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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백제 토론방 백제왕기(우태, 소서노, 주몽, 비류왕의 기사)
정성일 추천 0 조회 970 09.07.02 20:12 댓글 15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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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9.07.02 20:45

    첫댓글 비류와 온조의 나이는 그 주변인물들을 통해서 추론할 수 있으며 을음의 모친이 을씨라는 것도 추론 가능하며 추모왕 남하시기가 기원전 40년으로 나온 것도 고자 묘지명과 비교했을 때 충분히 개연성 있다고 생각합니다. 연타발의 역할이 삼국사기 보다 축소되었다는 점과 소서노가 셋째 딸이라는 것 그리고 왕실 사람들이 거론되고 거기에 복잡한 이해관계가 거론된 것만 제외한다면 전체적으로 삼국사기와 대동소이한 듯 합니다. 만일 저 기록이 진짜 근초고왕대의 백제인들이 쓴 것이라면 朱蒙이라는 폄하성 있는 표현은 북위가 아니라 백제가 최초가 될 듯 싶습니다.

  • 작성자 09.07.03 13:51

    묘지명의 내용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묘지명이 출토된 장소가 아닐까 합니다. 출토지에 대한 정보를 혹시 아시는지? 제가 알기로는 도굴로 발굴된 것이라 알 수 없다고들 하는데...

  • 09.07.03 14:04

    고자 묘지명은 낙양 근처에서 출토되었다고 하는데, 출토지가 고자 집안의 원 거주지도 아닌데, 왜 중요한지 모르겠군요.^^;

  • 작성자 09.07.03 14:20

    다른 묘지명과 착각 했습니다. 모두루 묘지명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모두루 묘지명은 집안이라고 나오는 군요.

  • 09.07.03 14:26

    모두루는 광개토태왕 때의 신하로 평양성 천도 이전인 국내성 지역에 살았으므로 집안에 그의 묘지명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 작성자 09.07.03 16:18

    모두루 묘지는 고구려 장수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저의 생각과는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많은 부분이 보이지 않고, 한자라는 것은 중요한 부분은 한 글자만 빠져도 엉뚱한 해석이 가능하고 혹은 띄어쓰기에 따라 다른 해석도 가능합니다. 저는 백두산의 서쪽인 집안 인근을 남옥저로 보고 있고, 백제의 영토로 봅니다. 그래서 혼란도 많고 생각이 정리되지 않습니다.

  • 작성자 09.07.03 16:20

    49~54행은 광개토왕의 죽음에 대한 모두루의 감회를 서술한 부분으로 여겨진다. 즉 “호천(昊天)이 어여삐여기지 않아 (광개토왕이 승하함에) 노객[모두루]은 원지(遠地)에 있었으나 그 애절함이 마치 해와 달이 빛을 잃은 듯하여 ... ” 이란 뜻의 표현이 있었던 것 같다. - 모두루는 임지에서 묻혔는지 아니면 고향으로 돌아와 묻혔는지, 생각을 많이 하게 합니다.

  • 09.07.03 16:34

    광개토태왕비와 모두루묘지명 등 고구려 관련 유적, 유물들과 전설들이 현 집안에 있는 한 집안을 국내성으로 비정하는 것은 부정하기 힘들다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모두루의 직책이 북부여수사로 그의 임지인 북부여는 송화강 일대로 광개토태왕이 죽은 장소인 국내성은 북부여쪽에 있었던 모두루에 입장에서 보면 당연히 遠地였을 것입니다. 그의 묘지명이 국내성쪽에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고향에 묻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작성자 09.07.03 19:14

    북부여의 영토가 송화강 일대였다는 것과 같이 저도 송화강 일대를 북부여의 영토로, 북부여 해모수가 나라를 세운 곳이 태백산(하얼빈의 남쪽 평정산) 일대로 봅니다. 고구려 추모가 졸본에 나라를 세우고 송양의 비류국을 정벌하고 옛 땅을 되찾았다 하여, 송양을 다물후로 봉합니다. 송양의 비류국에 태백산이 있고 이 부근에 유리왕의 국내성이 있다고 봅니다. 이 점이 다른 점인 듯 합니다. 통설은 존중하지만 계속 의심하면서 모두루 묘지명도 살펴보겠습니다.

  • 09.07.03 20:56

    우선 해모수가 나라를 세운 곳이 태백산 일대라는 기록과 비류국에 태백산이 있었다는 기록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동명왕편을 볼 때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태백산의 위치가 비류국, 국내성의 위치를 좌지우지 하지는 않습니다. 삼국사기에 태백산은 대략 세 번에 걸쳐 나오는데, 하나는 대신라 시대의 태백산으로 이 태백산은 현 춘천일대로 비정되므로 논외에서 제외하겠습니다. 두번째로는 동부여 금와왕이 유화를 만난 곳으로 압록강가에 살던 유화가 딸랑 시비 둘과 떠돌다가 정착한 곳이 태백산이라는 것을 볼 때 최소한 이 태백산은 하얼빈 일대보다는 부여의 최남단으로 여겨집니다.

  • 09.07.03 21:02

    세번째로는 추모왕이 오이를 보내 행인국을 정벌할 때 나옵니다.저는 지금까지 이 태백산을 현 백두산으로 여겼었는데, 이 태백산이 금와왕과 유화가 만난 태백산과 동일한 지명일 경우 이 태백산의 위치는 백두산이 아닐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고보니 우리나라 삼국지의 저자 임동주 교수님께서는 행인국을 부여남단으로 비정하셨군요.) 지금은 가능성이 그쪽에 더 쏠립니다.^^; 물론 신라 태백산 경우처럼 동명이지일 경우 행인국 근처의 태백산이 백두산일 경우도 여전히 유효하지만, 반증이 없는 한은 이 태백산은 만주의 태백산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 작성자 09.07.04 09:42

    댓글을 쓸 때 사서를 좀 보고 대답할 걸하고 후회를 하게 됩니다. 사서에 해부루가 나라를 세운 곳이 웅심산이라고 하였지 태백산이라고 표현한 곳이 없군요. 또한 송양의 비류국은 해모수와 유화부인이 놀러 다니던 땅이고, 해모수의 영토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또한 지도를 살펴보니 평정산은 하얼빈의 남쪽이 아닙니다. 제가 큰 착각을 하였습니다.

  • 09.07.04 13:08

    압록강가의 웅심산(혹은 웅심연)은 유화와 해모수가 만난 장소일 뿐으로 해부루가 웅심산일대에 나라를 세웠다는 기록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동명왕편에는 없는데, 남당유고에 있는지요?

  • 작성자 09.07.06 10:21

    환단고기(한단고기)에 북부여의 건국지가 웅심산이라고 나옵니다. 진실성 여부를 확인하기 곤란하고, 여러 사서를 대조할 필요가 있는 듯 하여 명치호태왕님의 답변을 추후로 미루고자 합니다. 사서마다 혼잡하게 쓰여 있으니 어느 것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어느 정도 감이 잡히면 저의 생각을 밝히겠습니다.

  • 작성자 09.07.06 10:24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 금와는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한 여자를 만나 그녀의 내력을 물었다. 그녀가 말하기를 "나는 하백의 딸이고, 이름은 유화이다. 여러 동생들을 데리고 나가 놀았는데, 때마침 한 남자가 자칭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 하면서 나를 웅심산 아래 압록강 가에 있는 집으로 유인하여 사욕을 채우고, 그 길로 가서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의 부모는 내가 중매도 없이 남자와 관계한 것을 꾸짖고, 마침내 우발수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하였다"고 대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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