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대한민국의 실제적 설계자, 조지 윌리엄스(1907~1994) 정보장교, 해군 중령으로 전역
존 리드 하지(해방 직후 한반도의 실제적 통치자) 재조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 군정사령관 1945년 2차 대전 종전 시절 미국 육군 제24군단장이었으며, 1945년에서부터 1948년까지 주한미군사령관 겸 미군정청 군정사령관으로 활동했다.
미군정청 군정사령관, 존 리 하지 중장의 특별보좌관이 조지 윌리엄스다. 조지 윌리엄스(1907~1994)는 1907년 인천에서 태어나 14세까지 충남 공주에서 성장했다. 그는 영어, 일어, 한국어를 잘했다고 한다. 조지 윌리엄스의 한국명은 우광복이다. 조지 윌리엄스의 아버지는 프랭크 윌리엄스로, 그는 미국 북감리교회 소속의 선교사로서 충남 공주의 공주제일교회 담임목사를 지냈다. 프랭크 윌리엄스 목사의 한국명은 우리암이다. 공주제일교회 소속의 미션스쿨이 공주 영명학교다.
프랭크 윌리엄스는 공주 영명학교를 1906년 설립해 1940년 강제추방(1941년 폐교)될 때까지 교장을 지냈다. 유관순 열사는 공주 영명여학교를 2년 다니다가, 프랭크 윌리엄스의 주선으로 서울의 이화학당에 편입했다. 영명학교는 ‘영원한 광명’에서 '영과 명'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아버지에 의해 ‘우리나라의 광복’을 의미한다는 뜻의 이름을 얻은 우광복(조지 윌리엄스)은 공주영명학교에를 다니다 14살 때 미국 콜로라도로 돌아가 의사가 되었고, 1945년 광복이 되자 미 해군 군의관에 자원해 다시 한국에 왔다. 그때 우리암 선교사도 함께 돌아와 미군정청 농업 고문을 지냈고, 우광복은 하지 사령관의 통역 등 사실상 비서실장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특히 우광복은 하지 사령관의 요청으로 미군정과 함께 할 한국인 50명을 추천했는데, 이 가운데 48명이 크리스토교도였다. 이런 이유로 그는 미군정 시절 소수파였던 크리스토교가 남한에서 실권을 얻는 데 주요한 기여를 한 인물로 손꼽힌다.
조병옥, 충남 천안 이승만 정권 아래서 1945년 10월~1951년 4월까지 경무부장, 경무국장(경찰청장), 내무부 장관을 지내며, 초기 대한민국의 치안책임을 6년 가까이 있었던 인물이다. 조병옥은 공주 영명학교 2회 졸업생이다. 1903년 조병옥은 케블 목사의 추천으로 공주군 영명학교에 입학하였다. 영명소학교를 거쳐 영명중학교를 1910년에 졸업했다. 다시 평양의 숭실중학교에 편입학하여 1912년에 졸업했다.
미군정 시기의 남한의 치안을 책임지던 조병옥은 미국 북감리교회가 파송 선교사인 프랭크 윌리엄스가 세운 영명학교 졸업자였다. 프랭크 윌리엄스의 아들이 조지 윌리엄스고, 조지 윌리엄스는 미군정청 사령관 하지 중장의 특별보좌관이었기에, 조병옥은 조지 윌리엄스의 천거로 요직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조병옥은 국회의원을 지낸 조순형은 조병옥의 아들(삼남)이다.
이묘묵(1902~1957)은 평양 광성학교 출신이다. 평양 광성학교는 미국 북감리교회 소속의 의료선교사였던 ‘W.J Hall(홀)’이 세운 학교다. 광성학교는 평양의 남산현(남산재) 교회 소속의 학교였다. 평양의 남산현 교회(감리교)는 장대현 교회(장로교)와 함께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과 1919년 3.1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교회다. 남산현소학교에서 광성소학교, 광성고등보통학교(광성고보)로 발전했다. 광성학교는 서울의 광성고등학교의 전신이다. 이묘묵은 1922년 공주 영명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이묘묵은 해방 정국에서 한민당 창당과 군정청 사령관 하지의 한국인 비서 등을 지냈고, 대한민국 건국 후에는 외교관,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한민당(한국민주당)은 1945년 해방 이후 송진우 등 민족주의 계열이 만든 우익 정당이다. 이묘묵은 코리아타임즈 초대 사장을 엮임했다. 이묘묵 역시 조지 윌리엄스와의 인연으로 미군정청 사령관 하지 중장의 통역관을 지냈던 것이다.
충남 공주시의 영명중고등학교 뒷산에는 감리교 선교사들의 가족 묘지가 있다.
조지 윌리엄스, 조병옥, 이묘묵의 연결고리는 미국 북감리교회(감리교. 개신교)와 공주 영명학교가 있다. 그들은 음지와 양지에서 현재 대한민국의 정체성 형성에 음양으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여겨진다. 한국 개신교는 현재 모습의 대한민국의 정체성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게 긍정적이든 비판적이든.
그 배후에는 미국이 있었고, 미국 건국의 배후에는 개신교가 있었다. 미국은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대서양을 건너면서 시작되었으니까. 미국의 초기 정착민들은 대부분 영국에서 온 개신교(청교도) 신자들이었다. 그들은 영국 국교회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나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으로 건너왔다. 미국의 초기 정착민들 모두가 개신교 신자는 아니었지만, 미국의 초기 역사에서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고, 그들은 미국의 정체성과 가치관의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