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자녀관계에서 좋은 부모가 되는 조건 중의 하나는 자녀들의 심리적(정신적) 기능인 인지, 정서, 동기가 서로 조화롭게 기능하도록 돕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모의 ‘자아정체감’을 점검해봄으로써 부모 자신의 성숙은 물론 자녀들에게 건강하고 좋은 모델을 보여 주는 것이다, 자아정체감은 나는 누구인가? 라는 자기의 주체를 인식하는 것으로, 건전한 자아정체감의 형성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개인에게 주어지는 많은 역할들이 그 개인 내에서 통합될 때 이루어진다.
에릭슨은 자아정체감의 형성을 청소년기의 가장 중요한 발달 과업으로 꼽고 있다. 이러한 역할들의 통합이 순조롭지 못하거나 또는 구분되지 못할 때 ‘역할 혼란’이 일어나 방황하게 되고 일탈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자아정체성은 청소년기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전 생애에 걸쳐 모든 개인을 따라 다니는 평생의 주제라고 생각된다.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한 자아정체감 점검하기의 첫 번째 작업은 현재 부모들이 속해 있는 발달시기의 특징을 이해하는 것이다. 청소년 자녀들의 부모의 나이는 대체로 30대 후반에서 4,50대가 될 것이다. 에릭슨의 주장에 따르면, 이 시기는 인생의 여러 측면에서 안정되고 성숙한 시기로 자신과 자기세대의 이익과 번영뿐만 아니라 자기 자손들의 세대 및 역사적 미래를 위해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드는데 헌신하는, ‘생산적인 활동의 시기’라고 한다. 즉 자기 자신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한편 자녀들의 세대를 위해 자연보호운동이나 근검절약, 문화적 유물 등의 보존 등을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다.
반면, 그렇지 못한 한 극단에는 오로지 자기 자신의 이익과 편안, 자기당대의 쾌락만을 추구하며 ‘자아탐닉’에 빠지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자녀교육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자녀교육이나 복지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자아탐닉에 빠져 사는 부모가 있다면 그는 훗날 뼈아픈 후회를 하게 될 것이다. 한편, 지나치게 자녀교육에 몰두해서 자칫 자기 자신의 발전을 소홀히 한다면 그것 또한 건전한 부모-자녀관계를 해치고 끊임없는 갈등을 유발할 뿐만 아니라 중년기(대략 40-65세)의 어느 시기에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았는가?’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등 자기정체감의 극심한 동요를 경험할 수도 있다.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소위 명문대를 수석 입학, 수석 졸업한 40대의 교사가 20여 년간 모교의 우상으로 떠받들리다가 어느 날 문득 ‘진정한 나의 삶은 무엇이었나?’ 라는 질문에 부딪치면서 극도의 혼란에 빠져 자신의 아이를 교살한 일로 정신과에 입원한 예가 있었다.
다음은 중년기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주제들이다. 중년기에 이르렀거나 곧 중년기를 맞게 되는 부모들은 자신과 자녀들에게 미칠 영향을 고려하여 한번쯤 생각해 보기 바란다.
첫째, 중년기를 힘이 절정에 달하고 개인적 성취, 사회적 우호관계, 시민자격, 신체적 원숙함이 나타나는 ‘인생의 절정기’로 볼 것인가? 아니면 자녀들이 성장하여 부모 곁을 떠난 ‘텅 빈 새둥우리’ 시기로 볼 것인가?
둘째, 환상을 버리고 남은 생애를 현실적으로 평가하거나 때로는 일찍 방향전환을 가능케 하기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 자산목록을 조사할 것인가? 아니면 폐쇄적인 운명론에 빠져 있을 것인가?
셋째, 자식으로서의 성숙을 이루어 부모가 나이 들고 전능감을 상실했다는 것을 인식하고 필요한 원조를 제공하며, 부모와의 개인적 갈등을 해결하고 부모의 죽음에 대해 건강한 슬픔을 경험하는, 자기위선에서 벗어나 마음을 열어놓을 것인가? 아니면 계속위선과 자기기만에 빠져 있을 것인가?
넷째, 인생을 절반쯤 살았다고 생각될 때 나머지 절반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성장한다는 것은 죽는 것이라는 인식에서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나이를 거꾸로 센다는 것의 의미를 앎으로써 건설적인 변화의 계기를 맞을 것인가? 아니면 청년이나 자손들을 선망하면서 회춘(?)이나 젊음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찾아다닐 것인가?
다섯째, 자아신념이나 깊은 현실적 확신을 갖는 가치체계를 발전시키는데 관심을 가질 것인가? 아니면 과격함과 극단론에 빠져 있을 것인가?
여섯째, 지금까지 발전시켜온 일과 관계 중에서 겉으로 보기에 중요하지 않은 사소한 일이나 관계를 중단하고 보다 중심적이고 특히 긴요한 일과 관계에 한정시키는 단순화를 찾을 것인가? 아니면 완고함과 계속적인 확산을 추구할 것인가?
마지막으로, 주제들이 평이하게 이해되는 의사소통의 간소화를 추구하고 어디쯤에서 어떤 사람들과의 관계를 그만두고 어떤 사람과 어떤 종류의 연속성을 유지할 것인가를 생각해 볼 것인가? 아니면 반복성과 권태, 조급함을 가질 것인가?
공자는 40대를 자신의 신념이 확고하여 어떤 부귀나 권세에 미혹됨이 없는 불혹(不惑)의 나이라고 했다. 이 나이쯤에서 일과 사랑, 과부족이 없는 삶의 태도를 갖는다는 것은 부모 자신이 성숙할 뿐만 아니라 자녀들로부터도 존경받는 부모가 되어 있을 것이다.
자아정체성 점검하기의 두 번째 작업은 자녀들이 성장함에 따라 부모도 계속 성장하고 변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모-자녀관계의 변화를 전 생애적 발달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부모를 정점으로 하는 초기의 수직관계에서 점차 수평관계(역 시계 방향)로 이동해 가며 자녀들이 책임 있는 성인이 된 후에는 자녀를 정점으로 하는 역 수직관계가 된다. 부모들은 이 관계의 변화를 인정하고 유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초기의 ‘수직관계’에서는 자녀는 전적으로 부모의 관심과 보호 하에 놓여지며 자녀들은 전적으로 부모에게 의존한다. 부모의 관심이 지나쳐서 과도하고 병적으로 의존하거나 간섭으로 받아들여지는 정도가 아니라면 그러한 관심과 도움은 반드시, 그리고 충분히 제공되어야 한다. 관심과 도움이 필요한 이 시기에 부모가 자신에게 무관심하다고 생각하는 자녀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일과 관계에서 부적응을 겪을 수 있다. 적절하게 충족되지 못한 관심과 사랑의 결핍상태는 자칫 심리적 위축감, 대인관계 회피와 소외감, 자존감과 자신감의 저하, 불안, 우울 등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부모의 도움이 절대적인 초기의 수직관계는 점차 ‘수평관계’로 이동 또는 변화해 간다. 부모-자녀관계가 수평관계가 된다는 것은 자녀들의 몸과 마음이 자라고 생각이 어른스럽고 책임 있는 행동을 하며 부모의 든든한 의논 상대자로 변화해 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많은 부모들은 자녀들에게서 ‘늘 어리게만 보았던 우리 아이가 어느새 저렇게 자랐나 !’ 하고 대견해 한 경험들이 있을 것이다. 부모는 이러한 대견함을 자녀들에게 표현하고 그들의 의견, 아니 그들을 신뢰하고 존중하는 태도를 보여 주어야 한다.
자녀들은 자신이 권위적 인물의 일차적 대상인 부모로부터 존중받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좀 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조절하고 책임 있는 행동을 하려 할 것이다. 이러한 가정의 분위기 속에서 자란 자녀들은 훗날 사회생활이나 대인관계에서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 행동하고 당당하고 합리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상대의 의견을 존중해 주게 될 것이다.
부모-자녀관계의 마지막 단계인 ‘역 수직관계’는 자녀들이 더 성장해서 학업을 마치고 결혼을 하고 부모가 되고 건전한 시민으로 살아가면서 부모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자신의 오늘을 있게 한 부모의 노고에 감사하고 부모가 나이 들어감을 슬퍼하며 편안한 노후를 보내도록 돌보아 주는 단계이다. 이 단계에 성공적으로 도달한 지각 있는 자녀들이라면 부모가 어떤 상황과 조건하에서 무엇을 할 때 편안하고 행복해 할 것인가를 생각할 것이다. 이 때쯤 부모들은 그간 누려왔던 주연의 자리에서 조연으로 역할을 바꾸어야 한다.
부모-자녀관계가 성공적이기를 바라는 부모의 할 일이란 자녀들이 건전하게 위의 세 단계들에 차례로 도달하도록 모범을 보이고 도와주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녀들의 수직-수평-역 수직관계로의 이동 또는 변화의 의미를 이해함과 동시에 부모 자신도 방향은 다르지만 동일한 단계나 과정으로 변화해 가고 있고 또 변화해 가야 함을 이해해야 한다. 이렇게 될 때 부모는 자신과 자녀들을 돕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좀 더 분명해 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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