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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셀 호네트, 『물화』, 강병호 옮김, 나남출판(2006)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부정은 ‘우리는 인간이다!’라는 선험적 전제로부터 따라 나온다. 하지만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라는 명제는 ‘기계는 인간이 아니다.’라는 명제에 대해 이율배반적이다. 즉 기계에 대한 인간의 부정으로부터 인간에 대한 기계의 부정은 따라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기계(적인 것)에 대해 인간이 하나의 관점(념)을 가질 수 있다는 건, 이미, 기계 또는 기계화가 인간의 내, 외적 상관물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이 책에서 다루는 기계화, 내지는 물화에 관한 문제는-내가 보기에-두 가지의 온건한 관점으로 접근하는 것이 수월하다는 생각이 든다. 첫째는 주체의 문제로서 ‘나는 내가 인간이라는 걸 알아. 하지만 살기 위해선 나 자신을 물화할 수밖에 없어.’ 라는 부정. 둘째는 타자의 문제로서 ‘나는 네가 인간이라는 걸 알아. 하지만 살기 위해선 너 자신을 물화할 수밖에 없어.’ 라는 부정의 형식이다. 이 두개의 형식이 서로 교차하는 곳에서, ‘나는 물론 너도 인간이다.’라는 목소리. 즉 선행하는 인정(認定)에 대한 가능성의 반향을 들을 수 있다. 하지만 사소한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책의 저자, 악셀 호네트는 물화 비판을 앞에 두고 루카치의 ‘공감하는 실천’, 하이데거의 ‘마음씀’, 듀이의 ‘실천적 관여’ 등등의 친화성에 기대거나 그것의 한계를 정위하면서, 자신의 ‘인정’이론으로 대면하고자 한다. 루카치, 하이데거, 듀이의 존재론적 도식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게 해준다. 물화의 문제는 관점의 이동이나 변화, 관점의 재인적인 특성을 통해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다는 것이다. 주체-객체의 분열적인 도식(인정하는 자 - 인정되는 자)은 이미 인간에게 있어 물화의 통합에 선행하며 그것에 저항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화의 진행은 앞서 말한바, 인간이 기계화에 연루되어 있으면서도 인간은 기계가 아니라는 것에 대한 망각으로부터 귀결된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 문제의 해답은 이미 문제에 내속적이자, 구성적인 것이어서, 우리가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문제를 다른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것 같다. 가령, 호네트는 이러한 관점의 이동을 듀이의 술사화(predication)를 통해서 예화하고자 한다; <듀이는 자신의 논지를 다시 한번 술사화된 “모든 사람은 죽기 마련이다”(Man is mortal)란 진술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우리가 이것을 본래 형태, 즉 자동사를 가진 문장 “사람은 죽는다”(men die)의 형태로 바꿔놓는 그 순간 이 진술은 비로소 단순히 속성을 부여하는 암시적 성격을 상실한다. 이 자동사 문장은 그러한 언어적 추상화 과정의 출발점에 있던 “인간의 운명”에 대한 “마음씀”을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다.(강조-인용자, 47쪽)>
하지만 이건 너무 손쉬운 해결이 아닐까? 먼저, 내가 위에서 제기한 두 개의 물신적 부인이라는 형식(~알아, 하지만…)과 물화의 사태에 대한 호네트의 듀이적 전망은 ‘본래 형태’를 ‘바꿔’ 놓는 주체가 이미 분열적이라는 사실과 ‘인정’이 근본적으로 주체에 의한 상호성에 기댄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 ‘나는 내가 인간이라고 인정하는 것’과 ‘나는 네가 인간이라고 인정’하는 것의 양태는 이미 ‘나’로부터 따라 나오며, 여기서 가능한 ‘인정’은 ‘나/너에 대한 나/너의 인정’과 ‘너-나에 대한 너-나의 인정’으로 대립된다. 이 사소한 형식(너와 나의 선행성)적 논의가 최소화의 범주적 오류를 감당할 수 있다면, 주체의 정위 가능한 인정의 양식은 내가 너를 인정하기 때문에 너도 나를 인정해야 한다는 ‘조건적’ 당위성이거나 그 반대이다. 따라서 ‘물화’와 ‘인정’의 대립은 동전의 양면이다. 이미 타자에 대한 주체/객체의 인정은 대상화의 과정을 통과하며, 이 대상화로부터 물화와 인정은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어보는 것이 다음 순서일 것이다. 과연 인정은 물화에 선행하는가? 아님, 물화 이후에 그것에 대한 비판을 근거 짓기 위한 인정의 재인적 특성이야말로 물화를 ‘무화’시키는 사후적 요소로 재발견되어야 할 것인가?
「인정의 우선성」이라는 곳에서 호네트는 인간의 발생적 증명에 접근하면서, 내가 제기한 물음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2인칭 관점에 자신을 세우는 것은 인정을 일종의 선금으로 지불할 것으로 요구하는데, 이 인정은 인지적 혹은 인식론적 개념들로는 온전히 파악될 수 없다. 그것은 자의적이지 않은 열림(Offnung), 헌신 그리고 사랑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54쪽)> 먼저 2인칭의 관점의 불가능성에 주목해보자. 2인칭의 관점으로 자신을 세운다 함은 주체가 내면의 관점을 이동시킨다는 것을 가리킨다. 때문에 ‘이동’이 가능하기 위해선 먼저, 그 이동을 감행하는 ‘나’라는 주체가 나에 대한 확신을 그 기반으로 가져야 할 것이다. 이것은 2인칭은 필경 1인칭의 관점의 얼룩으로 먼저 등장한다는 것을 말한다. 나아가 자의적이지 않은 열림이 가능하기 위해선, ‘나’라는 주체가 그러한 열림이 가능한 일종의 공백으로 등장하거나, 구성적인 결여로 인해 구멍이 나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질문을 이렇게 되돌려보자. 상호적인 ‘열림’에 있어 그 기반을 근거 짓는 ‘인정’이란 대칭적인 상호 주체들이 갖는 관계의 네트워크가 아니라, 주체가 감당할 수 없는 속성들의 비대칭적인 관계의 폭발을 무대화하는, 어떤 텅 빈 내용이 가지는 폭력적인 형식을 가리키지 않는가?
호네트의 논의는 그가 그렇게 의도하진 않은 것 같지만, ‘인정의 우선성’이라는 테제가 물화를 무화시키는 한에서, 언제나 재인, 재귀적인 특성을 통해 사후적으로 처방되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게 된다. 그렇다면, 어떤 ‘물화’에 대한 어떤 ‘인정’인가? 인정을 통한 물화의 예비적 처방은 <사르트르에 따르면 이러한 비대칭성은 원칙적으로 주체의 상대방에 대한 관계를, 그 상대방이 자기 자신의 상태에 대해 갖는다고 생각되는 바로 그 관계를 본으로 삼아 생각할 경우에만 극복될 수 있으며(58쪽)>, 타자에 대한 공감과 감응의 선결 조건은 <다른 주체의 감정상태에 대한 모든 가능한 인식에 앞서 우선 어떤 자세가 선행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내가 그의 감정세계에 마치 실존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처럼 느끼는 자세(59쪽)>이다. 따라서 물화는 ‘갖는다고 생각되는’ 것과 ‘있는 것처럼 느끼는’ 어떤 자세의 결여로 인해 발생한다. 하지만, 이러한 갈피를 잡지 못하는 어떤 생각과 어떤 느낌의 분열이 각 주체들의 상호인정보다 선행하는 것이라면, 어떻게 될 것인가? 만약 ‘인정의 우선성’에 ‘분열이 우선성’을 가진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역설적으로 물화를 치료하는 인정에 뒤이어 맞불을 놓은 것이 주체의 분열이고, 이것이 다시 물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면… 다시 한번 더 비틀어 진정 서로 인정해야 할 궁극적인 테제가 주체의 불열 그 자체라면…
때문에 호네트가 「물화 : 인정망각」에서 이렇게 묻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사회적 실천의 전제를 이루는 인정이, 이러한 실천의 실행 중에 뒤늦게 다시 시야에서 사라진다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생각될 수 있는가?(70쪽)>, <명시적으로 지도를 받아서가 아니라 실천적 연습을 통해 배운 것은 그 후에 다시 잊어버리게 되지 않는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렇다면 발생적으로뿐만 아니라 범주적으로도 선행하는 인정이 우리의 일상적 인식활동에서 다시 망각되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가?(70쪽)> 이 인용에서 등장하는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그리고 ‘연습’을 통해 배운 것을 써먹을 바로 그 ‘사회’란 대체 어떤 사회이고 더 이상 ‘일상’과 ‘사회’의 경계가 혼미/희미해져가는 바로 지금 ‘여기’가 어떤 곳인지에 관해 호네트는 깊이 파고들지 않는다. 역설적으로 가능한 것은 호네트가 『역사와 계급의식』의 루카치를 참조/비평하면서 넘어서고자 했던 그 장소로 논의를 되돌려 구체화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그-루카치(인용자)-는, 우리가 보아온 것처럼, “물건” 혹은 “물건 같은 것”이란 개념을. 한 주체가 그의 환경세계에서 혹은 자기 자신의 인격에서 경제적으로 가치증식이 가능한 요소로 지각하는 모든 현상들에 대해 매우 태만하게 사용하였다. 그에 따르자면 대상이든, 다른 인격체든 혹은 자신의 능력이나 감정이든 상관없이, 그것들은 경제적 거래에서 사용가능성이란 관점 아래에서 고려되자마자 물건 같은 객체로 체험된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전략은 “물화”가 “제 2의 자연”이라는 생각을 정당화하기에는 당연히 충분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제 2의 자연”에 대해 말할 때면 우리는 단순히 경제적 영역만이 아니라 사회적 행위의 모든 영역과 차원을 염두에 두기 때문이다(27-28쪽)> 과거 ‘실천적 연습’으로서 ‘정치’와 -도 빼고-‘경제’를 믹스해서 배웠던 내 기억을 상기하자면, 오늘날-어디선가 지젝이 말한바,-자본의 외부가 있다고 말하는 건, 지적(知的)으로 올바른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이를테면, 호네트는 구체적인 사회에 관해서는 거의 시비를 걸지 않는데, 어째서 인정이 ‘망각’될 수 있는가? 라는 진단을 앞에 두고 그는 인정에 대한 망각이 주체의 ‘주의력 약화’이거나, 인정이라는 ‘의식으로부터 물러남’ 같은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그에게 망각은 ‘부정’이나 ‘방어’ 같은 주체의 또 다른 개념으로 대체/기각되어야 했다.
주체의 자기인정을 통한 친숙함에 길들여짐, 이것은 구성주의에 맞서는 호네트의 표현주의라 할 수 있는데, 다음과 같은 주장은 정말이지, 따분해 보인다;―<우리는 사회화과정에서 우리의 욕구와 느낌을, 언어적으로 공유하고 있는 생활세계의 내면적 구성요소로서 지각하도록 배웠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욕구 및 느낌들과 어느 정도 친숙하다. 당연히 우리는 항상 반복해서 우리에게 완전히 낯설고 불투명하게 나타나는 심리상태들에 의해서 놀라기도 한다. 사회화과정에서 그것들을 언어화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적 비친숙성 또는 선행하는 탈상징화와 관계있을 이러한 경우에도(Lorenzer 1970 참조), 우리는 그러한 느낌과 감정에 대해 그것들의 낯설음을 이미 친숙한 것들의 지평을 통해 상쇄함으로써 보다 더 개시하고 좀 더 명확히 표현할 수 있는 자세를 취할 수 있다(85쪽>―아니-다시 읽어보니-놀랍다. 대체 ‘인정’이란 무엇일까? ‘낯설고 불투명’한 것에 대한 놀람이 ‘친숙한 것들(?)’ 의 지평을 통해 ‘상쇄’되어 표현되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이 인용문을 보더라도 호네트의 인정이론은 이질적인 타자를 인정 할만한 내/외연을 가지고 있지 않다. 낯선 타자가 친숙한 것들에 의해 상쇄되는 과정, 나라면 이것을 가리켜 ‘물화’라고 명명하겠다. 그리고 <인간에 대해 순수하게 관찰, 등록 혹은 계산하는 실천이 법적관계로 편입되지 않을 채 사람들의 생활세계적 맥락으로부터 자립화되는 모든 곳에서, 모든 상호주관적 물화의 핵심으로 묘사된 선행하는 인정에 대한 무시가 생겨(97쪽)>나기도 하겠지만, 나라면, ‘순수한 인간’이라는 전제적 망상을 ‘물화’라고 명명하겠다. 나라면, ‘법적 관계에 등록하고 계산하는 실천’이라는 균질공간의 미장센 역시 ‘물화’라고 부르련다. 하물며 법적관계로 편입되지 못한 불법 이민자나 미혼모, 사상범들의 고혈을 짜내는 소외 형식이야말로 ‘물화’에 다름 아니라고 말하련다.
첫댓글 잘읽었습니다! 좀더 자세히 읽어보려고 방금 프린트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