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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수많은 언어를 마음 밭에 뿌리고
소중한 삶 속에서 아름답고 지혜로운 분들을 만났기에 뒤늦게 문학의 길을 찾아 도전하는 꿈을 꾸고 실천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들을 잘 가르치기 위해 내가 먼저 배움의 길을 찾느라 심해를 허우적거리던 올챙이 시절이 아른거립니다. 수많은 언어를 마음 밭에 뿌리고 삶의 흔적을 모아 오색 빛깔의 보물들을 보듬는 기쁨 속에 은은한 향기를 풍기는 삶을 사랑하면서 점점 성숙해지는 보람을 갖게 되었습니다.
<녹색수필상>은 진실한 삶을 통해 짧고 튼실한 좋은 글을 쓰라는 격려로 알고 더 열심히 정진하겠습니다. 이 기쁨을 영원히 간직하고 저를 사랑해주신 문우님들과 기쁨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녹색시인협회와 시와산문사, 그리고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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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주 / 1999년 『시와산문』으로 등단했으며 수필집 『마음밭에도 풀꽃을 심어』, 『세월이 바람처럼 흘렀다』가 있다. 한국녹색시인협회 전북문인협회 회원이며 국민훈장 석류장을 수상했다.
<수상작품>
버리는 연습 외 2편
김연주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외로움이 인다던가. 또 나이가 들수록 그리운 게 많아진다던가. 고향의 냄새, 정든 사람과 추억, 동기간의 사랑이 외로움을 삭이는 청량제가 된다.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서 삶의 조량을 감지하나 보다.
금년 봄, 여든 두 해를 맞이하는 친정어머니의 생신축하를 위해 형제들이 모였다. 자식들의 의견일치로, 대가족이 무주리조트로 이동하였다. 한자리에 북적일 수 있을 만큼 넓은 장소를 택한 셈이다. “오래 살다보니 이런 데도 와 보는구나.” 하시며 어머니는 흐뭇해하셨다.
각지에서 모인 자식들(7남매)을 하나 하나 둘러보는 어머니는 병아리를 품에 안은 어미닭처럼 편안하게 보였다. 이제 당신이 더 어린애같이 보이건만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모르고 자식들과 마주앉아 따뜻하게 사는 지혜를 일깨워주신다. 그러는 동안 눈물과 한숨으로 지낸 세월의 아픔을 말끔히 치유한 듯 표정이 환하시다. 어머니 앞에서 신명난 자식들. 어렸을 적 추억을 회상하며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졌다. 어머니는 아버지 이야기가 나오자 “너희 아버지는 빈손으로 갔지만 받을 것이 많아 궁하지 않을 것이다.” 하시며 지난 날 남들에게 뿌렸던 아버지의 인정을 자랑스럽게 말씀하셨다. 온화한 성격으로, 성실한 삶을 살아가도록 몸소 실천으로 가르쳐주신 아버지가 더욱 그리워진다.
어느 해 할아버지 제삿날, 아버지께서 지방을 쓰고 남은 먹물로 백지에 한 획 한 획 작은 붓으로 글씨를 써내려가셨다. 송죽매松竹梅라는 글자와 ‘백인百忍’이었다. 평소 붓을 잡지 않던 아버지께서 일필휘지로 눈 깜짝할 사이에 백지를 메꾸었다. 그리고선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빙그레 웃으며 내게 건네주셨다. 이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할머니의 아버지 자랑을 떠올렸다.
아버지가 학교에 입학하기 전, 서당에서 공부를 했단다. 아버지는 항상 장원을 독차지했고, 시샘 어린 친구들이 아버지 얼굴에 까맣게 먹칠을 해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집으로 돌아와 얼굴을 씻어내더란다. 아버지가 쓰셨던 글자와 이 얘기에 아버지의 생활철학이 배어 있다는 걸 오랜 뒤에야 깨달았다.
신축년 삼월 십일 향당서辛丑年 三月 十日 香堂書라고 여백을 메운 ‘송죽매松竹梅’와 ‘백인百忍’을 쓴 종이 두 장을 고이 접어 간직했다.
그 해 10월, 나는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기거하던 방문 위에 아버지가 써 준 글씨를 종이 채 밥풀로 살짝 붙였다. 오며 가며 눈만 뜨면 보이는 아버지 필체를 보면서 객지의 외로움을 달랬다. 말수가 적은 아버지의 가르침은 백인百忍이라는 단 두 글자였다. 그 글귀에서 아버지의 웃음이 배어 나오는 듯했다. 매일 보고 또 보면서 참는 연습을 한 셈이다. 그러니 내 삶의 등대가 된 사람은 아버지다. 아버지는 침묵 속에서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도록 도와주셨다.
결혼 후, 까맣게 잊었던 아버지의 작품이 다시 세상빛을 보게 되었다. 넓은 집을 마련하여 이사할 때, 아버지의 글씨를 편액으로 만들었다. 명필가의 수려한 서체는 아니지만 내가 가장 아끼는 보물이었다. ‘송죽매松竹梅’ 편액은 큰방에, ‘백인百忍’ 편액은 딸아이 방에 걸었다. 매일같이 아버지를 대하는 내 마음을 누가 알까. 서예가로서 명성 깨나 있는 분의 서액을 뒤로 접는 내 심사를 눈치채고 아무 말 없이 동의해 준 남편이 참 고마웠다.
이제 그동안 고집스럽게 아끼던 편액을 동생들에게 주고 싶다. 김씨 집안의 가보로 삼고, 설움도 미움도 원망도 모두 버리고 행복한 마음으로 열심히 세상을 살아가라고.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며 찍은 사진들. 본인이 아니면 누가 얼마나 보아 줄 것인가. 묵은 사진첩에서 동생들의 옛 사진을 골라냈다. 동생들의 생글생글 웃는 어린 모습은 활짝 핀 꽃이다. 동생들의 사진을 하나 하나 각각의 봉투에 담았다.
세월에 훌쩍 밀려나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서서히 주변을 정리하고 버리는 연습도 해야겠다.
남십자성
남양의 훈풍이 신선하다. 뉴질랜드 남섬 크라이스트처치에서 마운틴쿡을 향해 가는 길이다.
달리고 달려도 초원이 끝없이 이어진다. 초록색 융단을 펼쳐 놓은 것 같은 언덕에서 양 떼와 소 떼가 한가롭게 풀을 뜯고 노니는 풍경이 너무나 평화롭고 그림 같다.
드넓은 초지에는 인가도 움막도 인기척도 없다. 오로지 우리가 탄 버스만 신나게 달릴 뿐이다. 초지조성이 잘된 드넓은 초원에서 양 떼와 소들, 사슴 무리들이 저희들끼리 어울려 군무하듯이 간간이 드러날 뿐이다. 농부들의 일손이 부족하여 축사도 없이 자연방목으로 목축업을 한다는데 그 풍경이 가경이다. 하늘을 지붕 삼아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눈이 오면 눈을 맞고, 바람이 불면 바람을 맞으며 강인한 삶을 살아간단다. 어찌 생각하면 스스로 살아간다고나 할까? 가축들의 낯선 모습이 나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바다 밑이 지각변동으로 솟아올라 땅이 된 곳이라더니 기암괴석들로 이루어진 절벽이 부지기수다. 멀리 구름이 내려앉은 것 같은 만년설산, 빙하가 녹아 만들어진 우윳빛 호수에 탄성이 절로 나온다. 눈이 시리게 아름다운 풍광을 바라보며 지구상에 가장 아름다운 낙원이란 말이 실감난다.
비가 내린 뒤도 아닌데 갑자기 맑은 하늘에 쌍무지개가 떴다. 얼마만에 보는 무지개인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무지개를 바라보며 탄성을 지른다. 파란 하늘에 또렷이 그려진 무지개. 마술사가 하늘에 그려놓은 환상의 아취다리 같다. 여행객들의 마음을 기분좋게 흔들었다.
차를 달리고 달렸다. 무려 다섯 시간이나, 오가는 차가 별로 눈에 띄지 않는 길을 달렸다. 가도 가도 끝없이 그림 같은 초지와 호수뿐이다. 우리나라는 짧은 여행길에도 온통 휴게소나 음식점이 즐비하지 않은가. 역시 청렴하고 깨끗한 나라라는 걸 알 것 같았다.
드디어 헤르미티지 호텔에 도착했다. 만년설로 가득 메워진 골짜기와 빙산으로 이루어진 뉴질랜드의 알프스. 뉴질랜드는 북섬과 남섬, 두 개의 커다란 섬으로 이루어진 땅인데 그 중 남섬의 최고봉인 마운틴쿡(해발 3.753m)이 찬란히 펼쳐져 있다. ‘구름을 뚫고 나온 산’이라는 뜻처럼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하얗게 솟아있다. 병풍처럼 둘러 있는 설산에선 지구온난화로 산꼭대기의 눈이 계속 아래로 흘러내려 빙하가 녹아가고 있다 한다. 저 장관을 보며 내 가슴은 툭 트이는 것 같았다.
다음 날 아침, 햇살의 노크에 창문을 열고 마운틴쿡을 찾아보니 온데 간데가 없다. 조반을 먹고나니 하얀 마운틴쿡이 어느새 다시 솟아났다. 눈이 즐겁고 마음이 즐겁다. 심신의 피로가 절로 풀어지는 것 같았다.
관광할 곳은 많은데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뉴질랜드 북섬에서 달밤에 체조하듯 노천온천욕을 하면서 바라본 하늘은 유난히도 맑았다. 아름다운 신화가 가득 담긴 별들이 각자 자기 모습을 뽐내며 은은한 빛을 내리고 있었다. 반짝 반짝 신호를 보내며 대화를 나누는 것도 같았다.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듯한 별들을 바라보자니 갑자기 남십자성을 찾아보고 싶었다. 그래, 바로 이거야. 무언가 한 가지라도 특별한 것을 얻는 게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우리나라에선 볼 수 없는 별이지 않은가. 말만 들었지 뚜렷이 기억이 나지 않았다. 뉴질랜드는 우리나라와는 다른 별자리들의 나라가 아닌가. 헬 수 없이 돋아 있는 별무리 중에서 어떻게 남십자성을 찾을까? 방향조차 가늠되지 않는 깊은 밤에 말이다. 그러나 나는‘남쪽나라 십자성은 어머님 얼굴…….’ 노래를 흥얼거리며 이국의 하늘에서 한번도 눈에 익히지 않은 별자리를 찾느라 열심이었다. 그래서 내 맘대로 남쪽을 향해 서서 우선 네 개의 별을 찾기로 했다. 먼저 마름모꼴이나 사다리꼴로 이루어진 네 개의 별로 좁혔다.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어서 혼자서 끙끙대다 수첩에 별자리를 그대로 그렸다. 희미하지만 밝은 별이 나를 향해 웃고 있는 것 같았다.
귀가하자마자 국어사전과 인터넷을 뒤져보았다. 마름모꼴로 이루어진 남십자성을 찾는 순간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우리나라에선 북극성이 길잡이가 되지만 남반구에선 남십자성을 기준으로 남쪽을 찾는다 한다. 남쪽 하늘의 은하수 사이에 유난히 밝은 별들 남십자성을 그대로 손녀들에게 보여주지 못해 서운하다. 나는 뉴질랜드의 이런저런 얘기와 함께 자신 있게 별자리를 그려 설명해줄 수 있는 것만도 즐거웠다.
아이들이 자라서 어른이 되면 뉴질랜드에 갈 기회가 흔해질 터다. 그때 아이들이 할머니와 함께 그려본 남십자성을 찾아볼까? 그 생각까지도 즐거웠다.
신비한 산, 마이산
따가운 햇살에 가을이 농익어간다. 단풍내 풍기는 가을바람이 불어오면 잔잔한 마음이 일렁거린다. 솔곳이 만산홍엽에 물든 산과 들이 보고 싶어진다. 가을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는 곳이 어디냐. 뭐니 뭐니해도 산이 제일이다.
7할이 산이라는 국토. 그래선지 내 고장 전북은 사방팔방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하늘과 땅 사이에 뿌리 깊게 내린 산, 산, 산. 첩첩 포개진 아름다운 경관 속에 유적의 숨결을 품고서 무한 세월을 허허로이 서 있다.
전주시를 양쪽에서 둘러싸고 있는 완주와 김제 땅을 걸친 모악산. 정상 아래 ‘쉰길바위’가 아기를 안고 있는 형상과 같아서 모악산이라 했다던가. 진묵대사가 수도하던 대원사와 수왕사를 거쳐 정상을 향해 오르노라면 법구경이 울려 퍼져 마음이 평화로워진다. 모악산은 산이 아니라 어머니라는 말이 생각난다. 어머니 품에 안긴 듯 편안하고 넉넉하다. 정상 너머엔 금산사가 포근하게 안겨있다. 이 산은 전주시민의 일일 산행길로써 마치 전주시의 산 같다.
뿐만 아니라 정읍에 뿌리내린 내장산, 바다 낙조와 산이 모두 일품인 고창 선운산, 만산홍엽의 절정미를 주는 무주 적상산도 있다.
또 있다. 전라도와 경상도에 버티고 서 있는 영산 지리산, 전라도와 충청도를 경계지으며 호남의 소금강이라 불리는 대둔산도 있다. 명산을 전주의 동서남북에 두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마음만 내키면 아무 쪽에 발길을 두어도 한두 시간이면 산자락에 닿는다.
가을바람 따라 동쪽으로 간다. 인삼의 고장 진안으로. 그곳의 대명사 마이산으로. 마이산은 참 기이하고 신비한 산이다. 부부봉으로 산 전체가 수성암이다. 말의 귀가 쫑긋 솟은 듯하다 하여 마이산이라는데, 숫마이산과 암마이산으로 불려지고 있다.
마이산은 자연과 인간이 만든 걸작이 아닌가 싶다. 태고적 자연이 만든 마이산에, 90년 전 인간 이갑룡 처사가 기도와 기적으로 쌓아올렸다는 돌탑이 심한 바람에도 무너지지 않아 신비함을 간직한 산이다. 겹가을의 단풍내음이 물씬 풍긴다. 북쪽 주차장에서 계단을 따라 올라가다, 양쪽으로 마이봉이 갈라지는 협곡 지점에 잠시 쉬었다. 왼쪽의 숫마이봉에 화암굴이 있고, 오른쪽 암마이봉에 가 보려면 철계단을 올라야 한다. 갑자기 사람들을 따라 오르고 싶어진다.
철계단을 따라 천천히 올라갔다. 오를수록 숨이 막히는 듯 힘이 든다. 희망의 봉우리를 눈앞에 보건만 오르는 마음은 점점 조급해진다. 산길을 따라 올라가던 길이 끊기고 가파른 바위산에 밧줄이 보였다. 나무와 나무 사이에 옭아매어 있는 밧줄. 사람들은 그 밧줄에 몸을 의지하여 서로 꼬이고 꼬여가며 오르내리고 있었다. 오르기도, 내려가기도 어중간한 지점에서 갈등이 생긴다. 남들 다 하는데 나라고 못하랴 싶어 포기하기가 싫었다.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에 밧줄을 잡았다. 난생 처음, 그것도 이순을 넘은 나이에 밧줄에 온몸을 맡기고 오르는 산행은 고달팠다. 몸도 마음도 괴롭기 한량없지만 정상을 향해 한 발 한 발 옮겼다. 어쩌면 내 생애에 처음 맞닥뜨린 공포의 순간이었다. 그러나 드디어 정상을 밟았다.
정상에 오르자 해냈다는 기쁨에 가슴이 벅찼다. 눈앞에 펼쳐진 시방산세十方山勢가 형용할 수 없는 형국이다. 높은 데서 낮은 데를 바라보는 맛이 다르다. 소슬한 바람결에 가랑잎들이 바스락거린다. 만감이 교차된다. 마이산 정기를 한꺼번에 들이마실 듯이 심호흡을 했다. 흠뻑 안겨보는 즐거움에 힘이 솟는다.
마이산은 크지 않지만 개성있는 산임엔 틀림없다. 벌집 모양의 타포니 지형 봉우리로 솟아 있다. 그래선지 산의 이름도 다양하다. 계절에 따라 다르게 불려진다. 봄에는 돛대봉, 여름엔 용각봉, 가을엔 마이봉, 겨울엔 문필봉으로 불렸다. 시대별로는 신라시대엔 서다산, 고려시대엔 용출산, 조선조 태조 때엔 속금산이라 하다, 태종 12년 이후부터 말의 귀와 같다 하여 마이산이라 불렀다고 한다.
마이산에는 구전되어 내려오는 전설이 있다.
아득한 옛날 남녀 두 신선이 이곳에서 자식을 낳고 살았다. 하늘의 때가 이르러 등천할 때, 남신이 “우리가 등천하는 모습을 아무도 봐서는 안되니 밤에 떠납시다.” 하는데 여신이 밤에 떠나는 것은 무서우니 새벽에 떠나자고 했단다. 새벽에 떠날 즈음, 마침 새벽 일찍 물길러 나온 동네 아낙이 마악 등천하려는 두 신선을 보고 놀라 소리치는 바람에 등천이 틀어져버렸다. 이에 남신이 화가 나서 “여자 말을 듣다 이 꼴이 되었구나.” 하고 탄식하다가 그 자리에 ‘바위산’을 이루고 주저앉았다고 한다.
알고나면 더 잘 보인다던가. 진안 쪽에서 산을 보면 동편 아빠봉에 새끼봉이 둘 붙어있는 듯하고, 서편의 엄마봉은 죄스러워서 등을 돌리고 앉아 고개를 떨구고 있는 모습이다.
어찌보면 산은 신의 영험을 무언으로 대변해 주는지도 모른다. 단련이 덜된 나에게 경사가 심한 마이산행은 사치스런 괴로움이었지만, 그 괴로움은 인생을 깨닫는 요인이 되며 삶의 윤활유가 되어주었다.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산을 어머니라 한다. 또 포근한 여인의 품 같다고 한다.
수가송무水歌松舞 석불미소石佛微笑.
물이 노래부르고 나무가 춤을 추니 석불이 미소짓는다.
은수사 주지께서 마이산이 바로 부처라고 말씀하신다. 산을 통해 무욕과 겸손을 배우고 행하는 일이 나를 다스리는 일이다.
속세를 벗어난 듯 마음이 경건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