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덕이 심한 날씨다. 아침 출근길에는 부슬부슬 내리던 게 점심 먹고 거래처 방문 위해 길을 나서니 장대 같은 빗줄기가 말 그대로 쏟아 붓는다. 앞유리에 떨어진 굵은 빗방울은 속도가 빨라지자 올챙이가 꼬물거리듯 올라간다. 어지러운 유리판은 지우개 달린 팔을 아무리 빨리 휘둘러도 순식간에 또 난장판이다. 오랜 가뭄에 몹시도 애타게 기다리던 비였는데 장마든, 폭우든 좋으니 제발 비 좀 쏟아져 달라고 아우성칠 땐 언제고 적당하게 올 것이지 왔다 갔다 변덕스런 날씨라고 더 변덕 심한 인간들이 적반하장으로 나무람을 쏟아낸다. 딩동! 하나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동기생 G 본인 상, K대병원 영안실 특실. 모월 모일 발인, 총무”
동기 중 가장 많은 돈을 모았다던 그, 언제나 부자라고 호기롭던 그, 그러나 돈 번 과정이 온당치는 못했다는 뒷말이 무성했다. 동기회나 동창회에 찬조금을 내고는 크게 생색을 내기도 했다. 그러다 불의의 뇌암으로 미국까지 가서 수술을 받았다. 한동안 호전되어 가벼운 운동도 한다고 했다. 그런데 완치가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서 꾼들에게 홀려 포커 판에서 지새운다며 좀 말려 달라는 전화를 몇몇 친구가 부인으로부터 받았다. 친구들의 전화는 받지 않을뿐더러 받아도 내 돈 내 맘대로 원 없이 써 보겠다는데 웬 간섭이냐며 마이동풍이었다.
언젠가는 세계적 학술지에 독창적인 논문을 발표한 물리학자 친구가 빚 독촉 때문에 연구에 몰두할 수 없다고 하소연했다. 그라면 푼돈 수준으로도 해결될 것 같아 노벨 물리학상 후보를 키운다는 보람으로 도와주기를 부탁했다. 한마디로 거절이었다. 심지어는 “네가 안 할거면 나한테도 절대 말하지 말라”는 핀잔까지 해서 몹시 기분이 상했다.
평양에서 자란 L할머니는 일제강점기 조선 제일의 무용가였던 최승희에게 사사하였다. 일사 후퇴 때 월남하였고 서울에 무용학원을 차려 많은 돈을 모았다. 여든을 넘겼지만 자그마한 체구의 단아한 모습에 한때는 날렸을 미모가 상기도 남아있는 할머니를 1987년 내가 경주지점에 초임대리로 발령받아 갔을 때 만났다. 결혼을 하지 않아 먼 친척 부부가 봉양하고 있었는데 친부모 이상으로 모신다고 했다. 몇 군데의 은행과 마을금고에 예금을 분산 예치해 두고 월별, 일자 별로 기일이 되면 찾아와 이자를 받았다. 자기 돈을 안전하게 맡아주어 고마운데 이자까지 주니 그냥 갈 수 있느냐며 근처 식당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맥주까지 한 병 시켜 할망구라도 여자가 따르는 술이 맛있다고 권하며 살아온 얘기를 조근 조근해 주던 멋쟁이 할머니, 나머지 재산은 인근 사찰에 시주하고 각급학교에도 기부했다. 사찰과 학교의 행사 때마다 초청받아 귀빈석에 앉은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로또 열풍이 한창 불던 때, 가운데 창구에 있던 로또 발행기를 구석 쪽 출납창구로 옮긴 날이었다. 한 주에 5만 원 어치씩을 사는 노인이 아침 일찍 용지를 들고 와 창구여직원에게 “내가 확인해보니 4개가 맞았던데” 하며 내밀었다. 방금 옮긴 단말기는 작동시킬 기사가 오지 않아 마냥 기다리게 할 수 없어 동그라미 쳐진 숫자만 간이 표로 확인했다. 그의 말대로 3등에 해당되어 세금 뺀 13만여 원을 지급하고 따로 보관해 두었다. 기사가 와서 정상 가동되는 단말기에 슬립을 통과시켰다. “아니, 2등이잖아!” 영감님은 (01)을 (1)로 인식하지 못해 다르다고 생각했고 행운숫자 ‘24’는 아예 확인대상으로 여기지도 않았던 것이다. 여직원이 복권 뒷면에 적힌 전화번호로 2등이니 본점으로 가시라고 연락하자 반신반의하며 달려왔다.
이튿날 부인과 함께 본점에 다녀온 영감님은 당첨금 1억4천여만원이 든 통장에서 200만 원을 찾아 나를 찾았다. “직원 덕분에 내가 2등 당첨되었는데 전 직원 회식 한번 시켜주소. 내가 직접 하고 싶지만 늙은 영감하고는 먹기 싫을 테니 지점장님이 대신해 주소” 선생님의 운으로 되신 것이니 개의치 마시라며 한사코 만류했지만, 막무가내로 놓고 가셨다. 땀 없이 들어온 돈은 나갈 때 꼭 해코지를 한다며 당첨금은 자신보다 남을 위해 쓰시겠단다. 그 돈으로 회식하니 실컷 먹었는데도 150만원이 남았다. 한 번 더 회식할까 하다가 우리도 그냥 먹어 치우기엔 마음에 걸려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 범물 사회복지관에 기부했다. 일부는 계약직원 딸애의 심장 수술비에 보태주었다. 사랑은 파도를 탄다더니 선의의 마음은 또 다른 선행을 유발하였다.
힘들여 벌든, 손쉽게 벌든 수중에 들어온 돈 아깝지 않은 사람은 드물다.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라”는 옛말도 있지만, 돈은 벌기와 쓰기에 따라 값어치가 달라진다. 돈이 인격이란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포커 판에서 날린 돈 일부만 물리학자 친구에게 도와줬어도, 뜻있는 사회사업에 기부했어도 도움의 결과 여부를 떠나 보람이나 있었을 텐데…... 나는 모질지 못한 성격이라 도움을 청하면 마지못해 응했다. 돌려받지 못하고 돈 잃고 친구까지 잃은 피해의식에 속상하기도 했고, 어쭙잖은 푼돈으로 생색내고, 도움을 남에게 미루기도 했다. 심지어는 다른 곳을 돕느라 여력이 없다고 거절할 때도 있었다. 록펠러나 워런 버핏, 유 일한이나 이 명박 대통령같이 거액을 기부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형편대로 용처를 정해 슬기롭게 쓸 줄 아는 노인 분의 모습이 더욱 크게 다가온다.
갑자기 휴대전화가 자주 울린다. “G가 죽었다는데 가 봐야 하나?” 다들 갈등은 있나 보다. “그래도 친구고 마지막 가는 길인데 함께 가서 명복은 빌어주어야지” “G가 어떻게 벌었든 생색은 좀 냈지만, 우리 동기회에는 도움을 주었지.” 그 많은 재산 다 써 보지도 못하고 아까워 어찌 떠날 수 있을까. 땡전 한 닢 넣을 주머니도 없는 수의를 입고 가는 그 길을……빗줄기는 하염없이 차창을 때린다
첫댓글 안타깝네요. 한창나이인데
돈은~ 버는자랑보다 쓰는자랑을 하랬는데
나도 돈쓰는게 전공인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