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사전] 모압과 암몬, 암몬사람
* 이 자료는 국가, 지리, 인물, 전쟁 등 성경의 역사가 장문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모압과 암몬의 기원만 이해하고자하면 각각 서두의 녹색부분만
읽어도 충분합니다.
모압 (Moab) 「아비의 소생」
아비 롯과 그의 맏딸과의 근친 상간에 의해 출생된 아들이다(창 19:37).
소돔 성이 멸망될 때 구원받은 롯과 두 딸이 소알에서 나와 산에 올라가 굴에서 살 때 큰 딸이 작은 딸에게, 아버지는 이미 늙었고, 또 우리의 배필될 사람이 없으니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워 우리가 동침하여 자손을 얻자고 의논하고, 하루는 큰 딸이, 다음은 작은딸이 들어가 동침했다.
모압은 이렇게 해서 얻은 맏딸 소생으로 모압 족속의 조상이다(창 19:37,38,신 2:9,18).이스라엘과 관계가 깊은 종족이다. 고로 모압은 각기 밀접하게 관계한 히브리 여러 종족(이스라엘 에돔 모압˙암몬)의 하나이며, 모두 같은 조상에서 나와 광야에서, 가나안 사람이 점거하고 있는 경작지를 쳐서 패권을 장악했다. 더구나 각 민족은 그 거주지에서 피정복민의 언어와 문명을 섭취한 것도 공통적인 사실이었다.
모압 족속의 영토의 어떤 부분의 선주민(先住民)은 `엠 족속' `수스 족속'(창 14:5,신 2:10)이라고 불리우고 있는데, 이들 종족의 인종적 관계는 분명치 않다. 민수기 21장, 신명기2:8 이하, 사사기 11:12 28 등의 기사는 모압인이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이전, 아마 약 1세기동안 사해 동부의 지방에서 상당히 번영하고 있던 것을 나타내고 있다.
이스라엘인이 호렙에서 가나안으로 진행하는 도중 모압의 남서경(南西境)에 이르기 조금 전에 모압인은 아마 요단 강 서쪽에서 와서 모압의 북쪽 땅 절반(아르논의 북쪽 부분)을 정복하고 그 주요 성읍(헤스본˙메드바˙기타)에서 모압 사람을 추방하고, 헤스본을 그 서울로 하고, 아모리 왕국을 건설한(민 21:21-30) 아모리인의 왕 시혼에 의해 몹시 고통을 당했다.
이리하여 이스라엘 사람은 모압 사람이 남쪽 영토에 봉쇄되어 아르논 강이 그 북부 경계로 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민 21:13). 그리고 모압 사람으로부터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오히려 환영을 받고 그 동부 경계를 통과했다.
아마 모압 사람은 아모리 사람보다 자기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이스라엘 사람과의 동맹을 바라고 있었을 것이지만, 그것은 효과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사람은 시혼을 정복한 다음 그들의 영토에도 손을 뻗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압 사람과의 사이에 틈을 만든 원인이 되었다. 모압 왕 발락은 선지자 발람으로 하여금 이스라엘 사람을 저주시키려고 했고(민 22장-23장), 또 바알브올의 퇴폐적 예배로 유혹하여 여호와에로 향하는 충심으로부터 이스라엘 사람을 격리시키려한 것(민 25:1-5) 따위의 기사는 모압 사람의 이 적의(敵意)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동안 양 민족이 싸웠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약자의 입장에 있는 모압 사람은 강력한 이스라엘 여러 부족의 연합군에 복종하지 않을 수 없어 가장 좋은 목축지, 많은 성읍은 르우벤˙갓에 점령되었다(민 32:1-5,34,수 13:15-28). 이 점령의 기사는 이사야 5:15 이하와 모압의 비석 제 10행 등으로 확실하다.
모압의 구 영토를 점령한 것은 주로 르우벤 사람이며, 갓 사람은 원래 더 이북 땅을 점유하고 있던 것 같다. 그 후 약 1세기 내외에 갓사람은 르우벤 사람으로 대신되고, 르우벤 사람도 후에는 부족적으로는 소멸되어 버렸다. 이스라엘인의 본대(本隊)가 요단을 건너 각 지파가 요단 강 서쪽 영토를 점령하려고 광분하고 있을 때, 모압 사람은 아르논 이북의 구 영토를 회복했거나, 마침내 그 왕 에글론 시대에 이르러 요단 강 이서(以西)의 이스라엘인을 공격했다.
그러므로 이 지방의 이스라엘인은 얼마동안 그들에게 예속되어 있었으나, 그 후 에글론 왕은 베냐민 사람 에홋에게 암살되고 그 군사는 전부 구령(舊領)으로 구축되어 드디어 모압인은 요단강 이서의 땅에서는 아무런 시도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후 몇년 지나 `사사 시대'에 이르러 길르앗 사람 입다는 모압 사람이 그들의 영토를 그 지배하에 두려고 했기 때문에 그들을 정복했다고 기록되어 있는(삿 11:12-28) 이 기사는 다른 자료에 의한 별개의 기사를 포함하고 있는 듯하다.
사울의 전쟁의 간단한 기사에서(삼상 14:47) 그는 모압인에 대해 성공적인 싸움을 했다고 되어 있으나, 하나의 싸움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도 없다. 창세기 36:35에 막연히 인용되어 있는 모압과 에돔의 전쟁도 이 기간에 속할 것이다.
룻기에 의하면, 엘리멜렉이라고 하는 베들레헴사람은 사사 시대에 모압으로 이주했다. 그의 두 아들은 모압 여자를 아내로 취하였는데, 그 중 한 사람인 룻은 이 책의 아름다운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되고 다윗의 조상이되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다윗은 모압과 어느 정도의 관계를 갖고 있었으며, 또 사울과의 분쟁하는 동안 그 양친을 모압 왕의 보호에 맡겼을 정도였으나(삼상 22:3), 그가 전 이스라엘 왕으로 된 후 모압과 그와의 사이에는 싸움이 일어났다.
다윗은 이 전쟁에서 철저한 승리를 했고, 피정복민을 무참하게 유린했다(삼하 8:2).
갓 사람이 모압으로 이주하여 가장 좋은 성읍과 목축지를 점령한 것도 이 시대일 것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모압의 비석 기사의 설명으로 된다(다윗 시대보다 150년 후. →메사<참조, 모압의 석비>). 즉, 그 제 10행 그리고 갓 사람들은 옛부터 아다롯에서 살았다 또 17행 하반절부터 18행 상반절의 그리고 나는 거기서 여호와의 번제단을 취하여 그것을 그모스의 앞으로 끌고 갔다는 것은 아마 다윗이나 혹은 갓 사람의 여호와 예배자가 만든 여호와의 성소 번제단일 것이다.
이 견해에 따라 민수기 32:1 , 33 , 여호수아 13:8 의 인용, 즉 르우벤 사람의 초기 점령에 대한 기억에 관한 인용, 다윗 시대의 갓 사람 후기의 이주에 관련된 갓 사람의 인용의 혼란된점 의 설명으로도 될 것이다. 모압 사람의 사기는 크게 떨어졌으나 아직 절망하지는 않고 르호보암의 즉위(BC 933년)와 더불어 그들은 아르논 강 이북의 구령(舊領)을 회복하여 이스라엘의 기반을 벗어나 오므리의 치세까지 독립을 유지한 것 같다.
오므리는 모압을 다시 이스라엘에 복종시켜(모압의 비문 제 4 8행. →메사<참고, 모압의석비>) 그 아들 아합의 치세 끝까지 이르렀다. 구약성경에는 오므리의 모압을 정복한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메사가 매년 새끼 양 10만과 수양 10만의 털을 바쳤다는 것이 기록되고(왕하 3:4), 그와 동시에 이 지방의 모압 땅이 얼마나 축복을 받았는지를 나타내는 것이다.
메사는 재능있는 애국적 왕이며, 구약성경에 의하면 아합의 말년에 이스라엘에 반기를 들었다(왕하 1:1,3:5). 모압의 비문은 이모반이 아합 시대에 행해졌던 것을 의미하는 것 같으나, `그(오므리)의 아들'이라고만할 뿐 아합을 가리키는지 혹은 그의 아들 요람을 가리키는지 분명치 않다. 여하튼 요람이 유대와 에돔의 원조를 얻어 메사를 다시 이스라엘의 지배하에 두려고 한 것을 보아(왕하 3:4-27), 충돌의 위기는 요람의 치세까지 이르지 않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메사의 이야기는 이 모반의 첫 부분인데, 그 모압의 비문의 제 1- 20행에 그 자신의 말에서 읽을 수 있다. 또 그가 그 왕국을 발달 조직시킨 건설적 사업은 그 비문의 뒷 부분에서 얼마간 엿볼 수 있다. 요람과의 싸움은 이 비문이 기록된 후에 속할 것이다. 이 싸움은 메사에게 그의 맏아들을 희생 제물로 죽였을 정도로 큰 타격을 주었으나, 요람의 승리로는 되지 않았다. 이스라엘 사람이 이 싸움을 포기한 것은, 메사의 그 전율할 행위에 의해 느낀 미신적 공포에서였을 것이다.
이 시대의 모압 역사에 대해 이 이상 알려져 있는 것은 없다. 역대하 20:1- 30의 기사는 역사성이 의심되고, 열왕기하 13:20은 이 시대의 양 민족의 적의를 일반적으로 반영하고 있는데 불과하다. 열왕기하 10:32 에는 수리아(하사엘)에게 복종한 것을 암시하는 기사가 있다.
다음에 모압에 대해 보는 것은 아모스 2:1- 3에 타국민과 더불어 불의한 행위_이 경우에는 에돔 왕에 대한 비인도적 행위_를 한 모압의 죄와 그 받을 벌을 여호와께서 선언하신 기사이다. 이 사건은 언제 된 것인지 알 길이 없다. 아마 열왕기하 3:4- 27의 사건에 관련된 듯하다. 아모스서의 이 인용에서 보건대, 당시 모압은 기룟을 수도로 하는 독립 왕국을 이루었던 것 같다. 이사야 15:1- 16:12에는 모압에 관한 가장 흥미 있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모압 사람이 목전에 닥친 북쪽 또는 동쪽으로부터의 침략을 두려워하는 모습이 여실히 묘사되어 있다. 이 위협적 또는 실제의 침략이 무엇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모압은 수리아에서의 다른 약소국들과 같이 불가항력적인 앗수르의 침략을 받지 않으면 안되었다. 모압 왕 살만은 유대 왕 아하스와 마찬가지로 BC 734년에 디글랏 빌레셀 4세가 북이스라엘과 다메섹을 정복했을 때 그에게 공납(貢納)했다.
사르곤(BC 722- 705)은 모압이 모반을 품고 있는 것을 보았으나, 그 후계자 산헤립(BC 705- 681)은 그모스나답을 충신으로 보았다.
산헤립의 후계자 에살핫돈(BC681- 668, 669?)은 그의 건축 사업을 위해 모압의 무추리(Mutsuri)로부터의 헌납을 받고, 또 아랍인에 대한 자위심(自慰心)은 모압인으로 하여금 아슈르바니발(BC 668-626)에게도 같은 충성을 다하게 했다. 이리하여 모압은 앗수르의 주권을 승인함으로써거의 1세기 반 동안 독립적 상태를 유지할 수 있어 번영했고, 앗수르 제국(BC 606)의 멸망에 따르는 제사건에는 그렇게 관련된 것 같지 않다.
어떤 때는 수리아에서 느부갓네살의 권세에 반항하는 모반에 가담하려고도 했던 것 같으나(렘 27:3), 유대에 대한 일반적 태도는 적의를 품고 있었기 때문에, 바벨론에 대해서는 우정적이었을 것이다(왕하 24:2,렘 9:26,48:1-47,겔 25:8,습 2:8).
모압은 에돔과 마찬가지로 오랜 세월 대적 유대가 멸망된 것을 기뻐했으나, 이 바벨론과의 전쟁시에 유대인 중에는 모압에 피난한 자도 있었다(렘 40:11). 이 적의는 결코 잊혀지지 않으며, 또 유대에 있어서의 반감은 율법˙예언˙시편 등에도 나타나 있다(신 23:3,느 13:1,23,시 60:8,83:6,108:9,렘 48장).
유대의 멸망 후 모압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 차츰 아랍 제부족에 정복되어 드디어 그 땅은 나밧아랍의 영토가 되고, 고대 모압 사람의 잔존자도 정복자에게 흡수되어 버렸다. →모압.(지명)
암몬, 암몬사람
[히] 'ammon 'ammoni [영] Ammonites
[1]
롯과 그 작은 딸 사이에서 난 벤암미의 자손(창 19:38).
모압자손과 한 가지로 롯이 근친상간에 의해 난 자손임이 그 기원으로 되어 있다(창 19:30-38).
아르논강에서 얍북강에 걸치는 지역에서 삼숨밈 사람들을 멸하고, 그곳에 정착했다(신 2:19-22). 이스라엘의 팔레스티나 침입 당시는, 얍복강 상류 부근에 살고(민 21:24,신 3:16), 랍바가 그 수도였는데(신 3:11), 광야길에 있는 이스라엘은 이들을 공격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신 2:19,37).
그러나, 암몬사람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떡과 물을 주지 않고, 모압 사람과 하나가 되어, 발람을 고용하여 이스라엘을 저주케 했기 때문에 그들의 자손의 10대에 이르기까지 주 여호와의 회중에 드는것이 금지되었다(신 23:3-6). 그들은 모압왕 에그론을 도와, 이스라엘의 일부의 성읍들을 점령했다(삿 3:13).
사사 입다의 시대에도 요단강 동의 이스라엘 사람을 박해하고 있었다(사10:6,9,18). 사울이 왕되기 직전, 암몬왕 나하스는 길르앗 야베스를 공격했다. 사울은 야베스 사람을 도와, 암몬군을 전멸시켰다(삼상 11:1-11). 나하스는 다윗과 우호관계에 있었다. 그것은 둘이 사울의 적이었기 때문이리라(삼하 10:1,2). 그러나 나하스가 죽은 때, 그 아들 하눈을 위로하기 위해 다윗이 보낸 사자가 모욕을 당하여, 싸움은 시작되고, 수도 라바를 점령했다(삼하 11-12장).솔로몬은암몬 사람의 딸들을 아내로 맞이했다(왕상 11:1).
여호사밧시대에 암몬 사람은 모압, 애돔과 연합하여 유다에 침입있으나 성공치 못했다(대하20:1-30). 웃시야와 요담의 치세중에 암몬 사람은 유다에 조공을 바쳤다(대하 26:8,27:5).
여호야김의 치세중 암몬 사람은, 느부갓네살을 도와 유다를 공격하고(왕하 24:2), 예루살렘 멸망 후, 유대인이 새 사회를 형성하려하자, 그 지도자 그달랴를 죽여 실패로 끝나게 했다(왕하25:25,렘 40:11-14). 또한 포로귀환후의 예루살렘 재건에도 반대했다(느 4:3-7).
그들의 우상예배는 유명하여 선지자들은 이를 비난하고 숙적으로 했다(렘 49:1-6,겔 21:20,25:1-7,암1:13-15,습 2:8-11). 마카비 시대에 그들은 마카비의 유다에 패했다. 그들의 주신은 밀곰과 몰록으로서, 솔로몬은 암몬 사람의 왕비들을 위해 이 신을 예배하는 장소를 예루살렘에 마련한 바 있었다(왕상 11:7). 수도 라바는 전3세기 애굽왕 프톨레마이오스 필라텔포스(Ptolemaios Philadelphos)에 의해 그리스풍 도시로 재축되고, 필라델피아(Philadelphia)로 명명되었다.
[2]
요단 강 동쪽 지역, 얍복 강 상류의 대만곡(大灣曲), 갓 지파와 아라비아 사막 사이 땅과 그 민족이다. 랍바(오늘날의 암만, Amman)가 그 도성이었다. 창세기 19장의 이야기에 의하면, 암몬 사람의 기원을 롯의 아들 벤암미에 두고, 동시에 모압 사람의 기원에도 언급하고 있다.
히브리어의 표현 bene'ammon은 수리아˙팔레스틴의 광용법인데, 앗수르 비문에 암몬 사람의 국가를 가리켜 사용하고 있는 Bit Amm nu에 해당한다. 창세기 19장의 이야기는 암몬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과는 근친 관계라고 하는 이스라엘의 의식을 표현하는 것이다.
암몬 사람과 개인의 인칭 명사는 알려져 있는 범위 내에서는 이 견해를 지지한다. 신명기 2:20에서 암몬 사람은 다른데서는 전혀 알려져 있지않은 유사전의 족속 삼숨밈 사람을 추방했다고 한다. 사해 사본 중 창세기의 아람어외경에서는 14장의 네 사람의 북방 왕이 정복한 족속의 하나로서, 마소라 본문에 수심사람(Zuzim)으로 되어 있는 것을 삼숨밈 족속(Zamzummim)이라고 읽고 있다.
암몬 사람이 언제쯤부터 이 땅에 정착민으로서 살게 되었는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N. Glueck 현재 암만(암몬)는 암몬 사람의 지역에서는 청동기 시대 중기와 후기의 토기가 완전히 결여되어 있음으로 그들은 BC 13세기 이전에는 정착하지 않았다고 결론하고 있다. 그러나 느보 산, 나우르(Na'ur) 및 암만에 있어서 청동기 시대 중기의 분묘군, 또 암만에 있어서 청동기 시대 중기로부터 후기에 걸친 신전, 다시 마데바(Madeba)에 있어서 청동기 시대 후기로부터 조기(旱期)에 걸친 분묘 등의 최근의 발견은 이 지역에 BC 13세기 이전부터 벌써 정착이 행해지고 있었던 것을 나타내는 것 같다.
가나안 땅을 정복해 들어가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암몬 사람을 동요시키지도 않고(민21:24,2:37) 영토를 침범하지도 않았다. 사사 시대에 암몬 사람은 모압 왕 에글론이이스라엘을 침략하는데 원조하고(삿 3:13), 또 후일에 그들은 길르앗을 정복하려 하였으나, 사사 입다는 이들을 격퇴하였다(삿 11:4-9,30,36,12:1-3). 후에 암몬 왕나하스는 길르앗의 야베스를 포위하고 사울은 이 성읍을 암몬 사람의 손에서 구출하여 그 공적 때문에 이스라엘 초대 왕으로 되었다(삼상 11장).
사울과 나하스는 서로 적대시하는 사이가 되었다. 따라서 나하스는 높아가는 이스라엘의 세력을 깎기 위해 다윗과 우의를 맺었다. 다윗이 사울의 뒤를 이은 때 나하스의 아들 하눈은 다윗에 도전하여 그 결과 암몬 사람의 수도 랍바는 유린되고 약탈되었으며, 암몬 사람은 노예로 되고 사람암몬의 유적지들에게 가공할 복수가 행해졌다(삼하 10장12장).
후에 압살롬의 반역때, 마하나임에서 나하스의 한 아들은 다윗을 원조하였다(삼하 17:27). 암몬 사람 셀렉은 다윗의 용사 중 한 사람으로 되었다(삼하 23:37). 이와 같은 교우 관계는 솔로몬의 치세에도 계속하고 솔로몬은 암몬 사람의 왕녀 나아마를 후궁의 한 사람으로 삼고 그녀에 의해 르호보암을 얻었다(왕상 11:1,14:21,31).
솔로몬의 치세가 끝났을 때 암몬 사람은 독립한 것 같다. 아합의 치세 중, 암몬 왕 루하비(Ruhubi)의 아들 바사(Ba'sa)는 앗수르의 살만에셀 Ⅱ세의 서방 진출을 저지하는 동맹자의 일원이었다. 역대하 20:1, 10에 의하면 암몬사람은 요사밧의 치세에 모압, 에돔과 연합하여 유대를 침략하였다.
여로보암 Ⅰ세의치세 전 암몬 사람은 길르앗의 점령을 꾀하여 그 싸움에서의 잔인성은 예언자 아모스의 의분을 자극하여 마지 않았다(암 1:13-15). 역대기는 그 후 곧 그들이 유대의 요담에게 패배하여 조공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대하 26:8,27:5).
앗수르의 디글랏 빌레셀 Ⅱ세는 암몬 사람의 왕 사니부(Sanipu)로부터, 에살핫돈은 왕 부두일루(Puduilu)로부터, 앗수르바니발은 왕 암미나르비(Amminadbi)로부터 각각 공물을 받고 있다.
끝으로 기록한 암몬 사람의 왕 이름은 암만 출토의 두 개의 고대 인장에서 발견된다.다음에, 성경이 암몬 사람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고용되어 고집이 센 유다 왕 여호야김을 괴롭힌데 관련하고 있다(왕하 24:2).
암몬 사람이 갓 영토를 점령한 것은 이 무렵일 것이다(렘 49:1-). 후에 이르러 바벨론의 통치는 암몬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을 친밀하게 하였다. 그것은 암몬 사람이 시드기야와 공모하여 느부갓네살에 반역하여 예루살렘 포위 중 많은 이스라엘 사람이 암몬으로 이주한 사실로 알 수 있다(렘 40:11-).
에스겔이, 랍바와 예루살렘 중 어느 쪽을 먼저 공략할 것인가를 점치고 있는 바벨론 왕을 묘사하고 있는 것에서(겔 21:20-)왕은 암몬도, 유다도 같이 모반자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신명기 23:3 이하에 암몬 사람과의 혼주(混住)의 위험에 언급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이스라엘의 영역 내에 암몬 사람의거주지가 있었던 것 같다. 또, 여호수아 18:24(`그발 암모니')은 포로 후 베냐민 땅에 `암몬 사람의 마을'이라고 부른 지역이 있었던 것을 보여주고 있다.
예루살렘 멸망 후 암몬 왕 바알리스는 느부갓네살이 유다의 총독으로 엄명한 그다랴를 암살하기 위하여 사람을 보냈다(렘 40:14). 또, 140년 후 암몬 사람은 그들의 힘을 다하여 느헤미야에 의한 성벽 개축을 방해하였다(느 2:10,19,4:3,7). 에스라, 느헤미야는 유다에 잔류하여 있던 이스라엘의 농부들이 암몬 사람의 여자들을 취한 것을 위법이라 하고 적의를 더 격앙시켰다(느 13:23).
느헤미야로부터 알렉산더의 동정(東征)에 이르기까지의 기간 요단 강 동쪽 지역은 나밧 사람들에게 유린되었다. 아마 이 시기에 암만 사람의 본체는 해소했을 것이다. 그 후에도 그들의 이름은 나오지만, 그것은 아랍족을 지칭하는 것이다. 마카비 1서 5:6 이하에는 유다 마카비아가 암몬 사람을 격파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또 순교자 유스티노스(Justin Martyr)는 그의 시대에 암몬 사람이 많이 있었다고 진술하고 있다. 그러나 요세푸스(Josephus)는 어떤 곳에서는 모압 사람과 암몬 사람을같은 말로 표현하고, 다른 곳에서는 이것을 `아랍인'이라 부르고 있다.
이 서술들로부터 나밧 사람의 침략으로 암몬 사람은 실질적인 존재를 상실한 것으로 되어 있다. 수도 랍바는 BC 3세기에 애굽의 돌레마이 빌라델보스(Ptolemy Philadelphos)에 의해헬라풍 도시로 재건되고 빌라델피아(Philadelphia)라 명명되었다.
오늘날 암만에 있는그 고지(古地)에는 요단 강동에 현존하는 가장 인상적인 유물의 하나이다. 암몬 사람의 신은 구약성경에 밀곰이라 불리우고 있다. 그것은 멜렉(왕)의 변형이다. 솔로몬은 암몬 사람의 후궁을 위해 이 신을 예배할 장소를 예루살렘에 마련해 주었다(왕상 11:7). 오늘날의 요르단하심 왕국이다. (인터넷자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