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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발심 때의 신심으로 돌아가자(2009년 8월 정기법회)
여러분들은 수행의 실제의 법문에서 다섯 가지 힘(indriya), 즉 ‘신심・정진・알아차림・마음집중・지혜’ 을 지녀야 수행이 진전된다는 내용을 익히 알고있습니다. 이 다섯 가지 힘의 요인들 중에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신심(믿음)입니다. 신심(믿음)이란 수행 안에서는 붇다에 대한 믿음・담마에 대한 믿음・상가에 대한 믿음・원인과 결과의 법칙에 대한 믿음・과보에 대한 믿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종교에서 일반적으로 ‘신심’이라고 하면 ‘신앙의 대상에 대한 신념’을 의미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일반인들은 신앙의 대상을 믿습니다. 왜 그 대상을 믿을까요? 믿음의 근원은 두려움 입니다. 세상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신앙의 대상을 믿습니다. 세상살이의 두려움 때문에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고, 성모 마리아를 믿고, 우주의 신을 믿고, 부처님을 믿고, 관세음보살을 ale습니다.
그런데 두려움이 발생하는 근원은,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 존재의 사실에 대하여 알지 못함, 즉 무지 입니다. 자기 자신과 존재의 사실에 대해 알지 못해 어리석다 보니 세상살이와 존재들이 온통 불문명하고, 불투명하게 느껴집니다. 무엇 하나 온전한 것이 없다고 느껴집니다. 그러다 보니 두렵고 무섭습니다. 사는 것과 관련된 일에 대해서 두렵고, 미래에 대해서도 두렵고, 죽음에 대해서도 두렵습니다.
그러다 보니 무언가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를 안락하게 해 줄 의지처를 찾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로 그 때 사람들은 자신의 알음알이나 혹은 누군가의 권유에 의해 어떤 ‘절대자’ 혹은 인격체적인 ‘신’에 관심을 두고 그것만이 온전할 것이라 상정해 놓고, 이제부터 그것을 믿기로 작정합니다. 그럼으로써 이 세상살이의 두려움에서 의지할 곳을 얻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믿음’의 실체입니다.
신앙생활이 진행됨에 따라 타자의 설득이나 자신의 관념에 의해 점점 이러한 ‘믿음’은 ‘신념’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신념을 내 안에 만들어 놓으니까 경험의 내용도 그 전과 다르게 됩니다. 경험은 믿는 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단지 자기의 관념적 해석에 바탕에 둔 경험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계기에 의해 자신 안에 있는 내면의 문제 사실을 보았을 때 두려움이 그대로 존재하고 있으면 자신의 믿음의 대상에 대하여 회의합니다.
이로 인하여 믿음은 언제고 바뀔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실에 대한 실천적인 경험에 바탕을 둔 자각에 따른 믿음이 아니라 단순한 바램과 관념에 토대를 둔 선택적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믿을 대상에 대하여 사실에 입각한 지혜적인 확증 없이 그저 두려움 때문에 믿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에 언제든 나의 믿음은 바뀔 수 있습니다.
인격체적인 하느님을 믿다가 하느님이 나의 두려움을 해소시켜 주지 못하거나, 내가 바라는 바를 얻게 해 주지 못하면, 이번에는 믿음의 대상을 신앙적 절대자로서의 부처님으로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그 반대의 현상을 자주 보기도 합니다. 이러한 ‘믿음ㆍ신심’은 온전한 믿음ㆍ신심이 아닙니다.
온전한 ‘믿음ㆍ신심’은 믿음의 대상이 ‘절대자’나 ‘신’ 나아가서는 ‘부처님’이 아닙니다. 온전한 믿음ㆍ신심은 믿음의 대상이 바로 자기 자신인 ‘내’가 되어야 합니다. 신・절대자・부처님 등은 그 존재 사실에 대한 내・외적 경험이 불가능한 대상입니다. 우리가 내・외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인 ‘나’ 밖에 없습니다. 나만이 내 스스로 경험하며, 현존하고 있습니다. 나만이 나 자신에 대하여 그 내면을 인식하여 관계할 수 있고 그래서 경험할 수 있습니다. 경험할 수 있으므로 관념적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이해합니다. 그러므로 현존・실존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이러한 관계의 내용을 아는 것이 믿음ㆍ신심입니다.
현재의 ‘나’는 불완전 합니다. 불완전하므로 자유롭지 못합니다. 불완전함이란 욕망에 집착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욕망에 휘둘리므로 자유롭지 못합니다. 욕망으로 인한 부자유를 분명히 알아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부자유스럽다는 것과 부자유한 원인을 분명하게 알고 있으므로 자유롭게 되고자 하는 서원을 결심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자유롭게 되고자 하는 결심이 ‘믿음ㆍ신심’입니다.
자신의 불완전한 그대로의 실상을 알고 있으므로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이해하여 받아들이므로 그것에 대한 극복을 의지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자기 자신인 ‘나’에 대한 믿음ㆍ신심입니다. 나 자신에 대한 믿음, 나 자신의 근본에 대한 확신과 신뢰 그것이야말로 온전한 믿음의 시작이자 종결입니다.
내 바깥의 어떤 대상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선택’입니다. 수많은 내 바깥의 대상들 가운데 한 가지를 선택하여 믿기로 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것은 온전하지 못하고, 내 스스로 확증해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 안의 두려움과 나약함 그리고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 등 나의 부족함을 어떤 대상에게 의지함으로써 보상받고자 하는 허약한 심리일 뿐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만이 온전합니다. 내가 나를 믿지 못하고 바깥의 대상을 믿는다면 나는 얼마나 공허해지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나의 밑바닥에는 항상 허망함이 깃들어 있지 않겠습니까. 나를 책임질 나의 내면을 세우지 못하고 내 바깥에 의지한다는 것은 얼마나 자신을 노예화 시키는 나약함 입니까.
그것은 나 자신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나 자신의 불완전함을 극복하려는 의도와 의지가 없음으로 인해 일어난 불신의 결과입니다. 극복에 대한 의지가 없어 스스로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에 내 바깥의 대상을 절대화, 신격화, 진리화 시켜 놓고 그것을 믿고 의지하려는 것입니다.
그 바깥 대상은 상정된 허구입니다. 허상의 관념입니다. 강박관념이 가져온 신기루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가짜 믿음ㆍ신심입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와 확신이야말로 온전하고 참된 믿음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 믿음을 가지는 사람은 두렵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의 현재의 모습은 문제로 싸여 있지만, 문제가 있다는 자기 자신의 내면의 실상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언젠가는 해방될 자유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그 어떤 괴로움이나 두려움이 오더라도 그것의 원인은 바깥 대상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다만 자기 내부에 있다는 것을 알고 이해하고 있으므로 그 경계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 앞에 펼쳐지는 그 어떤 괴로움도, 그 어떤 경계도 기꺼이 다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내 앞에 나타나는 그 어떤 존재도 모두가 법계에서 부여한 나름대로의 온전한 목적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 어떤 존재도, 그 어떤 일도 온전히 존중하며 경험하려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내 안을 바라보고 내 내면의 근본에 대한 믿음을 가지면 분열이 없고 혼란이 없습니다. 그것은 선택이 아닌 당위입니다. 자신을 믿는다는 것은 선택이 아닌 확신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을 지닐 수 있는 근원은 ‘감사하는 마음’에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 이치, 법을 알게 된 인연들에 대하여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인해 ‘나’는 오만하지 아니하고 자만하지 아니해서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지난 세월 언젠가에 우리는 불교를 알고 삶을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여기서 ‘불교를 알고’라는 의미는, 삶을 구성하고 있는 존재의,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의 보편적 특성을 안다는 것을 말합니다. 존재의 되어져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아는 것이 곧 이 세상살이의 참을 아는 것이며 그 참은 자기 자신의 대한 사실을 아는 것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적어도 개념적으로 분명히 이해하였더랬습니다. 그리고 그 이해를 위해서는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을 실행하기 위한 삶의 방식으로 이 생을 살아보려고 삶을 다시 시작하였더랬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실천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참으로 위대한 ‘수행’이라는 삶의 방법에 발을 들여다 놓았더랬습니다.
처음 공부할 그 당시에는 참 순수하고 맑은 신심이 있었습니다. 작은 가르침에도 깊이 감동하고,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하여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감사를 느끼고, 부처님 전에 공양 하나 올리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하고, 선원에 가서 스님으로부터 법문을 듣기 위해 하던 일도 대충 접어두고 달려가곤 하였습니다. 또 수행에 동참하기 위해 온갖 정성스런 마음을 다해 선원으로 향하곤 하였습니다.
집에서도 며칠씩 날짜를 정해두고 절을 하고, 새벽예불을 하여 보려고 애도 써보기도 하였고, 하루에 한 번은 좌선수행을 하며 생활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불법에 대한 책도 사서 보고, 법문도 찾아다니며 듣고, 그야말로 공부에 대한 마음이 진지하고 정성스러우며 순수한 열정을 가졌습니다.
그렇게 애쓴 보람이 있어 법에 대해 점차적으로 알게 되고, 자기 자신에 대하여도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 맛보았던 환희심을 여러분들은 기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제법 흘러 공부를 조금씩 진전시키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슬그머니 나태한 마음도 생기게 되고, 어떤 부분은 뭐 이런 것까지 해야 하나 싶기도 하고, 독경하고 절해서 뭐하나 하는 마음도 서서히 들고 일어납니다.
스님의 법문을 들어도 그 법문을 내 잣대로 분별하기도 하고, 붇다와 붇다의 가르침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이며 정성스레 공양하고픈 마음도 슬그머니 사그라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내 안에 붇다와 법이 있는데 꼭 선원에 가서 부처님께 공양 올릴 필요 있나 싶기도 합니다. 그래서 점점 수행의 모든 방편법들에 대해서 타성적으로 시무룩해져버렸습니다.
염불, 절, 독경 같은 것은 다 방편이고 필요 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염불하고 절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나도 처음에는 저랬지’ 하면서 한 수준 아래라고 깔보는 마음도 생깁니다. 위빠싸나 수행을 조금 배워 가지고 오래 앉아 있음을 자랑삼아 이야기 하면서 염불하고 절하는 사람들을 무시하기도 합니다.
수행 안 하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수행하는 사람이니 너희들과는 다르다’ 는 생각이 안에서 슬며시 자리하며 상대를 얕보고 깔보면서 ‘나 잘난’ 마음이 키워지고 있습니다.
또한 근본법에 대해 자꾸 많이 듣다 보니 방편법은 아예 무시하게 되었습니다. 일배가 삼천 배인데 뭐하러 절하느냐, 내 가족에게 정성스럽게 공양하는 것이 곧 붇다께 공양하는 것이다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300배 절하는 것 보다 한 시간 앉아 있는 게 낫다고도 하고, 늘 관하고 살면 되지 구태여 생활을 부수면서 선원에 갈 필요가 있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그렇듯 수행한다는 아상만 자꾸 커지고, 정성스런 마음, 진지한 마음, 맑은 신심이 자꾸 나약해지고, 방편은 저버리고 알음알이로 배운 근본법만 나열하면서 공부 많이 한 사람 행세를 하고, 또 대접 받으려고 한단 말입니다. 이렇게까지 극단적이지는 않더라도 누구나 이와 유사한 마음들이 기어드는 것을 분명히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근본법 운운하려면 어디까지나 근본자리에 계합이 되어 자기 자신의 문제에 대한 참성품 을 확연히 깨친 뒤에나 가능한 얘기입니다. 그 정도의 알음알이로 배우고 나서 법의 중심 부근에 가 있는 줄 안다면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수행 안에서 마음공부 열심히 하면서, 어디까지나 초발심 때의 그 겸손과 하심 그리고 순수한 믿음과 정성스런 공양 기도의 마음을 놓지 않아야 합니다.
옛날 우리 어머니 할머니들은 꽃이며, 떡이며, 쌀, 그도 아니면 무엇이 되었든 양이나 질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담아 얼마나 정성스레 공양 올렸습니까? 중요한 것은 무엇을 올리는가가 아니고 그런 정성스런 마음이 법계를 감동시키고, 그런 정성스런 공양이 복의 근원이 되었으며, 수행할 수 있는 힘으로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요즘 보면 ‘감사’하는 마음이 많이 없어졌습니다. 수행의 본질이 ‘감사’입니다. 이 우주 법계에 감사하고, 붇다께 감사하고, 붇다의 가르침의 내용에 감사하고, 스님께 감사하고, 이와 같이 불법과 수행이라는 삶의 방식으로 자신의 인생을 살게 해준 인연들에 감사하는 것을 접어두고 자유・행복・평온의 부근에 자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이 감사하는 마음이 기도의 본질이고, 수행의 깊은 뿌리가 되고, 불성을 일깨우는 순수한 깨우침이 되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에서 공양 올리려는 마음도 나오고, 온갖 정성을 쏟으려는 마음도 나오고, 시간을 내어 선원에 가서 한 시간이라도 예불하고 좌선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오는 법입니다. 아울러 선원에 공헌하고 헌신하고픈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 감사한 은혜를 갚겠다는 회향과 보시의 마음도 나오며, 나아가 수행에 대한, 깨달음에 대한 큰 정진심이 일어나는 법입니다.
지금 모든 우리 선원 회원님들 각자 각자가 매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우리는 삶의 한 가운데에 감사하는 마음을 바탕에 깔고 ‘믿음’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위빠싸나 수행에 오랫동안 인연을 가진 선원의 한 보살님이 “수행 수행 너무 강조하다 보니까 어느 순간 너무 수행한다는 상에 빠져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공양과 공경의 마음, 정성스런 기도의 마음, 순수한 믿음, 사원을 위하는 마음이 오히려 자꾸 퇴색되어가고 수행한다는 상만 자꾸 늘어났다.”고 하면서 참회해야 하겠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중요한 것을 놓치면 안 됩니다. 수행도 좋고 위빠싸나도 좋고 정진도 좋고 열심히 마음공부 하는 것 다 좋지만 본질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자꾸 알음알이 가지고 근본법을 운운하면서 지극히 순수한 기도의 마음, 공양의 마음, 감사의 마음, 정성스럽게 헌신하고 공헌하는 마음, 공경의 마음을 놓쳐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붇다께 공양 올리는 마음, 스님들께 공양 올리는 마음, 선원에서 절하고 수행하려는 마음, 선원에 헌신하고 공헌하려는 마음, 법을 사랑하며 위하는 마음이 아무리 시간이 흐른다 하더라도 사그라들지 않고 초발심과 똑같이 형식적이지 않으며 정성스럽고 진지한 믿음ㆍ신심으로 행해져야 할 것입니다.
마하보디선원 회원 여러분, 이제부터 초발심 때의 순수한 마음을 회상하며 다시 정진을 시작하십시다. 나를 낮추어 가장 초심자의 자리에서 새롭게 공부합시다. 그 감사의 마음이 이 선원을 다시 신심과 사랑의 분위기로 가득 채우고, 수행하는 마음을 북돋을 것입니다. 그 순수한 초발심의 신심이 자기 자신을 가장 진실되게 성장시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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