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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찬장군 동상, 경기 수원시 팔달구 팔달공원 |
강민첨
강민첨영정 [姜民瞻影幀]
1788년(정조 12)에 박춘빈(朴春彬)이 모사(模寫)한 강민첨의 초상화. 화면 상부에 기록된 제기를 보면, <晉州姜氏諱民瞻圖像 …戊申十月晉州兵使李延弼使畵師朴春彬移摹送寄于淮陽冊舍>라고 하여, 이 화상이 88년 박춘빈이라는 화사(畵師)에 의해 모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화상의 형식은 복두에 정장을 하고 홀(笏)을 든 우안 8 분면(右顔八分面)의 반신상으로, 고려시대 공신상 형식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의자에는 호피가 깔려 있는데, 이것은 모사 당시인 18세기 후반의 지배적인 상용형식을 빌어 온 것으로 보인다. 현재 고려시대에 재세(在世)했던 인물의 초상화가 희귀한 실정이므로 이 모사본을 통해서나마 그 전체적인 표현형식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보물 제588호.
강민첨 [姜民瞻, ?(?) ~ 1021(현종 12)]
고려시대 장군. 본관은 진주(晉州). 목종 때 문과(文科)에 급제, 1012년(현종 3) 안찰사(按察使)로서 영일(迎日)·청하(淸河) 등지에 쳐들어온 동여진(東女眞)을 격퇴하였다. 16년 내사사인(內史舍人)이 되고, 18년(현종 9) 거란[契丹]의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으로 쳐들어오자 강감찬(姜邯贊)의 부장(副將)으로 출전하여 흥화진(興化鎭)에서 적을 격파하였으며, 개경(開京)에서 거란군을 추격하여 자주(慈州)에서 크게 이겼다. 그 공으로 응양상장군주국(鷹揚上將軍柱國)이 되고 추성치리익대공신(推誠致理翊戴功臣)에 녹훈되었다. 이듬해 지중추사병부상서(知中樞事兵部尙書)에 올랐다. 죽은 뒤 태자태부(太子太傅)에 추증(追贈)되었고, 문종 때 공신각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