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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³о 개인 여행기 스크랩 4일차. 천산 남로-7월 21일 수요일(호탄)
윤상현 추천 0 조회 136 10.10.03 08:4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4일차. 7월 21일 수요일

원 없이 잘 잤다. 평소 새벽잠이 없는 내가 여덟시가 넘도록 잤으니 이제 허리까지 아플 지경이다. 사실은 평소 습관대로 새벽 일찍 일어났으나 혹시나 고단해 하는 조박사의 안면(安眠)에 방해가 될까하여 억지로 누워있었는데 그만 다시 잠이 들어 늦잠이 된 것이다. 또한 오늘 이곳에서의 일정이 한결 여유가 있는 때문이기도 하리라.

느지막하게 아홉시가 넘어서야 조반을 들고 열시를 넘겨서 호텔을 나섰다. 식사 끝에 마신 원두커피의 향기가 아직도 입가에 서려있다. 준비성 많은 조박사가 준비해 온 커피다. 아직 나의 다방용 봉지 커피는 개시(開始)도 하지 않았다. 우쭐한 백양나무 가로수 길이 시원한데 그 너머에 호탄 비행장이 자리했다. 우루무치까지 하루에 딱 두 번 비행기가 뜬다는 아주 한적한 공항이다. 공항 인근을 벗어나니 곧바로 드문드문 가시나무 덩굴진 식물이 자생하는 사막이다. 잠시 모래바람 이는 사막을 달려 작은 고갯마루를 내려가니 저 멀리 백옥하(白玉河)가 눈에 든다. 이곳 호탄(和田)은 흑옥하(黑玉河) 백옥하(白玉河) 사이에 이루어진 오아시스도시이다. 강물 이름에서 보듯이 옥(玉)의 산지로 유명한 곳인데 소위 말하는 곤륜옥(崑崙玉)의 주산지(主産地)인 것이다. 또한 이곳의 옥은 지난 2008년 북경 올림픽때 메달을 제작하는데 함께 쓰여 그 성가(聲價)가 세계적으로 알려진 뒤 가격까지 급상승했다하니 일확천금(一攫千金)을 꿈꾸는 사람들이 지금도 엘도라도를 꿈꾸며 이곳으로 모인단다. 요즈음처럼 여름에 큰물이 진 뒤에 강바닥이 뒤집히면 용(龍)꿈 꾼 사람들이 횡재(橫財)할 수도 있다한다. 그래서 그런지 멀리서 보아도 저편 강가에 많은 차량들이 몰려있고 중장비에 의하여 수 십 번 씩 파 뒤집혔다는 인근 저저대의 바닥은 울퉁불퉁하여 흉물스럽기 그지없다.

거친 황무지(荒蕪地)를 잠깐 지나니 다시 백양(白楊)나무 시원한 작은 마을이다. 어귀에 차량이 멈춰서니 동내의 조무래기들이 모여드는 가운데 당나귀수레가 당장 대령된다. 이곳에서부터 ‘메리카와트 고성’까지는 이 수레를 이용해야만 한다. 얼마 되지 않는 거리이지만 길이 좁은데다가 바닥의 토양이 가루에 가까워 도저히 차량통행 불가다. 유적지의 훼손도 염두에 둠이리라.

두 대의 수레 중 앞 수레에 걸터앉아 뒤를 바라보며 가노라니 푸르릉 거리며 따라오는 뒷 수레의 당나귀 콧바람이 카메라를 잡은 나의 손 등에 뜨겁다. 혹시나 콱 물지나 않을까 걱정을 하면서도 나귀의 덤덤히 눈망울을 응시하니 금방 안심이 된다. 로우 앵글로 셔터를 눌러대니 몰이꾼이 관심을 표하며 자꾸 모니터를 보여 달란다. 당나귀에 익숙해져 한결 느긋한 마음이 되자 절로 신바람이 인다. 제 흥에 겨워 ‘심봉사 황성 가는 대목’의 사설(辭說)이 절로 입에서 튀어 나온다. “도화동아 잘 있거라. 무릉촌도 자알 있거라 이제 내가 떠나가면 어느 년 어느 때 오랴느냐...........” 나의 낮춘 소리에 맞추어 스님과 처사님이 즉각(卽刻)으로 추임세들 넣으며 무릅 장단을 쳐서 화답한다. 팔자(八字)치고는 이만하면 상팔자(上八字)로다.

아까부터 계속 뒤따르며 “돈 달라!”와 “볼펜 달라!”를 외치는 꼬마 녀석이 집요하기도하다. 별 반응이 없는 나에게 도리어 이죽거리기까지 하는 진상(진짜 밉상)중의 진상이다. 망아지가 뛴다. 어미 당나귀였던지 어느 결에 새끼가 다가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

마차(馬車)를 탄지 이십 여분 만에 눈앞에 펼쳐진 고성(古城)의 유적지는 폐허(廢墟) 그 자체다. 1,500여 년 전에 건설된 남북 10km, 동서 2km의 상당히 큰 규모의 고대 왕국의 별장 터라는데 진흙을 이겨 위로 쌓아 올렸던 건물의 잔해만이 듬성듬성, 오랜 세월 바람에 쓸려 흙더미로만 사막 위에 멀뚱히 서있다. 칠 년 전 방문했던 해면하(海面下) 도시 ‘투루판’의 ‘고창 고성’, ‘교하 고성’과는 완전히 다른 을씨년스럽고 황량한 풍경이다.

주변을 관망(觀望)하며 이리저리 사진을 찍고 있노라니 아까의 나귀꾼이 다가와 내 손목의 시계에 관심을 보이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팔찌와 바꾸잔다. 나귀꾼은 여행자들을 위하여 마차를 몰면서 틈틈이 장신구를 팔기도하는 장사꾼을 겸했는데 이곳의 옥(玉)제품이라며 내놓은 물건들이 한 결 같이 조악(粗惡)하기 그지없다. 아마 모르긴 해도 그 당나귀를 팔다해도 시계 값에 못미치리라. 어이없어하는 내 표정에 그만 멀뚱한 모습으로 물러나다가 같이 기념촬영이나 한번 하자는 제의에 선뜻 응한다.

발걸음을 되돌려 마차에 오르니 마을에서부터 따라왔던 조무래기들이 조잘대며 뒤따른다. 맨발에다가 붉은 스카프를 두른 여자아이의 모습이 앙증맞다. 그 모습이 애틋했는지 일행 중 하나가 선뜻 아이를 안아서 마차에 태운다. 그러기도 잠깐, 조금 가다보니 나귀가 지친 기색을 보이자 주인은 아이에게 내릴 것을 종용한다. 그 상황이 민망하여 아이를 따라 몇몇이 함께 내리니 신발 아래에서 풀썩이며 피어오르는 고운 먼지가 장난이 아니다.

손을 흔들어 아이들과 작별을 하고 차에 오르자 시원하게 냉방이 잘 되었다. 뜨거운 날씨에는 그저 차 안이 천국(天國)이다. 마을을 벗어나 백옥하에 차를 대고서는 어제 밤 꿈을 잘 꾼 사람은 옥 줍기에 나서보란다. 옥 1kg의 가치는 한화 약1,500만원을 홋가(呼價)한다니 복권에 맞은 꼴이 되리라. 중장비로 수 십 번은 뒤집혔을 거친 강바닥에 고운 돌들이 널렸는데 대분의 잡석 안에서 어느 게 옥인지 도무지 구분해 낼 재간이 없다. 내 눈에는 다 그게 그것으로 비슷하다. 다만 많은 돌들이 수석으로만 보면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겠다싶지만 어떻게 들고 올 재간이 없다. 저 멀리 강둑에는 옥을 찾는 현지인의 오토바이와 승용차가 널렸다.

점심식사를 위하여 다시 시내로 들어간다. 호탄 공항의 활주로에는 역시 한 대의 비행기도 없이 군용 헬기만이 멀건히 프로펠러를 돌리고 있다. 햇빛 강한 거리에서 삼륜자전거에 승객을 태우고 페달을 밟으며 안간힘을 쓰는 운전사의 모습이 힘겹다. 길 가의 ‘켄터키 프라이드’ 간판에는 ‘무슬림(MUSLIM)'이 병기되었으니 새삼 회교권임을 인식한다. 거리의 도처에 뾰족탑을 가진 둥근 지붕의 이슬람식 건물이 널렸다.

“어머니가 차려주신 음식(母親下飯菜)”를 표방한 음식점의 점심식사가 아주 맛이 좋다. 워낙에 내 식성이 좋아서 그런지 몰라도 여행길 위에서 만나는 음식들이 별미(別味)가 아닌 게 없다.

약간의 휴식 뒤에 다시 거리에 나서니 자전거와 스쿠터, 자동차들이 엉켜있는 가운데 ‘현대’와 ‘기아’의 로고를 단 차가 눈에 띠어 반갑다. ‘요트칸(約特干)’유적지로 가는 길이다. 길 가에는 “씰크로드의 풍경이 웃음으로 손님을 맞이합니다.(絲路風情笑迎賓)”하는 입간판이 사막의 안내 지도와 함께 거창하게 서있다. 여기도 역시 포도농사가 성한 곳인가보다. 시골 마을 사방의 벽에 ‘포도향(葡萄鄕)’의 문구가 선명하다. 하미과(哈密瓜)와 수박이 산더미처럼 쌓인 옆에는 양 손에 아이를 안은 젊은 아낙들이 둘러섰는데 아가가 애기를 안은 것처럼 그 모습들이 앳되다.

간판에 쓰인 그대로 포도나무 덩굴로 가로수를 대신한 소롯길로 접어드니 짙은 그늘이 시원하다. 같은 모습의 길들이 반듯하게 반복되고 이정표하나 설치되어있지 않다보니 운전기사도 어디가 어딘지 헷갈려한다. 촌로에게 길을 물어 겨우 도착한 고대 ‘요트칸(約特干.Yotkan) 왕국’의 유적지는 키 큰 백양나무 방사림 아래에 덩그라니 유적지 표지만 서 있을 뿐 정작 아무런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사실 유허(遺墟)는 지하 몇 미터 아래에 묻혀있고 아직은 발굴을 하지 않은 상태란다. 우리나라하고는 별로 직접적인 연계가 없는 곳인지라 그 먼 길을 따라 여기까지 와서 만나진 유적지의 모습에 망연자실(茫然自失)할 뿐이다. 오랜만에 보는 외국인들에게 호기심을 보이며 다가오는 촌로(村老)들과 아이들을 만나 가벼운 교류를 하는 것으로 황당함을 메울 뿐이다. 이곳은 더욱 시골인지라 도시에서는 그나마 통하던 중국어가 여기서는 전혀 무용지물(無用之物)이다. 그래도 수줍음이 담긴 선한 웃음으로 다가서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기 좋다.

버스는 버려둔 채로 포도나무 가로수 그늘 아래를 걷기로 했다. 길 가 옥수수 밭에서는 일하느라 웃통을 벗어재낀 아이들이 사진을 찍어달라며 손을 흔들고 포즈를 취한다. 차 안에서 에어콘 바람에 지친 몸이 가로수 깊은 그늘 안에서 되살아나는 듯 피부에 닿는 바람 기운이 흡족하다.

여러 특산 과일 중에서도 이곳의 호도(胡桃, 核桃)는 더욱 유명하다. 인근의 농원에 호도 박물관까지 마련되어 있는데 이곳에는 이른바 호도왕(胡桃王)으로 불리는 수령 700년이 넘은, 유래가 없는 노거수(老巨樹)가 아직도 푸르름을 자랑하고 있다. 높이와 둘래가 함께 20m가 넘는 이 나무는 아직까지도 많은 열매를 맺어 노익장을 자랑하며 넓은 그늘을 제공한다. 노랗게 여물어가는 조롱박이 주렁거리고 호두나무 굵은 가지에 매달린 그네 위에는 위구루족 아낙이 기분 좋게 흔들리고있다.

안내인이 준비해 둔 하미과(哈密瓜) 몇 쪽으로 기갈(飢渴)을 달랜 뒤 박물관을 나서니 호도장수가 호객(呼客)을 한다. 여기까지 와서 호도 맛을 어찌 아니 보랴. 약간의 돈을 지불하니 우리 일행 전체가 맛을 보고도 남을 만큼 건네준다. 말린 살구의 맛도 기가 막히다. 장년의 장사꾼 사내 모습이 우리 넷째 외삼촌과 흡사하여 호감(好感)이 간다. 기념촬영 제의에 선선히 응하는 모습에서 아직까지 순박한 이곳 사람들의 면모를 본다. 바로 곁에 자리한 ‘서역 혼 뿌리 예술관’의 정문 앞에 우뚝 선 호양나무 괴목(槐木)에는 위구루족의 끈기와 은근한 자부심이 묻어있다. 호양(胡楊)나무는 사막 안에서 삼천년의 수명을 자랑하는데 자라는데 천년, 사는데 천년, 죽어서 천년이라 하니 그 세월의 단위가 놀랍다.

다시 해가 기울어 시내에 들어오니 한 중심에 ‘단결 광장’이 자리했다. 광장의 정면에는 모택동이 위구루족 노인과 악수하는 장면을 동상(銅像)으로 세워두었는데 혁명 당시 이곳을 장악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던 노인과의 만남을 기념하는 것이란다. 선선해진 저녁시간인지라 많은 시민들이 가족단위로 광장을 즐기는 중이다. 주로 공놀이가 흔한데 어린 자녀의 놀이에 흐뭇한 미소를 보내는 젊은 부부, 또는 비치볼을 주고받으며 까르륵거리는 젊은 아가씨들 등등 그 분위기가 많이 밝다. 사람 사는 곳의 모습은 어디나 비슷한 법이다.

한가한 걸음을 옮겨가며 기웃거리다보니 출출하다. 거리의 손수레 좌판이 남대문 시장 통의 순대장사를 연상케 한다. 돼지 대신 양의 내장 등속이 놓인 게 다를 따름이다. 회교지역인 이곳은 돼지고기가 금기의 음식이다. 보기에는 느끼해보였던 것들이 막상 입에 넣으니 구수한 맛이 앞선다. 주변 건물에는 많은 상점들이 성업 중이다. 마침 “폐업쎄일”의 간판을 내 건 구두점이 있어 80% 할인 된 가격으로 쌘달을 구입하고 보니 스타일과 가격이 모두 마음에 든다.

저녁 식사는 아예 야시장에서 거리 음식으로 해결하기로 했다. 땅거미 내리기 시작할 무렵, 이곳저곳에 하나씩 손수레가 준비고 거리는 갑자기 먹자골목으로 변한다. 기본 메뉴는 모두가 양고기로 만든 ‘꼬치구이(양러우촤얼)’와 ‘탕면(양러우탕미옌)’ 그리고 ‘볶음밥(양러우차오미판)’이다. 비장했던 소주와 함께 양고기를 정말 원 없이 먹었다. 평소 주탐(酒貪)은 몰라도 식탐(食貪)은 없다던 자부(自負)가 깨질 정도가 되었으니 어리석다 아니하랴. 곁의 현지인들도 좌판에 주저앉아 ‘구운 오리 알’을 맛있게 먹고 있다. 생각 같아서는 맛이라도 한번 보고 싶다만 이미 불러버린 내 배가 도저히 용납하지 않는다.

숙소(宿所)로 귀환하여 한참을 쉬고 나니 다시 좀이 쑤시다. 이국(異國)에서의 밤 시간을 어찌 방 안에 처박혀있을 것인가. 스님과 처사님을 동무삼아 어제 확인해 둔 야시장(夜市場)을 향했다. 야시장 입구에 자리한 땐스홀은 위구르족 전용인가보다. 경비를 맡은 청년 몇이 허리에 장식용 칼을 두른 채로 입장객을 엄중 검색하여 들여보내는데 왠지 살벌하여 구경이라도 한번 해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방음(防音)이 제대로 안된 내부에서는 싸이키델릭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이방인에게 꽂히는 시선을 무심(無心)한 듯이 피하고서 야시장의 탁자를 차지하고 앉았다. 처사님께서 오늘은 극구 자기가 한잔 사시겠단다. 끼니때마다 반주(飯酒)를 제공받으신 보답이란다. 스님은 발맛사지를 좋아하셔서 홀로 곁의 ‘족욕장’을 찾으셨다. 이슬비가 한 두 방울 비치기 시작한다. 이곳에서의 비는 알라의 축복이며 신의 선물이다. 젖어가는 대지와 함께 마음도 촉촉해온다. ‘신강 왕’ 표 맥주를 권커니잦커니 하면서 전력(前歷)을 말씀하는 처사님의 내력(來歷)이 화려하다. 몇몇 예술가들과의 교류와 본인의 수행 행각을 얘기해주시는데 시간이 어떻게 간 줄 모르겠다. 어느새 마사지를 마치고 오신 스님께서 호방(豪放)한 기분에 오늘 곡차(穀茶)값은 당신이 낸다신다. 내겐 당첨된 복권마냥 좋은 일이다. 이방(異邦)의 밤이 깊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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