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버지가 이끄는 말구르마 앞자리에 쭈굴쳐 타고 앉아 아버지만큼 젊은 조랑말이
말꼬리를 쳐들고 내놓은 푸른 말똥에서 확 풍겨오는 볏짚 삭은 냄새가 좀 좋았다고
말똥이 춥고 배고픈 나에게는 따뜻한 풀빵 같았다고 1951년 하필이면 어린 나의 생일날
일기장에 침발린 연필 글씨로 쓰여 있었다
오늘, 그 푸른 말똥이 그립다
평사리 봄밤
-최영욱
구레 지나
지리산이 전해주는 파르티잔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평사리 있다
하동 지나
섬진강이 전해 주는 '토지'의 한 서린
이야기를 듣다 보면 평사리가 있다
그곳엔 봄이면 꽃이 피는데
그것도 무더기로 피워 대는데
서울의 노동자 부부에게 한 소쿠리
부산의 중년 부부에게도 한 소쿠리
대전 광주에서 왔다는 팔팔한 젊음에게도
한 소쿠리 그것도 고봉으로 퍼주고선
밤이면 쓸쓸하다
햇 봄 묵은 정 다 퍼주고
신이 게으름 피운다는 윤이월 봄밤에
평사리가 참 쓸쓸하다
봄 날의 사진 한 장
김병호
늙은 사진사가 어둠을 감았지요
하나 두울, 셋
세상 가장 뜨겁고 환한 햇살이
한꺼번에 터졌지요
성당의 먼 종소리를 타고 흐르던
연분홍 살구꽃잎이
꽃무늬 양산에 번지고
수줍게 웃던 어머니는, 햇살 속에
한없이 부풀어 올랐지요
꽃의 시간을 모아 색을 만들고
뿌리의 시간으로 향을 만들듯
낡은 사진 한 장에 새로 피는 봄
어머니는 처녀적마냥 숨이 차오르는 것이지요
오래된 가지에 다시 오르는 꽃기운 마냥
햇살이 잔물결치는 뜨락에
연분홍 살구꽃잎 송이송이 날리면
그 꽃잎 타고 흐르는 노란 나비
너푼너푼 노닐다가 어느 햇살에 몸바꿔
내 어머니 되었지요
봄햇살 양수처럼 흐르고
다시 살구꽃잎 날리면, 나는
늙은 사진사가 감은 어둠으로 들어가
어머니에게 연애 한번 걸고 싶은 거지요
봄 햇살 속의 어머니를, 나는
그만 처녀로 놓아주고 싶은 것이지요
아무르 강가에서
박정대
그대 떠난 강가에서
나 노을처럼 한참을 저물었습니다
초저녁 별들이 뜨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 낮이
밤으로 몸 바꾸는 그 아득한 시간의 경계를
유목민처럼 오래 서성거렸습니다
그리움의 국경 그 허술한 말뚝을 넘어 반성도 없이
민가의 불빛들 또 함부로 일렁이며 돋아나고 발 밑으로는
어둠이 조금씩 밀려와 채이고 있었습니다, 발 밑의 어둠
내 머리위의 어둠, 내 늑골이 첩첩이 쌓여 있는 어둠
내 몸에 불을 밝혀 스스로 한 그루 촛불나무로 타오르고 싶었습니다
그대 떠난 강가에서
그렇게 한참을 타오르다 보면 내 안의 돌멩이 하나
뜨덥게 달구어져 끝내는 내가 바라보는 어둠속에
한 떨기 초저녁별로 피어날 것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초저녁별들이 뜨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
야광나무 꽃잎들만 하얗게 돋아나던 이 지상의 저녁
정암사 적멸보궁 같은 한 채의 추억을 간직한 채
나 오래도록 아무르 강변을 서성거렸습니다
별빛을 향해 걷다가 어느덧 한 떨기 초저녁별로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첫댓글 내 몸에 불을 밝혀 스스로 한 그루 촛불나무로 타오르고 싶었습니다~~~ 박정대님의 아무르강가에서는 언제 읽어도 맛이 새롭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남은 더위에 건강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