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공(空)은 대승 불교의 핵심사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공은 말이나 생각으로써는 파악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명이 가능하다면 법사님의 답변을 듣고 싶습니다. |
답: 부처님의 가르침을 언어로써 모두 답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부처님도 자신이 깨달으신 내용에 대해 말로 표현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말로 표현하시고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키셨습니다.
그렇다면 공(空)을 말로 표현할 수 있느냐? 궁극적으로는 직접 깨달아서 증득해야 할 바이지만 그렇다고 설명까지 못할 주제는 아닙니다. ‘유마경’을 보면 문수보살이 유마거사에게 공에 대해 묻습니다.
“거사님 공을 분별로써 알 수 있습니까?”
그러자 유마거사는 아주 역설적인 답변을 합니다.
“문수보살이시여, 분별이 곧 공입니다.”
문수보살이 다시 묻습니다.
“그렇다면 어디서 공을 알 수 있습니까?”
이번에도 유마거사는 기상천외한 답변을 합니다.
“저 외도들의 삿 된 62가지의 잘못된 견해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 문답에 근거한다면 공은 분별을 떠나 있지만, 그렇다고 분별과 별개로 있는 것이 아니어서 분별 속에서 공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외도들이 지닌 수많은 잘못된 견해들도 모두 공의 원리를 지니고 있으므로 분별과 공을 대립적 관계로만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제가 공에 대해 설명하는 것도 결코 공을 위배하는 것은 아니어서 허물이 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공을 너무 신성불가침으로만 여겨 설명조차도 못하게 하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불교는 언어를 뛰어 넘는 가르침이지 결코 언어를 거부하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예로부터 불문(佛門)을 공문(空門)이라고 하여 왔습니다. 이는 그만큼 불교에 있어 공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말 해주는 것으로, 공을 깨달으면 곧 불도를 완성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공에 대해 정작 제대로 그 의미를 파악하고 있는 분들이 많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여기 그 이해를 돕는 아주 유익한 대화가 하나 있습니다.
어느 때 한 외도가 부처님의 제자 사리풋다에게 “그대들은 모든 법이 공하다고 하는데 그 공이란 무슨 의미인가?”하고 묻습니다. 이에 대해 사리풋다는 “저기 아무 것도 없는 빈 땅이 있다. 저곳에 어느 날 땅의 주인이 집을 짓는다고 하자. 그러면 그 땅의 주인은 자갈, 모래, 흙, 목재, 쇠붙이 따위의 재료를 사들이고 목수와 미장이 기술자 등을 불러 집을 지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 집이 완성 되었다면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 집은 수많은 조건에 의해 결합된 것인가? 아니면 본래 있었던 집이 나타난 것인가?” 하고 말 합니다. 외도가 “비구여 그 집은 본래 는 없었고 땅과 주인과 재료와 기술자등의 갖가지 조건에 의해 나타났을 뿐이다.”라고 대답하자, 사리풋다는 “바로 그 말과 같다 모든 법은 조건이 갖추어져야만 나타나고 조건이 없으면 나타나지 않는다. 이렇게 조건에 의해 나타난 모든 법은 나라고 할 주체가 없으며 근원으로 세울만한 실체가 없는 것을 공이라 말한다. 우리 부처님께서는 조건이 갖추어질 때에 이름과 형태가 나타나고 이러한 이름과 형태는 무아이며 공이라고 설하셨다.”하고 답변하였습니다. 정말 통쾌한 답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앞서 수차례에 걸쳐 저는 불교에서는 모든 존재를 연기로 보고, 의타기로 보고, 무자성으로 보고, 무아로 보고, 공으로 본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잘 알아야 할 것은 이들 용어가 말은 다르지만 그 의미에 있어서는 동일하다는 점입니다. 즉 조건으로 생겼다는 것은 다른 것에 의지해서 생겼다는 것이고, 다른 것에 의지해서 생기므로 제 성품이 없으며, 제 성품이 없으므로 나라고 할 것이 없으며, 나라 할 것이 없으므로 실체가 없는 공인 것입니다.
바로 이치가 이와 같으므로 불교에서는 자성, 주인공, 참나, 영혼, 영원불멸 등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일찍이 대승불교의 아버지라 일컫는 용수보살은 그의 저서 ‘중론’에서 “모름지기 공에 바탕을 두지 않는 설법은 설법이 아니다. 공이란 곧 연기이니 이 뜻을 저버리고 법을 설하면 외도의 무리로 전락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공의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어떤 분들은 엉뚱하게 해석을 하여 중생들의 안목을 흐리게 하는 예가 있습니다. 이제부터 공을 세 가지의 예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자세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첫째, 공은 공간의 의미가 아닙니다. 공을 설명하는 분 가운데, 공을 어떤 공간의 개념으로 알고 텅 빈 자리, 혹은 아무것도 없는 자리로 여겨 모두 비우게 되면 곧 공을 깨닫는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는 잘못된 소견입니다.
둘째, 공은 유무(有無) 이전(以前)의 자리가 아닙니다. 이 같은 소견 가지신 분들이 가장 많은 것 같습니다만 공은 유무를 초월한 어떤 근본 자리가 아닙니다. 다만 분별로써는 그 이치를 알 수 없을 뿐,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어떤 특별한 자리가 아니라는 점에 주의해야 합니다.
셋째, 공은 만물이 탄생되기 전부터 존재 해온 어떤 근본원리가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공을 존재론적으로 이해하여 이 세상은 공으로부터 나왔다고 여기고, 공이 우주의 본질이며 이 본질은 나고 죽음이 없고 늘어나고 줄어듦이 없다고 합니다. 흔히 불교를 과학으로 설명하려는 분들이 이러한 오류를 범합니다. 색이 곧 공이라고 말은 하면서도 해석은 색이 공으로 부터 나왔다고 하여 공을 마치 중국 철학에서 주장하는 만물의 근원인 도나 무극의 원리로 설명합니다.
공은 만물이 지닌 공통된 성질입니다. 바로 무아의 성질, 무자성의 성질을 다른 말로 표현했을 뿐 우주의 근원을 밝히는 형이상학적 용어가 아닙니다. 혹 공에 대해 진공묘유(眞空妙有)를 말하면서 아주 공을 심오하게 해석 하려는 경향이 있으나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집이 실체는 없지만(眞空) 존재하지 않습니까?(妙有)
첫댓글 참나(眞我)는 실상에 존재하나 無我이지요. 무아의 관념에 잡히면 진아를 알지못하고
무아를 깨달은 마음은 진아, 즉 무아=진아. 무경계의 각성=진정한 자기 ,영원함=이순간.
감동받은 책 소개합니다
제목:무경계 저자:켄윌버 무우수출판.
그래도 붓다가 최고!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