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915 나해 연중24주일
잠언 1:20-33 / 야고 3:1012 / 마르 8:27-38
그리스도인의 지혜
신학생 시절 성서학을 배울 때가 생각납니다. 교수 신부님께서 구약의 지혜문학을 가르치시면서 시편(Psalms)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리는 공공 예배에서 사용하기 위해 오랜 시간에 걸쳐 시와 찬송을 수집한 책이라고 하시고, 잠언(Proverbs)은 고대 근동의 다른 민족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도 화자 되던 속담과 격언 등을 수집하여 모은 책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잠언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특별한 신적 계시가 필요하지 않은 보편적인 인간의 지혜와 삶의 경험에 바탕을 둔 책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잠언을 이루는 대다수 구절은 일상을 살아가는 데 도움을 주는 일반적인 격언들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독특한 역사적 맥락을 모르더라도 언제 어디서든지 적용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기독교를 모르는 사람과 초신자들에게 성서 읽기를 권할 때, 잠언서부터 읽기를 권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혜(智慧)라는 말은 기독교만의 독점물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철학(philosophy)이란 학문은 말 그대로 지혜를 사랑하는 학문이고, 불교에서는 지혜를 반야(般若)라고 해서 굉장히 중요시합니다. 또한 기독교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유대교에서 말하는 지혜와 기독교에서 언급하는 지혜 역시 미묘하지만 다릅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 신앙인들은 그리스도교의 지혜를 논하기에 앞서 우선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지혜에 대하여 간단하게나마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먼저, 불교의 지혜인 반야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불교에서 반야는 깨달음을 얻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모든 사물의 진실된 모습을 꿰뚫어 보는 깊은 통찰력을 의미합니다. 특별히, 불교는 모든 사물과 사건이 본질적으로 실체가 없는 공(空)이며, 원인과 결과인 연기법(緣起法)에 따라 생기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하는 것들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불교는 반야를 통해 우리 앞에 생멸하는 현상들의 본질을 꿰뚫어 보면서 이것들에 집착하는 우리의 번뇌를 끊어내고 해탈(解脫)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처럼 불교가 인간 내면의 깨달음을 통한 지혜를 가르치는 데 반하여, 유대교와 기독교는 하느님으로부터 지혜의 근원을 찾습니다. 또한 지혜의 최종목표 역시 서로 다릅니다. 불교는 고통에서 벗어나 해탈을 목표로 하고 있고, 유대교와 기독교는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 회복을 추구합니다.
오늘 제1독서인 잠언은 유대인들의 지혜, 특히 그 중에서도 지혜의 예언자적 측면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지혜는 다음과 같이 외칩니다: “철부지들아, 언제까지 철없는 짓을 좋아하려느냐? 거만한 자들아, 언제까지 빈정대기를 즐기려느냐? 미련한 자들아, 언제까지 지식을 거절하려느냐? 내 훈계를 듣고 돌아서면 내 속마음을 부어주고 내 속엣말을 들려주련만, 너희는 불러도 들은 체도 않고 손을 내밀어도 아랑곳하지 않는구나. (잠언1:22-24)” 지혜가 이렇게 외치면서 경고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내 말을 들어야 마음 편히 살고 변을 당할 걱정 없이 평안히 살리라.(잠언 1:33)” 이와 같이 유대교에서 말하는 지혜는 때로는 예언자처럼 경고를 통해, 때로는 시편을 통한 기도와 찬양을 통해 사람들을 하느님의 진리로 이끌어 줍니다. 그리고 유대교에서 그러한 지혜를 가르치는 사람을 ‘랍비’라고 불렀습니다. 랍비란 ‘선생님’ 혹은 ‘스승님’을 뜻합니다.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예수님을 ‘랍비’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고향인 갈릴래아 지방말인 아람어도 같은 뜻인 ‘라뽀니’라고 불렀습니다. 대표적으로 요한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막달라 마리아가 깜짝 놀라며 내뱉은 첫 마디가 “라뽀니!”, 즉 “선생님!”이었습니다.(요한 20:16 참조) 그렇지만, 랍비 예수는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던 그런 랍비와는 달랐습니다. 복음서는 산상설교에서 이 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시자 군중은 그의 가르침을 듣고 놀랐다. 그 가르치시는 것이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가 있기 때문이었다.(마태 7:28-29)” 또한 예수님은 여러 가지 기적을 일으키심으로써 예언자로도 명성을 얻고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랍비’ 혹은 ‘예언자’라고 알고 있었을 때,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마르 8:29)”라고 물으십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 8:29)”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란 ‘기름 부음 받은 자’, 즉 ‘메시아’이자 ‘주님’을 뜻합니다. 베드로의 이 고백은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유대교와 구별되는 결정적인 신앙고백입니다. 즉, 예수님은 하느님의 지혜를 가르치는 선생 또는 그 지혜를 예언하는 예언자를 뛰어넘어 우리를 구원해 주실 주님이시며, 이 고백은 훗날 삼위일체 교리에서 성자 하느님을 이해하는 출발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복음서는 베드로의 이 고백 직후, “그 때에 비로소(마르 8:31)”라는 구절이 등장합니다. 이제 예수님은 비유로서 하느님 나라와 그 구원계획을 돌려 말하시지 않고 직접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그 계시란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버림을 받아 그들의 손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게 될 것(마르 8:31)”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안에 나타난 하느님의 신비를 그분의 말씀과 기적들을 통해 외적으로만 알다가 그 진면모를 이해하는 단계로 넘어갈 때, 즉각적으로 커다란 낭패감과 당혹감을 느낍니다. 베드로가 이 말씀을 듣고 “예수를 붙들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펄쩍 뛰었다(마르 8:32)”라는 성서의 증언이 이 점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마도 베드로를 비롯한 열두 제자는 직감했을 것입니다. 스승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그와 흡사한 어떤 일이 자기들에게도 닥치리라는 것을 예감하였습니다. 자기들에게 닥칠 운명이란 결코 장밋빛이 아닐 것이고, 이것으로 자기들의 앞날이 온통 어두워지고 안개가 드리우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들은 주님의 계획이 띠는 가혹한 현실 앞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제자들은 스승 예수와의 정(情) 때문에 그리고 그분과 함께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 현실을 배척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제자들이 무의식중에나마 두려워하던 일이 수면 위로 올라온 것입니다. 어쩌면 스승 예수의 길은 그의 제자들의 길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릴 것이다.(마르 8:34-35)” 여기서 ‘자기를 버린다’라는 말씀은 ‘나 자신을 알 수 없다, 나의 삶을 감당할 수 없다, 생각을 가다듬을 수 없다’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내 힘으로가 아니라 오롯이 주님께 함께 그 길을 걷겠다는 뜻입니다.
이로써 그리스도교 지혜의 핵심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내가 자신의 힘으로 깨달아서 번뇌에서 벗어남도 아니요, 하느님의 지혜를 배우고 익혀서 현명한 사람이 되는 차원을 넘어서, 지혜의 근원이시며 인간이 되신 하느님 예수께서 계신 곳에 함께 있겠다는 근본 선택인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세상에는 지혜에 대한 훌륭한 가르침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불교나 철학과 같은 고상한 종교와 학문이 아니더라도 세속의 지혜는 우리를 보다 행복하고, 더 즐겁게 사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고 선전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지혜와 그러한 지혜 간에 가장 큰 차이점은 ‘십자가의 지혜’가 있냐 없냐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교가 십자가의 지혜를 깨닫고 그 길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은 그저 말씀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고, 기적을 보고 환호하는 차원에서 한 발짝도 전진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나 개인 혹은 그저 나와 관련된 몇몇 사람들의 행복과 구원밖에 가져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도 영원한 것이 아닌 한시적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가르치고 걸으셨던 십자가의 지혜를 따른다면, 그것은 나와 우리를 진정으로 살리고, 영원한 하느님 나라의 지혜로운 시민으로 우리를 변화시킬 것입니다. 우리는 이를 믿고 소망하기에 그리스도인의 지혜는 힘이 있습니다.
참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