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한남금북정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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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한 기원과 보살의 축수로 시작
한북정맥 이후 20일 만에 한남금북정맥 속으로 들어갔다.
북에서 남하하는 우선 순위로 보면 먼저 한남정맥으로 들어가야
하겠으나 대부분이 수도권이란 점을 감안하여 겨울로 미뤘다.
대간을 기준으로 하면 당연히 속리산 천황봉에서 분기하는 한남
금북을 먼저 밟는 것이 순서리라.
2003년 10월 25일 토요일,
미명의 출가가 다시 시작되었다.
남부터미널에서 첫버스편으로 도착한 죽산(경기도 안성시)이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나.
뭘 물어보려 해도 상대가 없으니.
어렵살이 확인된 것은 칠장리행 지방버스를 타려면 귀한 시간을
많이 낭비해야 한다는 것.
유감스럽게도 첫날부터 택시 이용이 불가피했다.
종주자들을 자주 태운다는 죽산 개인택시 정길성은 늙은 이에
대한 특별 배려인가.
스스로 택시비를 감해 주었다.
처음 찾은 칠장사의 이른 아침은 여느 산사와 다름 없이 정적이
감돌 뿐이었다.
국보와 보물, 경기도 문화재 자료가 수두룩한 명찰, 고찰이다.
낙동정맥 천성산의 일화처럼 혜소국사(고려)의 교화로 일곱
악인이 현인이 되었으며 그들이 이 곳에 오래 기거했다 해서
칠현산(七賢)칠장사(七長)란다.
칠현산의 전 이름은 아미산인데 이런 이유로 개명되었단다.
칠장사는 벽초 홍명희의 실명 역사소설 임꺽정에도 등장한다.
(갓바치대사 병해와 임꺽정)
칠장사 일주문(칠장사 자료에서 전재)
산사의 경내에 든 늙은 山나그네가 비록 불자는 아니지만 전혀
생소한 산속으로 떠나는데 경건한 기원이 어찌 없겠는가.
잠시 두루 살피려 했으나 어찌나 고요한지 발자국 소리내기 조차
민망해 머뭇거리고 있는데 합장 순례를 하던 한 노보살이 반기며
칠장산 길을 안내하고 늙은 이의 장도를 축수해 주었다.
코 없는 장님들만 사는 곳인가
곧 칠장산에 올랐다.
해발 492m에 불과하나 호남, 금남, 금남호남 세 정맥의 분기점인
전북 진안의 주화산(일명 주줄산)처럼 한남과 금북, 한남금북 등
3정맥의 접점으로 의미있는 산이다.
그러니까 이 아침에 떠나면 적어도 한 번은 곧 다시 와야 한다.
한남을 김포 문수산에서 시작해서 여기를 거쳐 바로 금북으로
진입하려는 계획이니까.
칠장산의 3정맥(한남금북, 한남, 금북) 분기점
한데, 칠장사는 지근의 칠장산을 두고 상거가 꽤 먼 금북정맥의
칠현산을 챙기는 까닭이 무엇일까.
일주문의 현판이 칠현산칠장사다.
그 때문에 엄연히 다른데도 이 두 산을 이명동산으로 보는 이까지
있는 것 아닌가.
아리송한 점이다.
재회를 기약하고 정상에서 분기점으로 되돌아와 동진을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골프장을 만났다.
정맥을 뭉개버린 안성컨트리클럽이다.
골프장들이 언제 정맥 사정 봐주었던가.
종주자들이 안중에 있겠는가.
그렇다면 이 늙은 이 눈에 라운딩중인 골퍼들도 없다.
낙동정맥 통도사골프장에서 했드시 필드를 무단횡단했다.(백두
대간 52번 글 참조)
컨트리클럽 정문 앞 17번 국도상의 걸미고개에서는 심한 절개로
정맥 진입이 난감했다.
겨우 찾은 정맥에 오르다가 욕을 쏟아내지 않고는 참을 수 없는
참상이 목도되었다.
소위 식용개 사육장 산비탈에 마구 버린 병사(病死?)한 크고 작은
개들이 썩고 있었다.
더러는 뼈만 원형대로 고스란히 남은 채로 였다.
아무리 축생이라지만 저렇게 잔인할 수가....
참으로 기이하고 이해되지 않은 것은 악취가 진동한데도 그대로
방치되고 있다는 점이다.
코 없는 장님들만 사는 곳이란 말인가.
그러지 않고서야 어찌 잠자코 있단 말인가.
개로 환생했다가 꼭 저 꼴이 되어라.
아니, 축생도(畜生道: 불교의 三惡道의 하나)에나 떨어져라.
지장보살이라 해도 제도를 포기하고 말 몹쓸 인간들 아닌가.
마이산의 미스터리
저주를 퍼붓고 난 후에는 늙은 이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래서 더 뛰듯 했다.
애매모호한 데서 다리품 팔기(소위 알바)가 일쑤였다.
버려진 벌목지대들이 진행을 훼방했다.
그래도 가시덤불, 칡넝쿨들의 저항이 다소 수그러든 계절인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했다.
죽산면 당목리와 용설리를 넘나드는 이른 바 도화동고개 마루의
용설리쪽 절개지에 선 새 집이 인상적이었다.
걸음을 돌려 가보았다.
이사짐이 들어오고 외부의 마무리 공사가 진행중이라 어수선한
중에도 한 쪽에서 굽고 있는 바비큐 돼지고기에 목젖이 떨어질
지경이었다.
수원의 (주)대원공영(대표이사 함재근)이 지은 건물이란다.
원매자를 기다린다는데 용도가 애매하게 보였다.
이 늙은 이가 정녕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나 보다.
대간에서처럼 정맥에서도 옮겨 앉을 만한 곳에 대한 미련을.
의존하고 있는 50.000:1 지도에서 대강 확인하며 나아갔다.
200m ~ 400m 대의 산과 봉이라면 그 자락들이 개간, 개발됐을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이 현실이다.
당연히 산재한 마을들을 양 어깨에 끼고 가야 한다.
농로, 임도, 마을이 끌어들인 도로를 따르거나 건너는 일 또한
비일 비재다.
산과 봉, 마을 이름들이 토속적인데 반해 바가프미산, 도고리봉
등 수입품 냄새가 진한 것도 있다.
황색골산으로도 불리는 353m 도고리봉에 오르기 직전의 안부
저티(겨티?)고개는 지리적인 의미가 있다.
잠시 경기도와 충청북도의 도계(道界)가 되는 한남금북정맥에서
이 고개는 양도민의 교통요지였으니까.
예전엔 안성시 죽산면 용설리와 음성군 삼성면 대사리, 즉 경기와
충북 도민을 연결해 주는 역할을 했다.
마이산으로 이어지는 정맥 차현고개는 중부고속도로로 인해
짤리고 화봉육교가 들어섰다.
마이산(馬耳)은 금남호남정맥 진안의 마이산과 한자가 같다.
그러나 말의 두 귀같은 마이산이 아니다.
주변 지명에도 마이는 없는데 어데서 따온 이름일까.
망이산이 마이산으로 변음됐다 하나 하필이면 馬耳인가.
어찌 됐건 망이산성터와 봉수대터가 주목을 받고 유적을 발굴중
이라는데 마이산의 미스터리를 풀어줄 자료들이 나올까.
마이산 정상석(상)을 지나 얼마 가지 않아 또 정상석(하)
그런데 어느쪽이 진짜 마이산 정상인가.
표석이 두 곳에 각각 있으니 말이다.
이정표에는 인색하기 그지 없으면서도 값 비싼 오석들을 마구
겹치기로 세워놓다니.
백두대간 도솔봉(소백산 구간)의 재판이다.
아쉬운 마음으로 귀로에
전형적인 가을 날씨가 진행을 수월하게 한 것인가.
숱한 훼방과 실의(失意)에도 속도감 있게 동진을 거듭하여 어느
결에 도(道)를 바꿔버렸다.
경기에서 충북으로.
안성시에서 음성군, 죽산면에서 삼성면으로.
해 안에 삼성면 대야리 도로에 내려선 나는 다시 한 번 소홀한
준비를 탓했다.
당초의 예정은 여기까지 이틀을 잡았는데 하루에 마쳤음에도
지도가 없어 다음 구간을 이을 수가 없으니까.
종이 한 장의 무게 때문이었겠는가.
아쉬운 마음 안고 귀가할 수 밖에.
그래도 시작이 반이며 시작이 좋아야 끝도 좋다잖은가.
첫 날이 좋았으니 순항할 것이다.
귀로를 찾으려면 삼성면 소재지로 철수해야 했다.
북쪽으로 도로가의 제법 큰 공장에서 퇴근하려는 근로자들이
회사 버스쪽으로 몰려 나오고 있었다.
승용차와 승합차들의 출입도 빈번했다.
나는 정문 수위실로 가서 수작을 걸었다.
중년의 호인형 수위는 승용차 한 대를 세웠다.
뭐라 했는지 젊은 운전자가 나와서 트렁크 문을 열고 내 배낭을
받아 넣었다.
풍천실업주식회사(Starcom BMC) 성형팀 金基榮이다.
산이 싫어서 오르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을까.
이러 저러한 이유들 때문이지.
김기영도 그런 젊은 이중 하나다.
그가 산과 더불어 행복하기를 축수하는 것으로 고마움을 표할
수 밖에 없다.
그의 도움이 있었기에 귀로가 편했으니까.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