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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황영준 원문보기 글쓴이: 물댄동산
이 세상은 어제밤에 꿈과 같은 천막집 그 기쁨은 저마다- 물거품 같고 그래도 청년들에게 말합니다. '어른들이 불렀던 이런 찬송도 있었다. 그 때 세월이 험악했기 때문에 현세 보다 내세에 대한 소망을 붙들고 어려운 십자가를 감당했던 것이다.' 라고. 함께 불러보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순교신앙을 가르칩니다. 전해집니다. 주 목사님의 뒤를 이어 산정현교회를 시무했던 목사님들과 전도사들도 순교했습니다. 아버지가 마산 문창교회를 시무할 때 소학교에서 동방요배를 하지 않았다고 퇴학을 당했습니다. 아버지 따라 평양으로 가서는 숭덕학교 나왔고 다음에는 남강 선생이 설립한 오산학교를 다녔습니다. 교장이 조만식 장로님이었으니 신실한 믿음과 민족정신을 다졌을 것입니다. 일본으로 가서는 루터신학교를 다녔는데 전쟁말기에는 그곳에서도 신사참배를 강요했습니다. 자퇴했고, 일치신학교에 들어갔는데 거기서는 주기철 목사의 아들이라 하여 퇴학당했습니다. 어려움을 많이 겪었습니다. 총회 전에 체포되어 투옥되었습니다. 목사님 노모와 가족은 교회를 나와서 어렵게 생활했습니다. 주영진은 귀국하여 가족의 생계를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힘겹게 감당했습니다. 주 목사님은 고문과 핍박을 견디다 못해 1944년 4월에 숨을 거두고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갔습니다. 한상동 목사님이 산정현교회를 맡으면서 주영진이 전도사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 영진이가 아버지 때문에 그 교회 교역자가 되는 것을 부담스러워 했습니다. 주 전도사는 평양 근교의 장현리교회로 옮겨서 단독 목회를 했습니다. 공산당 정권을 세워지면서 교회가 다시 핍박을 받았습니다. 순교신앙을 지켜왔던 교회들은 무신론 공산주의를 반대하고, 교회를 간섭하는 일에도 단호하게 저항했습니다.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선출하는 1946년 선거일이 주일이었는데 교회들이 선거에 불참했습니다. 북한 5도연합노회는 '성수주일'을 결의했던 것입니다. 공산당은 어용단체인 '기독교도연맹'을 조직했지만 많은 교역자들이 거부했습니다. 예배당에 스탈린과 김일성 사진을 걸도록 지시했지만 주영진 전도사는 이러한 모든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는 집을 나서면서 아내에게 "여보, 내 잠시 다녀오리다." 했지만 그 말이 마지막 인사였습니다. 1919년생이니 32세 되던 해였습니다. 끌려간 교인들은 총살을 당하거나 강제노역을 하다가 사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정일선 목사님은 6·25 다음 날 체포되어 옥에 갇혔는데 9·28 수복 후에 공산군의 방화로 별세했습니다. 그가 '하나님 아버지, 부족한 종을 순교자 주기철 목사와 김철훈 목사가 섬긴 교회에서 일하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들의 뒤를 잇는 제물로 받아주시니 더욱 감사합니다.' 하고 숨을 거두었다고 전해집니다. 6·25 며칠 전에 끌려가 생매장을 당했습니다. 유계준 장로님은 주기철 목사님이 감옥에 계실 때 가족을 정성껏 돌보았던 일로 널리 전해졌습니다. 장로님은 해방 후에 아내와 자녀들을 월남시키고 자신을 교회를 지켰는데, 역시 6·25 전에 체포되어 순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 순교의 피 위에 세워진 한국교회는 부흥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십자가 없는 면류관은 없습니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을 그런 신자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 하셨던 말씀을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기복주의 신앙에서 산 제물 되는 삶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