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으로는 5섯살 때의 일인것 같다
엄마는 아빠의 사업 실패로 퇴직금 몽땅
날리고 읍내 마차다리 근처에서 구멍
가게(점방)를 운영하셨다 (아빠는 들러리)
9남매를 먹이고 가르치기 위한
생계수단이었다.
장독을 묻어 막걸리 배달 받아 붓고
연탄불에 큰 양은솥 올려 놓고
콩나물 국에 두부 데쳐 술안주를
장만한다
나무와 유리 덮게로 만든 대,여섯개의
과자 통속에는 눈깔사탕, 비과, 유과,
셈빼, 고구마 과자등을 조촐히 진열
해 놓고 손님을 기다린다
그 시절! 사람을 태우는 작은 트럭은
긴 나무의자였다. 나는 차가 타고 싶어
그 차에 무조건 올라 탔다
손님을 다 태운 그차가 어디론가를
향하여 출발한다.
나는 무척 행복했고 신이 났다
그 차의 행선지는 충북 영동에서
무주까지이고, 시골 5일장을 보는
손님들을 위한 유일한 수송수단
이었던 것이다
그 차가 무주에 도착하여 손님들이
다 내려 집으로 향하는데, 나만 차에
남아있자 기사님이 크게 외친다
"어린애를 두고 가면 어쩌냐?"고~
아무도 우리 애가 아니라고
고개를 젖는다
기사분과 나와의 대화가 오간다
"너 집이 어디야?" "영동인데요!"
"영동 어디야?" "마차다리 옆에요!"
"이놈 환장하겠네! 별놈 다 봤네! 참!"
기사님이 자기 옆에 나를 앉히고 다시
영동 읍내로 돌아왔다
"저기가 우리집이예요"
기사님이 엄마한테 나를 넘겨주고
엄마한테 최고의 대접을 받고는 돌아
가셨다
직후 엄마의 날카로운 손바닥이 세번씩
이나 보송보송한 내 뺨을 후려친다
내 몸이 휘영청 할 정도로~~
엄마는 그래 놓고는 펑펑 우신다
"망할놈, 썩을놈, 애미 너 찾는다고
죽는줄 알았다" 며 찾았다는 안도감에
엄청도 우신다. 나도 따라 많이
울었고, 그때 나는 엄마 품에 꽁꽁
앉겨 있었다
"안 아프냐"며 호호 불고 약을 발라 주셨
다. 눈깔사탕을 엄마 입에서 내 입으로
옮겨 주신다
9남매 중 막내였던 나 였기에 더욱
그러셨을까?
이 세상 엄마들이 다 그렇듯이~
지금 이 글을 쓰며 내 눈엔 눈물이
하염없이 흐른다~
내가 중3 봄에, 엄마는 한국나이
51세에 고생 고생만 하시다가
뇌졸증으로 운명을 달리 하셨다
엄마...!! 사랑합니다♡
많이 또 많이 보고 싶습니다
우리 스케치 회원님들~
저 처럼 후회하지 마시고 부모님 살아
계실 때에 효도하고, 잘해 드리세요😭
첫댓글 그런 슬픈 사연이 있었네요.
우리들 세대라면 이 보다도
더한, 덜한 말 못할 사연들
이 많으리라 생각됩니다~
우리 친구들중에 점방아들이 있었는데 다 부러워했어요
이유는 과자를 마음대로 먹을수있다는 이유때문에..
쫀드기.고구마과자,소라과자,라면땅등등
지금도 먹고싶어요 ㅋ
그리고 우리딸도 잃어버려서 얼마나 애가 탔는지
길에 가는 아이들이 내딸 같아서 ..울면서 찾던 기억이 생생
나중에 알고보니 어떤 할머니가 우는 아이를
자기집에 데려다가 보관..동사무소에서 방송하니
할머니가 신고해서 찾았지요
또 아들은 이모결혼식에 갔다가 행방불명
어떤 여자아이 손잡고 횡단보도 건너는것을 발견..
불러도 여자아이 손을 잡고 막 뚸어가더라고요ㅠ
얼마나 귀가 막히던지..ㅠㅠ
솔로몬님 때문에 옛추억이 솔솔납니다
와~~ 그랬군요! 지금 막
골프장 둘레길 걷다가, 더워
서 의자에 앉아 쉬었다 가려
는데 반장님 댓글을 보고 울
애들 잃어 버렸던 생각이 나
서 혼자서 엄청 웃었어요😁
어릴때는 점방 하는집은
부러웠지요
과자 마음대로 먹을있겠다는 생각으로 ㅎ
자식잃어버리면
부모 마음이 얼마나
힘들겠어요 ㅠㅠ
부모님마음
다같은 마음
솔로몬님은
어릴때부터 모험심이강했군요 ㅎ
부지런하신 비타민님~!!
맞아요! 제가 모험심이 좀 강
했던것 같아요~
라디오, 미싱기, 시계등 고친
다며 다 망가뜨려 놓기도 하
고 혼도 많이 났어요~^^
솔로몬님 옛얘기를
읽노라니 제눈에도
눈물이 핑도네요~~
넘 아까운 나이에 넘일찍
가신 솔로몬님의 어머니...
괜히 또 엄마 생각에 울컥합
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