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우리들에게 의외로 독일민요가 귀에 익은 게 사실이다. 뭐 당장이라도 뭐가 있냐고 물으면 주르륵 꿸 수 있는 게 독일민요이니, '노래는 즐겁다', '이 몸이 새라면', '로렐라이', '소나무야', '한 떨기 장미꽃' 등등...거기에다 작곡자가 분명한 '숭어', 보리수' 등을 포함하면...에휴! 외국민요는 독일민요밖에 배운 게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는구만.
어릴 때는 몰랐지. 당시 우리나라의 초·중등학교 교과서를 만든 사람들이 대개가 일제시대 때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은 거의 일본에서 또는 일본인들의 교육을 받았다. 따라서 해방을 맞은지 몇 해 지나지 않은 우리들의 어린 시절 학교 교육에서 일본의 교육과정의 영향은 클 수밖에 없다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리라.
근디 우리들이 어린 시절 왜 독일민요를 많이 배웠는지를 살피는 중에 뜬금없이 일본 교육의 영향 운운하니까 우습지 않나? 비단 음악교육 뿐이 아니라 해방 후 우리나라 사회 전반에 일본의 영향이 꽤 오랫동안 강하게 작용하고 있어 왔다. 일본의 먹물 한 방울 튀기지 않은 사람이 당시에 지식인으로 대접받을 수 없는 시기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식민지 시절 일본이 남겨주고 간 사법제도는 해방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법 체계의 근간을 이루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 일본이 1800년대 후반 근대화의 길에 들어서면서 서양의 근대화된 제도와 문물 중 독일의 그것들을 가장 많이 도입했다. 근대사를 보면 당초 일본은 미국과 영국의 신문물에 관심을 가졌으나, 여러 가지 측면을 고려해 보건대 독일에 경사될 조건들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우선 독일이 미국, 영국, 그리고 프랑스보다 상대적으로 근대화가 늦었기 때문에 출발 조건이 일본과 비슷했고, 무엇보다도 영미 쪽의 개인주의적 사상보다 아리안 민족의 강한 집합주의적 사상이 당시 일본의 사정이나 국민성(국민성이란 게 있다면)에 딱 맞아 떨어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 가까운 관계가 마침내는 제 2차 세계대전의 추축국(樞軸國)으로 연합하여 세계를 멸망 직전의 구렁텅이로 몰아가게 되긴 했었지만...
그리고 일본의 지식인들은 독일의 모든 것, 제도와 사상, 그리고 문물들을 일본으로 퍼 나르게 되는데, 여기서 일본의 외국어 번역작업이 엄청나게 이루어지면서 오늘날 세계 유수의 지적 강국으로 올라서는 힘을 축적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독일에서 들여온 근대화된 문물을 기반으로 군사강국으로 올라선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고 만주까지 파죽지세로 올라가는 가운데, 당연히 조선에 일본의 제도와 문물이 도입되고 학교교육 역시 그 영향권에 들었다. 해서리 우린 그 시절 학교에서 자신도 모르게 아주 많은 독일민요를 접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하나 이해가 되지 않는 게, 춘천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육부(당시에는 문교부)에서 음악담당 편수관으로 재직하며 나중에는 편수국장까지 올랐던, 우리 시절 음악 교과서 편찬에 가장 큰 영향력을 가졌던 정세문 선생이 일본 유학 경험이 전혀 없음에도 그가 책임지고 편찬한 음악 교과서에 독일민요가 많았다는 사실이다. 모르지 뭐, 먹물이야 내가 요리조리 피하고 조심한다고 해서 꼭 내 옷에 묻지 말란 법 있간디?
- Der Lindenbaum(보리수)- Nana Mouskouri
- Die Forelle(숭어)- The King's Singers
- Lorelei(로렐라이)- Mireille Mathieu
- Heidenroslein(한 떨기 장미화)- The King's Singers
- Muss i denn, Muss i denn zum Städtele hinaus(정말 난 이 도시를 떠나야 하나) 번안곡 Wooden heart(목석같은 마음)- Elvis Presley
- O Tannenbaum(소나무야)- Vicky Leandr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