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396
2월9일[연중 제5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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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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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1WZJGaFW-50 (차바우나 바오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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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 아무리 심연의 밑바닥에 있다 할지라도 끝까지 희망해야 하겠습니다!>
악령은 아닐지라도 이런저런 병고나 상처, 심각한 문제 성향, 사이비 종교 등에 빠진 자녀들 때문에 항상 울고 다니시는 부모님들을 자주 접합니다. 그분들이 겪고 계시는 몸과 마음의 고통은 필설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입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녀, 선물이요 보배, 분신이요 삶의 의미요 전부인 자녀가 그리도 고통을 겪고 있으니 부모의 마음은 찢어질 정도입니다. 그 어떤 위로의 말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저 함께 울어주는 수밖에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이방인 여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랑하는 딸이 악령에 들려 비참한 죽음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태도를 보면 놀랄 정도입니다. 딸을 위해 불 속이라도 뛰어들 태세입니다. 딸을 위해서라면 대신 죽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딸만 치유된다면 자신은 개가 되어도 좋다는 심정입니다. 어머니의 모습에 깊이 감동 받으신 예수님께서 기꺼이 치유에 응하십니다.
그녀는 비록 이방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지니고 계셨던 신성(神聖)과 전지전능하심을 잘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동시에 그분을 향한 강한 신뢰심과 굳은 신앙심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겸손한 태도로 딸의 치유를 청했습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코 복음 7장 28절)
거듭된 예수님의 외면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믿음과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간절하다 못해 집요하게 매달린 결과, 그녀는 즉각적인 딸의 치유라는 큰 은총과 축복을 선물로 받습니다.
더이상 비참할 수 없었던 이방인 여인의 수직 상승은 오늘 우리에게 큰 교훈 하나를 선물로 주고 있습니다. 잘 나갈 때일수록 더욱 겸손해져야 하겠습니다. 아무리 심연의 밑바닥에 있다 할지라도 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말아야겠습니다.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코 7,24-30)
<(2) 벼랑 끝에 서서>
하루가 다르게 점점 야위어가는 아이의 몰골에 가슴이 찢어지던 한 어머니를 알고 있습니다. 같은 병실에서 같은 병명으로 함께 치료받던 아이가 먼저 "너무 짧아서 서러운 이 세상"을 하직했을 때만 해도 "우리 애는 절대 아닐거야. 절대로 그래서는 안되" 하며 하루에 수 백 번도 넘게 자신을 추스르던 어머니였습니다.
그러나 "저희로서는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어떻게 더 이상 해볼 도리가 없습니다"는 의사의 판정을 들은 어머니는 그야말로 세상의 벼랑 끝에 선 듯 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 표현에 따르면 "뚜껑이 열리고" 말았습니다. "꼭지가 돌아버리고" 만 것입니다. 너무도 화가 난 나머지 이성을 잃고 만 것입니다.
신자였던 어머니는 병원 부속 성당으로 달려가셨습니다. 그리고는 대뜸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다행이 방음이 잘 된 성당이었고 밤늦은 시간이어서 성당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느님, 이거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저 어린 것이 무슨 죄가 있다고... 하느님, 당신은 자비의 하느님이시라면서 어찌 이런 일이 제 눈앞에 벌어지게 하십니까?" 하며 대성통곡을 터트렸습니다.
울다 지친 어머니는 아예 성당 바닥에 드러누웠습니다. "하느님 당신이 주신 아들이니 당신이 살려내십시오. 너무 어리지 않습니까? 이거 너무 하지 않습니까?"
어느덧 시간은 흘러 새벽녘에 이르렀는데, 그때 어머니의 기도는 이렇게 바뀌어있었습니다. "하느님, 데려가시려면 차라리 저를 데려가 주세요. 제발 부탁입니다. 하느님, 저를 데려가 주세요. 만일 아이를 살려주시면 꼭 당신 나라의 일꾼이 되도록 인도하겠습니다." 그리고 울다 지친 어머니는 자기도 모르게 깊은 잠에 빠져 들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출근한 청소부 아주머니에 의해 잠이 깬 어머니는 소스라치게 놀라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그렇게 분하고 원통하던 마음이 깨끗이 사라지고 왠지 모를 평화가 마음에 찾아온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내게 큰일을 하셨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병실로 뛰어온 어머니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습니다. 너무도 기력이 소진되어 제대로 앉지도 못하던 아이, 물도 한 모금 제대로 못 마시던 아이가 침대에 똑바로 앉아 바나나를 먹고 있었습니다.
말짱한 얼굴로 말입니다. 그리고는 한다는 말이 "엄마, 어디 갔다 왔어? 나 배고픈데" 하는 것이었습니다.
엄마는 너무도 기쁘고 또 한편으로 아이 때문에 속상했던 지난 일들이 생각나 "너, 왜 이렇게 엄마 속을 태우는거니?"하면서 뺨을 한대 세게 때렸답니다.
영문도 모르고 세게 뺨을 한대 맞은 아이가 울기 시작하자 엄마도 아이를 품에 안고 아이를 따라 크게 울기 시작했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정말 실화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시로페키니아 출신의 이방인 어머니는 악령 들린 딸의 치유를 예수님께 부탁드렸습니다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합니다.
어떻게 보면 참으로 모욕적인 일입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더욱 여인을 비참하게 만듭니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 자신을 강아지 취급하는 예수님이 한없이 원망스러웠을 것입니다.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겠습니까? "내가 차라리 그냥 가고 말지!" 하는 생각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은 체면불구하고 끈질기게 예수님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놓지 않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딸의 치유를 부탁드립니다. 자신을 강아지라고 말하면서, 강아지도 바닥에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지 않느냐면서 집요하리만치 간절하게 매달립니다.
머리를 땅에 대고 온몸으로 통사정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를 가지고 말입니다.
우리는 언제 단 한번이라도 간절히 기도한 적이 있습니까? 밤새워 눈물을 펑펑 쏟으며 예수님께 매달려 본 적이 있는지요?
간절한 기도는 하늘까지 닿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절대로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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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yaPwdk7VT7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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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었다고 믿어야만 악에서 해방되는 이유>
2017년 6월 청년 창업 지원과 전통시장의 활성화를 위해 지자체에서 내놓은 방법은 청년들이 음식을 판매하는 청년몰입니다. 여기는 창업 비용이 거의 들지 않고 임대료도 다른 업소들에 비해서 10분의 1 정도입니다. 이런 환경에서 실패할 일은 없어 보입니다. 게다가 ‘백종원의 골목식당’을 통해 백종원 씨가 여러 가지 솔루션을 주었고 이 방송은 커다란 홍보 효과를 낳았습니다.
지난 2018년 SBS ‘골목식당’에 나온 뒤 손님들이 줄을 이었던 인천 신포국제시장 청년몰. 지금은 문을 연 점포가 단 한 곳도 없습니다. 대전 청년구장의 청년몰 역시 2021년 모두 폐점했습니다. 물론 코로나 여파도 없지 않아 있겠습니다. 그러나 코로나로 모든 상인이 망한 것은 아닌데도 왜 유달리 청년몰은 전국적으로 다 망했을까요?
백종원 씨는 2019년 청년구단을 기습 방문하여 청년구단 대표들을 모아놓고 정확히는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장사가 장난입니까? 이렇게 장사하면 다 망해요. 왜 가게 세가 이렇게 낮은데 여러분들은 다른 곳과 같은 가격대를 형성합니까? 내가 분명히 가격 내리라고 했는데. 그리고 왜 다른 업소에서 파는 것을 내가 팝니까? 서로서로 잘 돼야 하지 왜 나만 잘되려고 합니까? 여러분들은 이것을 통해 장사 경험을 쌓는 학교, 다양한 손님을 접하는 기회가 되는 거로 족해요. 그런데 서로 자기가 더 매출을 올리려고 하고 있잖아요. 내가 2~3년 안에 망하지 않으면 손에 장을 짖어요.”
코로나의 영향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네티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망하는 집 이유 있고, 흥하는 집 이유 있다. 임대료로 15만 원 내면서 임대료 150만 원 내는 프랜차이즈 가게처럼 비싼 가격으로 장사하다니. 팔아주러 갔다가 헛웃음 나오고 오만 정 다 떨어졌다.”
누가 망하고 싶을까요? 하지만 사람이 함께 살아가다 보면 그래도 내가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살아남으려면 천상 남을 이겨야 합니다. 그러니 서로 경쟁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함께 망하는 것입니다. 이런 현실은 비단 작은 청년몰의 경우에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한 나라가 그러하고, 전 세계가 그러합니다. 예수님은 악이란 것이 외부의 영향이 아닌 자기 자신들 안에서 나온다고 하십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마르 7,20-23)
예수님은 이러한 나쁜 생각들과 행동들이 나쁜 사람에게서 나온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냥 사람의 마음에서 저절로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 없는 세대가 오면 세상이 멸망하게 될 이유입니다. 우리라도 나쁜 생각이 아닌 좋은 생각이 나오게 해야 합니다. 그들은 백종원 대표의 말을 들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말을 물리쳤고 결과는 함께 망하는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김여환 의사의 『천 번의 죽음이 내게 알려준 것들』에 ‘임종 전 죽음을 예고하는 다섯 가지 증상’이란 동영상이 있습니다.
어떤 증상들이 있을까요?
1. 먹고 마시고 싶은 생각이 사라집니다. 삶의 의욕을 더는 붙잡고 있을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
2. 잠자는 시간이 길어집니다. 3~4일을 내리 자다 문득 일어나 가족들과 대화를 나누고 다시 긴 잠에 빠지기도 합니다.
3. 몸이 편안해집니다. 고통이 덜해지며 구토감이 없어지고 더는 기침도 나오지 않습니다.
4.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선물을 준비합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분이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 오후에 내가 시내에 마지막으로 볼일이 있거든. 외출을 허락해줬으면 좋겠어.”
5. 갑자기 기운을 차려 가족들에게 추억거리를 얘기하거나 덕담을 건네기도 한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이러한 증상들이 나타나면 사실 가족들보다 본인이 더 자신이 마지막 때임을 느낍니다. 곧 죽는다고 느끼면 이렇게 육체적인 욕망도 사라지고 집착도 사라집니다. 그러니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그러다 보니 몸도 편안해지고 나를 위해서가 아닌 가족을 위해 무언가를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악해지는 이유는 살려는 마음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몇 번이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6,25)
백 대표의 말은 함께 살기 위해 자기를 포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백 대표의 말을 받아들일 겸손함이 없었던 것입니다. 반면 오늘 복음의 여인은 예수님께서 그녀를 거의 죽이다시피 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 7,28) 예수님께서는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마르 7,29)라고 하십니다. 겸손한 이에게는 마귀가 발을 붙일 수 없습니다. 겸손이란 죽은 상태입니다. 겸손은 말 그대로 땅을 상징합니다. 땅은 모든 죽은 생명들의 마지막 상태입니다.
‘삼사라’란 영화에서 자기 육체의 욕망을 없애고자 몇 년 동안의 고행을 했지만, 결국 사라지지 않아 파계한 스님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살다 보니 다시 도망쳐 스님으로 살고 싶어집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삶. 하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서부터 이미 죽은 사람처럼 살 수 있습니다. 호스피스에서 돌아가시기 얼마 안 남으신 분들은 이미 자신이 죽었다고 믿습니다. 믿음의 효과는 마치 플라시보 효과처럼 내가 그렇다고 믿어버리면 나타납니다. 그래서 우리가 죽었다고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정말 죽었습니다. 믿으면 효과가 나타납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어서 그분과 함께 묻혔다고 합니다. 믿으면 효과가 생겨납니다.
죽으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자기 힘으로 죽으려고 하는 것이고 그 말 안에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믿음이 존재합니다. 그러면 절도 못 죽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끌어안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기 때문에 우리도 죽은 것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그분은 정말 우리 인성을 끌어안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 이미 죽었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마음 안에서 악이 솟아나지 않습니다. 임종 직전의 환자처럼 좋은 것만이 나옵니다. “나는 죽었습니다”라는 믿음의 효과가 이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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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일을 잘 하는 사람은 머리가 좋아서 인 경우가 있습니다. 성실해서 인 경우도 있습니다. 운이 좋아서 인 경우도 있겠습니다. 제가 볼 때는 ‘우선순위’를 잘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북한산에 가기로 했으면 북한산에 대한 자료를 먼저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설악산에 대한 자료를 본다면 시간을 많이 내서 일을 했지만 정작 중요한 순간이 오면 당황하게 됩니다. 우선순위를 정하는 기준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공, 명예, 권력’이 우선순위입니다.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영광, 영원한 생명, 이웃사랑’이 우선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신앙인들의 모범이 되신 분들이 있습니다. 교회가 성인으로 품에 올린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능력, 재능, 업적이 뛰어나서 신앙의 모범이 되고, 성인품에 오른 것이 아닙니다. 모두들 하느님의 영광, 영원한 생명, 이웃사랑을 삶의 우선순위에 놓았던 분들입니다.
요즘 우리는 창세기의 ‘천지창조’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성서는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신 과정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빛을 만드시고, 해와 달 그리고 별을 만드셨습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에는 바다와 육지를 만드시고, 그 위에 많은 생명을 만드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생명을 다스리기 위해서 하느님을 닮은 ‘모상’으로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하느님을 닮은 사람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보호하고, 돌볼 수 있는 권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닮은 모상인 사람에게는 ‘짝’이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다른 생명이 아닌 하느님을 닮은 모상인 사람에게서 ‘짝’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짝을 보고 사람은 이렇게 감탄하였습니다.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 하느님을 닮은 모상인 남자와 여자는 이렇게 부부가 되었고, 부끄러움을 몰랐습니다. 하느님의 우선순위는 하느님을 닮은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천사보다 못하게 만드셨지만 존귀함을 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예전에 감동적인 신문 기사를 읽었던 적이 있습니다. 한 여인이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남편을 6년 동안이나 간호해서 의식을 되살려낸 것입니다. 이 여인은 의사들도 회복할 수 없다고 포기한 남편을 기적적으로 소생시켰습니다. 그녀는 항상 "그는 환자가 아니다. 내 남편이다."라고 스스로 다짐하였으며 하루에도 수십 차례 의식 없는 남편과 대화를 나눴다고 합니다.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남편을 아기처럼 껴안고 뽀뽀도 하였으며 남편이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고 했습니다. 도저히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이 그 남편은 6년 만에 부활하여 첫마디를 "아멘"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남편들을, 아내들을 부끄럽게 만듭니다. 모든 부부는 분명히 결혼식에서 '비가 오나 바람 부나 괴로울 때나 슬플 때나 병들었을 때나 늙었을 때나 항상 사랑할 것을 맹세'한 신랑 신부였습니다. 그 자매님에게 우선순위는 ‘남편’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내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남편은 이 세상에서 ‘부활’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이 아니었던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솔로몬처럼 지혜가 크지도 않았습니다. 저처럼 사제생활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 듣지도 않았습니다. 그 여인에게 우선순위는 병중에 있는 ‘딸’이었습니다. 다만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였고, 겸손하게 무릎을 꿇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겸손함을 보시고, 그 믿음을 보시고 여인의 딸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능력, 지혜, 업적, 지위를 모두 모아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겸손과 모든 것을 내맡기는 믿음의 무게를 감당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내 삶의 우선순위가 하느님의 영광이 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이웃사랑으로 드러나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모두 영원한 생명에로 나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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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7,24-30: 강아지도 빵 부스러기는 얻어먹지 않습니까?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마르 7,15) 이 말씀으로 바리사이들이 불쾌하게 여기자 주님께서는 티로 지방으로 가신 것 같다. 그분은 “아무에게도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으나 결국 숨어계실 수가 없었다.”(24절) 그분은 육체를 가지신 분으로 우리와 같은 한계를 가지고 계셨기 때문이다.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은 끈질긴 간청으로 주님의 연민을 불러일으켰다. 티로에서 예수님은 마귀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어머니를 만나 그 간청을 들으신다. 마귀 들려 고생하는 자기의 딸을 고쳐달라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이상한 말씀을 하신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27절) 당시 희랍인들은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여인을 “개”라고 불렀고, 유다인들은 이방인들을 경멸하는 말로 “개”라는 표현을 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당시의 사람들이 사용하던 말을 사용하셨던 것 같다. 아마 이것은 그 여인의 믿음을 보려고 하셨던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 여인의 대답은 어떠했는가? 그런 말씀에 하나도 섭섭함이 없이 오히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28절) 한다. 얼마나 여유 있고 부드러운 마음의 태도, 생활의 자세인가? 마치 유대인이 다른 민족들의 주인이라도 되는 것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 자신은 어떠했는가? 우리가 우리의 원의를 갖고 기도할 때에 얼마나 조바심을 해왔고, 또 귀에 거슬리는 처사나 말을 다른 사람에게 들었을 때 이 여인의 모습보다는 화를 낸다든지 즉시 그 사람을 향하여 서운한 마음을 가지고 욕을 하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다. 그 여자는 은총을 얻기 위하여 강아지라는 칭호마저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어머니로서 딸을 위하여서는 어떠한 희생도 감수할 수 있다는 자세로 예수님께 간청하고 있다. 이것이 또한 어머니의 사랑이다.
하여간 오늘 복음에 나오는 이 여인의 태도는 다르다. 예수님은 이 여인의 태도를 칭찬하셨고 그 여인의 딸을 치유해 주신다. 그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감탄하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29절) 말씀하셨다. 이 여인의 자세, 이것이 우리가 주님 앞에, 우리의 이웃 앞에 갖추어야 할 기도의 자세이며, 신앙인의 자세다.
우리 자신이 이제는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다른 종교의 신자들을 업신여긴다든지, 무시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는 귀중한 사람들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며, 그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다. 주님을 믿고 따르며 참으로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사는 올바른 신앙인의 자세로 주님께 나아가며, 주님을 이웃에게 전해줄 수 있는 우리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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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자녀들, 강아지들>
2월 9일의 복음 말씀은, 예수님께서 어떤 이교도 여자를 ‘참 신앙의 길’로 인도해 주신 이야기입니다. (여자의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신 일은 ‘부수적인 일’입니다.) 이 이야기를, ‘여자의 믿음’을 부각시키는 이야기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여자는 믿음이 없는 상태로 왔고, 예수님을 만난 뒤에야 올바른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를 해석할 때 여자의 ‘우상숭배’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옳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또 묵시록을 보면, “개들과 마술쟁이들, 불륜을 저지르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 그리고 거짓을 좋아하여 일삼는 자들은 밖에 남아 있어야 한다.”(묵시 22,15)라고 예언되어 있습니다. (개들, 돼지들, 우상 숭배자들은 모두 ‘같은 말’입니다.)
우상 숭배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2월 9일의 복음 말씀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그들이 하느님 나라의 구원을 얻는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스스로 우상 숭배를 버리면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고, 믿는 대로 살면 됩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우상을 숭배하면서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티로 지역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떤 집으로 들어가셨는데, 아무에게도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으나 결국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부인이 곧바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분 발 앞에 엎드렸다. 그 부인은 이교도로서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이었는데,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그분께 청하였다.”(마르 7,24-26)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제자들의 휴식을 위해서, 또는 제자들의 교육을 위해서 잠시 군중에게서 떨어져 있기를 원하셨던 것 같습니다. 앞의 6장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따로 배를 타고 외딴곳으로 떠나갔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들이 떠나는 것을 보고, 모든 고을에서 나와 육로로 함께 달려가 그들보다 먼저 그곳에 다다랐다.”(마르 6,31-33)
지금 티로 지역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애타게 예수님을 찾은 것은 여러 가지로 절박한 상황에 있었기 때문일 텐데, 티로 지역에서 예수님을 찾아온 여자도 절박한 심정으로 예수님을 찾아다녔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여자의 딸이 ‘더러운 영’이 들렸다는 말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마귀 들린 상태’가 아니라, 아마도 어떤 중병에 걸린 상태를 나타내는 말일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을 보면, “바로 그 시간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마태 15,28)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의 딸의 병을 고쳐 주신 것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서 ‘티로 지역, 이교도,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이라는 말은, 그 여자가 우상 숭배자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과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을 구분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신앙인이 미신과 우상 숭배에 빠지는 것은 십계명을 위반하는 큰 죄를 짓는 일이지만, 하느님도 모르고 십계명도 모르는 사람이 우상을 숭배하는 종교에 속해 있는 것은 그냥 어둠 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 여자는 딸을 고치기 위해서 자기가 섬기는 우상에게 간절하게 빌었을 것이고, 다른 우상들도 찾아다녔을 텐데,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절망 상태에 빠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서, 마치 지푸라기라도 잡는 것과 같은 심정으로 예수님을 찾아왔을 것입니다. <그 여자가 들은 ‘소문’은 “예수님은 무슨 병이든지 고치시는 분이고, 무슨 마귀든지 쫓아내시는 분”이라는 소문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응답하였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그 여자가 집에 가서 보니, 아이는 침상에 누워 있고 마귀는 나가고 없었다.”(마르 7,27-30)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께 은총을 청하려면 먼저 하느님만 믿는 자녀가 되어라.”라는 가르침입니다. <여자의 믿음을 시험하는 말씀이 아니라, 그를 믿음의 길로 인도해 주신 말씀입니다.> 신앙은 절대적이고, 유일한 것입니다. 하느님을 여러 신 가운데 한 분으로 생각하는 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입니다.
“하늘에도 땅에도 이른바 신들이 있다 하지만 ― 과연 신도 많고 주님도 많습니다만 ― 우리에게는 하느님 아버지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1코린 8,5-6ㄱ)
여자의 대답은, 우상 숭배를 버리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서 하느님만 믿겠다고 서약한 말과 같습니다. “지금부터 하느님만 믿겠습니다. 그러니 우선 은총의 부스러기라도 주십시오.” 간절함이 계기가 되었지만, 어떻든 여자는 원하던 은총도 얻었고, 청하지 않았던 은총도 얻었습니다. 즉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은총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사실 그 은총이 더 큰 은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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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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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가끔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잘 생기고 돈이 많고 또 사회적 직위도 높은 사람들이 성당에 다니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다니면 선교도 훨씬 더 잘 될 것 같고, 또 많은 사람이 그 사람의 모습을 보고 함께 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이지요.
또 반대로 어떻게 저런 사람이 성당에 다닌다고 나오는 것인지 의아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 사람은 차라리 안 나오는 것이 더 좋을 것 같고 저런 사람이 성당에 다니면 오히려 주위에서 말들이 많을 것 같은 사람이 있는 것이지요. 저런 사람도 성당에 다닌다면 그런 성당에 나는 다니지 않겠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 오늘 복음을 통해 함께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모두 죄인일 뿐 아니라 구원을 받을 수도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또 그들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부정을 탄다고 여겨서 상종조차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강아지’라는 표현이 나오고 있는데 실제로 유다인들은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을 개, 강아지라고 표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여인에게 강아지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은 다른 민족을 지칭하는 당시 유다인들의 표현 방식을 그대로 나타내 보이고 계신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나 우리의 생각과는 다른 행보를 보이고 계십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부정 탄다는 이유로 다른 민족들과는 만날 생각도 하지 않았으며 이방인 지역에는 아예 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가신 곳은 “티로”라는 이방인 지방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이 부정을 탄다고 기피하여 발걸음조차 딛지 않던 이방인 지역이었지요.
그곳에서 예수님은 시리아 페니키아 출생의 한 이방인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악령이 들린 어린 딸을 둔 이 여인은 소문을 듣고 예수를 찾아와 치유해 주실 것을 엎드려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모정에 못을 박는 말씀을 하십니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르7,27)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거절의 말씀이시지요. 물론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의 이 표현은 그 시대의 상황을 반영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이방 여인은 예수님의 그런 단호한 거절에 물러서지 않습니다. 예수님이라고 해서 다를 줄 알았는데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른 것이 없구나 하며 모멸감에 발걸음을 돌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께 더욱 달려듭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7,28)
이렇게 거듭 사정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악령 들린 여인의 딸을 치유해 주셨다는 내용이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과는 다른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일생 자체가 그러셨지요. 예수님께서는 부유한 사람, 잘생긴 사람, 또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보다는 가난한 사람, 지탄받는 사람, 부정 탄다고 사회에서 내몰린 사람들과 행적을 함께 보내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생활하시며 그 어려움들을 도와주셨음을 우리는 예수님의 일생을 통해 잘 알 수가 있고 오늘 복음은 그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혹시라도 우리 마음이 부유한 사람, 성공한 사람, 잘나 보이는 사람에 더 쏠리는 유혹을 느낀다면 그것은 주님의 뜻에 합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어떤 처지의, 그리고 그 누구의 기도도 물리치지 않으신 분이었습니다. 죄인의 기도라도 귀를 기울여 주시는 분이 예수님이지요. “죄 많은 내가 어떻게 감히 하느님께 기도 드릴 수 있겠는가?”
이것은 우리의 생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자가 아닌 사람의 기도, 예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의 간절한 기도도 받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의 한 이방 여인을 통해 우리는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자칫 성당은 완전하고 거룩한 사람의 공동체라는 잘못된 생각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웃의 작은 잘못에 대해서 성당에 다니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고 지탄합니다. 그 지탄으로 이웃에게 상처를 주고 신앙의 걸림돌이 되게 하는 경우가 있는 것이지요. 이는 주님의 뜻에 어긋나는 행위입니다.
거룩하기만 한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성당에 다닌다고 해서 모두가 거룩하고 날개 달린 천사들과 같은 모습들이 아니지요. 부족하지만 서로 노력하고 믿으며 기도하는 공동체가 바로 우리 공동체입니다.
과거에 그렇게 살던 사람이 어떻게 성당에 나올 수 있느냐며 한 식구로 맞기를 꺼려하는 사람들은 우리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너무나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심지어 신부인 저에게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신부님께서 그 사람에게 세례를 주시려면 책임 또한 지셔야 합니다.” 과거의 삶을 들추어내어 하느님의 이름으로 미래를 막는 이런 사람들은 교만하기가 하늘을 찌르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부분이지요.
우리는 부족하지만 모두가 함께 노력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부족한 사람의 상처를 건드려서 덧나게 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서로서로 상처를 싸매 주고 치료해 주며 감싸 안는 공동체가 바로 주님께서 바라시는 공동체의 모습인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이셨습니다. 상처받고 지탄받는 사람을 우선으로 싸안고 치료해 주신 분이셨습니다. 우리의 부족한 이웃을 죄인이라고 단정 지으며 상처를 들춰내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우리 행동은 사랑이신 예수님을 대적하는 행동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을 살아가며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 우리가 자칫 저지르기 쉬운 죄이며 유혹입니다. 우리는 항상 깨어있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어떤 경우에서든지, 어떤 처지에 있든지, 예수님을 알든 모르든, 그 누구도 받아주시는 모습을 보여주심으로써 우리에게도 그렇게 살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함께 기도하고 감싸주며 성장해 나가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희망하고 나아가야 할 우리 공동체의 모습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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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곽용승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겐네사렛의 땅을 뒤로 한 채 이스라엘의 북서쪽 이방지역인 티로에 가셨습니다. 그 곳에서 예수님께서는 조용히 머무시고자 하셨지만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맙니다.
그리고 악령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이방인 여자가 예수님께 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 앞에 엎드리며 딸의 악령을 쫓아내 달라고 간청합니다.
이 간청에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이 먹는 빵을 강아지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으며 자녀들이 먼저 배불리 먹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부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여기서 자녀들이란 이스라엘의 자손들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강아지는 이방인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이는 곧 이스라엘의 구원을 통하여 이방인에게 구원이 전파되도록 하려는 구원 계획을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에도 굴하지 않고 여인은 “선생님, 그렇긴 합니다만 상 밑에 있는 강아지도 아이들이 먹다가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얻어먹지 않습니까?”라고 하면서 예수님께 애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의 간청을 들어주십니다.
이 복음의 내용을 흔히 우리는 이방인 여자의 깊은 믿음에만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역시 이 이방인 여자의 믿음을 본받아야 하는데 많은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옳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복음을 접하면서 먼저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사랑에 먼저 초점을 맞추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가나안 여자가 비록 주님이라고 고백하며 신뢰를 표현했지만 이 고백과 신뢰가 있기 전에 예수님의 자비하심과 사랑이 먼저 있었습니다.
이 자비하심과 사랑이 이 이방인 여인의 마음을 열 수 있었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딸의 치유도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유대인의 사고 틀에서는 결코 가능하지 않았던 일 곧 하느님의 구원이 이방인에게 펼쳐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는 구원과 복음 선포에 대한 이스라엘의 우선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받아들이지 않았음도 드러내는 것입니다. 곧 하느님 나라의 초대에 응하지 않았던 이스라엘 백성의 불신앙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하심과 사랑은 세상과 인류 구원의 매개 역할을 한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모든 이에게 열려있음을 오늘 복음은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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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유다인의 머릿속을 뒤집는 작업>
지난 이틀간의 복음을 통해 우리는 예수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말 그대로 지키고 따르며 소중히 여기던 조상들의 전통을 ’사람이 만든 계명’으로 단언하시고, 이를 과감히 폐기하심으로써 정결에 대한 새로운 계명을 세우신 것을 보았다.
이제 세상에서 사람과 또 사람과 하느님의 관계를 더럽히는 것은 모두가 사람의 마음에서 밖으로 나오는 악한 생각들이다. 예수께서 유다인들의 전통과 관습을 폐기하신 일은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다. 이런 일들이 누적되어 예수께 대한 유다인 지도계층을 적대감은 계속 커져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의중은 전통이나 관습 따위의 외적인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유다인들 머릿속에 든 생각까지 바꾸는 데 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어떤 생각이 들어 있는 것일까?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만이 하느님 야훼로부터 간택된 백성이며 자기들만이 구원 받으리라는 배타적인 선민사상과 구원관에 사로 잡혀있었다.
비참했던 바빌론 유배 생활을 몸소 체험한 것을 시작으로 주변 강대국의 끊임없는 침략과 지배, 그리고 문화적인 압박을 통하여 그들의 선민사상과 구원관은 메시아사상과 함께 더욱 고조되어갔다.
이스라엘이 로마제국의 식민지로 전락했을 때 그들의 메시아사상은 정치적이고 현실적인 해방과 메시아의 직접적 통치에 대한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메시아는 비천한 마구간 출신의 나자렛 평민으로 등장한다.
그분은 백성들의 기대와는 반대로 지상의 왕국이 아니라 천상의 왕국을 선포하시며, 로마제국의 세력을 내어 몰기는커녕 가난하고 구박받고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억압받는 이들에게 지상의 행복보다는 천상의 행복을 약속하신다.
이것이 곧 예수께서 의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배타적인 선민사상과 구원관을 보편화시키는 작업이다. 비록 이러한 메시아의 참된 정체를 유다인들이 외면하더라도 이 작업이 관철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작업을 성취시키기 위해서 예수께서는 이방인 지역의 선교를 떠나신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예수께서 찾아가신 ’티로’는 시리아의 페니키아 지방에 속한 도시로서 갈릴래아 호수에서 북서쪽으로 약 56Km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현재 레바논에 속하는 지중해 연안 항구도시이다.
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 이곳에 도착하여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집에 계시려 했으나 소문을 듣고 찾아온 시리아의 페니키아 출생의 한 여인 때문에 들키게 되었다고 한다. 이 대목에 머물러 잠시 생각해 보면, 몇 가지 지적해야 할 점이 생긴다.
첫째, 예수께서 혼자 티로까지 먼길을 가셨을 리는 없다. 오늘 복음과 같은 내용의 기사를 보도하는 마태오복음(15,21-28)을 보면 분명히 제자들이 등장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티로와 시돈의 이방인지역 선교여행에 제자들이 함께 있었고, 군중도 대거 동행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둘째, 따라서 예수께서 ’조용히 계시려 했으나 들키게 된 일’은 아직도 베일에 싸여 있는 메시아의 정체성이 점점 밝혀지고 있음을 예고하는 마르코복음사가 특유의 편집기법으로 풀이된다. 이 의도가 악령이 들린 딸을 고치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온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의 믿음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의 여인은 선민도 아니고, 선민들로부터 비난받던 한 이방인이다. 그런데 이 여인이 확고한 믿음으로 예수를 찾아와 딸에 대한 치유의 간청과 함께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이 먹는 빵을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좋지 않다"(27절)는 예수님의 말씀과 이에 대한 "선생님, 그렇긴 합니다만 상 밑에 있는 강아지도 아이들이 먹다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얻어먹지 않습니까?"(28절) 라는 여인의 대답은 서로 대조를 이룬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이스라엘의 배타적인 선민사상과 구원관이 메아리치지만 여인의 대답으로 그 메아리가 즉시 멈춘다. 예수님의 단호한 말씀에 주위의 이스라엘 군중은 처음에 사뭇 기뻐하였을 것이나, 여인의 대답을 알아들은 사람은 즉시 안색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렇다. 예수님의 행동은 곧 이방인 여인에게도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제 이방인들도 구원의 범주에 포함된다. 이방인 여인의 탄복할 믿음을 바탕으로 예수께서는 유다인들의 머릿속 생각까지 엎어버리셨다.
이스라엘 백성이건 이방인이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참 메시아로 모시고 그 분께 믿음을 두는 자는 다 하느님의 백성이다. 이들이 곧 신약의 새로운 하느님백성이며 이를 우리는 교회라 부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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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벗이여 그분께>
마르코 7,24-30 (시리아 페니키아 여자의 믿음)
그때에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떤 집으로 들어가셨는데, 아무에게도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으나 결국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부인이 곧바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분 발 앞에 엎드렸다. 그 부인은 이교도로서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이었는데,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그분께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응답하였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그 여자가 집에 가서 보니, 아이는 침상에 누워 있고 마귀는 나가고 없었다.
<벗이여 그분께>
그대가
그분에게
가기에 앞서
그분께서는
그대에게
가시며
그분은
제 자리에
머물지 않고
몸소 오시어
그대 앞에
계시니
벗이여
믿음으로
그분 앞으로
주저함 없이
한걸음에
가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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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힘과 용기를 주시는 분>
‘가톨릭 공동체 활성화를 위한 시너지 리더십’이라는강의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강사 진형기교수는 “신자는 신부의 손님이다. 그리고 신부는 신자를 다스릴 수 없다. 다스리려 하면 실패한다.”라고 말씀하시며 신자들에게 대접받고 사는 성직자의 현실을 지적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말씀과 실행, 이론과 실제가 일치된 리더, 후계자와 인재 양성에 중심을 둔 리더, 서비스 마인드가 충만하신 리더, 팀웍을 중요시한 리더, 현실을 통찰하고 비전을 세우신 리더, 관계를 중시한 리더, 관용과 용서로 실패를 재기의 기회로 삼도록 격려하는 리더, 모든 사람을 소속감을 가지게 하는 리더, 고난을 극복하면서 자신을 성숙시키는 리더, 사람들의 경제 생활을 보살피신 리더, 소외된 자들을 정성껏 끝까지 돌보신 리더,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행함으로써 효과적으로 열매가 맺어지도록 하는 리더’로 소개하셨습니다. 그중에 몇을 닮았는가 생각하니 부끄러움만 큽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이교도 부인이 예수님 발 앞에 엎드려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르 7,27)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 7,28) 하고 끈질긴 믿음으로 응답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으로 결국 마귀는 떠나갔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우선적인 구원의 대상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불신과 시기로 배척하고 있으므로, 믿음을 가진 이방인에게 구원의 혜택이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주어지는 구원의 혜택은 유다인 또는 이교도라는 외적인 관계보다 철저한 믿음의 관계가 우선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원칙만 고수하시는 완고한 분이 아니라 열려있는 분이십니다.
이교도 여인은 어떻게 보면 강아지 취급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시험이었습니다. 여인은 복음의 부스러기라도 받아먹으려는 간절한 믿음을 지켰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놀라운 믿음을 보시고 청을 들어주셨습니다.
마침내 여인의 딸에게서 더러운 영이 떠나갔습니다. 믿음은 바로 하느님께서 나를 외면하고 감추어 계신 분처럼 보일 때, 더 큰 신뢰로 자신을 의탁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는 할례를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만이 중요할 따름입니다.”(갈라 5,6) 바리사이들의 경건과 신앙이 ‘표면적’ 믿음이었다면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의 이교도의 믿음은 ‘속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헛배가 부른 신앙인이 아니라 떨어뜨린 부스러기라도 받아먹으려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주님의 능력이 역사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은 ‘소외된 사람을 끝까지 돌보시는 리더’로서 다가오시는 주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인생여정 안에서 이러저러한 어려움들에 직면하게 됩니다. 어쩌면 좋은 일보다 어려운 일이 더 많은 듯합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난관들 안에서 주님께서는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원하는 때, 원하는 방법은 아니지만 함께하시어 기운을 북돋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앞에 있는 ‘험한 산을 치워주지는 않으시지만, 그 산을 넘을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께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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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다음의 상식 퀴즈를 맞혀보세요.
1) 영국은 섬나라인가?
2) 한국 전쟁이 일어난 연도는?
3) 태양계의 행성을 순서대로 말해보라.
요즘 유행하는 상식 퀴즈라고 합니다. 대학생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첫 번째 문제의 정답률은 30%, 두 번째 문제의 정답률은 23%, 마지막 문제의 정답률은 14%였습니다.
‘아니, 이 정도도 몰라? 지성인이라고 하는 대학생의 상식 수준이 이것밖에 안 돼?’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굳이 알 필요가 뭐 있어?’라고 말입니다. 상식이 부족하다고 또 무식하다고 말을 들을 수는 있겠지만, 사는 데 지장이 없다면 굳이 알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요즘 아이돌 가수를 잘 모릅니다. BTS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고 하지만, 솔직히 그들의 이름도 모르고 몇 명으로 구성된 그룹인지도 모릅니다. 젊은 세대가 볼 때, 너무나도 무식한 모습일 것입니다.
그러나 굳이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다지 좋아하는 취향도 아니고, 관심도 없기 때문입니다. 젊은 세대와 공통 주제로 소통하기는 힘들겠지만, 오십 넘어 그들과 굳이 이런 내용으로 소통할 필요가 있을까 싶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에게 지식의 전달이 아닌, 지혜의 전달이기 때문입니다. 상식 부족이라는 이유로 남을 평가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보다 그 모습도 인정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가장 중요한 것을 전달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부인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찾아갑니다. 그런데 이 부인은 이교도였습니다. 선민의식이 강한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교도는 구원으로부터 제외된 사람들이라는 것이 상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씀하셨던 것은 당시 유다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이지요. 사랑 그 자체이신 예수님께서 왜 차별의 말씀을 하셨을까요? 정말로 유다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생각이 옳았기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을 드러내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바로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님에 대한 굳은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하느님께서는 그 어떤 사람도 절대 외면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특히 상식을 내세워 자기 생각만 옳다고 착각해서도 안 됩니다. 그보다 하느님의 뜻을 찾고,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추는 것.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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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혼자 있으면>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그에게 알맞은 협력자를 만들어주겠다."
오늘 창세기는 창조하신 것을 보시고 다 좋다고 하신 하느님이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은 보기에 좋지 않다고 하십니다.
즉시 떠오르는 것이 요즘 혼자 사는 사람이 늘어나서 혼족이니 혼밥이니 혼술이니 하는 말이 유행이고, 방송도 이런 세태를 반영하여 혼자 사는 연예인들의 모습을 엔터테인먼트 식으로 방영하기도 합니다. 젊은 사람 중에 그런 프로를 보고 즐기는 사람이 많나 봅니다.
또 즉시 떠오르는 것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복음의 기쁨>에서 ‘고립의 정신’을 크게 걱정한 내용입니다.
물론 혼자 사는 사람이 다 ‘고립의 정신’의 소유자라고는 할 수 없겠지요? 혼자 살지만, 고립을 살지 않고 가족에게 매이기보다 보편적인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사람도 많을 겁니다.
그런 경우 그것은 고립의 정신을 사는 것이 아닐뿐더러
혼자 살 줄 모르고 의존적으로 사는 사람보다 훨씬 잘 산다고 해야겠지요.
의존적인 행복은 의존적인 불행으로 이어지기 때문이지요. ‘혼자서도 잘해요’라는 말이 있듯이 혼자서도 잘하는 것은 이런 의존적인 불행과 미성숙을 넘어서는 행복한 성장의 표시이기도 하지요.
그러므로 보기에 좋지 않은 ‘혼자’는 고독이 아니라 고립을 뜻하는 것입니다. 고립 특히 고립의 정신은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혼자’를 말하는 것이고, 부담감이나 두려움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 때문에 공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우리는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두려워할 것이 무언인지. 사람을 두려워할 것인지 아무도 없는 것을 두려워할 것인지.
가끔 죽음 이후를 생각할 때 저는 하느님도 안 계시고 아무도 없는 저 캄캄한 우주 공간을 생각하고 저 혼자 떠도는 것을 상상합니다.
아무도 없이 혼자서 있으면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그러다 누구 하나를 만나면 얼마나 반갑겠습니까?
사람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혼자 있는 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생각하면 사람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해야 할 것이고 외톨이 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두려워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그런데도 사랑이라는 것을 놓치는 순간 사람이 두려워질 것이고, 반대로 사람을 두려워하게 되면 사랑을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또다시 근본적으로 생각하고 용기 있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공존을 선택할 것인가? 고립을 선택할 것인가? 사랑을 선택할 것인가? 두려움을 선택할 것인가? 같이 있을 사람을 선택할 것인가? 혼자 있는 자유를 선택할 것인가?
혼자 있으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혼자 있으면 기뻐할 일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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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마르7,28)
<버티어 낼 수 있을까?>
오늘 복음(마르7,24-30)은 '시리아 페니키아 여자의 믿음을 전하는 말씀'입니다. '시리아 페니키아 여자'라는 것은 그녀가 '이방인'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된 선민의식이 강했던 유다인들에게 이방인들은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그런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 이방인 여자가,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시리아 페니키아 여자가 예수님께 매달립니다.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간절히 청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그 이방인 여자를 개 취급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7,27)
그런 개 무시에도 그 여자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 이렇게 응답합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습니다."(7,28)
이 흔들지 않는 마음, 그 믿음이 마귀 들린 딸을 살립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7,29)
'버티어 낼 수 있을까?'
결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못 버티어 낼 것 같습니다. 수모와 무시를. 개 취급 했다는 것은 가장 밑바닥에 있는 존재로 여겼다는 것인데, 이런 큰 수모와 무시가 나에게 주어진다면 버티어 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만이 그런 수모와 무시를 버티어 낼 수 있다.'고 권고합니다.(권고 14, '마음의 가난' 참조)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 영이 가난하다는 것'은 '하느님의 영에 목말라 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곧 온갖 수모와 무시를 버티어 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향해 있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이 믿음이 나와 너 그리고 모두를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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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 7, 28)
우리 안에
존재하는
뜨겁고도 간절한
믿음을 봅니다.
믿음은
작은 것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진심어린 감사에서
믿음의 문이
활짝 열립니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감사입니다.
흩어진
감사의
부스러기를
한 데로 모으니
믿음이 됩니다.
믿음을 정화하는
감사입니다.
욕심의 찌꺼기가
아니라
감사의
부스러기들
입니다.
오히려
부스러기로
우리를
건져올리시는
예수님의
구원입니다.
사라지지 않을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
그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부스러기같이
작은 것에
충실한 삶입니다.
가득차다라는
의미 또한
부스러기의
간절한 힘입니다.
부스러기가
되어도 행복한
주님의 종입니다.
무디어져 가는
우리 마음을
오히려
부스러가가
뜨거운
칼날이 되어
우리의 일상을
깨웁니다.
오늘도 우리가
놓치고
볼 수 없는
수 많은
은총의
부스러기들이
우리의 하루를
채워줍니다.
믿음은
이와 같이
부스러기의
수 많은 은총에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부스러기를 모으니
열두 광주리를
가득 채우고도
남습니다.
믿음은
있습니다.
감사의
부스러기로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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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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