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 오바마는 누구?
다들 잘 아시는 내용입니다만여기 저기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내용을 찾아서 편집해본내용입니다. 잘 알지못했던 내용도 있을것입니다
'버락 오바마는 누구인가'
본명 Barack Hussein Obama 출생 : 1961년 8월 4일
옥시덴탈대학 학사. 컬럼비아대학교 정치학 하버드대학교대학원 법학 박사 미국 일리노이주 민주당 연방상원의원 일리노이주의회 보건복지위원회 의장 미국 일리노이주 상원의원. 시카고대학교 로스쿨 교수 미국 일리노이주 인권변호사 1961년 8월4일 하와이주 호놀룰루에서 케냐 출신의 흑인 아버지와 캔자스주 출신의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오바마는 2004년 11월 일리노이주에서 미 역사상 두번째 흑인 상원의원으로 선출되고, 그해 대선 때 보스턴의 민주당 전당대회에 찬조연설자로 나서기 전까지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흑인으로서 어렵게 성장하면서도 하버드 법과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의 주류사회에 구김살없이 진입한 젊은 흑인정치인의 통합과 희망의 메시지는 강력한 인상을 심어주고 있다.
오바마 의원의 정식 이름은 ‘버락 후세인 오바마’다. ‘후세인’은 무슬림 할아버지 후세인 온양고 오바마에서 따왔다. 공화당측 보수언론은 그의 이름을 거론할 때 꼭 후세인을 덧붙인다. ‘사담 후세인’을 연상시키는 효과를 누리기 위해서다. 오바마 의원의 종교는 이슬람교가 아닌 기독교다. 하와이 대학에 사상 첫 유학생으로 입학한 오바마 후보의 아버지가 그 곳에서 ‘백인’ 여성을 만나 결혼해 낳은 아기가 오바마다.
혼혈인 자신을 스스로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고 하는 그의 어린 시절은 순탄치 않았다. 부모의 결별로 친척들의 손에서 자라기도 했고, 어머니가 인도네시아인과 재혼하자,오바마는 어머니를 따라 6~10살 인도네시아에서 살았다. 그는 또 자신이 30대 초반에 쓴 회고록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을 통해 고교시절 마약을 접했었다는 것을 인정해 논란이 되기도 했고, 청소년 시절 인종 문제로 정체성의 갈등을 겪기도 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이후 그는 로스 앤젤레스의 옥시덴탈 칼리지에 입학해 교환학생으로 컬럼비아대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1985~1988년 시카고에서 비영리 빈민조직사업에 뛰어들면서 인생이 변하기 시작했다. 이후 하버드대 로스쿨에 들어갔고 1990년 법률학술지 ‘하버드 로 리뷰’ 104년 역사상 처음으로 흑인 편집장 자리에 올랐다.
당시 오바마 의원은 법학박사 학위를 딴 뒤 시카고로 돌아가 사회운동을 계속하면서 시카고대 로스쿨 강사로 일했다. 1996~2004년 일리노이 주의회 상원의원을 거친 뒤 2004년 민주당 전당대회 기조연설을 했다. 그 후 3개월 뒤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됐다. 오바마는 태생적으로 운이 좋았다. 출생지인 하와이 호놀룰루는 미국 연방에 편입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인종에 대해 관용적이었다. 부모가 결혼했던 1960년대는 미국 전체 주 중 절반 이상이 흑인과 백인의 결혼을 중죄로 규정하던 때였다. 무엇보다 외가가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흑인 오바마의 성장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조부모는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흑백간의 결혼을 가로막는 세태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런 부모의 피를 물려받은 오바마의 어머니는 인종문제에 대해서는 강인한 모습을 보였다. 어린 오바마에게 항상 흑인의 장점과 우수성을 가르쳤다.
오바마 후보가 부인 미셀, 딸 맬리아, 사샤와 함께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오바마가 흑인에 대해 어머니에게 배운 것은 최초의 흑인판사, 최초의 흑인 민권 운동가, 최초의 흑인 여배우… 이런 사람들이었다. 세상의 차별로부터 아들을 철저히 차단하려고 했던 어머니 덕분에 오바마의 어린 시절은 자신감과 희망으로 충만했다.
시카고 인권변호사, 시카고 대학 로스쿨 교수를 거친 뒤 주 상원의원을 3번 연임한 그는 2004년 여름 보스턴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인종에 관계없이 미국인은 모두 하나라는 내용의 기조연설로 전국적인 지명도를 얻었고, 이후 일리노이주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70%의 기록적인 득표율로 당선되면서 중앙 정치무대에 화려하게 등장, 민주당의 대선후보로 도약했다.
버락 오바마 후보의 부인인 미셸 오바마 여사가 1일 학생들의 유권자등록 독려차 콜로라도 대학을 방문해 학생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위에서 언급했지만 케냐 출신으로 케네디 재단의 지원으로 미국에서 유학 중이었던 아버지와, 캔자스 주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2살때 부모의 이혼과 그 직후 어머니의 인도네시아 거주 동행 등 다양한 지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한때 마약에 손을 대는 등 불행한 청년 시절을 보내기도 했으나 1983년 컬럼비아대 정치학과를 졸업 후, 시카고 시의 빈민가에서 인권 운동가로 맹활약했다. 그 후 하버드 법대에 진학해 1991년에는 흑인계로는 처음으로 하버드 법대의 학술지 편집장을 지냈으며 수석 졸업했다.
어린 시절의 버락 오바마와 그의 어머니 앤 더넘 소에토로 씨 변호사 자격증 취득 후에는 시카고 지역을 중심으로 자선 봉사 단체 및 시민 법률 상담 활동을 하면서 지역 기반을 다졌고, 인권 변호사로 그 명성을 드높였다. 또한 1993년부터 2004년까지 시카고 법대의 교수로 재직했다.
1970년대 초반 하와이에서 당시 10대 소년이었던 버락 오바마(맨 오른쪽)가 엄마 스탠리 앤 던햄, 여동생 마야와 함께 단란한 한때를 보내고 있다. 1996년에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민주, 시카고 남부 제13지역구 대표)이 되면서 정계에 입문했으며, 2004년 11월 연방상원의원에 출마해 70%의 압도적인 득표로 당선됐다. 2004년 8월 보스턴에서 열린 민주당 전국전당대회 기조연설과 2004년, 2006년 선거전 등에서 보여준 천재적인 대중연설 능력과 열성 지지자들의 지원을 바탕으로 2007년 2월 제44대 미국 대통령 선거의 민주당 후보경선에 출마를 선언하였다.
오바마 부인 미셸… 청중 동원력·장악력 과시
미셸은 행동파 퍼스트레이디가 될 가능성이 크다. 오바마 못지않은 청중 동원 능력과 장악력을 과시한다. 미셸은 ‘끝내기의 달인’이다. 망설이는 유권자들의 마음을 남편 쪽으로 끌어당긴다. 특히 오바마가 ‘흑인이냐 아니냐’며 헷갈렸던 흑인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인종문제를 피해 다녀야 되는 오바마와 달리 그는 은근히 ‘인종감정’을 자극한다. 대학에서 부전공으로 미국흑인학을 공부한 그는 “미국 언론은 미국 흑인공동체의 이미지를 왜곡하고 있다”고 말했다.
▲ 버락 오바마는 출신, 정치경력, 유세 스타일 등에서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과 닮았다는 평가를 많이 받고 있다.
오바마는 미셸을 ‘나의 반석(盤石)’이라고 부른다. 오바마 부부의 친구들은 미셸이 오바마의 ‘진북(眞北·true north)’이라고 말한다. 어두운 밤 방향을 가리켜주는 북극성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 만큼 오바마가 대통령이 될 경우 미셸은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 할 수 있다. “퍼스트레이디가 되면 어떤 일을 할 것인가”라는 언론 매체의 질문에 대해 미셸은 굳게 입을 다문다. 또한 자신에게 최고 우선순위는 어머니·아내 역할이라고 강조한다. 미국 유권자들이 지나치게 설치는 퍼스트레이디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美 민주당 대선주자 버락 오바마 상원의원의 부인 미셸 오바마가 미국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 랜초 고등학교 유세에서 오바마 후보를 소개하고 있다.
없는 말도 만들어 내는게 선거전이다. 미셸과 신디도 가혹한 검증을 받고 있다. ‘미셸은 애국심이 부족한 게 아닌가’ 하는 대중의 의구심 때문에 도마에 오른다. 애국심보다 흑인 정체성이 더 강한 게 아니냐 하는 문제다. 그가 프린스턴 대학을 졸업할 때 쓴 학사 논문은 ‘프린스턴 대학 흑인 졸업생과 흑인 공동체’였다. 오바마가 상원의원으로 당선된 후 미셸(시카고 대학 메디컬센터 부사장)의 연봉이 2004년 12만 달러에서 2005년 32만 달러로 인상된 것도 따가운 눈총을 받고 있다. 오바마 가족…다양한 인종 융합된 '멜팅 팟'
대학을 졸업하고 시카고의 법률회사인 시들리 앤드 오스틴에서 일하다 만나 결혼한 부인 미셸과의 사이에 10살인 말리사와 7살인 사샤를 두고 있다.
오바마의 가족관계는 현재의 미국의 구성을 보여주듯 아주 복잡하다. 케냐인 아버지, 코카서스인 엄마, 인도네시안 이복동생… 그래서 사람들은 오바마를 가리켜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융합돼 있다는 뜻으로 ‘한 사람의 용광로’(One-man-melting pot)라고 부르기도 한다. 오바마의 어머니인 앤 던햄은 캔사스에서 태어났으나, 그의 부모가 하와이로 이주함에 따라 하와이 대학에 진학을 하고 거기서 케냐에서 유학와 경제학을 전공하고 있던 아버지 버락 오바마 시니어를 만나 결혼한다. 61년에 결혼을 하고 결혼한 지 6개월 뒤에 오바마가 태어난다. 그러나, 64년 초 이들은 이혼을 하고 만다.
오바마가 엄마를 따라 6살까지 하와이에 살게 되나, 67년 인도네시아인과 재혼한 엄마를 따라 다시 인도네시아로 이민을 가게 된다. 오바마의 친부는 그후 케냐로 돌아가 석유회사와 케냐 정부에서 일하다 82년에 교통사고로 죽게된다. 이때 그의 나이는 46세. 인도네시아에서 오바마의 이복 동생이 태어나고, 다시 하와이대 대학원으로 진학한 엄마를 따라 하와이로 왔다가 77년 엄마가 인도네시아로 돌아가자, 그는 외조부모와 함께 함께 살다 뉴욕의 컬럼비아대로 진학을 한다.
잘 알여지지 않은 오바마의 가족 비사
버락 오바마의 할머니 사라 후세인 오바마와 삼촌 세이드 오바마가케냐 코겔로 마을 자택에서 취재진 앞에 포즈를 취했다.
오바마 할아버지 오바마의 할아버지는 세 번결혼했는데 오바마는 둘째부인의 손자이다. 현재 케냐에 살고있는 할머니 "사라아냥고"는 오바마 할아버지의 셋째부인인데 친가쪽에서 보면 현재 생존하고 있는 유일한 할머니이지만 엄밀히 보면 오바마와는 피 한방울 섞이지않은 할머니이다. 왜냐하면 오바마는 할아버지의 둘째부인 손자이기 때문이다.
오바마의 아버지
오바마 아버지
오바마의 친부는하와이에서 케냐로 돌아가 석유회사와 케냐 정부에서 일하다 1982년에 교통사고로 사망 오바마의 아버지 버락 후세인 시니어는 네 번 결혼을 했다. 케냐에서 첫부인과 네명의 자녀를 낳았다. 그런데 미국으로 유학와서 오바마의 어머니인 백인여성 스탠리 앤 던햄과 두 번째 로 결혼해서 오바마를 낳은것이다. 오바마 아버지는 오바마를 낳고 이혼한후 미국에서 루스 라는 여인과 세 번째 결혼을 합니다. 그 사이에서도 둘을 낳았다고 한다. 그런데 오바마 아버지가 미국에서 공부를 끝낸뒤 케냐에 돌아가서는 또 네번째 부인 자엘과 또 결혼을 합니다. 그 사이에서도 아들 을 하나 낳았다고 한다.
오바마의 어머니
1967년 인도네시아 출신 유학생 롤로 소에토로 씨와 결혼한 뒤 오바마와 함께 인도네시아로 이주해 새로운 가정을 꾸렸다
오바마의 어머니 더넘씨는 가구상이던 부모님을 따라 미국 하와이에 이주했던 하와이대에서 오바마의 아버지를 만나 1961년에 결혼했으나 오바마의 아버지가 케냐로 귀국하기로 결정하자 이혼했다 오바마의 어머니 스탠리 앤 던햄은 이혼한뒤 인도네시아 남자 롤로 소에토로와 결혼해 인도네시아로 이주했습니다. 인도네시아인과의 사이에서 마야 라는 딸을 낳았습니다. 오바마의 이복여동생입니다. 오바마의 어머니는 마야를 낳은후 또 이혼을 했습니다.
오바마의 의붓동생 마야
하와이에서 교편을 잡고있는 마야는 오바마 캠프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습니다. 오바마의 여러 이복 형제 자매중 유일하게 오바마를 도왔습니다.
오바마의 외할머니
버락 오바마 대통령 당선자가 컬럼비아대 재학 시절 외조부, 외조모와 함께 뉴욕의 공원에서 찍은 사진
오바마는 열 살때부터 열아홉살 대학에 들어가기전까지 하와이 외가에서 자랐습니다. 오바마는 외할머니는 나에게 미국의 가치를 심어줬다. 애국과 근면 이웃사랑이 어떤것인지 가르쳐줬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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