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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관점
예수는 갈릴리 지역 순회를 마치고 “예루살렘에 가시기로 마음을 굳히셨다.” 예수는 9:28-36에서 대화를 나누었던 모세나 엘리야처럼 단호하고 집중적으로 예언자적 태도를 보이신다. 그렇지만 예수는 단순한 예언자 이상이다. 그는 메시아이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앞으로 닥칠 일과 관련하여 꼼꼼한 대비를 시작하신다. 분위기는 차분하다. 예수는 이미 제자들에게 당신이 배신당하고 사형에 처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9:21-22, 44) 예수가 사명을 이루기 위해 가는 길에 동행하기 위해서는 상처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예수의 제자들은 배척과 박해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배워야 한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그 결과에 좌우되지 않고 예수가 가는 길을 걷는 것이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의 승천에 대한 예고로 시작된다: “예수께서 하늘에 올라가실 날이 다 되었다.” 제자들은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주어질 대사명을 위해 준비되고 있다. 누가는 제자들이 예수가 가는 길을 예비하기 위해 사마리아 동네로 보냄을 받은 것을 기록하면서 속죄론적인 주제를 전개한다. 사마리아는 유대 공동체와 적대 관계에 있는 외부 공동체이지만 예수는 이 지역을 위한 선교 계획을 추진한다. 예수의 용서와 치유의 능력은 인종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불순한” 집단인 사마리아인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 제자들은 예수의 복음을 갖고 그들에게 간다. 제자들은 예수가 그랬던 것처럼, 기꺼이 익숙한 영역을 떠난다.
그러나 그들의 포용심은 금방 바닥이 드러난다. 사마리아인들이 그들을 배척하자, 제자들은 분노한다. 야고보와 요한은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을 불로 멸망시킨 것처럼 사마리아에도 불심판이 내려지기를 바란다. 예수는 즉각 그들을 꾸짖고, 제자가 되기 위한 대가에 대한 확고한 가르침을 주신다.
힘에 의존하여 문제를 해결하려는 유혹은 제자들에게는 물론 교회에게도 늘 있을 것이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어떤 마을에서 배척을 당하면 발에서 먼지를 털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선포를 하라고 이미 명령하셨다. (눅 9:5, 10:11) 오늘 본문에서 예수는 어떤 형태의 보복도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한다. 기독교 신앙을 강요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기독교의 본질적 정신에 어긋난다.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은 종말론적인 심판을 직면해야 하지만, 심판은 하나님께만 속한 것이다.
능력을 남용하기를 거부하는 예수의 입장과 연결되는 것이 물질적 집착으로부터의 초탈이다. 예수는 제자들이 이것도 배우기를 원한다. 그 내용은 귀에 거슬리고 반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예수는 제자가 되려는 이들에게 여우고 굴이 있고 새도 둥지가 있지만, 인자는 머리를 둘 곳이 없다고 말한다. (58) 성육하신 하나님은 편안한 집을 떠나 환영하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 사시는 셈이다. 이것이 제자들에게는 어떤 의미를 주는가? 물질적 소유나 경력, 가족과 관련하여 어떤 영향을 미칠까? 제자도는 성인들이나 신비가들이 수행했던 초탈, 즉 빈손으로 사는 훈련이다. 누구도 소유욕에 잡혀있으면서 예수의 충실한 제자가 될 수 없다.
이러한 금욕적 요구에 근거하여 오래전에 수도원 전통이 생겨났고, 가톨릭에서는 청빈, 순결, 순명이 복음적 덕목으로 강조되었다. 이 본문이 어떤 때는 극단적인 금욕주의나 육체적인 것을 경시하는 이원론으로 빠진 예도 있었지만, 예수가 극단적인 금욕주의를 실천했거나 주창했다고 볼 수는 없다. 예수의 대적자들이 예수가 “마구 먹어대는 자요, 포도주를 마시는 자”(7:34)라고 비난한 것은 과장된 것이겠지만, 예수가 정상적인 육체적 욕구를 죄악시하지 않았음은 확실하다. 예수가 가르치고자 했던 것은 인간사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절대적 중심에 견주어 상대화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의식주와 같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까지도 이차적인 것이다.
예수의 낮아지심(kenosis, 자기 비움)의 의미가 어떤 때에는 종종 육체를 죄악시하고 영적인 것만을 강조하는 식으로 잘못 받아들여지기도 했지만, 그 본래 의미는 오늘의 물질문명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본문은 오늘의 교회에 중요한 질문들을 던진다. 예수에게 집이 없다는 선언이 오늘의 교회론에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물질적 소유나 장소와 관련하여 자기 비움을 실천하려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본문이 주는 도전은 무엇인가? 교회가 소비주의적 문화에 휩쓸리지 않으면서 가족과 공동체를 위해 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인가?
충실한 제자로 살기 원하는 사람들은 모든 영역에서 도전을 받게 된다. 어떤 경우 복음은 전통적인 가족·문화적 관습에 어긋나는 때도 있다. 긴 장례일정을 앞둔 자에게 예수는 “죽은 사람을 장사하는 일은 죽은 사람들에게 맡겨두고, 너는 가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여라”고 말씀하셨다. (9:60) 이 말은 부친상을 당한 사람에게 주는 것으로는 배려심이 없고 부적절한 것처럼 들린다. 예수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제자가 가족, 공동체, 전통에 관한 의무에 일차적 우선순위를 준다면, 그는 자신의 삶에 충실한 것을 더 중요한 사명으로 여기는 셈이라는 것이다.
동방정교의 theosis (神化, deification)나 서방 교회의 성화(sanctification) 교리는 제자들이 성령의 임재를 통해 겪게 될 변혁과 관련 있다. 오늘 본문은 제자들에게 성령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명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삶을 살기를 요구한다. 즉, 제자들은 성화된 삶을 살도록 부름 받았다. 하나님의 사랑과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버리고 “예루살렘으로 가기로 마음을 굳히는” 삶을 살도록 부름 받았다. 작물을 심기 위해 흙갈이하는 농부처럼, 제자들은 미래에 추수할 것을 생각하여야 한다. 그들은 쟁기를 손에 잡고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한다. 그들에게 설교하고, 가르치고, 병 고치는 사도적 능력이 주어질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배척과 박해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사마리아 동네에서 시작된 예루살렘으로의 여정은 그리스도의 영에 이끌려 걷게 되는 사도의 길이다.
주석적 관점
- 비록 세 공관복음서가 예수의 갈릴리 사역을 이어서 유대와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신 것을(마19:1-2;막10:1) 묘사하지만, 누가는 이 여행의 드라마를 선교여행이야기(눅9:51-19:28)안에 복음서의 약 1/3쯤 되는 곳에 배치하여 강조하고 있다. 누가의 관심은 지리적인 것보다는 신학적인 것인데, 그의 여행의 진도를 알 수 있는 아무런 표시는 없지만, 누가는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반복적으로 상기시키는 것에서 이를 알 수 있다(13:22,33-34;17:11;18:31;19:11,28).
- 누가는 9:51에서 이야기의 결정적인 전환점을 제시하는 말로 선교여행이야기를 도입하고 있다. 결정적 순간을 “예수께서 하늘에 올라가실 날이 다 되었다”라고 말한다. 하늘에 올라가실 날이 다 되었다는 것은 누가가 말한 중간시간으로서의 그리스도 사건에 대한 강조와 상통한다(1:1;4:21;행1:2). 누가는 이 시간을 앞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의 ‘떠나가심’에 대해 말한 것을(9:31) 상기시킴으로 지적하고 있다. 이번 경우에는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다”. “올라가는 것”이 대략 승천을 의미하지만(행1:2,11,22), 누가는 아마도 죽음, 부활, 승천을 포함한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모든 일들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기에 예루살렘은 예수에게 운명의 장소이다. 가시기로 마음을 굳힌다는 것은 마치 에스겔이 이스라엘을 향해 예언할 때와 같은(겔6:2;13:17;14:8), 단호한 결의를 보여주는 예언적 행동이다. 예수가 나중에 여행이야기에서 제시한 것과 같이 예루살렘은 예언자들이 순교하는(눅13:34) 장소이다.
- 죽음으로의 예수의 여행은 9:51-62에 이어지는 제자도에 대한 이야기의 배경을 제공한다. 갈릴리 사역과 마찬가지로 여행 도중에, 제자들이 예수를 따르고, 그의 사역을 함께하며(9:1-5), 십자가를 진다(9:23). 마태와 마가가 베레아를 통과하는(마19:1;막10:1)것으로 묘사하는 것과 비교해서, 누가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직선도로인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것으로 묘사한다. 사마리아를 통과한다는 것은 큰 도전인데, 왜냐하면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오랫동안 적대적으로 살며 서로 상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요4:9). 요세푸스는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유대순례자들에 대한 사마리아인들의 빈번했던 폭력적 행동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유대전쟁사2.232).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제자들을 경멸받는 사마리아인들의 선교에 가담시켰는데, 이는 후에 복음이 유대를 넘어 사마리아로 퍼져 나가는(행8:4-25) 계속적인 선교를 예고하고 있다. 제자들은 곧바로 이 여행의 위험을 알게 되었는데, 왜냐하면 예수를 환영했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눅7:36;9:1-5 비교10:38-42), 사마리아인들은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도중이므로 예수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 맞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인들에게 하늘에서 불을 내려 태워버리라고 하는 요청을 보면, 제자들은 이러한 거부에 대해 발에서 먼지를 떨어 버리고(9:5) 다른 동네로 가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잊어버린 것이 틀림없다. 그들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왕의 부하들을 태워버렸던(왕하1:10) 엘리야를 모방하려 했다. 제자들을 꾸짖고 다음 동네로 가시면서 예수는 제자들에게 불가피한 거부에 대해 폭력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새로운 길로 선교를 계속하도록 가르치셨다.
-제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과의 짧은 이야기에서, 누가는 예수가 그의 운명의 길을 가는 것처럼 제자도의 더 높은 차원을 제시한다. 누가는 처음 두 이야기들(9:57-60)은 마태와 공유하지만(마8:19-22), 그의 독자적 자료를 통해 세 번째 이야기(9:61-62)를 첨부한다. 이미 누가는 예수가 그를 따르려면 매일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했지만(9:23), 첫 번째 제자가 되려했던 사람은 예수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겠다고 말했다. 다른 제자 지망생과는 달리 그는 제자됨에 아무런 조건도 달지 않았다. 사마리아인들과의 만남은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는 것을 생생하게 생각나게 해주었는데, 왜냐하면 그가 의지하는 환대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예수를 따르려는 사람들은 같은 운명을 예상할 수 있다. 누가는 어떤 사람들이 그들의 동네에서 예수를 섬기고(8:39 비교8:1-3), 환대하는 것(10:38-42)을 묘사하면서도, 예수를 따르려는 사람들이 결정적인 선교에 있어서는 특별한 요구를 하고 있다.
- 첫째 예수를 따르려는 사람이 있었지만, 예수는 두 번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신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는”(출20:12) 십계명의 가르침과 부모를 매장하는 책임을 져야하는 유대의 전통에서 보자면, 그 사람이 아버지의 장례를 치루겠다는 요청은 온당한 것이다. 그 사람의 아버지가 이미 죽었는가를 따지는 주석가들은 대화의 초점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누가의 일차적 관심은 그 사람이 예수를 기꺼이 따르고자 하는데 있어 조건을 내건다는 것이다. 예수의 대답, 즉 “죽은 사람들을 장사하는 일은 죽은 사람들에게 맡겨 두라”는 것은 그 사람이 사태의 긴급성에 대한 인식이 없다는 것을 가리키는데, 그러기에 제자됨의 요구는 율법의 정상적 의무를 넘어서는 것이다. 14:16-24의 예화에서 보듯이 시대의 긴급성을 보지 못한 채 땅을 사고 결혼을 하는 정상적 일만을 계속하는 사람들처럼, 이 사람도 제자됨을 “아버지나 어머니나, 아내나 자식이나, 형제와 자매보다”(14:26) 우선하라는 예수의 요청을 이해하지 못했다.
- 세 번째 제자가 되려는 사람도(61-62) 이해할만한 요청을 한다. 그의 대답은 엘리야가 엘리사에게 제자가 되라고 했을 때를 상기시키는 데(왕상19:19-20), 그 때 엘리사는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작별인사를 하게 해달하고 요청했다. 엘리야는 그 요청을 허락했지만, 예수는 “누구든지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보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했는데, 이는 엘리야가 그를 불렀을 때 엘리사가 쟁기를 잡고 있었던 것을(왕상19:19) 암시하고 있다. 뒤를 돌아본다는 것은 가족들의 요청을 제자로의 부름보다 우선한다는 것이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하는 일에 어울리기 위해서는 엘리야의 요구보다 더 엄격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의 거부됨(51-56)과 운명(57-62) 모두를 나누어야 한다.
목회적 관점
믿음은 다양한 방법으로 표현되고 경험되지만, 각자의 신앙 여정에서 헌신의 깊이를 분명하고 명확하게 표현해야 할 때가 온다. 우리 인생에서 하나님의 자리는 편의의 문제도 아니고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서도 안 된다. 인간의 다른 노력과는 달리 하나님께 대한 헌신은 논리적 의사 결정과정의 결과라기보다는 진심에서 우러난 문제다. 예수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기로 했을 때, 사랑이나 은혜 같은 요소들이 교제의 길이나 지식의 깊이 같은 기준보다 훨씬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제자로서의 삶을 사는 것은 파트 타임이나 일시적인 헌신일 수 없다. 이것은 우리 삶의 방향과 우선순위를 변화시키는 것으로, 우리의 인간적인 필요와 요구를 우리 주님의 부르심에 종속시키는 것이다.
예수가 걸어간 여정은 고된 것이었고, 결국 십자가에서 끝나는 것이었다. 수많은 선택과 즉석 만족의 시대에, 이런 식의 헌신은 우리 마음을 사로잡기 힘들다. 누가복음 9:51은 예수의 생애와 사역에서 주목할 만한 전환을 기록한다. 예수는 결국 그 자신을 요구하게 될 희생에 관하여 가르쳐왔다. 이제 그가 “하늘에 올라가실 날이 다 되었다.” 그래서 예수는 방향을 바꿔서 예루살렘을 향해, 거기서 죽음을 만나기 위해서 간다.
우리도 사는 동안 중요한 전환의 시간을 직면한다. 신앙 발달의 초기에 우리는 종종 성경과 교회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에 관하여 더 자세히 아는 데 집중한다. 우리는 놀랍도록 친절한 구세주에게서 온전하고 완전한 사랑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기뻐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멋진 친교를 서로 나눈다. 우리는 새로워지고, 양육되고, 놀랍게 충족됨을 느낀다.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고 성숙하는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삶은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과 서서히 통합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길을 가는 삶을 사는 것이, 어떻든 간에 개인적인 노력 이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스도의 길을 가는 삶이 진정한 의미와 온전함을 가지려면 그것이 우리의 정체성이 되어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부분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깨닫고 정체성에 따라 살아야 한다. 우리가 가진 은사와 단점이 무엇이건 간에,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진해서 예수와 나란히 걸어야만 한다. 심지어 그 여정이 세속적인 사람들이 피하는 어려운 선택을 하도록 강요하더라도.
예수가 선택한 새로운 방향은 때로는 적대적이고 때로는 당황스러운, 심한 반대와 만났다. 그 길을 준비하려고 보낸 사람들 대부분은 영접보다 반대를 받았다. 비록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이유를 확실히 오해했지만, 예수가 가는 길을 거룩한 도성으로 순례하는 것으로만 보면서, 시비를 걸었다. 예수가 환영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제자 야고보와 요한은 분개하면서, 하늘에서 벌을 내려달라고 제안했다. 오늘날에도 예수는 그를 지원하기 꺼려하는 사람들을 처벌하려고 하지 않는다. 사랑의 구세주는 저항하거나 모든 사람을 강제로 줄세우려는 사람을 벌하지 않고, 그와 함께 여행길을 갈 것을 믿는 사람들을 초대한다.
모든 사람이 그 길을 갈 준비가 된 것은 아니다. 이 성서정과의 후반부(57-62)는 여러 명의 잠재적 추종자들의 신실성과 신앙의 깊이가 시험을 받게 되는 일련의 만남들로 구성되어 있다. 표면적으로 보기에 각각의 응답은 합리적이고 적절한 것처럼 보인다. 누가복음 9:51의 컨텍스트에서 이 만남들을 볼 때, 예수를 따르는 것이 많은 우선순위 가운데 유일한 선택이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사람들은 예수를 따르겠다는 열망보다 앞자리에 무언가를 놓는다.
첫 번째 시나리오(57-58)는 열광적인 팬이 “당신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 가겠습니다”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불합리한 선언은 아니지만, 아마 이것이 이따금 우리의 기도에 숨어들어 왔을 것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따르는 것이 그들의 신앙에 기본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어려운 질문은, 그것이 무슨 뜻이냐는 것이다. 단순히 듣고 배우는 것인가? 아니면 더 깊은 헌신을 해야 하는 것인가?
예수는 단순하게 “같이 가자”고 대답하시지 않고,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대답하심으로 따라오는 것을 차단하신다. 예수의 길을 따르기로 선택한 사람들은 물질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집이라고 부를 곳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첫 번째 경우, 우리가 우리 집 문 밖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일할 때, 특별히 제한된 영역에서만 일하게 되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두 번째 경우, 기독교인의 가치와 봉사는 언제나 정치적으로 바르거나 문화적으로 인기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수의 길을 따르는 것은 신자로 하여금 우리의 결정을 방해할 수 없는 세속적인 세상에 있게 할 수 있다. 우리의 길은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과 우리가 설정하는 순위와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 의해 확인된다. 누가복음 12:34을 보라.
이러한 초점은 두 번째 시나리오에서 강조된다(59-60절). 여기서 예수는 “나를 따라 오너라”고 단순하게 초대한다. 잠재적인 추종자는 가서 자기 아버지를 먼저 장례하게 해달라고 응답한다. 이것은 누가복음 5:11에서 제자들의 응답과 비교된다. 자유롭게 예수를 따라가기 전에 돌봐야 할 중요한 것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 세 번째 시나리오(61-62)에서 우선순위는 가족의 필요성과 의무라는 형태를 취한다. 합리적인 요청으로 보이는 것이 사실은 우리의 소명을 따라 살아가는 것에 대한 또 다른 장애일 수 있다. 이러한 변명은 다른 방향으로 가려고 요청하는 것이다. 예수가 제안한 것은 신앙의 여정을 따라올 기회이다.
기독교인의 여정은 가족과 직장에 대한 책임을 거부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신앙의 빛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더 깊은 헌신이라는 렌즈를 통해 그것들을 보도록 우리를 격려한다.
설교적 관점
-C.S.Lewis의 사랑받는 작품 “The Lion, the Witch, and the Wardrobe”(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 7개로 구성된 나니아 연대기의 첫 작품)의 반전포인트에서 몇몇 중요한 등장인물들은 마녀에 의해 점령당한 나니아의 진정한 통치자이며 위대한 사자인 아슬란이(Aslan) 악한 마녀와 싸우기 위해 다시 나타났다는 소식을 가지고 서로서로를 격려한다. 그들이 서로를 격려하는 말은 명료하면서도 강력하다: “아슬란이 오고 있다”. 오늘 누가복음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 그것은 예수 사역의 후반부를 시작하고 있으며 예루살렘으로의 여행과 십자가를 알려주고 있다.
예수의 얼굴은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는 지 모르나 그는 직선경로를 택하지 않는다. 사실 누가가 수집하여 다루고 있는 이야기와 사건들만을 가지고는 예수께서 택한 경로를 구분해내기란 쉽지 않다. 누가의 관심은 이야기나 지리적인 것에 일차적 관심이 없고 신학적인 데 있다. 즉 누가가 보여주는 이야기들은 예수의 특성을 드러내고 계속해서 그를 보낸 아버지와 예수가 성취하도록 부여받은 선교에 관한 것이다.
-오늘의 성서정과에서 볼 수 있는 2개의 장면은 예수의 소명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두 장면 모두 예수가 변화산상에서 그가 신뢰하는 제자들 앞에서 모세와 엘리야를 만난 사건 바로 직후에 일어난다. 첫 번째 장면은 예수가 사마리아 마을에서 거부당하고 야곱와 요한이 화를 내며 하늘로부터 불을 내려 이 마을을 불사르자고 요청한 것이다. 우리 눈에는 이 두 제자가 지나치게 열광적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나 우리는 엘리야가 자신의 적들을 태우려 두 번이나 불을 내린 것을 주목해야 한다. 아마도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를 이러한 예언자의 반열에서 이해했던 것 같다.예수는 거부한다. 이보다 앞에있는 구절에서 이미 그는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어디를 가든 제공되는 환대를 받으라고 하였고 그것이 거절되면 그 발의 먼지를 털어버리고 이동하라고 하였다. 복수나 폭력은 예수가 가진 비전은 아니다. -궁금하게도 누가는 왜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았는가를 보여주지 않는다. 하지만 누가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거부를 예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는 길이라는 점과 연결시킨다. 중요한 것은 사마리아인들의 거부가 아니고 예수가 지닌 단호한 목표이다.
이 점은 그 다음 장면과 연결된다. 언뜻보기에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의 요청이 예수로부터 그런 비난을 받았는지 설명하기가 어렵다. 가족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부모님의 장례를 치르는 일은 지나친 요청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엘리사에게 예언자가 되기 전 가족들과의 인사를 허락했던 엘리야와 비교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포인트는 예수가 엘리야보다 더 요구를 한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예수의 길이 보다 중요하다는데 있다. 예수는 자신의 목적과 사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고 또 그러지도 않을 것이다. 예수는 예루살렘으로의 여정과 거기서 그를 기다리는 십자가는 타협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인식하고 있다. 폭력을 거부하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고통을 떠안으며 하나님의 비전과 선교에 충실하기 위해 안락한 삶, 특권을 포기하는 일은 적어도 당시 문화와는 어긋나는 일이다. 아마도 이러한 일들은 보존, 안전 그리고 안락한 삶을 누리려는 인간의 자연적 본능에도 역행하는 일일 것이다. 예수와 그의 선교를 받아드리는 사람들은 이것이 그들에게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 분명히 알아야만 한다.
-여기에서 아마도 설교자가 직면하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이 본문이 제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냐하는 점이다. 만일 제자들이 누가가 보기에 보다 더 낫게 행동했다면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제자들에게만 해당].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께서 자신의 운명을 여러차례 이야기해지만 알아듣지 못한다. 십자가를 말해주었을 때에도 그들은 누가 크냐에 관해 다툰다. 그들이 필요한 시간이 제자들은 잠을 잔다. 그들은 예수를 배반하고 버리고 부활에 관해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고 여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나는 누가복음의 총제적인 이야기 방향이 다른 면을 강조한다고 보는데 그것은 세상을 위해 예수께서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embrace)이다. 이 본문이 말하려는 것은 제자됨의 길도 아니고 십자가를 앞둔 예수의 영웅적인 용기도 아니다. 오히려 온 인류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심원한 사랑에서 비롯된 단호한 목적이다. 누가복음 서두에서 누가는 예수의 족보를 다윗이나 아브라함이 아닌 온 인류와 연관되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아담까지 소급해 올라간다. 사도행전의 마지막에 누가는 복음의 궤적을 예루살렘으로부터 로마 그리고 온 세상까지 확대시켰다. 누가에 따르면 예수의 관심은 온 세상을 포함하고 있다 (universal). 이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용서와 그 뿌리가 잇닿아 있다. 결국 십자가에서 예수가 자신을 못박은 자들을 용서하는 이야기는 오직 누가에게만 나타난다.
-모든 것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강조는 본문에서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폭력을 거부하는데서 절정에 이른다. 그것은 단순히 예수의 비전에 반대되는 것일뿐만 아니라 그의 정체성과 선교와도 부합되지 않는다. 이처럼 예수와 그의 십자가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철저한 사랑을 입은 사람들은 당연히 이 사랑이 사랑에 관한 인간의 모든 개념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만 할 것이다. 우정, 가족 간의 결속, 경건, 제자도등[인간의 사랑]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희생적 사랑이라는 눈으로 볼 때 다르게 보인다. 이 사랑을 강조하는 설교자는 이 설교가 불러일으키는 반응에 놀라워 할 수도 있다. 그 반응이 어떻든 간에 이 설교의 길을 가는 설교자는 [인간의 사랑과는 다른 하나님의 사랑을 설교하는] 선한 그룹에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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