는 원자력에서부터 소각장 문제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이 과학 그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의사결정 과정에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얼마만큼 대중적인 논의 속에서 민주적으로 의사가 수렴ㆍ결정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정현백 사실 유럽에서는 90년대에 신사회운동이 소강상태에 들어가면서 심각한 실업 위기가 닥쳤을 때 다시 노조운동이 활성화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또하나 얘기하고 싶은 것은, 시민운동으로는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다시 정치 영역으로 들어가자고 해서 출발한 녹색당이에요. 시민운동에서 노동운동으로 돌아가는 거지요. 지금 유럽에서는 프랑스의 실업자 소요 같은 폭발적인 시위가 다시 나오고 있어요. 그런데 경제위기의 상황에서는 항상 두 가지로 갈리거든요. 극단적으로 과격한 좌파이데올로기 아니면 파시즘이 도래하는데, 우리 경우에는 이런 것을 교훈삼아서 시민운동과 노동운동의 긴밀한 결합을 고민해야 한다는 뜻에서 제가 노동운동 문제를 제기한 거예요. 또 마찬가지로 노동운동을 강조한 것은 노동운동은 성격상 폭발적인 조직력과 힘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여전히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씀드린 겁니다.
청중 이시재 선생님께서 비시장부문에서의 연대 또는 시민운동을 말씀해주셨는데요. 정현백 선생님께서 예를 드신 서유럽도 그렇고, 우리는 우리대로 상황의 변화, 이를테면 대중매체의 발달이나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삶의 변화 속에서 나타나는 여러 문제들이 폭넓게 다루어지지 못해서 시민운동이나 노동운동 등이 자기폐쇄적인 상태에 빠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거든요. 그리고 아까 매개구조로서의 공공영역을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대체적으로 공공영역은 지방자치 같은 정치영역만을 예로 드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저는 그것이 좀더 넓은 의미에서 사람들의 생활환경과 관련된 문화ㆍ정치ㆍ경제 등 모든 부문들이 포함되는 것으로 폭넓게 총체적으로 사고하는 것, 그러니까 새로운 의미의 총체성에 대한 관념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청중 시민문화연구소의 김정수입니다. 먼저 정현백 선생님께 여쭈어보고 싶은 것은 정선생님의 환경운동이나 여성운동, 또는 노동운동을 바라보는 창이 어떤 것일까 하는 겁니다. 노동운동이 자본과 노동자의 문제라고 한다면, 환경운동은 전사회적 씨스템의 존립 문제, 인간과 자연의 문제이기 때문에 실은 노동운동보다도 훨씬 포괄적이고 시장논리가 통하지 않는 많은 영역들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성격으로 봤을 때는 오히려 환경운동이 훨씬 많은 역할이 있기 때문에 시장 외적인 부분, 그리고 노동운동의 한계를 좀더 잘 해결해나갈 수 있는 측면이 있다고 보거든요. 정현백 선생님께서 시민운동이 노동운동을 지원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논리적 근거, 또는 배경에 대해서 구체적이고 현실타당한 설명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청중 저는 연세대 문과대학 2학년생입니다. 먼저, 이시재 선생님께서는 대안적인 모델을 제시하는 것이 사회운동의 본분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 모델을 제시하는 것만으로 사람들의 힘을 하나로 결집해서 시장 외적인 부분에서 시장을 효율적으로 통제할 수 있겠냐는 의문이 듭니다. 그 다음에 아까 공공영역에서 사회운동들을 완충적으로 연결해야 한다는 식으로 들었는데요. 이건 마치 무슨 문제가 생기면 담임선생님한테 가서 해결해달라는 식의 느낌을 받았어요. 진정한 타협과 이해관계에 바탕하지 않은 연대를 이룬 운동들이 어떻게 시장구조를 통제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고요. 마지막으로는 국제적 기구에 의한 시장통제라는 것도 사실은 제가 수능 논술고사에 많이 써먹은 부분이거든요.(웃음) 그런데 항상 논술에다 쓰고 느끼는 것이 뭐냐면, 어떻게 너무나도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국가들을 하나의 행동으로 결집시킬 수 있을까? 역시 담임선생님한테 가서 해결해달라는 그런 식이 아닐까라는 유치한 수준의 질문을 드려봅니다.
이시재 매개구조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동의하고요. 그러니까 삶의 구조가 변했고, 그래서 공공성이라는 매개구조의 의미도 바뀐다는 얘기로 듣고 있습니다. 다음에 학생이 질문한 것에 대해 답변하자면, 새로운 모델이란 새로운 삶의 양식, 운동의 양식, 조직의 양식, 그것이 삶의 태도에서부터 조직의 변화에까지 이르는 한 쎄트의 또하나의 대안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모델을 통해서 생명ㆍ생활공동체를 추구해가면 자연히 시장경제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게 될 것이며, 거기에 대해서 대항을 하지 않을까 하는 겁니다. 국제적인 시민운동에 대해 한 가지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작년 11월에 전세계의 지뢰를 제거하자는 국제협약이 만들어졌습니다. 거기에는 물론 중국이나 미국 같은 몇몇 대국은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무려 백여 나라 이상이 이 협약에 서명했습니다. 백여 개의 국가만이라도 자기 나라에서는 대인지뢰를 쓰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것입니다. 이것을 성사시킨 것은 주로 비정부단체의 시민운동세력들이었습니다. 시민운동은 국제평화나 지구환경 같은 정당성의 면에서 국민국가들보다 우위에 서 있기 때문에 이러한 일을 해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UN 같은 공적인 기구에서도 비정부단체들을 끌어들여서 그 사람들의 목소리를 이용해 각 국가를 설득하는 경향까지 있는 형편이고, 그래서 이제는 국민국가의 시대를 넘어서는 초국가적인 움직임, 그런 세력들에 대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부분에서 뒤떨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내셔널리즘이라든지 민족주의적인 틀 속에 갇혀 있어서는 시민사회가 지향하는 정당성을 획득할 수가 없습니다.
정현백 저에 대한 질문에 간단하게 대답할게요. 아무리 노동자들의 삶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환경파괴로 인해 지구가 몰락해버린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지 않느냐는 말씀이신데 그런 면에서 생태문제가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은 저도 인정합니다. 그런데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환경운동이 잘못 가면 근본주의적으로 빠진다는 거예요. 철저하게 모든 기술문명을 배격하자든가 생활공동체를 통한 실현 등을 강조하는데 아까 이시재 선생님은 대안적인 모델을 찾아 그걸 확산하면 되지 않느냐 하시는데, 유럽에서는 실제로 대안적인 문화를 만들어가는 이런 생활공동체들이 써클처럼 자족적인 경향에 빠져버렸어요. 자기들 안에서는 만족하는데 사회적인 영향력은 그렇게 크게 행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저는 환경문제도 노동운동의 힘을 빌려서 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런 면에서 노동운동이 가진 기존의 조직을 좀더 활성화해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이고요. 유럽의 경우를 자꾸 얘기합니다만, 유럽은 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의 이중 회원들이 많아요. 노동조합 하는 사람들이 환경운동 지역단체에도 참여하는 이런 더블 멤버십이 많은데, 우리는 시민운동과 노동운동 사이에 알게모르게 약간의 긴장관계가 있거든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런 것을 향후에 극복해나가야 한다는 거고요. 그리고 여성운동과 노동운동을 바라보는 창 같은 것을 말씀하셨는데, 여성운동 내에서 성과 계급 논쟁도 있기는 하지만, 저는 어느 것이 더 중요하냐, 어느 것이 더 결정적이냐 하는 얘기를 하기보다는 구체적인 국가나 시대 상황에서 각기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데 여전히 한국에서는 여성해방도 중요하지만 노동자들의 인간다운 삶이 향상되는 것에 의해서 여성의 지위도 더불어서 향상할 수 있고, 그래서 여성들이 독자적인 목소리도 내야 하지만 노동운동이나 다른 사회운동과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여성단체연합도 ‘함께 그리고 따로’라는 슬로건을 표방하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역시 우리 사회에서는 이런 노동과 자본 간의 갈등이 본질적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1) K. Marx and F. Engels, The Communist Manifesto, 1848.
2) W. Rostow, The Stages of Economic Development: A Non-Communist Manifesto, Cambridge Univ. Press 1960.
3) Lim Hyun-Chin, Dependent Development in Korea, 서울대 출판부 1985.
4) F. Fukuyama, “The End of History,” National Interest 1989년 여름호.
5) 시민의 원의(原義)가 ‘bourgeoisie’이며, 시민사회의 원의가 ‘bourgeois society’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상공인들이 시민사회의 중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6) 이중의 의미에서의 자유. 즉 가진 것이 없는 것(free)과 자신의 신체와 노동을 자기가 판매할 수 있는 인신(人身)의 자유라는 의미에서의 이중성.
7) Daniel Bell, The Cultural Contradictions of Capitalism, Basic Books 1976. 벨은 자본주의의 문화적 모순으로 기능성을 지향하는 경제형태, 평등성을 지향하는 정치형태, 그리고 자기실현을 지향하는 문화형태 간의 상호모순을 지적하였다. 그의 주장은 정당하다고 생각되지만, 경제형태에서의 기능성이야말로 시장문화이며, 이것이 문화의 중심적인 자리를 차지하려고 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8) 한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교육개혁의 원리는 수요와 공급, 경쟁의 원리를 교육’시장’에 적용하여 결과적으로 교육구조의 자연도태를 가져오게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원리는 병원이나 비영리 민간사회단체 등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되고 있다.
9) 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범문사 1978, 177~78면 참조.
10) 坂本義和, 『相對化の時代』, 岩波書店 1997.
--------------------------------------------------------------------------------
11) Karl Polanyi, The Great Transformation, Beacon Press 1944, 57면.
12) J. 보드리야르, 『소비의 사회학』, 문예출판사 1991.
13) 見田宗介, 『現代社會の理論: 情報化, 消費化社會の現在と未來』, 岩波書店 1996.
14) Ivan Illich의 ‘shadow work’를 연상해볼 수 있다.
15) Martin O?onnor, Is Capitalism Sustainable?: Political Economy and Politics of Ecology, The Guilford Press 1994, 162~63면.
--------------------------------------------------------------------------------
16) 백낙청, 「백낙청 편집인에게 묻는다」, 『창작과비평』 1998년 봄호.
17) 졸고, 「지방자치시대와 시민운동」, 크리스찬아카데미 사회교육원 엮음, 『지방화와 지구화 그리고 시민운동』, 한울 1995, 79~93면.
18) 환경운동은 1996년에 서울지하철노동조합과 공동으로 지하철의 공기오염에 대한 공동캠페인을 전개하여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사례는 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이 공공의 이익이라는 고리를 통해서만 연대할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