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한영 베드로 신부
연중 제10주간 토요일
1열왕기 19,19-21 마태오 5,33-37
엘리야가 엘리사 곁을 지나가면서 자기 겉옷을 그에게 걸쳐 주자, 엘리사는 자신의 일생을
스승에게 맡기고 길을 따라 나섭니다. 엘리야는 하느님을 부드러운 소리 가운데 만난 뒤
하느님으로부터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후계자로 삼으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하느님께 오롯한 사랑을 바친 엘리야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진실한 제자를 얻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두고, 그리고 어떤 대상을 두고 맹세하지 말도록 당부하십니다.
이 말씀의 뜻은 그릇된 맹세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욕심이나 계획을 미리 계산하고
하는 맹세는 진실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하는 진실한 맹세 외에
다른 모든 약속은 헛된 것입니다.
허상을 두고 하는 맹세는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을 따르겠다고 하는 서약은
진실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세례 받을 때 하느님 앞에 믿음을 고백하며 서약합니다.
수도자와 성직자들도 자신을 봉헌하며 자신이 맡은 직분에 충실할 것을 서약합니다.
진리 자체이신 하느님께 속한 사람은 진실한 사람이 됩니다. 진리를 따르는 사람은 자유로워지고
빛을 받습니다. 그 사람은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 말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는 덕은 겸손의 덕입니다. 교만은 자신을 높이고 가식을 담기 때문에
그릇된 맹세를 하게 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진실에 대해 변명하거나 방어하지 않습니다.
진실하신 하느님께서 그의 증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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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영 사무엘 신부
연중 제10주간 토요일
열왕기 상 19,19-21 마태오 5,33-37
어디선가 읽은 글이다.
‘나는 늘 호주머니에 십자가를 넣고 다닙니다.
어디에 있던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주니까요.
이 작은 십자가는 마술도 아니고, 기막힌 행운을 가져다 주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모든 해악에서 저를 보호해 주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나와 구세주의 관계를 이해시키는 것뿐입니다.
호주머니에서 동전이나 열쇠를 꺼낼 때 내 손에 잡히는 이 십자가는
주님께서 나를 위해 치르신 대가를 기억나게 합니다.
그 작은 십자가는 날마다 내가 받은 은총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고
내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 안에서 그분을 더 잘 섬기도록 도와줍니다.
그것은 또 매일 나의 스승님을 아는 모든 사람들과 그분의 돌보심에 의탁하는 사람들과
내가 나누는 평화와 위로를 기억하게 해줍니다.
그래서 내가 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삶을 돌봐주시도록 허락하기만 한다면
그분이 내 삶의 주인이시라는 것을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에게 상기시켜 주기에 십자가를 호주머니에 늘 넣고 다닙니다’.
우리가 항상 주님을 생각하고 느끼고 생활한다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복음적 가치를 선택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내 생각과 욕심이 내 생활을 지배한다면 ‘예’ 해야 할 때 ‘아니오’ 할 수 있고,
‘아니오’ 해야 할 때 ‘예’라고 할 수 있다.
겸손이란 늘 호주머니에 십자가를 넣고 다니며 선택의 순간에 그리스도의 생각과
그리스도의 판단에 맡겨 바르고 복음적인 결단을 내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상의 삶 안에서 매순간 순간의 응답 안에서 늘 마음 안에 겸손이 배어 있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서울대교구 김지영 사무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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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재호 루카 신부
연중 제10주간 토요일
1열왕기 19,19-21 마태오 5,33-37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맹세를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수도자나 성직자들은
서원식 또는 서품식 때에 서약을 합니다. 또한 평신도들도 세례 때에 서약을 합니다.
그렇다면 맹세를 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 말씀에 사용된 ‘맹세하다’의 그리스 말 ‘옴뉘오’는 ‘절대자이신 하느님을 근거로 자신이
진실하다고 주장한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사람이 맹세를 할 때에도
이 낱말을 사용하지만, 신약 성경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당신 자신을 두고 맹세를 합니다(루카 1,73; 히브 3,11; 6,13 참조).
예외적으로 하느님이 아닌 사람이 맹세를 하는 경우가 두 번 있습니다. 한 사람은 헤로데로서,
헤로디아의 딸에게 왕국의 절반이라도 주겠다고 맹세를 합니다(마르 6,23 참조).
다른 한 사람은 베드로인데, 예수님께서 체포되시어 대사제의 저택에 끌려가셨을 때,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면서 맹세를 합니다(마르 14,71 참조).
이렇게 볼 때 맹세를 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려고 하느님을
이용하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하늘, 땅, 예루살렘을 두고 맹세를 하기에
사람은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존재임을 깨달으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보잘것없는 피조물일 뿐입니다. 그러한 우리가 하느님을 이용하여
우리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려 한다면, 이는 하느님 앞에서 주인 노릇을 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그저 우리의 참주인이신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에는 “예.”라고 응답하고,
그분께서 원하지 않으시는 것에는 “아니요.”라고 순명하는 것뿐입니다.
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참조
가톨릭사랑방 catholic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