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1열왕기 21,17-29 마태오 5,43-48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 앞에서 자신을 참으로 낮춘 아합을 보시고 그에게서 재앙을
거두십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앞에서 부족하고 부당한 죄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시편 말씀을 입으로 고백하며 주님의 자비를 청합니다.
“하느님, 당신 자애로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시편 51[50],3).
하느님께서는 죄인이며 참으로 보잘것없는 우리를 자비로이 부르시어,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를 당신 자녀가 되게 하시고 영원한 생명의 길로 초대해 주셨습니다.
한편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서의 여섯 가지 대당 명제(마태 5,21-48 참조)가운데 마지막인
“원수를 사랑하여라.”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이미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말씀을 너무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좀 더 주목하게 되는
구절은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라는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인 줄 알았는데,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의 중심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자녀가 되는 핵심 조건으로 원수에 대한 사랑과 박해하는 이들을 위한
기도를 요구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는 악인과 선인에게 똑같이 기회를 주시는 분이시고, 모든 이가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자비로우신 아버지이십니다. 자녀들은 아버지의 성품을 본받고 따르며
아버지의 모습을 비추는 이들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고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하는 일입니다.
서양 격언에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은 마귀의 일이며, 선을 선으로 갚는 것은 사람의 일,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하느님의 일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고,
또한 하느님의 자녀로서 주님과 영원히 함께 살기 위하여 하느님의 일을 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아버지를 닮아 사랑과 자비로 주위의 모든 사람을 품습니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대구대교구 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1열왕기 21,17-29 마태오 5,43-48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겨자씨와 밭에 묻혀 있는 보물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 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미 시작된 하느님 나라는 우리의 노력과 우리의 기도와 우리의 나눔으로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저는 며칠 전에 서점에 갔습니다. 서점에서 책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 나라의 비유가 떠올랐습니다. 서점에 진열된 책은 밭에 묻혀 있는 보물과 같았습니다.
서점에 진열된 책은 땅에 떨어진 겨자씨와 같았습니다. 제가 돈을 주고 사서 읽으면
저는 책 속에 있는 보물을 얻게 됩니다. 겨자씨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되어 새들이 쉴 수 있듯이
제가 읽은 책은 저를 영적으로 풍요롭게 해 줄 것입니다.
저는 서점에서 2개의 보물을 찾았습니다. 하나는 오강남 교수의 세계 종교 둘러보기와
팀 마샬의 지리의 힘입니다. 오만과 독선에서 벗어나 다양성을 존중하는 세상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습니다. 기회가 되면 책의 내용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이야기를 통해서 저는 또 다른 보물을 찾았습니다. 한국에서 시력을 잃어버린 학생이 미국에서
혜안을 찾았던 이야기입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학생을 위해서 승무원은 휠체어를 탈 수 있도록
배려하였습니다. 그러나 공항으로 학생을 마중 나온 하숙집 주인은 승무원에게 큰 소리로
야단쳤습니다. ‘학생은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이지, 다리는 멀쩡하지 않느냐?
그렇다면 학생의 손을 잡고 안내하면 될 일이지 왜 휠체어를 태우느냐?’
학생은 하숙집 주인의 말을 듣고 부끄러웠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말을 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남에게 폐를 끼치기 싫었다고 합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것은 불행한 것은 아니라, 단지 불편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숙집 주인은 부모님처럼 학생을 도와주었습니다. 학생의 실력을 보고 일반 고등학교에
입학시켜 주었습니다. 학교에서도 앞을 보지 못하는 학생을 위해서 많은 배려를 해 주었다고 합니다.
선생님들은 학생을 위해서 특별한 방법을 찾아냈다고 합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안 되는 것들이
많았는데 그래서 포기하는 것들이 많았는데 미국에 와서는 할 수 있는 것들을 찾게 되었고,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람들을 만났다고 합니다.
그렇게 학생은 투자 분석가가 되었고 'JPM(제이피모건)’이라는 유명한 회사에 입사하였다고 합니다.
비록 시력은 잃었지만 경제의 흐름을 볼 수 있었고, 투자할 수 있는 기회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면접관들은 시각장애인이 투자회사의 분석가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가능성을 보았고 조금만 도와주면 잘 할 수 있을 거라며 적극 추천하였습니다.
회사에 입사한 청년은 4시에 일어나서 6시에 출근했다고 합니다.
모든 서류를 스캔하여 컴퓨터에 입력하였고 음성파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모든 서류를 들은 후에 정확한 분석을 내놓았다고 합니다. 청년의 분석은 정확하였고,
많은 실적을 올렸습니다. 시각장애인 최초로 회사의 임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내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참고서를 점자책으로 만들어주었던 어머니의 헌신과 나를 정상인과
똑같이 대해주었던 하숙집 주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보물은 겨자씨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밭에만 묻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장애가 있을지라도, 죄를 지었을지라도 가능성을 볼 수 있다면,
함께 할 수 있다면 우리의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보물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을 이야기하십니다.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닌
마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보는 것을 넘어 영적인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서도, 나를 시기하는 사람에게서도 보물을 찾을 수 있습니다.
길가에 핀 들꽃에서도, 흘러가는 구름에서도 보물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연중 제11주간 화요일
1열왕기 21,17-29 마태오 5,43-48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오늘 복음은 마지막 여섯 번째의 새로운 의로움으로, ‘완전한 사랑’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레위기 19장 18절의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라는 말씀을 넘어서,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마태 5,14)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이웃과 원수를 구분해서 처우를
달리해 온 그동안의 관행을 완전히 뒤엎어, 이웃이나 원수를 가리지 않고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원수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또는 우리 자신에게서 미움을 없애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혹은 단지 사랑에 한계를 두지 말라는 것만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는 ‘있는 그대로’를 ‘호의로’, ‘자애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곧 부족한 이를 부족한 채로, 원수를 원수인 채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그가 나를 미워하지 않게 되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미워한 채로 사랑하는 일입니다.
나아가서는 그가 부족하기에 바로 그 이유로 더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가 사랑이 더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죄인이기에 처벌받아야 하기보다 용서받아야 할 대상이듯이 말입니다.
동시에 이는 자기 자신만 구원받아야 할 존재인 것이 아니라 타인도 구원받아야 할 존재임을
깨우쳐줍니다. 자기 자신만 사랑받아야 하는 존재인 것이 아니라 타인도 사랑받아야 할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는 말씀에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만 하지 않으시고 그를 위해 기도하라고
덧붙이셨습니다. 사랑은 애당초 자기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스테파노가 돌을 맞아 죽어가면서도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을 ‘위하여’기도했던
것처럼(사도 7,60), 사도 바오로가 고난을 겪으면서도 박해하는 유대인들을 ‘위하여’
기도했던 것처럼(1코린 4,12)말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나 이웃만 사랑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자기에게 잘 해주고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라고도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사실 친구를 사랑하는 사람은 죄는 짓지 않을지 몰라도 의로움을 행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친구가 아닌 원수를 사랑할 때라야 의로움을 행하게 됩니다.
악을 피하는 것을 넘어 선을 행할 때라야 비로소 완전해지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의로움은 단지 죄짓지 않고 무난하게 살기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베푸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사랑이 우리를 하느님과의 의로운 관계로 이끌어갑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10)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오늘의 샘 기도>
주님!
되갚지 않을 뿐 아니라 억울한 고통도 기꺼이 지게 하소서.
미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받아들여 사랑하고,
사랑할 뿐 아니라 기도하게 하소서.
죄짓지 않을 뿐 아니라 죄인을 용서하고,
용서할 뿐 아니라 선을 베풀게 하소서.
개방할 뿐 아니라 받아들여 수용하고,
수용할 뿐 아니라 그로 말미암아 변형되게 하소서.
아멘.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참조
가톨릭사랑방 catholic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