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리 - 왕숙천 길을 걷다
1. 김춘수 시인의 <꽃>의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까지는 너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라는 구절은 이름의 중요성을 말할 때마다 인용되는 명문장이다. 모든 존재는 이름이 없으면 분명하게 이해될 수 없다. 이름이 지정되어야 비로소 실체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다. ‘이름’은 비록 자의적으로 붙여질 때라도 이름이 생김으로써 다른 것과의 구별이 이루어지고 정체성이 만들어지며 독자적인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다.
2. 하지만 ‘이름’만으로 완성될 수 없다. ‘이름’이 중요한 것은 구체적인 실체를 알고 있을 때인 경우일 뿐이다. 대상을 알지 못하면서, 그것을 경험하지 못하면서, ‘이름’만 알고 있는 것은 다만 유령같이 떠도는 허상일 뿐이다. 그렇기에 이름은 대상과의 연결을 통해서만 이름의 중요성을 증명한다. ‘명실상부’라는 말의 참뜻은 이렇게 완성된다.
3. 수도권 외곽 도로를 달릴 때마다 안내판에 적혀있는 수많은 지명은 익숙하지만 전혀 구체화될 수 없는 장소들이었다. 우리가 매일 살아가는 공간도 자신이 찾고 경험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자신의 영역이 될 수 없다. 그렇기에 도로안내판에 적혀있는 수많은 지명들은 다만 수수께끼와 같은 미로 안내장에 불과했다.
4. 날씨가 적당히 쌀쌀한 날, 구리 시내 중심을 흐르고 있는 ‘왕숙천’ 길을 걸었다. 항상 다른 곳을 가기 위해 지나가던 장소를 찾은 것이다. ‘구리 시민체육센터’ 주차장에 차를 대고 왕숙천으로 나왔다. 하천 건너편에 연이어 우뚝 솟아있는 아파트촌이 눈에 들어왔다. 별 생각없이 찾은 길이지만 그동안 궁금했던 지명들의 실체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왕숙천을 사이로 구리와 남양주가 경계를 이루고 있었고 맞은편은 ‘다산 신도시’였다. 길을 계속 이어나가자 퇴계원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구리와 남양주의 경계에 있는 지역, 익숙하지만 알 수 없었던 장소의 땅을 걸었다. 조금 더 걷자 ‘별내 신도시’ 가 보인다. 시민체육센터에서 춘천선 ‘별내역’까지는 대략 2시간 정도 소요되었다. 걸으면서 그동안 궁금했던 세 개의 장소를 발견하였고 장소들 사이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름’과 ‘실체’가 합치된 것이다.
5. 모르던 장소의 이름을 나중에 아는 것보다, 이름을 알고 있는 장소를 경험하게 되는 것이 훨씬 이해도를 높이고 집중도를 증가시킨다. 완성되지 않았던 퍼즐이 완성되기 때문일 것이다. 도로를 지날 때마다 알지 못하는 장소명을 발견하게 되면 궁금해진다. 더구나 자주 다녀 너무도 익숙한 지명은 더할 나위없다. 최근 경기도 지역을 다니면서 익숙한 지명과 지명의 연결을 확인하는 순간들이 즐겁다. 여행의 맛 중 하나는 걷는 그 자체도 있지만, 장소의 연결과 경계를 알게 되는 것이다. 고산자 김정호가 ‘지도 만들기’에 정열을 바친 이유 중 하나가 이런 즐거움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산과 강이 흐르고 그러한 지리적 경계를 통해 만들어지는 공간을 발견하게 되는 일은 또 다른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임에 분명했다.
6. 내가 태어나고 존재했고 사라져갈 장소를 알아가는 행위가 바로 살아가는 것이다. 누군가는 한 장소에서 이동하지 않고 깊이를 추구하는 자가 있다면, 누군가는 이동할 수 있다면 어떤 장소든 이동하면서 넓이를 성취하려는 자도 있다. 결국은 어떤 것이든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결정할 수밖에 없다. 다만 나란 존재를 물질적 부와 경제적 가치로만 평가하거나, 내면의 감정으로만 진단하지 말고, 때론 나를 둘러싼 세계를 경험함으로써 경계를 확장하는 작업도 중요하다고 생각해본다. 그런 작업을 통해서 자칫 협소해지기 쉬운 ‘자아’ 속으로의 고립을 극복하고, 모든 곳 모든 상황에서 살아가고 도전하는 자유의 ‘존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첫댓글
자유 = 자기 존재의 이유!
(신영복)
길을 찾는 것이 자유의 여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