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대 마르코 신부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1열왕기 21,1ㄴ-16 마태오 5,38-42
폐기되는 '탈리오' 법
오늘 복음은 다섯 번째 대당명제를 담고 있다.
예수께서는 구약성서가 말하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야 한다.
그러나 다른 사고가 생겨 목숨을 앗았으면 제 목숨으로 갚아야 한다"
(탈출 21,23-25; 레위 24,20; 신명 19,21 참조)는 명제를 폐기하시고
"앙갚음하지 말라"는 반명제를 제시하신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는 앙갚음은 피해자가 받은 것과 같은 종류의 해를 가해자에게
주거나 같은 종류의 방법으로 가해자를 해치는 소위 동해형법(同害刑法),
또는 동태복수법(同態復讐法)을 말한다.
그렇다고 이 법칙이 앙갚음이나 보복을 정당화하고 복수를 부추기는 법이라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모든 종류의 형법은 사전에 범법행위를 방지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따라서 이 규정은 오히려 가해자에 대한 어떤 조치가 개개인의 일이 아니라
이를 관장하는 기관이나 공동체의 장치에 속한 일임을 밝히려는 것이다.(민수 35,24)
나아가 구약의 율법은 가해자에 대한 일련의 조치가 하느님의 전적인 통치권에
속함을 강조하고 있다.(신명 32,39-43; 집회 28,1; 이사 35,4; 예레 46,10; 에제 25,17)
이러한 동해형의 가해 형법이 원시사회나 고대문화권에서는 어느 정도 통용된 규정일지 모르나
법이 발달한 오늘날 사회에서는 국가가 이를 용납하지 않고 있다.
복수와 보복의 오해를 내포하고 있는 동해형법, 또는 동태복수법이라는 용어보다
"탈리오법(lex talionis)"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더 옳을 지도 모른다.
"탈리오(talio)"는 "이러한, 동등한, 동일한" 등의 뜻을 가진 라틴어 형용사
"탈리스(talis)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그 원초적인 유형은 바빌론 제1왕조의 6대 대왕인
함무라비(Hammurabi, 재위 B.C 1792-1750)의 법전에서 발견된다.
탈리오 유형의 형법은 고대 앗시리아와 그리스문화권에서도 발견되며, 고대 로마문화권에서는
십이동판법(十二銅版法)이라고 불리는 법전의 한 조항으로 성문화되었다고 한다.
여기에는 "만일 그가 다른 사람의 사지를 분리시키고, 타협에 이르지 못하면
탈리오 해야 한다"(제8표 2)고 규정하고 있다.
이 규정의 뜻은 어떤 사람이 남의 손이나 발을 부러뜨렸는데 가해자와 피해자가
금전적 배상에 합의하지 못할 경우, "탈리오"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곧 가해자도 동일한 해를 입도록 조처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탈리오는 비교적 초기 단계에서 소멸되고
국가에서 정하는 특정한 형법이나 재산에 의한 손해배상으로 변화하였는데,
그 근본적 사고방식은 응보이며 이러한 견해는 형벌의 역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
탈리오법은 언뜻 보기에 적용이 쉽고, 상당히 이성적이며, 정의롭게 느껴진다.
그러나 복수가 또 다른 복수를 낳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어쨌든 예수께서는 "앙갚음을 하지 말라"고 가르치신다. 예수님의 요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예수께서는 앙갚음을 하지 않는 것으로만 머물 것이 아니라,
악(惡)을 선(善)으로 되 갚으라고 하신다.
오른 뺨을 치는 자에게 왼 뺨마저 돌려대고, 속옷을 가지려고 재판 거는 자에게 겉옷까지
내어주며,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하는 자와 십리를 같이 가 주라는 것이다.
또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꾸려는 사람의 청을 물리치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예수께서 악(惡)을 관용하고 무조건 받아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대사제 안나스가 예수를 심문하는 자리에서 그의 가르침에 대하여 묻자 예수께서
"왜 나에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들은 사람들에게 물어 보아라.
내가 한 말은 그들이 잘 알고 있다"고 대답하자 경비병이 예수의 뺨을 때렸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다른 뺨을 돌려대지 않으시고 "내가 한 말이 잘못이 있다면 어디 대 보아라.
그러나 잘못이 없다면 어찌하여 나를 때리느냐?"(요한 18,20-23 참조)고 하신 말씀을 떠올려 보라.
악은 분명히 악이다. 예수께서 악을 선으로 되 갚으라고 하시고, 요구하는 것보다 훨씬
더 베풀라고 해서 옳고 그름의 척도가 파기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악의 도전을 받았을 때나 어떤 요구를 받았을 때, 이에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는 것이다.
예수님의 요구는 분명 실천하기 어려운 면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악보다는 선을, 법보다는 사랑을, 강함보다는 약함을 더 선호하시는 것이다.
이 선호는 그리스도의 참다운 자유에 뿌리박고 있으며,
하느님 나라에 참여하기 위한 조건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잘 들어라. 너희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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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1열왕기 21,1ㄴ-16 마태오 5,38-42
예전에 부모님은 자식이 잘못을 저지르면 교육을 잘못 시킨 자신의 탓이라 여겨
자식에게 자신의 종아리를 때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자식들은 그런 부모님의 엄명에 눈물을
흘리고 잘못을 뉘우치는 산 교육을 몸으로 배우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이런 교육은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경쟁과 야합, 이기심과 허영으로 가득 찬
우리 사회가 선으로 악을 이기기에는 너무 역부족이란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논리는 역설적입니다. 내가 당한 만큼 상대도 당해야 속이 풀릴 것 같은
세상인데, 막상 그렇게 한다고 내 맘이 편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미 받은 상처와 폐해는 돌이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보복하고 원망해도
이미 저질러진 악은 또 다른 악으로 치유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합이 이제벨의 간교로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고 권력을 남용한 사례는,
오늘날에도 권력 남용으로 인권과 사회 정의가 유린되고 있는 현실을 생각하면
과거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지만 이러한 폭력과 불의 앞에서도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하시는 예수님의 역설적 가르침은,
악의 힘은 더 이상 악이 전염시킬 힘이 없는 선과의 만남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불의 앞에 침묵이나 타협이 아닌, 정의를 외치는 것은 정당한 예언자적 소명입니다.
하지만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지 말라는 것은 불의한 악의 힘에 복종하라는 뜻이 아니라,
궁극적 정의의 실현은 하느님께 맡기라는 믿음의 요청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십자가의 용서와 자비에서 드러난 구원과 해방을 선포하는
역설적인 하느님의 반전 드라마에서 시작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광주대교구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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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용선 바오로 신부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1열왕기 21,1ㄴ-16 마태오 5,38-42
우리는 오늘의 복음말씀을 들으며 의구심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나에게 잘못한 자에게 어떠한 반대적 반응도 보이지 말고 오히려 그에게 더 잘 대해 주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니 말입니다.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을 내 밀어 주며 더 맞으라'고 하시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한 대만 맞아도 아프고 화가 날 지경인데 얼굴을 내밀며 더 맞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다니요...
상식적으로 이해가 잘 안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남이 나를 학대하고 경멸하며 혹사하게 내버려두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까?
그렇게 한다면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갈 도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장사꾼들은 도무지 어떻게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들은 하나하나 이윤을 따지고
돈을 벌지 않으면 비정한 경쟁의 삶의 자리에서 지고 말 것입니다.
군인들이나 경찰관들은 또한 어떠하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하다간 군대의 규율은 무너져 버리고
정복하거나 방어하려는 정신에 찬물을 끼얹는 꼴이 되어 버릴 것이며,
질서와 공안을 위한 경찰관들의 체제 또한 무너져 내릴 것입니다.
또 '재판을 걸어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어 주라'고 하시다니,
이래서는 정의로운 판결이 불가능할 것이며 감옥은 개방해야 하고
소송제도는 폐지해 버려야 할 것이며 판사나 변호사들이 해야 할 일도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남이 달라는 대로 다 내어 주고, 꾸려고 하는 자의 청도 다 들어 주라'고
말씀하시는데, 그러면 우리는 이 점을 이용한 사람들의 끝없는 요청에 계속 시달릴 것이며
끝내 빈 털털이가 되어 버리고 말지 않겠습니까?
정말, 예수님의 오늘 말씀은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의 생각이나 삶의 자세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를 정의롭지 못하고 나약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은 아닌지,
나아가 그릇된 악으로 우리를 내몰아 버리게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복음말씀은 세상 살기 참 힘들게 만들어 버리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오늘의 복음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선 마태오 복음의 오늘 복음과 같은 장인
5장의 앞부분이 말하고 있는 바, 즉 '참된 행복의 선언'이라 표현되는
'하늘나라에 대한 기쁜 소식'이 먼저 언급되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참된 행복은 이 세상에서 생각하는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고 하십니다.
참된 행복은 하늘나라와 연결되는 삶 안에서 가능해 질 수 있습니다.
이 지상의 나라가 아닌 하늘 나라, 즉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 안에 참된 행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신앙인들은 이 지상에 있으면서도 이 지상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고 예수께서는 성서의 다른 구절에서 말씀하기도 하셨습니다.
'지상의 삶'의 눈으로만 보면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오늘의 복음말씀은
바로 '하늘나라의 삶' 안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우리에게 혼란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하는 행복한 삶의 자세'를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제한 없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그것은 바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행복하다'는 것을 알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바로 '미움은 미움을 계속 낳지만, 사랑은 사랑을 계속 낳는다'는
참으로 확실한 진리를 우리의 삶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함으로써 이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삶의 자세를 통해 하늘 나라가 바로 이 지상에서 이루어지길
우리 함께 희망해 봅시다.
남에게 먼저 그렇게 살으라고 말하기 이전에, 지금 이 자리에서부터 내가 먼저
그렇게 한번 살아 보도록 합시다.
제한 없이 주는 사랑을 실천할 때, 오늘의 복음말씀이 제대로 이해될 것이며,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하고 계심을 실감하며 참된 행복을 이 지상에서부터 영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산교구 윤용선 바오로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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