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8월 이후 38선을 경계로 남북의 왕래가 끊기자. 38선에서 가장 가까운 양양 본당은 마지막 북쪽 기착지로 월남을 준비하는 보루가 되었다.
이때 양양 본당 주임인 이광재 신부는 남한으로 자유를 찾아가는 이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월남길을 주선하였다.
그러나 이 신부는 "단 한 명의 신자라도 남아있는 한 떠나지 않겠다."며 한사코 마다했다.
그러던 1950년 6월 22일 "1년에 한 번은 성사를 줘야 한다. 내가 살아있는 한 꼭 가야 한다."라고 하며 공소 순례길을 떠나 평강으로 갔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1950년 10월 9일, 공산군은 유엔군의 진격으로 패주하면서 이광재 신부와 김봉식 신부,
그리고 함께 갇혀있던 약 400명의 인사들을 와우동 교화소에서 끌고 나와 방공호 속에서 무참히 학살하고만 것이다.
당시 학살 현장에 끌려갔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한 준명 목사는 이렇게 전한다.
"공산군이 학살을 끝내고 돌아간 뒤에도 아비규환의 비명소리는 이틀간이나 계속되었다.
시체들 중에는 아직도 살아있는 수가 적지 않았다.
"아이구 목말라. 물 좀..." "아이구...나 좀 살려주. 아이구..."
그런데 저편 구석에서 "응, 내가 물 떠다주지. 응, 내가 가서 구해주지..."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 신음 소리에 답하며 달래주듯 끊임없이 들려오지 않는가?
그때 나는 이것이 분명히 이 신부의 음성임을 식별하였다.
이 신부는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도 온 힘을 다해 주위에서 신음하는 사람들의 소리를 듣고 그에 대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신의 몸 역시 꼼짝없이 죽어가는 이 마당에..."
"이 신부님, 이 신부님."
"응, 내가 가요...응, 내가 가요..."
이 신부의 이런 대답이 약 스무 번 이상 되풀이 되었을까?
마침내 이 신부의 음성도 차츰 기력을 잃어가더니 그만 그쳤다.
권군과 나는 그 자리에 선 채 한참 동안 기도를 드리고 떠날 줄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