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동창회에 참석한 뒤 돌아가는 길이었다. 참석한 동기생들 가운데 하필이면 그녀를 방향이
같다며 모셔다 주라는 동창회장의 엄명에 따라 그는 그녀를 집까지 태워다 주게 됐다.
그리고 그 길에 그녀네 집 가까이에 있는 찻집에서 둘이 차 한잔을 함께하는 시간을 갖게 됐다.
실로 삼 십년 만의 해후였기에 흰 칼라 빳빳이 세운 까만 교복 차림의 앳된 모습을 떠올리며 행사장에
간 그에게 몰라보게 변해버린 그녀의 모습은 처음엔 좀 실망스러웠던게 사실이다.
하기야 강산이 변해도 세 번은 변했을 시간이 아니던가. 한 번쯤 그녀와 마주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옛일을 회상해 보고픈 마음이 그에게 없었던 건 아니다. 그러나,
우연히 알게 된 그녀의 전화번호를 몇 번 들춰만 보았을 뿐 차마 전화를 걸어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아무리 동창이라 해도 엄연한 남의 부인인 그녀와 단둘이 몰래(?)만난다는 것 부터가 올곧은 그의
성품으로는 가당치 않은 일이었고 또한 세월의 더깨 만큼이나 무디어질 대로 무디어진 그의 가슴 속에
이제는 잊혀진 희미한 옛사랑, 아니 첫사랑의 그림자일 뿐인 그녀와 마주 앉아 봤자 별 할말이
없을것 같기 때문이었다.
그가 그녀를 좋아하게 된 것은 중학교 이 학년때 쯤이었을 것이다. 오리길을 걸어서 오가는 학교
근처의 외딴 과수원집 딸이었던 그녀는 동그스럼한 얼굴에 눈매가 무척이나 예쁜 아이였다.
새침하고 얌전하여 말 한번 붙이기가 힘들었지만 그 무렵 그는 그애를 멀리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매일 학교에서 보는 것 만으로는 부족하여 어느날은 그애를 한 번이라도 더 보려고 그
과수원집 울타리 안을 기웃거리다가 그애 오빠한테 붙잡혀 혼쭐이 난 적도 있었다.
그 열병이 더해진 것은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그리고 그의 단짝이자 유일한 경쟁자였던 친구 k 역시
그녀를 좋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시내에서 자취를 하며 학교에 다니던 그들 셋이 곧잘 어울리게 되면서 그녀를 바라보는 k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는 걸 알아채기까지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돌이켜 보면 참으로 눈부시게 아름답고 순수하던 날들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였던가,그들 세사람
사이에는 묘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고, 때마침 입시준비에 전념하게 되면서 그녀도, k도 그에게서
멀어져 갔다.
그토록 그녀를 좋아하면서도 한번도그녀에게 그 마음을 고백해 보지 못한 채로, 또한 그런 그의
마음을 진작에 눈치챘을법한데도 언제나 변함 없는 친구로만 대할 뿐, 별 내색이 없는 그녀의 속
마음을 도무지 알지 못한 채로였다.
대학 1학년을 마치고 군 입대를 코 앞에 둔 날, 그는 절박한 심정에 어렵사리 수소문한 그녀의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그는, 서울의 대학에 입학했다는 소식만 전해 들었을 뿐 자신도 모르고 있는 k의 근황을
그녀가 알고 있음에 내심 조바심을치며, 그녀와 만나기로 약속한 입영 전날의 그 시간까지 이런
말들을 준비하며 기다렸다.
널 좋아해, 사랑해! 그러니까 군복무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꼭 기다려줘.
그러나 어쩐 일이었는지 그날 그녀는 끝내 그곳에 나타나지 않앗다. 혹시나 하고 걸어본 전화에 벌써
나간지 오래라는 주인 아주머니의 대답을 듣고도 몇 시간을 더 기다린 끝에, 그는 그녀의 얼굴 위에
자꾸 오버랩되는 k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곳을 나왔다.
그날밤 혼자 포장마차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한번 부딪혀 보지도 못한 채 끝장나 버리고 만
짝사랑의 쓰라림을 곱씹다가 찬바람 휘몰아치는 쓸쓸한 겨울밤 거리를 지칠때까지 하염없이 헤매고
다녔다.
그 후 군에서 제대하고 복학한 그해 봄에 그는 그녀의 소식을 전해 들을수 있었다.
뜻밖에도 k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로 시집을 갔다고 했다.
그리고 k로부터 그동안 그녀와의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다소 맥 빠지는 고백도 듣게 됐다.
찻집 안은 추운 날씨탓인지 한산했다. 창 밖으로 그녀의 집이 있다는 아파트 단지가 빤히 바라다
보이는 곳이었다.
"세월 참 많이도 흘렀지?"
"....그런거 같애."
처음으로 가까이에 앉아 마주 보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분명 젊은날 그의 가슴을 그토록
오래 아리게 하던 옛날의 그 소녀는 아니었다.
약간 넉넉해진 몸매에 편안(?)한 분위기가 영락 없는 그 나이 또래의 이웃 부인네 같았다.
그래도 그는, 왠지 설레는 마음을 감추기 위하여 몇번이고 자리를 고쳐 앉았다. 오래 전 기억의 저
편에 묻어버린 유년에 대한 향수가, 학창시절의 아련한 추억들이 하나 둘, 되살아 나고 있었다.
마치 한 순간에 되감겨졌다가 희미한 흑백 화면으로 재생되는 옛날 영화처럼.
"부질없는 일인줄 알지만....."
낯선 것도 같고 낯익은 것도 같은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가 또다시 세월 참 많이도 흘렀구나
생각할 때에 그녀가 조금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래도 꼭 한번 물어보고 싶었어. 그때 왜 나오지 않았어? 세시간이나
기다렸는데..........."
"....................??"
잠시 멍해진 그의 머릿속에서 혼란과 의혹이 교차 했다. 그리고 순간, 번쩍! 하고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그럼 혹시?
"그날은 구정 다음 다음날 오후였지. 자유극장 옆에 있는 지하다방 크리스탈........"
"아니 이층이었는데? ....극장앞....에머랄드였는데.......??"
아, 이럴수가! 그날 그가 크리스탈 다방에서 초조히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시간, 그녀는 맞은편
에머랄드 다방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을 줄이야.
그랬다. 그때 그녀도 그를 기다렸던 것이다. 어쩌면 그날 뿐만이 아닌 그 전에도 그 후에도 오래도록...
그때는 왜 그 생각을 못했었는지 지금도 기억하는 그 골목 그 다방 '에머랄드'와 '크리스탈'을 그때
두 사람 중 누가 착각을 일으켜 서로 엇갈리게 됐는지 조차 이제는 도저히 알 수 없을만큼
시간은 강물 따라 아득히 흘러가 버렸다.
때마침 스피커에선 그의 기분을 대변이라도 하듯 나직이 흔들리는 탱고음과 함께 최백호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청춘의 미련이야 있겠냐마는.....내에 가아슴에~ 다시
못올 것에 대하여~ 나앙만에 대하여어~ "
(1997년 02월 )
첫댓글 오래전에 써본 콩트입니다, 순전히 픽션인데요, 좀 유치하죠 시간 많은 사람만 읽어보시길.... ^^*
ㅎㅎㅎㅎㅎ 솜씨가 보통이 아니십니다. 다시못올거에 대하여 미소지며 그려보는재미도 괜찮은데요 .어깨불편하신데 글 올리는라 힘드셨겠어요 감사합니다
에메랄드 크리스탈 너무 어려븐 걸 택했다 진주나 호박으로 했으마 그런 애석한 일은 일나지도 않았을지도 모를낀데 나는 픽션인 줄 알았는데 부정의 부정?은......결말이 산뜻하고 좋네요
한 가지만 잘 하이소 8년 전 솜씨 이 정도 마 잘 딱았스만 소설가 될뻔 했네예 유행가 가사와 내용의 스토리를 어쩌면 전문가 처럼 잘도 맞아 떨어지는구만요. 놀랍데이....
그 웬수같은 에메랄드 크리스탈 만 아니었어도.......시나리오 작가로 갔으면 만날수도 없었데이......다시 못 올것 에 대하여.........오호 통재 라 !!
아하하!... 이럴수가! 진짜로 재밌는 콩트입니다 그 길로도 재능이 뛰어나시네요 (혹시 본인의 사연은 아니신지?)
우리 시대의 사랑이네, 나는 사실 그렇게 쑥맥은 아니었는데, 생은 뒹굴어 보는 게, 얻는 게 많은 게 아닐까? 뒹굴고 난 뒤의 뭔가가 더 핵심은 아닐까? 그러나, 안 되는 건 할 수 없고. 크리스탈, 에머랄드의 혼란, 좋네요.
우리 시대의 사랑이네, 나는 사실 그렇게 쑥맥은 아니었는데, 생은 뒹굴어 보는 게, 얻는 게 많은 게 아닐까? 뒹굴고 난 뒤의 뭔가가 더 핵심은 아닐까? 그러나, 안 되는 건 할 수 없고. 크리스탈, 에머랄드의 혼란, 좋네요.
ㅎㅎㅎ...게시판 둘러 보다 다시 보니....댓글이 더 재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