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성공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 성사모 원문보기 글쓴이: 다락방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평화'
최영실 (성공회대학교/신약학)
시작하는 말
인류는 끊임없는 분쟁과 갈등, 전쟁의 역사 속에서 불안과 죽음의 공포 속에 살고 있다.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참된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는 평화를 갈구해 왔다. 평화! 평화! 평화!......오늘날도 사람들은 평화에 대한 수많은 연구와 토론을 하며, 분단된 우리 민족의 평화뿐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평화'와 '세계의 평화'를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을 보면서 우리는 과연 사람들이 저마다 추구하고 있는 저 '평화'란 어떤 것인지를 진지하게 되묻게 된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입으로는 평화를 외치지만, 평화와 정의의 이름으로 강자가 약자를 살육하고 전쟁을 일삼아 온 것이 역사 현실임을 목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많은 학자들이 성서에 나타난 평화 사상에 대해 연구했다. 그들은 저 Pax Romana(로마의 평화)처럼 무력으로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고 침묵시키면서 자신들만의 부와 안정을 얻는 그 평화란 사실상 '거짓 평화'라는 사실을 밝혔다. 또 성서가 말하는 평화란 그리스-스토아 학파에서처럼 세상의 소란한 일들과 멀리 떨어져서 금식과 금욕 등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내면적이며 신비적인 평화가 아니라는 점도 지적했다. 구약에서 평화'를 뜻하는 '샬롬'은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사이에 자유와 정의가 실질적으로 보장되며 하느님의 창조질서가 수립되는 평화다. 그런데 이 평화는 어떻게 이 땅에서 이루어 질 수 있을까?
구약성서는 궁극적으로 '사랑과 진실이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는'(시 85:10) 참된 평화인 '샬롬'은 먼 종말의 미래에, 하느님 자신에 의해 주어질 구원의 은사로 증언했다. 말하자면 참된 평화란 하느님이 메시아를 보내어 모든 불의한 자를 심판하고 억압받는 자를 해방시키며 구원하는 역사를 통해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이다(사 32:1-35:10; 미 4:1-8). 그런데 신약성서 저자들은 구약에서 예언되었던 그 평화가 역사의 인물인 예수에 의해 이미 이 땅에서 실현되기 시작했다고 증언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그러나 그 경우에도 예수가 이 땅에 가져온 그 평화는 근본적으로 종말적인 구원 은사로서의 '하느님의 평화'로 이해되었다.
그런데 요한복음 저자는 독특하게 '하느님의 평화'가 아니라, '예수의 평화'에 관해 말하며 예수의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르다는 점을 강조한다. 요한복음의 고별담론에서 예수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은 것이 아니다"(요 14:27), "내가 이렇게 말한 것은 너희로 하여금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시련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 16:33).
요한복음에 나타나는 '예수의 평화'는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이 세상에서는 얻을 수 없는 초 세상적인 어떤 것이며, 세상적이며 육적인 것을 벗어버림으로써 갖게 되는 내적이며 신비적인 어떤 것인가?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평화'는 어떤 것인가? 예수는 어떻게 그 자신 '평화'를 갖게 되었는가? 예수의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어떻게 다른가? 예수의 평화를 받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요한복음은 어떠한 상황에서, 왜 '세상의 평화'와는 다른 '예수의 평화'에 관해 말하는가?
1.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하는 '세상'
요한복음이 말하는 '예수의 평화'는 어떻게 '세상의 평화'와 다른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요한복음이 어떠한 상황에서 쓰여졌으며, 요한복음에서 지칭되고 있는 '세상'이 어떤 자들을 지칭하는지를 규명해 보아야 한다. 요한복음은 예수의 사후, 유대 회당이나 베드로를 위시한 사도계열의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와 형성된 '요한 공동체'에 의해 주후 1세기의 마지막 10년경에, 시리아에서 쓰여진 책으로 알려져 있다. 학자들은 요한 공동체가 유대교의 회당과는 결정적으로 분리된 집단이며, 사도 계열의 공동체뿐 아니라 당시 위세를 떨치고 있던 세례 요한 종파나 성례주의자, 그리고 육체를 부인하던 영지주의자들과 대립해 있었다는 점을 말한다. 그런데 왜 요한 공동체는 당시 주류를 이루고 있던 모든 종교들과 대립한 것일까?
학자들 중에는 그 원인을 요한 공동체가 당시 유대 회당으로부터 박해를 받고 출교당했던 사람들에 의해 형성된 종파적 집단이었고, 열두 사도를 통해 전승된 제도화된 교회로부터 소외된 이단적 종파의 공동체였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요한 공동체가 주변 종교들과 대립한 것은 그 공동체가 단순히 이단적 종파의 공동체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 공동체가 경험하고 확신한 특별한 신학과 신앙에서 비롯되었다. 그 신앙은 당시 모든 종교들이 구원과 평화를 얻는 것으로 간주하여 추구했던 '신'과 '진리'를 '아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요한복음이 쓰여지던 당시 유대 종교가들은 '본래는 볼 수 없는' 신을 아는 유일한 길은 신의 계시인 '율법'을 알고 지킴으로써 종말에 신의 영광을 보고 신을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가 하면 주후 1세기경 성행했던 세례종파나 성례주의자들은 세례와 제의와 만찬을 통해서 신에 이르는 길을 추구했고, 영지주의자와 신비주의자들은 신과의 합일을 이룸으로써 신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여 금식과 금욕 등의 방법으로 육체를 억제하며, 세상적인 것을 피했다. 한편 로마 권력자들은 힘과 권력을 통해 '로마의 평화'를 추구하면서 그 길이야말로 '진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한복음 저자는 저 종교들과 대립하면서, 신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제시한다. 그것은 역사 안에서 자신의 은 몸으로 신을 나타내 보인 역사의 인물 예수를 보는(요 1:47, 4:29, 14:9, 19:5) 것이다.
복음서 저자는 당시 독자들에게 잘 알려져 있던 영지주의의 이원론적 개념과 사상을 이용하여 요한복음의 서막(요 1:1-18)에서 예수를 '태초부터 신과 함께 있었고, 그 자신이 신이었던 로고스'로 말한다. 그리고 그 '로고스'는 세상을 창조한 자이나, 세상이 그를 알아보지도, 받아들이지도 않았기 때문에 '로고스가 육이 되는'(요 1:14) 사건을 통해서 신을 세상에 나타내 보이고, 마침내 세상이 신의 영광을 보고, 신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요 1:18). 이 점에서 예수는 세상에 빛과 생명을 주는 자로서, 빛, 생수, 길, 진리, 생명, 부활로 묘사되기도 했다. 서막에서 증언된 이 '로고스'는 복음서 전체에서는 처음부터 '아버지와 함께 있는 아들'로서, 아버지의 뜻을 알고, 아버지의 말과 일을 대신하여 세상에 아버지를 나타내 보인 '아들'로서의 예수에 대한 증언으로 진술되었다(요 5: 19-47).
예수는 신이었던 아버지를 앎으로써, 그 자신이 종말적인 구원 은사인 평화를 가질 수 있었다. 그는 신이 어떻게 온 세상을 창조했으며, 어떻게 그 세상을 사랑했는지를 알았다. 신은 어두움에 빠져 있는 세상에 빛을 주기 위해 자기의 아들까지 내어 준다(요 3:16-17). 예수는 그 자신이 신의 뜻에 의해 세상에 보내어짐을 알았고, 신이 그에게 맡긴 일을 수행한다. 그는 자기의 뜻대로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고, 오직 신이 기뻐하는 일을 하며, 신의 영광을 드러내어 신을 나타내 보인다(요 5:30, 7:18, 8:29). 요한복음에서 예수가 병든 사람과 소경을 고쳐주고, 배고픈 사람에게 빵을 주며, 죽은 사람을 살린 행위는 단순한 마술적인 기적이 아니다. 그것은 신의 모습을 드러내어 주는 '표적'과 '징표'(2:11,23, 4:54, 6:26)이며, 신이 그에게 맡겨준 '일들' (5:17, 10:37)이다.
예수는 목마른 사람에게 '생수'를, 배고픈 사람에게 '빵'을, 눈 먼 사람에게 빛'을, 죽은 사람에게 '생명'을 준다. 이것이 온 세상을 사랑하여 모든 목마르고 죽어 가는 사람들을 살리는 신 자신의 모습이다. 그 때문에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신 자신의 현현을 표시하는 "내가 그다"(ego eimi)라는 표현으로 그 자신을 빛, 생수, 생명의 떡, 진리, 생명, 부활로 말한다. 그리고 요한복음서 저자는 과감하게 예수를 신과 동일한 자'(요 5:18), '신과 하나된 자'(10:30), '신' 자신(요 1:18, 10:33, 20:28)으로까지 증언한다. 그러므로 세상이 참으로 신을 알고 종말의 구원 은사인 평화를 얻으려면 그들은 예수의 행동을 직시해야만 한다. 그리고 역사 안에서 행동한 그 예수에게서 신 자신을 보아야만 한다(요 14:6). 사실상 "예수를 알면 신을 알고, 이미 그분을 보았다"(요 14:7).
그러나 당시 많은 종교들은 신을 알기 위해 금식, 금욕, 신비적인 제의에 몰두하면서 역사의 예수를 직시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빵을 먹고 배부르게 해 줄 왕(요 6:15,26)과, 그 출처를 알 수 없는 신비한 인물로서 영원히 죽지 않는 구원자(요 7:27, 12:34)를 추구했을 뿐이었다. 특히 유대인들은 율법과 신의 이름을 빙자하여 예수와 그 제자들을 회당으로부터 출교시켰을 뿐 아니라 자신들의 교리에 어긋나는 사람을 로마에 밀고하여 죽였다(요 9:22, 10:31, 16:1-2). 그리고 로마 제국으로 대표되는 빌라도 역시 '진리'를 추구한다고 하면서도 유대인들의 위협에 몰려 죄없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도록 유대인에게 내어 준다(요 19:3-16).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제자들은 '세상으로부터 택한 자기의 사람들'(요 13:1, 17:6)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 제자들도 사실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 이전에는 전혀 예수가 누구인지를 올바로 알지 못했다(요 2:22, 7:3-10). 예수의 친형제들도 예수를 믿지 않았다(요 7:3-5). 결국 이 점에서 이들은 모두 신'과 '진리'를 알지 못하고, '어두움'과 '거짓'과 '죽음'에 빠져 있는 제상'에 속해 있다.
2. '세상'과 싸워서 얻는 평화
예수는 신의 뜻과 신을 안 자로서, 종말의 구원 은사인 평화와 기쁨을 가졌다. 그런데 신을 앎으로써 예수가 가진 그 평화는 결코 세상으로부터 도피하거나 세상을 떠나서 죽은 후에 얻는 어떤 내면적이며 정신적인 평화가 아니며, 신비적인 제의와 엑스터시를 통해서 얻는 평안도 아니다. 도리어 그것은 세상 안에서, 세상과의 싸움에서 얻어야 하는 것이다(요 15:18, 17:9,15, 16:33). 왜냐하면 구약성서에서 '신을 앎'은 '신의 뜻을 알고' 정의를 수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예수는 첫 서막에서부터 '어두움과 싸우는 빛'(요 1:5)으로 묘사되었고, 요한복음 2-12장에서는 유대인으로 대표되는 불의한 '세상'과 싸우는 계시자로서의 모습이 강조된다. 이 점은 공관복음서에서 예수를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고'('세상에 불을 지르고 분열을 일으키러 온 자'<눅 12:49-51>)로 말한 것과도 일맥 상통한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어떻게 불의한 세상과 맞서 싸우는가? 우선 요한복음에서 불의한 '세상'으로 대표되는 유대인들과 대립하고 있는 예수의 행위를 주목해 보자. 당시 예루살렘의 유대주의자들은 "구원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오며"(4:20),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려야 한다"(요 4:20)는 교리와 이데올로기를 만들어서 갈릴리와 사마리아 사람들을 멸시하고 차별했다. 예수는 "그리심 산도 예루살렘에서도 아닌 데서 영과 진리로 예배드릴 때가 왔다"(요 4:21-23)고 말하면서, 예루살렘 성전 체제의 차별적인 이데올로기를 깨뜨려 버린다. 예루살렘 성전 대신 자신의 육체를 성전으로 내세운 예수의 말(요 2:21)과, 예루살렘 성전을 허물라는 예수의 말(요 2:19), 장사하는 집으로 변질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서 상을 뒤엎고 돈 바꿔주는 사람의 돈을 쏟아버린 예수의 행동은 당시 예루살렘 성전 체제를 빌미로 동족을 멸시하던 유대인들의 불의를 철저히 고발하고 그들과 맞서 싸운 행동이다.
예수는 당시 율법과 진리를 안다고 자처하면서 자기들의 교설과 교리를 신봉하지 않는 사람들을 모두 죄인으로 규정하고 죽이려 한 유대인들과 맞서 싸운다. 요한복음에서 유대인은 율법을 연구하고 그 율법을 잘 아는 사람들로 말해진 반면, 예수는 율법도 알지 못한 무식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으로 진술된다(요 7:15). 그러나 예수는 유대인들이야말로 율법을 빙자하여 불의를 저지르고 있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폭로한다. 정말로 간음죄를 지은 사람은 간음죄로 끌려온 여인을 돌로 치려고 하는 바로 그 유대 남자들이며(요 8:7), '태어나면서부터 소경 되었다가 눈 뜬 사람'이 아니라, 그 소경을 멸시하고 죄인으로 비난하며 출교시키려고 했던 유대인들이야말로 두 눈을 뜨고서도 하느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장님이며 죄인이라고 고발한다(요 9:41).
유대인들은 스스로 신을 잘 섬기며 예배한다고 자랑했지만 사실은 신의 사랑과 자비를 모르고 부와 권력을 탐하며, 세상의 권력자에게 종속되는 삶을 살았다. 유대인들은 빵을 먹고 배부르기 위해 예수를 따라다녔고(요 6:26), 자기들에게 부를 가져다 줄 것으로 생각하여 예수를 억지로 자기들의 왕으로 삼으려 하기도 했다(요 6:15). 그런가 하면 "우리의 왕은 가이사 밖에 없습니다"(요 19:15) 하고 로마 제국에 아부하며, 그들의 힘을 빌어 자신들의 적대자를 살해했다. 예수는 이러한 유대인들의 행위를 비판한다. 그는 로마 권력과 모든 세상 권세를 이기는 '하느님의 권세'에 관해 말하며, 그 자신이 그 모든 권세를 가진 자임을 천명한다(요 10:15-18, 18:37, 19:11).
결국 유대인들은 입으로는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모든 것을 자기들의 잣대로 판단하며(요 7:15), 자신들의 영광을 위해 일할 뿐이었다. 그들은 신의 뜻'과 '진리'를 알지 못하고 인종과 지역과 성별과 계층으로 사람을 차별하고 멸시하며 살해했다. 예수는 이러한 위선적인 유대인의 행위를 폭로하며 비판한다(요 8:28-31), 그리고 예수 자신은 '자기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를 세상에 보낸 아버지의 말과 일을 하며, 아버지의 영광만을 구한다(요 7:18, 8:50)고 말함으로써 유대인들의 행위의 본질을 문제삼는다.
한편 예수는 당시 '진리'를 안다고 자처하던 로마 제국과도 싸운다. 로마 제국의 대표자로 나타나는 빌라도는 예수가 무죄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실상 이 점에서 빌라도는 어떻게 보면 '진리'를 알았다. 그 때문에 빌라도는 예수를 놓아주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라고 소리치는 그 소리에 굴복했고, 만일 그가 예수를 놓아준다면 로마 황제를 반역하는 것이 된다(요 19:12)는 유대인의 위협에 굴복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안정을 위해서 무죄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도록 내어 준다. 빌라도는 진리를 따르지 않음으로 해서 결국 그 자신이 추구했던 진리의 길을 찾지 못하고 말았다. 참으로 신과 진리를 아는 자는 불의와 맞서 싸우며 정의를 실천해야 한다. 예수는 진리를 알면서도 그 길을 따르지 않는 자들에게 또한 맞서 싸운다.
3. '세상'을 사랑하는 예수의 평화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어두움'과 '거짓'에 쌓여 있는 '세상'과 맞서 싸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예수는 온 세상을 창조한 자로서, 아버지가 자기에게 준 세상의 모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으려고 애쓴다(요 18:9). 예수에게서 악한 '세상'은 심판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자기의 창조물이며, 사랑과 구원의 대상이다. 그 때문에 복음서 저자는 "하느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다.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로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요 3:17) 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흔히 정의나 신의 이름으로 불의한 자를 심판하고 죽인다. 그러나 예수는 아버지가 자기에게 맡겨 준 온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의 우리 안에 들어오지 않은 다른 양들을 저주하거나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양들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바친다(요 10:11-16). 예수가 원한 것은 세상에 대한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다. 다만, 예수의 말을 듣지 않고, 그 길을 거부하는 세상은 자기들의 죄 때문에 어두움에 머물고 있다(요 8:9).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예수는 어두운 세상에 빛을 던지기 위해 세상 안에서 자신의 온 몸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나타내 보인다. 예수는 당시 유대 사람들이 멸시하고 차별했을 뿐 아니라 상종도 하지 않던 갈릴리 지역과 사마리아 지역까지 들어가 인종, 지역, 신분, 계층, 성별의 차별 없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만나서 그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나타내 보인다. 그러나 세상은 그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고 본래는 하느님의 한 피조물이었던 자들이 서로 반목하며 미워하고 죽였다. 그리고 하느님의 일을 하는 예수까지 미워하며 죽이려 했다. 그 상황에서도 예수는 하느님이 자기에게 준 세상의 모든 사람인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되 끝까지 사랑했다(요 13:1). 예수는 당시 노예들이 하듯이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김으로써 사람들을 섬기는 신의 모습을 나타내 보인다(요 13:2-20). 그리고 자신의 살과 피를 생명의 떡으로 내어 주는(요 6:51-59). 십자가의 사건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명백히 드러낸다(요 17:1-6).
유대인들이 자신을 박해하고 죽이려 하고, 제자들이 자신을 버리고 배반하며 부인했을 때에도 예수가 자기의 평화를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모든 사람들과 '세상'에 대한 사랑 때문이 아니었을까? 불의한 '세상'에 대한 예수의 사랑은 수없이 자신을 배반하고 거역했던 이스라엘을 끝까지 용서하고 사랑한 하느님의 사랑, 바로 그것이었다. 만일 예수가 세상에 대한 사랑이 없었다면 그의 제자들이 모두 자기를 버리고 배반했을 때 예수야말로 '슬픔'과 '고통' 속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이 세상을 사랑하여 자기의 독생자를 주었듯이 예수도 세상을 사랑하여 자기 목숨을 바친다.
요한복음에서 '사랑'은 신을 알고 있다는 확실한 징표이다. 아니, '사랑'은 바로 하느님 자신이다. 이것은 요한 서신에서 더 분명하게 언급되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도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요일 4:16). 하느님을 알고, 그의 뜻을 알았던 예수는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 그 자신도 하느님이 세상을 사랑한 것처럼 끝까지 세상을 사랑한다. 그리고 그의 제자됨의 자격을 전적으로 이 '사랑'의 행위에 두었다. 예수의 참된 제자는 단순히 베드로를 위시한 사도계열의 제자들을 뜻하지 않는다. 예수는 말한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나의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요 13:35). 예수는 제자들에게 말한다. "나의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 15:12-13). 예수는 그 자신이 아버지의 사랑을 안 자로서, 세상을 끝까지 사랑하여 목숨을 주고, 제자들을 향하여 그 사랑을 따르라(요 21:15-19) 고 요구한다.
4. '세상'을 이기는 평화
예수는 '세상'을 사랑하여 어두운 세상에 빛과 생명을 주고, 참 평화를 주기 위해 일했지만, 그것을 알아보지 못한 '세상'에 의해 로마에 밀고되어 살해당하고 말았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예수는 실패자이며 패배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복음 저자는 예수야말로 세상을 이긴 자'(요 16:33) 라고 증언한다. 뿐만 아니라 예수가 주는 평화를 가지면 담대함을 가지고 세상의 모든 박해와 시련을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예수는 제자들이 곧 당하게 될 세상의 박해에 대해서 언급하며 이렇게 말한다. "보아라.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제각기 자기 집으로 흩어져 갈 때가 올 것이다. 그 때가 벌써 왔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나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이렇게 말한 것은 너희로 하여금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시련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 16:32-33).
예수는 어떻게 그 자신이, 세상을 이기는 평화를 가지게 되었으며, 또한 그가 주는 평화는 어떻게 제자들로 하여금 근심을 이기고 담대하게 세상의 시련과 박해를 이기게 하는가? 예수 자신은 그가 세상의 박해 속에서 십자가에 달리고, 제자들이 모두 자신을 버리고 흩어져 갈 바로 그 때에도 아버지가 자기를 버려두지 않고 함께 있다(요 16:32)는 신앙으로, 기쁨과 평화를 가질 수 있었다. 본래 유대교에서 '신과 함께 거한다'는 것은 종말에 신의 영광을 보며, 구원과 평화를 얻는 것이었다. 복음서 전체에서 예수는 '아버지와 함께 거한 자'(요 1:14,39, 4:20,23, 15:7, 16:4, 17:26)로서,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가 기뻐하는 일을 행한다. 그 때문에 아버지는 그 아들을 기뻐하여 그에게 자기의 전권을 맡기고 모든 권세를 준다(요 5:20, 17:10). 아들이 아버지의 일을 끝까지 수행하여 십자가에서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낼 때, 그 아버지는 아들을 영화롭게 하며, 영광과 생명을 준다(요 17:1-5). 예수는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았다. 그는 십자가의 그 길이 죽음이나 세상에 대한 패배가 아니라, 도리어 그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영광과 생명을 얻는 승리의 길임을 알았다.
요한복음 저자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한 번도 유대인으로부터 죽임 당한 사건으로 진술하지 않는다. 저자는 그것을 '아버지께로 감'(요 13:1, 17:13), '십자가에 올리움'(요 12:32), '영광을 받는'(요 17:1-26) 사건으로 진술할 뿐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세상의 죄'가 드러나고 '세상이 심판을 받는' 일로 증언한다(요 16:8-11). 왜 사실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임 받았는데, 도리어 세상이 죄와 심판을 받는다는 것일까? 그것은 세상이 자신들의 고집과 거짓된 교설로 예수를 살해함으로써 그들 자신이 그토록 보려고 추구했던 신의 영광과 신 자신을 보는 길이 막혀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세상의 실패며, 심판이다.
이 점에서 제자들은 십자가의 길을 간 예수야말로 온 세상에 신을 알리고 보여줌으로써 세상을 심판하며, 세상을 이긴 승리자라는 사실을 보아야 한다. 그 때에는 제자들도 세상의 시련과 박해를 이기고 담대함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 있는 동안은 아직 그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모두 근심에 쌓여 있다(요 16:20-22). 그러나 예수는 아버지께로 가면서, 결코 제자들을 홀로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요 14:18). 그는 제자들과 거처를 함께할 것이다(요 14:13). 그는 '돕는 자'이며 '진리의 영'인 '보혜사'를 보내어 예수가 누구인지를 증언할 것이다(요 16:7-15). 그리고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가 누구인지를 올바로 보게 할 것이며, 신 자신을 나타내 보일 것이다(요 16:16).
그러므로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 일을 통해 세상은 예수를 보지 못하지만 제자들은 비로소 예수와 아버지를 올바로 볼 수 있기(요 16:16, 17:26) 때문이다. 예수가 가서 보혜사를 보내어 모든 것을 알려 주면, 제자들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온 세상을 사랑하여 독생자를 보낸 아버지의 사랑을 알뿐 아니라, 이제는 아버지가 친히 그들을 사랑하신다(요 17:23)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복음서 저자의 증언에 의하면 실제로 제자들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 이후 비로소 이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수가 준 그 평화를 가지고 세상의 박해와 시련 속에서도 담대함을 가지고, 자신의 목숨을 버리며 신의 사랑을 알린다(요 21:18-19). 이로써 온 세상이 신의 사랑을 알고 따르며, 사랑의 행위 안에서 하나가 되는 참 평화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요 3:16, 20:31).
이렇게 볼 때,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가 세상을 이겼다는 것은 결국 예수의 행위를 통해 신의 모습을 보고 믿게 된 사람들이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예수의 길을 따르게 되었다는 점에서 승리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단순히 예수를 쫓아다닌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그 '따름'은 예수처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람들을 사랑하며 자신의 목숨을 '내어줌'을 뜻한다(요 13:36-38, 21:19). 그러나 바로 이렇게 자신의 목숨을 내어주는 그 길이 온 세상에 빛과 생명을 주며, 모든 사람을 사랑 안에서 하나되게 하는 승리의 길이다.
5. 하나됨을 요구하는 평화
예수는 아버지를 안 자로서, 세상 안에서 아버지의 말과 일을 하며, 자신의 목숨을 주는 '마지막 일'을 수행함으로써 아버지를 알리고 제자들에게 참된 평화와 기쁨을 선사했다. 이 평화와 기쁨을 갖게된 제자들은 어떻게 되는가? 예수의 평화를 받지 못하고, 근심과 걱정에 쌓여 있을 때, 제자들은 모두 예수를 배반하고 떠나갔다. 그러나 예수가 아버지께로 간 십자가 사건 이후 제자들은 비로소 예수가 세상에 생명을 주는 신 자신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올바로 깨닫는다. 부활한 예수를 만난 후 도마가 고백한 '나의 주, 나의 하느님'(요 20:28)이야말로 예수에 대한 가장 올바른 인식이다. 제자들은 부활한 예수로부터 평화의 인사를 받고(요 20:19), 예수가 아버지로부터 보냄 받은 것처럼 그들도 예수로부터 세상에 보냄 받는다(요 20:19-23). 그것은 예수가 아버지와 하나인 것처럼 모든 사람이 사랑의 행위에서 '하나'가 되어 참된 생명의 길을 걷게 하기 위함이다(요 17:22).
예수의 고별설교는 모든 사람이 '하나됨'을 이루는 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예수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아버지께 간구하며, 처음에는 세상 모든 사람이 아니라, 아버지가 '자기에게 준 사람들'만을 위하여 간구하는 것처럼 나타난다(요 17:9). 그러나 예수는 자기가 보낸 제자들의 말을 듣고 자기를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빌며,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빈다(요 17:20). 그리고 마침내 세상으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자신을 보냈다는 것을 믿고, 모든 사람이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간구한다(요 17:15-22). 온 세상이 예수를 아버지로부터 보냄 받은 자로 믿고, 하나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요한복음에서 모든 사람이 '하나'가 된다는 것은 신비적인 차원에서의 신과 하나됨을 뜻하지 않는다. 아버지와 예수의 사랑의 행위에 동참하여 그들도 사랑의 일로 하나가 되는 것을 뜻한다(요 14:1-15:17). 그 때문에 예수의 평화를 따라 '하나됨'을 이루려는 사람들은 결코 자기들의 힘이나 학식, 무력을 통해 하나됨을 이루려 하지 않는다. 또 그들은 금식이나 기도, 신비적인 제의와 엑스터시 속에서 신과의 합일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직 자신들을 사랑하여 목숨을 내어 준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에 힘입어서만(요 15:6), 자신을 내어 주는 사랑으로 하나됨을 이룬다.
요한복음에는 공관복음서에서 볼 수 있는 성례전이라든지, 세례, 성만찬에 대한 진술들이 들어 있지 않고, '교회'에 대한 개념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요한복음이야말로 당시의 세례종파나 밀의 종교들과 유대교와는 달리 율법이나 교리, 제의들을 뛰어넘어 오직 사랑으로 하나되는 참된 교회와 공동체의 모습을 제시해 준다. 공동체에 들어와서 하나됨을 이루기 위해 예수가 요구한 것은 세례나 신비적인 제의가 아니고 유대적인 율법과 교리도 아니다. 그것은 단 하나, '사랑'의 행위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를 믿고 아버지를 믿으라는 요구는 예수와 아버지가 나타내 보여준 그 '사랑'을 깨닫고, 사랑으로 자기의 목숨을 내어 줌으로써 하나됨을 이루라는 요구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맺는 말
지금까지 요한복음을 중심하여 '세상의 평화'와 다른 것으로 진술된 '예수의 평화'에 관해 고찰해 보았다. 여기에서 우리는 마지막으로 요한복음 저자가 무슨 목적으로 '세상의 평화'와는 다른 '예수의 평화에 관해 진술했는가를 찾아보아야만 한다. 요한복음의 상황과 관련하여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은 대략 다음과 같이 이해되었다. 즉 주후 90년 유대교가 공식적으로 이단에 대한 저주 법령을 만들어서 요한 공동체를 박해하던 상황에서, 요한 공동체에 속해 있던 저자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세상'의 시련과 박해 속에서도 '세상'과 싸워 이긴 승리자로 부각시킴으로써, 그 공동체 전체가 용기와 확신을 얻으려 했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주장은 요한복음 저자가 세상의 박해와 시련을 이기는 것으로서의 '예수의 평화'를 말한 이유를 밝혀 주는 것 같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평화'는 단순히 어떤 '두려움'과 '불안'을 극복하는 것이 아닌, 종말적인 구원 은사로 진술되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신을 앎'으로써 얻게 되는 종말적인 구원 은사로서의 평화와 기쁨,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뜻한다. 그 때문에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평화'가 '세상의 평화'와 어떻게 다른지는 당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신에 이르는 길을 추구하던 종교들의 행태와 비교함으로써 보다 분명히 드러날 수 있다. 말하자면 요한복음에서는 당시 신을 알고 구원과 평화를 얻기 위해서 자기들의 방식으로 애쓰던 세상 모든 사람을 문제삼으면서, 그들이 추구하던 것과는 다른 '예수의 평화'를 말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요한복음 저자가 볼 때 유대교를 위시한 당시의 종교들과 로마제국은 물론, 베드로를 중심한 사도계열의 공동체와 예수의 친형제들까지 그 누구도 사실은 예수를 올바로 깨닫지 못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세상에 평화를 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신들의 잣대로 힘없는 사람을 억압하고, 종교적인 편견과 율법으로 지역과 인종, 남녀, 신분, 계층을 따라 사람을 차별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입으로는 신과 진리를 내세우고, 평화를 준다고 말하지만 사실상 그들은 약자를 지배하고 억압하며 착취하면서 자신들만의 부와 안정과 안일을 추구한 자들이었다. 이 점에서 세상이 주는 것은 사실 평화'가 아니다. 그것은 착취와 억압과 죽음이다.
그러나 온 세상을 사랑하여 그 아들을 보낸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로부터 보냄 받아서 세상에 빛과 생명을 주기 위해 온 예수는 그 자신이 종말의 구원 은사인 평화를 가지고, 세상의 불의와 맞서 싸우며 세상이 만들어 놓은 거짓 이데올로기와 법과 교리를 깨뜨리며 그 자신의 평화를 세상에 준다. 예수는 저 유대인들처럼 자기와 같지 않은 사람들을 내어쫓거나 그들의 목숨을 빼앗지 않는다. 도리어 예수는 세상의 모든 사람을 사랑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어 줌으로써 신을 알고,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을 보여준다. 그리고 온 세상으로 하여금 자기들이 만든 율법과 교리와 진리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을 죽이고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신과 예수가 보여준 것처럼 사랑으로 하나가 되라고 요구한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유대인들로부터 멸시받던 지역의 비천한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율법도 알지 못하고 배우지도 못한 사람으로 부각된다. 그러나 바로 이 예수는 자신의 온 몸으로 신의 사랑을 알린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사랑의 행위 안에서 신과 예수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모든 차별의 벽을 깨뜨리고 하나되는 길을 보여준다. 예수는 당시 유대인들이 멸시하던 지역인 갈릴리와 사마리아를 찾아가서, 유대의 고귀한 학자인 니고데모 뿐 아니라 죄인으로 취급당하던 사마리아의 여인과 대화한다(요 3-4장). 그는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이데올로기와 약자를 억압하는 것으로 변질된 유대교의 율법의 부당성을 폭로하고, 그들이 만들어 놓은 법규를 깨뜨리며 생명을 살린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지역주의와 종교적 편견, 신분, 성별의 차별을 깨뜨릴 뿐 아니라, 베드로를 위시한 사도계열의 제자들의 특권도 깨뜨린다. 종래의 신비적인 메시아관이나 이스라엘에게 부를 가져다 줄 왕 메시아에 대한 편견도 깨뜨린다. 로마 제국의 불의와 편견을 폭로하고, 유대교의 분단 이데올로기를 극복한다. 요한복음에서는 사실상 이원론적인 영과 육의 이데올로기도 극복된다. 요한복음 저자는 예수의 '살'을 '생명의 떡'(요 6:49-58)이라고 말함으로써, 사실상 당시 영지주의에서 신을 아는 것과는 거리가 멀고, 더럽고 추하며 죽는 것으로 간주된 '육'을 도리어 '생명'을 주는 것(요 6:51-58)으로 증언한 요한복음에서는 편협한 가족주의도 넘어선다. 예수의 어머니는 곧 '예수의 사랑하는 제자'의 어머니가 된다(요 19:26). 예수의 떠나감은 아버지와 함께 영원히 머물러 있음이고(요 14:1-25), 제자들의 슬픔과 근심은 기쁨이다(16:20-24). 영원히 살아 있는 인물로서의 '하느님의 아들'과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의 아들'이며, '볼 수 없었던 신'(요 1:18)은 물과 피를 홀리며 죽는 인간 예수(요 19:31-37)로 증언된다. 당시 철학에서 추상적인 진리와 길, 생명은 모든 세상 사람을 사랑하여 목숨을 내어 주는 사랑의 행위로 역사화 된다. 요한복음에서는 인간 위주의 구원관도 극복된다. 종말의 메시아는 사마리아 사람은 물론, 그 지역의 모든 가축까지 물을 먹을 수 있게 해 주는 자(요 4:12)로 나타난다. 세례와 성례는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고(요 13:1-20) 자신의 살을 내어주는 사랑의 사건(요 6:48-58)으로 증언되었다.
이렇게 볼 때 요한복음에서 '세상의 평화'와 다른 '예수의 평화'를 말한 것은 결국 모든 사람이 헛되게 신을 찾고 율법을 내세우면서 편견과 차별을 가지고 힘없는 사람을 박해하고 죽일 것이 아니라, 도리어 사람들을 섬기며,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는 사랑의 행위로 하나됨을 이루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 그것을 통하여 세상의 모든 박해와 시련을 이기고, 세상으로 하여금 그 길을 돌이켜 신의 사랑의 길을 따르게 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모든 어두움과 죽음의 세력을 극복하고 영원한 생명과 참된 기쁨을 누리는 참 평화를 얻게 함이 아닌가?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여전히 평화와 정의의 이름으로 분단의 벽을 쌓고 차별과 갈등과 전쟁을 일으키는 불의한 세상에 맞서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평화'를 증언해야 한다. '예수의 평화'로 이 세상에서 모든 불의와 거짓을 깨뜨리고 모든 사람이 하나가 되는 참된 평화를 수립해야 한다. 세상이 주는 그 평화는 거짓 평화이며, 그것으로는 세상에 빛과 생명을 줄 수가 없다.
출처: 신상의 소리 글쓴이: 아모스
|
출처: 성공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 성사모 원문보기 글쓴이: 다락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