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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濟書記(백제서기)
百濟者大神水之義也 百濟俗重武而不修文 且多忌諱故久無史 至近肖古王時高興始作史曰書記
백제(百濟)란 大神水(百은 크다는 뜻의 大로, 濟를 부수로 나누어 水와 齊로, 齊는 齋(재계하다)의 의미로 쓰였다)의 뜻이다. 백제의 俗(관습, 대중적인 것)은 무(武)를 중요시 하고, 문(文. 여기서는 史書의 의미로 한정하여 해석함이 옳다)을 정리하지 않았다. 또 기휘(忌諱, 숨기다)하는 일이 많아, 그런 연유로 오랫동안 사서가 없었다. 근초고왕(近肖古王)때 이르러, 고흥(高興)이 비로소 사서를 짓고 서기(書記)라 불렀다.
≪비교≫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30년 기사 말미
古記云 “百濟開國已來 未有以文字記事 至是得博士高興 始有書記” 然高興未嘗顯於他書 不知其何許人也
고기(古記)에서 말하기를 “백제(百濟)는 나라를 창건한 이래로, 문자로 사건을 기록함이 없었다. 이 때에 이르러 박사(博士) 고흥(高興)을 얻어 비로소 서기(書記)를 갖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고흥은 일찍이 다른 책에는 나타나지 않는 연유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
≪견해≫ 1. 백제왕기의 말미에 백제서기(百濟書記)라는 부분은 백제서기에 대한 설명일 뿐 이 책이 백제서기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백제서기를 참고한 2차 혹은 3차의 사서로 보인다.
2. 백제가 기휘(忌諱)하는 일이 많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삼국지위서동이전(三國志魏書東夷傳)의 부여(夫餘)기사와 북사열전(北史列傳)의 백제, 주서(周書列傳)의 백제, 수서동이열전(隨書東夷列傳)의 백제 기사에 동일한 부분이 있으나 부여와 백제가 동일한 나라임을 감히 주장하지 못함이 있는 것은 중화의 섞어 쓰기 뿐만은 아니라 백제가 기휘함이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3.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 18년(A.D.538) 國號(국호)를 南夫餘(남부여)로 개칭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신라사초에는 백제라는 국호를 대신하여 부여라는 국호를 쓰고 있으므로, 중국정사 조선전 부여의 기사에도 백제의 기사가 포함되어 있다고 보여 지며, 인근의 국가와 동일한 국호를 씀으로써 백제가 中華에게 이득을 본 일이 많았던 것 같다.
優臺王(우대왕)
北夫餘解夫婁王之庶孫也 解夫婁王以日神降靈之後 布德北方天下泰平 分遣王子于列國 以監民疾苦
북부여(北夫餘) 해부루(解夫婁)왕의 서손(庶孫)이다. 해부루왕이 일신(日神, 태양신)이 강령(降靈)한 후 덕을 베풀어 북방 천하가 태평하였다. 왕자를 열국(列國)으로 나누어 보내어 백성들이 질병과 고통(疾苦)을 살펴보게 하였다.
時卒本太守延陀勃有女曰召西奴 甚美 優台聞之 請往卒本 王以優台母微不許 優台乃私行 至卒本與山 西奴相通 延陀勃以王不許 欲禁之 乃相逃避太伯山谷沸流川上〈今白頭山溫河〉
당시 졸본태수(卒本太守) 연타발(延陀勃)에게는 소서노(召西奴)라 불리는 딸이 있었는데 대단히 아름다웠다. 우태(優台)가 그 소리를 듣고 졸본으로 가기를 청하였다. (해부루)왕이 우태의 어머니의 (신분이) 미천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우태가 몰래 졸본 여산(與山)에 이르러 (소)서노와 상통(相通)하였다. 연타발은 (해부루)왕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다하여 금(禁)하려 하니, 이에 태백산(太伯山) 골짜기 비류천(沸流川) 상류〈백두산 온하〉로 도피하였다.
≪견해≫ 지명 비정이 남당의 것인지 아니면 선대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사서마다 제각각이므로 너무 믿지 말기를 바랍니다. 본인은 흑룡강성 하얼빈의 남쪽 평정산(平頂山, 1429m)으로 추측한다. 이 곳은 북부여의 시조 해모수가 강림한 곳으로, 우태의 사망 후에 송양이 일시적으로 차지하였다.
祀河神 而生子曰沸流 延陀勃聞之 使人迎歸 遂以卒本之地歸之 時漢元年初元二年甲戌歲也.
하신(河神)에게 제사를 지내어 아들을 낳고 비류(沸流)라 이름 지었다. 연타발이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돌아오게 하여 맞이하였다. 드디어 졸본의 땅이 우태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때는 한(漢) 효원제(孝元帝) 초원(初元) 2년(B.C.47) 갑술(甲戌)년의 해다.
≪견해≫ 誤記가 있는 듯
時解夫婁王太子金蛙立 卽優台之父也 命優台 王于卒本.
당시 해부루왕 태자 금와(金蛙)가 섰다. 즉 우태의 아버지다. 우태를 졸본의 왕으로 명하였다.
≪견해≫ 우태의 졸본 건국, 우태 立
元年 甲戌 五月 立召西奴爲妃
원년(B.C.47) 갑술 5월 소서노를 세워 비(妃)로 하였다.
立東明廟 於沸流川
동명묘(東明廟, 해부루의 사당)를 비류천(沸流川)에 세웠다.
四年 丁丑 三月 次子溫祚生
4년(B.C.44) 정축 3월 둘째아들 온조(溫祚)가 태어났다.
≪견해≫ 고구려사초(략)과 다른 부분이다.
七月 分國爲東西南三部 使乙氏吃氏解氏 分長其州
7월 나라를 동, 서, 남의 3부(部)로 나누었다. 을(乙)씨, 흘(吃)씨, 해(解)씨로 하여금 나누어 그 고을의 우두머리(長)로 하였다.
≪견해≫ 신라의 6부(六部)의 땅을 다시 생각해 볼 기사다.
七年 庚辰 正月 王母乙氏薨 於夫餘 王往迎其喪 而歸之 得疾而薨
7년(B.C.41) 경진 정월 왕의 어머니 을씨(乙氏)가 부여에서 죽었다. 왕이 모친상을 맞이하여 (부여로) 갔다가 돌아왔으나 병을 얻어 죽었다.
≪견해≫ 우태의 어머니 을씨(乙氏)는 을음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소서노의 어머니 을류(乙旒)와 자매사이 인 듯 하다.
四月 王遺腹女阿爾生
4월 왕의 유복녀(遺腹女) 아이(阿爾)가 태어났다.
五月 以妃召西奴爲女君
5월 비(妃) 소서노를 여군(女君)으로 하였다.
≪견해≫ 소서노 立
八年 辛巳 七月 慕漱王太子朱蒙 自北夫餘逃來 年十九 而英雄無比 召西奴迎之 置于賓堂 侍之甚厚 朝暮同浴 朱蒙誘以甘言 曰 “女君年才二十七 能爲先王守貞乎” 召西奴曰 “非敢曰貞也 無可以爲夫者也” 朱蒙乃知其意 遂挑而通之 恐國人不悅 而諱之
8년(B.C.40) 신사 7월 모수(慕漱)왕태자 주몽(朱蒙)이 북부여(北夫餘, 금와의 동부여)에서 도망하여 (졸본으로) 왔다. 나이 19세로 견줄만한 것이 없는 뛰어난 영웅이었다. 소서노는 주몽를 맞이하여 빈당(賓堂, 손님을 모시는 방)에 모셔두고 대접함이 심히 후하였다. 아침저녁으로 함께 목욕을 하였다. 주몽이 달콤한 말로 유혹하여 말하기를 “여군(女君)의 나이 이제 스물일곱인데 선왕(先王)의 정조를 능히 지킬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소서노가 말하기를 “어찌 감히 정절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가히 남편으로 삼을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주몽이 이에 소서노의 뜻을 알고 마침내 어깨에 메어들고 소서노와 통(通)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기뻐하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여 그러한 사실을 숨겼다.
十月 朱蒙與召西奴出獵 獲神鹿 朱蒙曰 “此天將祚 我夫妻也” 召西奴曰 “今汝與我潛通 以不告於國中 奈何” 朱蒙曰 “吾善射 汝宜擇夫 以善射者 何如” 召西奴諾之 乃令國中 曰 “吾年少而寡 不可空房 能善射者 可以夫之 各以其技 來試吾前” 令下應募者甚衆 皆不及於朱蒙 召西奴大喜 遂與朱蒙相婚 於廟中 不及者怒 欲作亂 朱蒙使其臣陜夫等 捕而治之.
10월 주몽이 소서노와 더불어 사냥을 나갔다가 신록(神鹿)을 잡았다. 주몽이 말하기를 “이곳의 하늘은 장차 우리 부부에게 제위(祚, 임금의 지위)를 내리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소서노가 말하기를 “지금 당신과 나는 몰래 정을 통하였으나, 나라 안에 알리지 않았으니 어찌하면 좋을까?”라고 하였다. 주몽이 말하기를 “나는 활쏘기에 능하니, 당신은 마땅히 선사자(善射者, 활을 잘 쏘는 자)를 남편으로 선택함이 어떠한가?”라고 하였다. 소서노가 승낙하여, 이에 나라 안에 영(令)을 내려 말하기를 “나의 나이 젊으나 과부가 되었으니 여자 혼자 사는 것은 옳지 않다. 활쏘기에 능한 자를 남편으로 삼음이 옳으니, 각자 그 기예를 나의 앞에서 시험하러 와라.”고 하였다. 영(令)에 응모하는 자가 매우 많았으나 모두 주몽에게 미치지 못하였다. 소서노가 크게 기뻐하며 드디어 주몽과 더불어 사당(廟)에서 혼인을 하였다. (시험에) 미치지 못한 자들이 노하여 장차 난리를 일으키려 하였다. 주몽이 그의 신하 협부(陜夫, 협보) 등에게 사로잡아 다스리도록 하였다.
九年 壬午 四月 朱蒙說召西奴 曰 “吾爲汝夫 而國人多不腹者 以吾無功 於國家也 吾欲養精兵 以攻隣邦之傲慢無禮者 何如” 召西奴曰 “吾爲汝妻 惟命是從 而已” 於是朱蒙選民壯丁 使習弓馬 分署部曲 以其心腹臣領之
9년(B.C.39) 임오 4월 주몽이 소서노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나는 당신의 남편이 되었는데 나라사람들 중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내가 나라에 공(功)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정병(精兵)을 양성하여 이웃의 오만무례한 자들을 공격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라고 하였다. 소서노가 말하기를 “나는 당신의 처가 되었으니 명령에 따름이 마땅할 따름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때부터 주몽이 민간의 장정(壯丁)을 선발하여 활쏘기와 승마를 배우도록 하고, 부곡(部曲)에 관청을 나누어 세우고, 그 심복들로 통솔하게 하였다.
十年 癸未 二月 召西奴生 朱蒙女甘兒
10년(B.C.38) 계미 2월 소서노가 주몽의 딸 감아(甘兒)를 낳았다.
是年 朱蒙盡平卒本諸部落 威振一國 召西奴曰 “吾以女子 不識時務 但居內 育兒主饋可也 天下事 惟郞君主之” 朱蒙大喜 曰 “汝眞吾妻也 奈汝旧臣不服何” 召西奴曰 “郎君以我爲妻 以吾子爲太子 則吾臣豈有不服之理哉” 朱蒙曰善
이해에 주몽이 졸본의 모든 부락을 평정하여 일국(一國, 온 나라)의 위엄을 떨쳤다. 소서노가 말하기를 “나는 여자인 까닭에 (임금으로써) 그 때 그 때 할일을 알지 못한다. 다만 (궁)안에서 자식을 기르고 (나라의) 안 살림을 책임짐이 옳다(여군이 아닌 왕비의 역할을 하겠다는 뜻으로 주몽에서 선위를 하겠다는 의미). 천하의 일은 낭군(郞君)이 주재함이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주몽이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당신은 나의 진실한 아내다. (그러나) 당신의 옛 신하가 복종하지 아니하니 어찌할까?”라고 하였다. 소서노가 말하기를 “낭군이 나를 처로 삼고, 나의 아들을 태자로 삼는다면 곧 나의 신하들이 어찌 복종하지 않을 도리가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주몽이 이치에 맞다 하였다.
≪견해≫ 백제는 주몽에게 국정을 위임한 사실을, 고구려는 주몽이 주변의 국가를 정벌하여 국토를 넓힌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백제왕기는 백제인이, 고구려사초(략)은 고구려인이 쓴 古記를 저본(底本)으로 쓴 사서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十一年 甲申 正月 召西奴立朱蒙爲王 而沸流爲太子 溫祚爲王子 命憂臺旧臣卒本諸臣與朱蒙之臣 相婚 爲親戚
11년(B.C.37) 갑신 1월 소서노(召西奴)가 주몽(朱蒙)을 세워 왕으로, 비류(沸流)를 태자로, 온조(溫祚)를 왕자로 하였다. 우대(憂臺)의 구신, 졸본(卒本)의 제신(諸臣, 모든 신하)가 주몽의 신하와 혼인하여 친척이 되도록 하였다.
改國號曰 高句麗
나라이름을 고쳐 고구려(高句麗)라 하였다.
≪견해≫ 고구려의 건국, 주몽의 원년, 주몽 22세(B.C.58년생)
十二年 乙酉 六月 平沸流國 以其主松讓爲多勿候 沸流本屬卒本 今復歸故也
12년(B.C.36) 을유 6월 비류(沸流)국을 평정하였다. 그 나라의 주(主)인 송양(松讓)을 다물후(多勿候, 候는 侯의 오기)로 삼았다. 비류는 본래 졸본에 속하였는데, 지금 본래의 상태로 되돌아온 까닭이다.
十四年 丁亥 七月 城郭宮室始大成 王與后飮酒極樂 賞賜內外宗戚及諸臣
14년(B.C.34) 정해 7월 성곽과 궁실의 바야흐로 이루어졌다. 왕과 후가 술을 마시며 크게 기뻐하며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내외종척(內外宗戚, 종척과 외척)과 모든 신하에게 상을 내렸다.
十六年 乙丑 丁月 將軍烏伊芙芬奴 分兩道 攻太伯山南東荇人國 取其地爲城邑
16년(B.C.32) 을축 정월(丁月) 장군 오이(烏伊)와 부분노(芙芬奴)가 양쪽 길로 나누어 태백산(太伯山) 남동쪽 행인국(荇人國)을 공격하여, 그 땅을 취하여 성읍(城邑, 고을)으로 삼았다.
十九年 壬辰 五月 以荇人國王女碧蘿爲太子沸流妃 賜脯群臣.
19년(B.C.29) 임진 5월 행인국 왕녀 벽라(碧蘿)를 태자 비류의 비(妃)로 하였다. 군신에게 포(脯, 회식하다)를 내렸다.
二十一年 甲午 十一月 將軍扶尉厭寄 攻滅北沃沮國 以其地置溝婁爲城邑
21년(B.C.27) 갑오 11월 장군 부위염(扶尉厭)에게 위임하여(寄) 북옥저(北沃沮)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그 땅 치구루(置溝婁)를 성읍(城邑, 고을)으로 삼았다.
二十四年 丁酉 王母柳花后薨 於扶餘 王與后發喪擧哀 于鴨宮水上 遣使 于扶餘 獻賻
24년(B.C.24) 정유 왕의 어머니 유화(柳花)가 부여에서 죽었다. 왕과 후가 압궁(鴨宮)의 상류에서 발상(發喪, 초상이 난 것을 알림)하였다. 부여에 사신을 보내어 부의를 하였다.
是年 王嫡子類利 自扶餘來 謁王 于獵途 王畏后不悅 不直率歸 使寄多勿候松讓家 而巡行國中 恤民窮乏者 而醫其疾 人稱其賢 召西奴聞 而怪之 謂王 曰 “夫婦一身 郎君之子來 居吾國 而不來謁者何也” 王曰 “彼雖慕父而來 我以沸流溫祚爲子 何可戀戀子 已棄之子乎” 召西奴曰 “父子天倫之親也 安可棄之哉 且妾與大王相婚二十餘年 只有甘兒一人 郎君之子乃妾之子也 何不召來 而置於宮中” 王曰 “吾妻之曰善矣 若以阿爾妻之 而共子 是子則好莫甚矣” 后曰 “夫婦之間 有何所惜 惟汝所慾者 是妾之心矣” 王大喜 乃召類利 置於阿爾宮中 而妻之 類利乃與阿爾 內媚于父王母后 外結執政大臣 暗畜奪嫡之志.
이해에 왕의 적자(嫡子) 유리(類利)가 부여에서 와서 사냥 가는 길에서 왕을 만났다. 왕은 후(后, 소서노)가 기뻐하지 아니할 것이 두려워하여 곧바로 데리고 돌아오지 않고, 다물후 송양(松讓)의 집안에 부탁하여 맡겼다. 나라 안의 이곳저곳을 돌며 궁핍한 백성을 구휼하고, 병든 자를 치료하였다. 사람들이 그 현명함을 칭송하였다. 소서노가 듣고 괴이하게 여겨 왕에게 까닭을 물어 말하기를 “부부는 한 몸이요. 낭군의 아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사는데, 어찌 오게 하여 만나지 아니 한가?”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그 아이가 비록 아버지를 그리워하여 왔으나, 내가 비류와 온조를 아들로 삼았는데 어찌 아들을 연연(戀戀, 그리워 함)함이 가당하겠소. 이미 버린 자식이로다.”라고 하였다. 소서노가 말하기를 “부자(父子)는 천륜(天倫)의 친함이 있는데, 어찌 버림이 가당하리오. 또 첩과 대왕이 서로 결혼한 지 20여년이 되었지만 단지 감아 한명이 있을 뿐입니다. 낭군의 자식은 첩의 자식이기도 하니, 어찌 불러 오게 하여 궁중에 두려하지 않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나의 아내의 말이 합당하도다. 만약 아이(阿爾)를 시집보내어 공동의 자식으로 한다면, 이 아들이 더할 나위 없이 좋도다.”라고 하였다. 후가 말하길 “부부사이라면 어찌 아까움이 있겠습니까. 당신이 바라는 것은 첩의 마음이기도 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며 이에 유리를 불러 아이궁(阿爾宮) 안에 두고 아이(阿爾)를 아내로 삼게 하였다. 유리가 이에 아이(阿爾)와 더불어 안으로는 부왕(父王)과 모후(母后)에게 애교를 부리고, 밖으로는 집정대신(執政大臣)과 결탁하여 암중으로 적자의 자리를 빼앗을 뜻을 모았다.
二十九年 壬寅 四月 右輔烏伊等上言 曰 “自古帝王 莫不立其子以爲太子 今大王辛苦創業 而不立己子 臣等不取 千秋萬歲之後 沸流若立 宜以其父優台 配于吾后矣 大王安得血食 于此國乎 若以類利爲太子 而阿爾爲太子妃 則阿爾今已娠矣 他日大王聖后之孫 永久王子此土 大王聖后畏在 相配食在土是非 俱美之道哉” 王曰 “立子以賢者 以重社稷宗廟也 今沸流仁而有德 吾何敢私其所生乎” 群臣曰 “沸流雖仁 非帝王之器 守成之人也 類利才德雙全 万姓答曰 吾王之子 以歸之 今若不立 悔之晩矣” 王不聽其言 類利亦自辭讓 而群情一動 不可禁之 王與同枕 而憂之 后曰 “吾子沸流雖仁 而不及於汝子類利 人所共知也 阿爾若生好孫 而能繼是邦 吾於前夫後夫皆盡婦道矣 汝何固執而憂之乎” 王曰 “建國之道 莫如捀嗣以賢 吾實不知吾子之賢 若如汝言 明日可試 而爲之” 乃立幟 於王宮之左右 而令 曰 “欲立沸流者右 而欲立類利者左往” 左者三倍于右 王嘆 曰 “吾非不欲立沸流夫也 奈何” 乃立類利爲太子 而使分三部地 沸流弟其東南 溫祚弟其西南 類利治其北部 以慰后心 自是國政多歸類利 沸流溫祚 漸懷不平之志
29년(B.C.19) 임인 4월 우보(右輔) 오이(烏伊) 등이 글을 올려 말하기를 “옛날부터 제왕(帝王)은 그 아들을 태자로 세우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지금의 대왕은 매우 고생을 하여 나라를 세웠으나 자신의 아들을 (태자로) 세우지 못하였습니다. 신(臣) 등은 천추만세(千秋萬歲, 꽤 오랜 세월)의 후를 의지할 수 없습니다. 만약 비류를 세운다면 마땅히 비류의 부친인 우태(優台)를 우리의 왕후와 짝지을 것이므로, 대왕이 어찌 이 나라에서 혈식(血食, 나라의 제사)을 받겠습니까? 만약 유리(類利)를 태자로 삼고 아이(阿爾)를 태자비로 삼는다면, 아이(阿爾)는 지금 임신 중이므로 다른 날 대왕과 성후(聖后)의 손(孫)으로 영구히 이 땅의 임금의 지위가 이어질 것입니다. 대왕과 성후가 두려워하는 바는 서로의 배우자가 이 땅에서 나라의 제사를 받는 일에 시비가 있는 것이니, 함께 아름다운 도리가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현명한 아들을 세우는 것이 종묘사직에 중요하다. 지금의 비류는 어질고 덕이 있으니 내가 어찌 사사로이 소생(所生, 자기가 낳은 자식)을 세울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군신들이 말하기를 “비류가 비록 인자하나 제왕의 그릇이 아닙니다. 단지 수성(守成, 조상들의 이루어 놓은 것을 이어서 지킴)의 그릇입니다. 유리는 재주와 덕을 쌍으로 온전히 갖추었습니다. 만백성(萬姓)들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우리왕의 아들에게 보위가 돌아가야 한다고 합니다. 지금 만약 세우지 않는다면 후회해도 늦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유리 또한 스스로 사양하며, 군신들의 뜻이 함께 움직이는 것을 금(禁)하는 것은 불가(不可)하다 하였다. 왕이 (소서노와) 더불어 동침하며 후계자를 세우는 일을 걱정하였다. 후(后)가 말하기를 “나의 아들 비류가 비록 인자하나, 당신의 아들 유리에게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 바입니다. 만약 아이(阿爾)가 좋은 손자를 낳으면 이 나라를 능히 이어 나갈 것이고, 나는 전남편과 현재의 남편 모두에게 부인의 도리를 다하는 것이 됩니다. 당신은 어찌 고집하여 근심을 하는가?”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건국의 도리(이념)는 어진 이를 후계자로 세우는 것이다. 나는 사실 내 자식이 현명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만약 당신의 말과 같은지 내일 시험하여 그렇게 하겠다.”라고 하였다. 이에 왕궁의 좌우에 깃발을 세우고, 영(令)을 내려 말하기를 “비류를 세우고자 하는 자는 오른쪽, 유리를 세우고자 하는 자는 왼쪽으로 가라.”고 하였다. 좌에 있는 자가 오른쪽에 있는 자보다 3배가 많았다. 왕이 탄식하며 말하길 “내가 비류의 사내(夫)를 세우고자 바라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어찌하면 좋을까.”라고 하였다. 이에 유리를 태자로 세우고 3부로 나누도록 하였다. 비류는 차례(弟, 순서, 배열)는 동남을, 온조의 차례는 서남을, 북부는 유리가 다스리게 하여, 후(后, 소서노)의 마음을 위로하였다. 이때부터 국정(國政)의 많은 부분이 유리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비류와 온조는 점점 불평의 뜻을 품게 되었다.
九月 王薨 后哀痛欲殉之 群臣止之 曰 “大王忽棄 聖后亦從 臣等何歸” 后曰 “太子在 汝等奉之可也” 於是類利卽王位 奉后爲太后 以阿爾爲后 以沸流溫祚爲左右兄王.
9월 왕이 돌아가셨다. 후(后)가 애통하며 따라 죽으려하였다. 군신들이 말리며 말하기를 “대왕은 홀연히 버리고 (떠났는데), 성후(聖后, 소서노)는 역시 (대왕을) 따른다면, 신들은 누구를 따라야 합니까?”라고 하였다. 후(后)가 말하기를 “태자와 있으니, 너희들이 받들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유리가 왕으로 즉위하여, 후를 태후로, 아이는 후로, 비류와 온조를 좌우형왕(左右兄王)으로 삼았다.
≪견해≫ 고구려사초(략)과 다른 부분이 있다.
十月 阿爾后生 太子都切 大赦
10월 아이(阿爾)후가 태자 도절(都切)을 낳았다. 대사면을 하였다
類利初在宋讓之時 潛通其女宋花 至是阿爾産臥 而無後宮 宋花入內後 通之如故 太后不悅 曰 “吾女産君之子 而臥 爲人之夫者 當旦夕在其側 而分勞之 安可繼慾 納不美之女哉” 類利曰 “人君當廣其嗣孫 不可無一二後宮 況宋花者 吾之糟糖餠母言 不可棄也” 太后乃怒 曰 “汝爲太子時 欺吾夫妻 示以仁賢 今汝父沒 而忽敢如此乎” 乃召沸流溫祚 議 曰 “吾爲類利所欺 汝等宜早爲之計 各往所封之地” 沸流曰 “大王生時 愛吾等如子 今則未免疣贅 不如奉母 南行開創新國矣” 溫祚曰諾
유리가 처음 송양(宋讓)에게 있을 때, 송양의 딸 송화(宋花)와 잠통(潛通, 결혼하지 않고 정을 통하는 일)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아이(阿爾)가 출산하여 누워있었는데 후궁(後宮)이 없었다. 송화를 안(內, 여기서는 후궁의 침소)으로 들어오게 한 이후로 옛날과 같이 (정을) 통하였다. 태후가 기뻐하지 아니하며 말하기를 “나의 딸은 임금의 아들을 낳고 누워있으니, 남편의 사람됨이란 마땅히 아침과 저녁으로 그 옆에 있으면서 수고를 나누어야 한다. 어찌 아름답지 못한 여자를 거두어 이어가기를 바라느냐.”라고 하였다. 유리가 말하기를 “임금(人君)은 마땅히 대를 이을 자손(嗣孫)를 넓혀야 하니 한두 명의 후궁은 없어서는 아니 됩니다(不可無). 하물며 송화는 나의 조당병모(糟糖餠母, 조강지처)로 맹세하였으니, 버릴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태후가 이에 노하여 말하기를 “너를 태자로 삼으려고 하였을 때, 우리 부부를 속여, 어질고 현명하게 보이려 하였다. 지금 너의 아버지가 죽고 없으니, 갑자기 감히 이처럼 대할 수 있느냐?”라고 하였다. 이에 비류와 온조를 불러 의논하여 말하기를 “우리는 유리에게 속임을 받았다. 너희들은 마땅히 계책을 서둘러서, 각자가 봉하여진 땅으로 가야한다.”라고 하였다. 비류가 말하기를 “대왕이 살아있을 때 우리들을 자식처럼 사랑하였는데, 지금은 곧 혹(疣贅, 혹, 사마귀, 군더더기의 뜻으로 쓸모없음) 같은 존재를 면할 수 없으니,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 새 나라를 열어 창업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온조가 승낙하였다.
沸流王(비류왕)
優台王長子 爲人柔仁孝友.
우태(優台)왕의 장자다. 사람됨이 순하고 인자하며,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에 대한 우애가 있었다.
元年 癸卯 正月 沸流東行 南渡帶水 至彌鄒忽 欲居之 溫祚與烏干馬黎等 西南行 而渡浿河 亦會于彌鄒忽 立沸流爲王
원년(B.C.18) 계묘 정월 비류(沸流)가 동쪽으로 가다가 남으로 대수(帶水)를 건너 미추홀(彌鄒忽)에 이르러 그곳에서 살기를 원했다. 온조(溫祚)는 오간(烏干), 마려(馬黎) 등과 서남으로 가다가 패하(浿河)를 건너 역시 미추홀(彌鄒忽)에서 모였다. 비류를 세워 왕으로 하였다.
≪견해≫ 비류와 온조가 가는 방향이 서로 다름에도 미추홀에서 만났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졸본의 동쪽에 대수가 있고, 대수를 건너 미추홀이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졸본에서 서남으로 가면 패하(浿河)를 만나게 되고 패하의 물길이 역시 미추홀의 인근에 도달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미추홀은 후에 고구려에 병합되었다.
五月 立東明廟
5월 동명묘(東明廟, 주몽의 사당)를 세웠다.
七月 類利以松花爲后 阿爾妬之 與太后欲奔歸彌鄒忽 乙音諫之 曰 “小不忍亂 大謀爲 后之道 莫若承順 夫王之志” 乙音者 優台母乙氏通其私夫 而生者也 沈重有識見 曾諫 召西奴之迎朱蒙爲夫 又諫納類利 至是留古都 以慰太后.
7월 유리(類利)가 송화(松花)를 후(后)로 하였다. 아이(阿爾)가 시새움하여 태후와 미추홀로 도망하여 돌아오고자 하였다. 을음(乙音)이 간언하여 말하기를 “소인은 어려움을 참지 않습니다. 큰 계책은 후(后)의 도리로써 부왕(夫王, 유리)의 뜻을 순종하여 따름과 같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을음이라는 사람은 우태(優台)의 어머니 을씨(乙氏)가 사부(私夫, 샛서방)와 통하여 태어난 사람이다. 침중(沈重, 성질이 가라앉아 진득함)하며 식견(識見, 사물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일찍이(曾) 소서노에게 주몽(朱蒙)을 맞이하여 남편으로 삼으라고 간언하였고, 또 유리를 받아들이도록 간언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고도(古都, 졸본)에 머무르며, 태후를 위로하였다.
二年 甲辰 三月 太后與乙音歸彌鄒忽 是年 正月 王以末曷在北界 勇而多詐 欲繕兵績穀 以究拒守之計 群臣皆曰 “若非乙音不可” 乃召乙音 爲右輔 太后亦以此機歸我 而重其勢 舊臣之奔來者 陸續不絶 乙音總執內外兵馬事
2년(B.C.17) 갑진 3월 태후와 을음(乙音)이 미추홀로 돌아왔다. 이해 정월에 왕이 말갈(末曷)이 북쪽 경계에 있고, (말갈사람들은) 용감하고 속임수가 많으므로, 병장기를 수선하고 곡식을 모으고, 막아 지킬 계책을 연구하였다. 군신들이 모두 말하기를 “을음이 아니면 불가하다.”라고 하였다. 이에 을음을 불러 우보(右輔)로 삼았다. 태후 역시 이 기회로 우리에게 돌아왔다. 그 기세에 거듭하여 구신(舊臣)들 중에 도망하여 온자가 육지(陸)로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을음에게 나라의 안팎의 병마사(兵馬事, 군대, 무기, 전쟁에 관한 일)를 총괄하도록 하였다.
≪견해≫ 삼국사기에는 소서노, 비류, 온조가 함께 남하한 것으로 되어있다.
王以親妹甘兒妻王弟溫祚 甘兒朱蒙王之女也 能騎馬善射 類利欲通之 爲後宮 阿爾后 曰 “我已見欺 悔之無及 汝宜從太后 歸依胞兄” 甘兒亦心鄙 類利無義多詐 從太后歸彌鄒忽 至是與溫祚相婚 於東明樹下 大宴群臣 太后飮酒樂之 命王與后 起舞而歌 其歌 曰 “奉吾母爲王 吾大愛吾弟 爲抱吾妹 願我子孫 樂無窮而不盡 後人論孝友者 必以此歌爲訓”
왕이 여동생 감아(甘兒)를 왕의 동생 온조(溫祚)에게 시집보냈다. 감아는 주몽(朱蒙)왕의 딸이다. 말을 타고 활쏘기에 능숙하였다. 유리가 감아와 통(通)하고자 하여 후궁으로 삼았다. 아이(阿爾)후가 말하기를 “나는 이미 속이는 것을 보았으나, 후회해도 돌이킬 수 없다(悔之無及). 너는 마땅히 태후를 따라서 같은 어머니의 오빠에게 귀의(歸依)하여야 한다.”라고 하였다. 감아 또한 마음속으로 유리가 의롭지 않고 속임이 많음을 더러워하였다. 태후를 따라서 미추홀로 돌아왔다. 이때에 이르러 온조와 더불어 동명수(東明樹) 아래에서 혼인을 하였다. 군신들에게 큰 잔치를 벌였다. 태후가 술을 마시며 즐거워하고, 왕과 황후에게 일어나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도록 명령하였다. 그 노래의 가사는 “나의 어머니를 왕으로 받들어 모시고, 나는 나의 동생을 매우 사랑하여, 나의 여동생을 품도록 하였다. 우리의 자손들에게 즐거움이 무궁무진(無窮無盡, 끝이 없고 다함이 없음)하기를 바라니, 후인들아, 효도와 우애를 논하려거든 반드시 이 노래를 교훈으로 삼아라.”고 하였다.
≪견해≫ 고구려사략에는 감아(甘兒, 온공주)가 이해에 죽었다고 하였다. 본기신편열전에는 감아는 우태의 딸이고, 온조는 주몽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三年 乙巳 五月 甘兒生子多婁 時王后碧蘿 生三女而無子 太后命取多婁爲王子 妻以碧蘿之女蛙氏
3년(B.C.16) 을사 5월 감아(甘兒)가 다루(多婁)를 낳았다. 당시 왕후 벽라(碧蘿)는 딸 셋을 낳았으나 아들이 없었다. 태후가 다루를 취(取)하여 왕자로, 벽라의 딸 와씨(蛙氏)를 처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견해≫ 온조의 장자(長子)에 대한 기록이 없다. 비류의 가업(家業)을 계승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九月 末曷來侵北界 王命溫祚擊退之 甘兒亦被甲從之 選勁師出 間道忽擊 大破之 賊之生還者 十之一二 王乃賞王弟王妹 曰 “好 吾弟妹國之雙宝也” 夕食于太后宮
9월 말갈이 북쪽 경계를 침입하여 왕이 온조에게 말갈을 격퇴하도록 명하였다. 감아 역시 갑옷을 입고(被甲) 온조를 따라갔다. 굳센 병사를 골라 출병하고 있는 도중에 갑자기 부딪쳤으나 적을 크게 깨뜨렸다. 적들 중에 살아 돌아간 자는 열 명중 한둘이었다. 왕이 이에 온조와 감아에게 상을 내리며 말하기를 “아름답구나! 나의 남동생과 여동생이 나라의 쌍 보배로다!”라고 하였다. 태후궁에서 저녁식사를 (함께) 하였다.
十一月 類利遣使 獻方物 於太后 而請還都 太后曰 “聞汝王喪松花 而更娶禾雉兩女 以傷吾女之心 如此好色之人 吾不願見也 先王英雄無比 而惟與我好 不用他色 汝王其宜知之” 使者恐懼而歸
11월 유리(類利)가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태후에게 바치며 환도(還都)하기를 청하였다. 태후가 말하기를 “듣자하니 너의 왕이 송화(松花)의 상을 당했다고 하더니 이번엔 화희(禾)와 치희(雉) 두 여자에게 장가를 들어, 나의 딸의 마음을 다치게 하였다. 이와 같이 호색한이니 나는 (너희 왕을) 보기를 원하지 않는다. 선왕(先王, 주몽)은 비교할 것이 없는 영웅으로, 오로지 나만을 좋아하여 다른 여자를 등용하지 않았다. 너희 왕은 마땅히 그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신은 몹시 두려워하며 돌아갔다.
≪견해≫ 백제가 남하(南下)한 원인을 말하여 주는 기사다.
四年 丙午 春夏大旱 而民饑且疾 王與后巡撫部落 而慰恤之
4년(B.C.15) 병오 봄과 여름에 크게 가물어 백성들이 굶주리고 또한 병이 들었다. 왕과 후가 부락(部落, 시골의 큰 마을)을 돌며 백성을 어루만지고, 위로하고 구휼했다.
八月 遣使于樂浪 而修好 樂浪者辰韓也 在我東南界 共拒末曷 而事馬韓故也
8월 사신을 낙랑(樂浪)으로 보내어 사이좋게 지냈다. 낙랑은 진한(辰韓)이다. 우리의 동남쪽 경계에 있으면서 함께 말갈을 막았는데, 마한(馬韓)을 섬겼던 연유에서다.
≪견해≫ 온조왕 당시의 낙랑은 진한낙랑이다. 백제는 마한의 동북에 낙랑의 서북에 있었으며, 낙랑과 마한은 동서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五年 丁未 四月 遣王弟溫祚 於馬韓 借地 時馬韓政衰 畏末曷樂浪加耶之漸盛 欲使王 制末曷樂浪 乃許東北百里之地 且許採鐵鑄兵戈 優待王弟 而歸
5년(B.C.14) 정미 4월 왕의 동생 온조를 마한에 보내어 땅을 빌렸다. 당시 마한 정부는 쇠락하여 말갈(末曷), 낙랑(樂浪), 가야(加耶)가 점점 번성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왕으로 하여금 말갈과 낙랑을 제어하기를 바랐다. 이에 동북 100리의 땅을 허락하였다. 또 철을 캐내어 병과(兵戈, 무기)를 주조하는 일을 허락하였다. 온조가 후한 대접을 받고 돌아왔다.
≪견해≫ 가야국이 건국되기 이전임에도 가야(加耶)라는 국호가 나타나고 있다. 아마도 가야(加耶)라는 것은 국호이기 이전에 지방을 나타내는 지명으로도 쓰인 듯.
十月 王巡撫北邊 獲神鹿
10월 왕이 북쪽 변경을 돌며 어루만지다가 신록(神鹿)을 잡았다.
十一月 馬韓使來 請王女 王謝以年幼 馬韓君臣耽樂 不恤國民 樂浪加耶年年納美女 侵入其封疆 疆域日縮 而不以爲意
11월 마한(馬韓)이 사신을 보내어, 왕녀를 청하였다. 왕은 나이가 어리다하여 사양하였다. 마한의 임금과 신하들은 탐락(耽樂, 주색이나 오락에 빠짐)하여 국민들을 구휼하지 않았다. 낙랑과 가야가 해년마다 미녀를 바치며 그 봉해진 경계를 침입하였다. 강역이 날마다 줄어들었는데, 나라를 다스리려는 뜻이 없었다.
甘兒生子馬婁.
감아가 아들 마루(馬婁)를 낳았다.
≪견해≫ 온조의 차자(次子) 마루(馬婁)는 마한 백제를 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왕기 다루왕 기사에 다루(多婁)를 당대에 마루(馬婁)라고 불렀다고 한다.
七年 戊申 王后碧蘿薨 王痛哀之 群臣請納繼后 王不忍之 曰 “夫婦之道 宜相從 雖不得相從 安忍暑未冷 而忽復再娶乎” 太后聞 而悲之 曰 “吾有罪於沸流矣” 溫祚慰之 曰 “母之再嫁 豈其罪哉 兄之不再娶者 亦何賞善之善哉 盖其愛嫂之情猶有 未已故也” 碧蘿以荇人王女 有傾國之色 而太妊之德 孝友戀愛能 使沸流 浹洽于心 當大難而不惑 南來以後 親執饋事 以慰將士 夙奧夜寢疲勞 盖忍遂得疾以薨 故群臣上下 莫不痛之 春秋三十四 有三女皆絶美 馬韓王數遣使求之 而不許 以溫祚子多婁爲子 欲傅其國 臨薨謂王 曰 “我死勿更娶 以若兒輩國政 可委溫祚 而內事万委女輩” 王許之 時王長女葱姬年已十六 能代后 視內事故也
6년(B.C.13) 무신 왕후 벽라(碧蘿)가 죽었다. 왕이 애통해 하였다. 군신들이 새로운 후(后)를 받아들이기를 청하였다. 왕이 참지 못하여 말하기를 “부부사이에는 마땅히 따르는 도리가 있으나, 비록 따르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어찌 잔인하게도 뜨거움이 채 식지 않았는데, 재취(再娶, 아내를 여윈 뒤 두 번째 장가를 듦)하라고 말하는 것이냐.”라고 하였다. 태후가 듣고 슬퍼하여 말하기를 “내가 비류에게 죄가 있음이로다.”라고 하였다. 온조가 위로하여 말하기를 “어머니가 재혼한 것이 어찌 죄가 되겠습니까? 형이 재혼을 하지 않은 것 또한 상줄 만한 선(善)중의 선(최고선)입니다. 아마도 형수를 사랑하는 마음이 지나침이 있어 (때가) 아닐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벽라는 행인(荇人)국의 왕녀로써 경국지색(傾國之色)의 아름다움이 있고 태임지덕(太妊之德, 太任은 주(周) 나라 왕계(王季)의 비(妃)이며 문왕(文王)의 어머니, 태임(太姙)이라고도 함)이 있으며 효도하고 우애 있고 연애(戀愛, 남녀사이에 애틋하게 그리워하고 사랑함)함이 능하여, 비류로 하여금 마음으로 화목하게 사귀도록 하였다. 큰 어려움을 당하여 미혹당하지 않았으며, 남쪽으로 내려온 이후 친히 (음식을) 먹이는 일을 집정하였고, 이로써 장사(將士, 장수와 병졸)들을 위로하였는데,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 잠잘 때까지 피로(疲勞)하였다. 아마도 참고 견디어 마침내 병을 얻어 죽었다. 그런 연유로 군신의 높고 낮음이 없이 모두 아파하지 않음이 없었다. 춘추 34세였다. 딸 셋이 있었는데 모두 절세미인이었다. 마한왕이 수차례 사신을 보내어 딸을 얻기를 구(求)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온조의 아들 다루를 아들로 삼아, 나라를 전하고자 하였다. 죽기에 직면하여 (벽라가) 왕에게 힘써 말하기를 “내가 죽더라도 다시 장가들지 말라, 만약 아이들(兒輩, 후계)의 문제에 관한 국정이라면 온조에게 맡기고, 집안일(內事)에 관한 온갖 일은 여자의 순서(輩)에 따라 맡기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이 허락하였다. 당시 왕의 장녀 총희(葱姬)가 이미 나이 16세로, 능히 후를 대신하여 집안일을 볼 수 있었던 까닭이다.
≪견해≫ 60간지와 기년이 1년 차이가 난다. 오기(誤記)가 있음에도 어는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
三月 王與葱姬 北巡郡邑 以慰戍卒 命甘兒入內視事
3월 왕과 총희(葱姬)가 더불어 북쪽의 군읍(郡邑)을 살피며, 수졸(戍卒, 변방을 지키는 병사)들을 위로하였다. 감아(甘兒)에게 (궁으로) 들어와 여자의 일(의복, 음식, 잠자리 등)을 살피도록 명하였다.
八年 庚戌 二月 末曷三千來 圍慰禮城 王經旬閉門不出 待其糧盡而歸 簡銳卒 追及大斧峴 殺虜五百余人
8년(B.C.11)년 경술 2월 말갈병 3천명이 와서 위례성(慰禮城)을 포위하였다. 왕이 10일 동안 성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다. 식량이 다하여 돌아가기를 기다려, 날랜 군사를 선별하여 대부현(大斧峴)까지 추격하였다. 죽이거나 포로로 잡은 자가 500여명이었다.
≪견해≫ 위례성(慰禮城)은 도성(都城)의 이름이다. 온조가 분립하지 않았다.
七月 築馬首城甁山柵 與樂浪失和.
7월에 마수성(馬首城)과 병산책(甁山柵)을 세워, 낙랑과 우호를 잃었다.
≪견해≫ 마수성(馬首城)과 병산책(甁山柵)은 말갈이 침입한 기사가 나타나므로 말갈을 대비하기 위한 성이다. 그러나 성책을 쌓은 위치가 진한낙랑이 요동과 왕래하기 위한 교통로 판단되며, 백제가 교통을 방해하였기 때문에 낙랑이 성책을 허물 것을 요구하였다. 백제가 이에 성책을 허물기를 거부하여 낙랑과 우호를 잃은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자세하다.
十年 壬子 王出獵獲神鹿 以送馬韓
10년(B.C.9) 임자 왕이 사냥을 나가서 신록(神鹿)을 사로잡아 마한에 보냈다.
十月 末曷寇北境 王遣兵二百 拒戰於昆彌川上 而敗 積依靑木山 而自保 王親帥精騎一百 出烽峴救之 賊乃退
10월 말갈이 북쪽 경계를 노략질하여 왕이 병사 200명을 보내어 곤미천(昆彌川) 상류에서 막아 싸웠으나 패배하여, 청목산(靑木山)에 의지하여 머무르며 스스로를 지켰다. 왕이 친히 장수가 되어 정예 기병 100명을 거느리고 봉현(烽峴)으로 나아가 구하니, 적이 이에 물러갔다.
十一年 癸丑 四月 樂浪唆末曷 襲破甁山柵 殺掠百余人
11년(B.C.8) 계축 4월 낙랑이 말갈을 부추겨서 병산책(甁山柵)을 습격하여 깨뜨리고 100여명을 죽이고 노략질했다.
七月 設禿山狗川兩柵 以塞樂浪來侵之路.
7월 독산(禿山)과 구천(狗川)의 두 책(柵)을 세워 낙랑이 침입하는 길을 막았다.
十三年 乙卯 二月 嫗化爲男 五虎入城 王禳之 於東明樹王 未幾太后得疾 而薨 春秋六十一 國人立召西奴祠 而祀之 后以延陁勃大王第三女 身長而美 旦有權 數養卵人 與優台王經營卒本國 得人心 且與朱蒙王 經營高句麗國 亦得衆望 及類利背叛 不與之爭 委之以國 又與二子 南渡經營百濟國 太后三國人皆 尊之如神
13년(B.C.6) 을묘 2월 늙은 할멈(嫗, 소서노)이 남자(男, 장수)가 되자, 다섯 마리의 호랑이가 성안으로 들어왔다. 왕이 동명수왕(東明樹王) 아래에서 제사(禳)를 지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태후가 병이 들어 돌아가셨다. 춘추 61세였다. 나라사람들이 소서노의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다. 후는 연타발(延陁勃)대왕의 셋째 딸로 키가 크고 아름다웠다. 떠오르는 태양과 같은 형세(權)가 있어 수차례 난인(卵人, 영웅)들을 길렀다. 우태(優台)왕과 더불어 졸본(卒本國)을 다스려 인심을 얻었으며, 또 주몽(朱蒙)왕과 고구려국을 다스리며 또한 나라사람들의 기대를 받았으며, 유리(類利)가 배반함에 이르러 다투지 않고 나라를 맡겼다. 또 두 아들과 남쪽으로 건너와 백제국을 다스렸다. 태후는 3국(졸본, 고구려, 백제)의 백성들에게 모두 신처럼 존중되었다.
≪견해≫ ‘嫗化爲男 五虎入城’이라는 문장은 고구려본기의 도절태자가 동부여에 볼모로 가는 문장과 연계하여 해석할 필요가 있다. 아이후의 아들 도절태자가 동부여로 볼모로 가게 되자 외할머니인 소서노가 미추홀의 병사들을 데리고 도절의 사신일행을 저지하여 동부여에 도착이 지연되는 일이 있었는데, 그 틈에 낙랑이 미추홀에 호랑이를 풀어놓은 것이다. 미추홀에 많은 사상자가 나자 소서노가 자책하여 사망한 기사로 추측된다.
첫댓글 비류와 온조의 나이는 그 주변인물들을 통해서 추론할 수 있으며 을음의 모친이 을씨라는 것도 추론 가능하며 추모왕 남하시기가 기원전 40년으로 나온 것도 고자 묘지명과 비교했을 때 충분히 개연성 있다고 생각합니다. 연타발의 역할이 삼국사기 보다 축소되었다는 점과 소서노가 셋째 딸이라는 것 그리고 왕실 사람들이 거론되고 거기에 복잡한 이해관계가 거론된 것만 제외한다면 전체적으로 삼국사기와 대동소이한 듯 합니다. 만일 저 기록이 진짜 근초고왕대의 백제인들이 쓴 것이라면 朱蒙이라는 폄하성 있는 표현은 북위가 아니라 백제가 최초가 될 듯 싶습니다.
묘지명의 내용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묘지명이 출토된 장소가 아닐까 합니다. 출토지에 대한 정보를 혹시 아시는지? 제가 알기로는 도굴로 발굴된 것이라 알 수 없다고들 하는데...
고자 묘지명은 낙양 근처에서 출토되었다고 하는데, 출토지가 고자 집안의 원 거주지도 아닌데, 왜 중요한지 모르겠군요.^^;
다른 묘지명과 착각 했습니다. 모두루 묘지명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모두루 묘지명은 집안이라고 나오는 군요.
모두루는 광개토태왕 때의 신하로 평양성 천도 이전인 국내성 지역에 살았으므로 집안에 그의 묘지명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두루 묘지는 고구려 장수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저의 생각과는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많은 부분이 보이지 않고, 한자라는 것은 중요한 부분은 한 글자만 빠져도 엉뚱한 해석이 가능하고 혹은 띄어쓰기에 따라 다른 해석도 가능합니다. 저는 백두산의 서쪽인 집안 인근을 남옥저로 보고 있고, 백제의 영토로 봅니다. 그래서 혼란도 많고 생각이 정리되지 않습니다.
49~54행은 광개토왕의 죽음에 대한 모두루의 감회를 서술한 부분으로 여겨진다. 즉 “호천(昊天)이 어여삐여기지 않아 (광개토왕이 승하함에) 노객[모두루]은 원지(遠地)에 있었으나 그 애절함이 마치 해와 달이 빛을 잃은 듯하여 ... ” 이란 뜻의 표현이 있었던 것 같다. - 모두루는 임지에서 묻혔는지 아니면 고향으로 돌아와 묻혔는지, 생각을 많이 하게 합니다.
광개토태왕비와 모두루묘지명 등 고구려 관련 유적, 유물들과 전설들이 현 집안에 있는 한 집안을 국내성으로 비정하는 것은 부정하기 힘들다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모두루의 직책이 북부여수사로 그의 임지인 북부여는 송화강 일대로 광개토태왕이 죽은 장소인 국내성은 북부여쪽에 있었던 모두루에 입장에서 보면 당연히 遠地였을 것입니다. 그의 묘지명이 국내성쪽에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고향에 묻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북부여의 영토가 송화강 일대였다는 것과 같이 저도 송화강 일대를 북부여의 영토로, 북부여 해모수가 나라를 세운 곳이 태백산(하얼빈의 남쪽 평정산) 일대로 봅니다. 고구려 추모가 졸본에 나라를 세우고 송양의 비류국을 정벌하고 옛 땅을 되찾았다 하여, 송양을 다물후로 봉합니다. 송양의 비류국에 태백산이 있고 이 부근에 유리왕의 국내성이 있다고 봅니다. 이 점이 다른 점인 듯 합니다. 통설은 존중하지만 계속 의심하면서 모두루 묘지명도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해모수가 나라를 세운 곳이 태백산 일대라는 기록과 비류국에 태백산이 있었다는 기록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동명왕편을 볼 때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태백산의 위치가 비류국, 국내성의 위치를 좌지우지 하지는 않습니다. 삼국사기에 태백산은 대략 세 번에 걸쳐 나오는데, 하나는 대신라 시대의 태백산으로 이 태백산은 현 춘천일대로 비정되므로 논외에서 제외하겠습니다. 두번째로는 동부여 금와왕이 유화를 만난 곳으로 압록강가에 살던 유화가 딸랑 시비 둘과 떠돌다가 정착한 곳이 태백산이라는 것을 볼 때 최소한 이 태백산은 하얼빈 일대보다는 부여의 최남단으로 여겨집니다.
세번째로는 추모왕이 오이를 보내 행인국을 정벌할 때 나옵니다.저는 지금까지 이 태백산을 현 백두산으로 여겼었는데, 이 태백산이 금와왕과 유화가 만난 태백산과 동일한 지명일 경우 이 태백산의 위치는 백두산이 아닐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고보니 우리나라 삼국지의 저자 임동주 교수님께서는 행인국을 부여남단으로 비정하셨군요.) 지금은 가능성이 그쪽에 더 쏠립니다.^^; 물론 신라 태백산 경우처럼 동명이지일 경우 행인국 근처의 태백산이 백두산일 경우도 여전히 유효하지만, 반증이 없는 한은 이 태백산은 만주의 태백산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댓글을 쓸 때 사서를 좀 보고 대답할 걸하고 후회를 하게 됩니다. 사서에 해부루가 나라를 세운 곳이 웅심산이라고 하였지 태백산이라고 표현한 곳이 없군요. 또한 송양의 비류국은 해모수와 유화부인이 놀러 다니던 땅이고, 해모수의 영토라고만 되어 있습니다. 또한 지도를 살펴보니 평정산은 하얼빈의 남쪽이 아닙니다. 제가 큰 착각을 하였습니다.
압록강가의 웅심산(혹은 웅심연)은 유화와 해모수가 만난 장소일 뿐으로 해부루가 웅심산일대에 나라를 세웠다는 기록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동명왕편에는 없는데, 남당유고에 있는지요?
환단고기(한단고기)에 북부여의 건국지가 웅심산이라고 나옵니다. 진실성 여부를 확인하기 곤란하고, 여러 사서를 대조할 필요가 있는 듯 하여 명치호태왕님의 답변을 추후로 미루고자 합니다. 사서마다 혼잡하게 쓰여 있으니 어느 것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어느 정도 감이 잡히면 저의 생각을 밝히겠습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 금와는 태백산 남쪽 우발수에서 한 여자를 만나 그녀의 내력을 물었다. 그녀가 말하기를 "나는 하백의 딸이고, 이름은 유화이다. 여러 동생들을 데리고 나가 놀았는데, 때마침 한 남자가 자칭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 하면서 나를 웅심산 아래 압록강 가에 있는 집으로 유인하여 사욕을 채우고, 그 길로 가서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의 부모는 내가 중매도 없이 남자와 관계한 것을 꾸짖고, 마침내 우발수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하였다"고 대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