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8년 10월1일
벌써 10월, 오곡백화가 무르익는 완연한 가을이건만 낮의 기온은 28도를 넘어서니 아직도 여름의 모서리다. 중간고사 마지막 날 등교하는 아들에게 최선을 다하라고 격려하여 보내고 아침식사를 했다. 오전에 개봉동에서 조사장을 만나 대화를 하니 나도 어렵지만 그도 시공한 건물 분양이 안 되어 나름 고민에 쌓여 있다. 강원도 속초에서도 아파트를 시공하는데 완공이 되면 인천상가 대신으로 하나를 받아가라고 요청한다. 미안한 마음으로 그렇게 말하지만 거리도 있거니와 시공사 입장에서 손해를 보고 거저 넘겨주는 것도 아니고 또한 은행융자가 있어 나에게 먼 이야기로 들린다. 서울로 나오면서 종식이 형의 금전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강서구청에 갔다가 3시에 건강검진을 받는다는 어머니한테 가기 위해 내부순환도로를 타고 요양원 근처에 있는 위생병원으로 향했다. 시간을 맞추어 도착하니 형과 동생이 먼저 와 있고 비뇨기과 검사에서 소변에 혈액과 박테리아가 있다는 진단을 하며 약을 조제하여 준다. 나이가 들면 누구나 아이가 된다더니 병원에 있는 동안 우리들이 옆에 있어서 그런지 어머니께서 온갖 투정을 부려 힘든 시간이었고 요양원에 다시 돌아가 주무시는 것을 보고 나왔다. 젊은 날 친하게 지냈던 초등학교 동창 영근이 부친상 소식이 있어 내일 고향에 가기 위해 집으로 일찍 들어왔다.
2일 그리운 고향에 1년 만에 그것도 친구 부친상으로 가는데 시간을 내어 집도 둘러보고 성묘도 할 계획이다. 서울에서 요양원에 계시는 어머니와 함께 지내다 보니 고향에 가는 시간도 잊고 긴 시간을 보냈다. 시험이 끝난 아들은 홀가분한지 오늘은 여유를 부리며 학교에 가고 이어 딸도 나간다. 식사를 마치고 고속터미널에 가려고 현관을 나서는데 TV자막에서 여배우 최진실이 사망했다는 문자가 나와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강남고속터미널에 지하철로 도착하여 김제행 버스를 확인하니 시간이 맞지 않아 익산행 버스를 타고 내려가 다시 시외버스로 갈아탔다. 김제에 도착하여 중앙장례식장에 들어가 조문과 함께 친구와 슬픔을 나누고 고향 집에 택시로 가는데 벽골제에서 지평선축제가 시작되어 차량이 정체를 이루고 있다. 과거에 컴컴하고 개구리 울음 소리만 들렸던 이곳이 축제장으로 변하여 차량행렬이 줄을 잇다니 상전벽해의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시간을 지체하여 그리던 마을에 들어서니 여전히 누런 벼이삭만 바람에 출렁일 뿐 오가는 사람도 없고 쓸쓸하고 한적하기만 하다. 내가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인데 자주 찾아오지 못하여 미안한 마음이 있었고 집 대문에 들어서서는 텅빈 마당 그리고 우거진 잡초에 울적하기만 했다. 현관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가니 가족들의 사진 그리고 어머니의 흔적만 여기저기 남아 있어 한 동안 말없이 서 있기만 했다. 과거의 시간을 회상하며 집안 곳곳을 둘러보고 선산에 갔다가 벽골제 행사장으로 이동하여 친구들과 시간을 보냈다. 저녁에 시내로 이동하여 낮에 갔던 장례식장에서 식사를 하고 김제역을 출발하여 용산역에 10시에 도착했다.
3일 어제 서울에 도착하여 차용곤과 친구 형준이를 연거푸 만나는 바람에 늦게 들어와 피곤하다. 오늘은 개천절 휴일이라 아내는 일찍 수업을 가고 체육대회를 하는 아들은 아예 운동복을 입고 학교에 간다. 식사를 마치고 작년 체육대회에 달리던 아들을 생각하며 오늘도 응원을 하려고 10시에 학교에 도착했다. 프로그램을 보니 오늘은 아들이 속한 2학년은 축구를 하고 3학년은 농구를 그리고 달리기는 주로 1학년이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운동장이 좁아 학년별로 종목을 다르게 선정하여 내가 도착했을 때는 마침 아들의 축구경기가 열리고 있다. 열심히 달리는 아들은 두 경기를 이기고 오후에 결승전을 하게 된다. 예선전 아들의 경기를 보면서 역시 달리기를 잘하여 날렵하고 발기술이 좋은 반면에 몸싸움에서 밀리는 경우가 종종 있어 아쉬움이 있었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무엇을 하든지 악착같은 투지나 정신력은 반드시 필요한데 아들이 반드시 보충해야 할 부분이다. 어제는 원석이 아빠가 추석쯤에 어머니 치료비 명목으로 1백만 원을 형에게 주었다고 여동생이 말을 하는데 나는 금시초문이어서 의아했다. 나도 알아서 고마움을 전하는 것이 당연한데 단절된 내용이라 형이 좋은 뜻으로 사용했다고 하여도 야속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오늘이 연휴라 내일쯤 속리산이나 월악산 여행을 계획하여 오후에 아내와 딸이 먼저 청주에 내려가고 아들과 나는 내일 새벽에 내려가는 것으로 약속했다. 점심을 먹고 논술교실에 올라가 마라톤 체험기를 완성하고 4시에 신설동 3층 이사 문제로 갔다가 저녁에 돌아왔다. 오늘 체육대회를 마친 아들은 결승전에서 자신이 골을 넣어 우승을 했다고 자랑을 하고 나는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훗날 멋있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공부도 열심히 하라고 당부했다.
4일 토요일 새벽에 일어나 청주를 가려고 아들을 깨웠다. 아내와 딸은 어제 먼저 갔으니 우리만 내려가 어르신들을 뵙고 충주 수안보와 월악산 주변을 다니다가 돌아올 생각이다. 모처럼 가족이 여행을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도 들뜨고 고속도로를 달리며 휴게소에서 아침식사를 하자고 하니 아들도 밝은 표정으로 좋아라 한다. 7시가 되기도 전에 집을 나서는데 아내한테 청주에서 첫차로 올라오는 중이라고 문자가 온다. 평소에 늦게까지 잠을 자는 사람이 새벽에 올라온다니 더구나 우리도 내려가 여행을 하기로 약속을 해 놓고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다. 얼마쯤 집에서 기다리니 아내와 딸이 돌아왔고 이왕 준비를 한 것이니 외식도 할 겸 반대방향 경기도 포천으로 떠났다. 아름다운 광릉내 숲을 통과하여 갈비와 막걸리로 유명한 이동면을 향하여 새로운 고속도로를 타고 시원하게 달렸다. 초가을의 아름다운 경관과 근처에 있는 명성산 억새축제 홍보그림까지 마치 축제장같은 포천에 도착하여 유명한 소고기 등심으로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차를 몰고 산 하나를 넘어가니 정상에 위치한 산정호수가 시야에 들어온다. 아내와 아들 딸은 서둘러 오리배를 타고 나는 호수주변과 명성산 입구를 걸어 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4시가 지나 산정호수를 뒤로 하고 서울 방향으로 오면서 꽃으로 유명하여 전직 대통령도 방문했다는 평강식물원에 들어갔다. 산 뒤쪽이라 벌써 어두워지는 느낌이어서 여러가지 모양의 아름다운 꽃을 서둘러 감상하고 포천을 떠나왔다. 오늘이 주말이라 차량 정체로 매우 힘들게 서울에 도착했고 늦은 밤에는 가족이 비빔밥을 요구하여 내가 만들었는데 상식없이 고추장을 많이 넣어 매워서 모두 힘들게 먹었다.
5일 일요일 새벽에 도봉산에 가자는 친구의 문자가 왔지만 오늘은 일이 많아 어렵다는 답을 보내고 일단 늦게까지 누워서 보냈다. 아름다운 가을의 경치와 맑은 공기를 마신 어제의 시간이 꿈에서 본 그림 같은데 아마 우리 인생도 지나고 나면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오늘은 그 동안 사용한 거실 소파와 결혼할 때 구입해 온 오디오를 버린다고 아내와 아들이 오전부터 땀을 흘린다. 10년 넘게 사용하여 소파는 낡았고 오디오는 깨끗하지만 사용을 안하고 공간만 차지한다는 이유로 처리를 하는 것이다. 처음 구입할 때는 이름도 있고 가격도 만만치 않은 제품이었는데 세월이 흘러 외면을 당하는 꼴은 나이가 들어 도태되는 사람과 같은 수순이다. 점심이 되기 전에 포도 한 송이를 가지고 안산에 올라 걷다가 2시간을 보내고 내려왔다. 오후에 어머니를 뵈러 요양원에 가니 형이 와 있어 어머니와 어린 시절의 추억을 이야기하고 저녁에 나오는데 내일 또 오라고 전라도 말투로 외치는 어머니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웃었다. 오후 5시 집에 돌아와 학원에 간 아들을 제외하고 아내와 딸과 삼겹살로 저녁을 먹으며 칡술을 몇 잔 마셨다.
6일 10월의 연휴를 마치고 출근하는 차량 행렬이 이른 아침부터 무악재 언덕에 줄지어 있다. 아들과 딸이 학교에 가고 9시에 체육관에서 운동을 하는데 긴 휴일 탓인지 여기저기서 전화가 많이 온다. 인천 북항에서 중고차를 외국으로 수출하는 친구 우현이는 일이 너무 바쁘다며 나한테 아르바이트를 주문한다. 인터넷으로 서울에서 주문한 중고차를 운전하여 가져가면 대략 4만원을 준다고 하고 하루 2회나 3회도 가능하다고 한다. 친구의 부탁이고 그의 사업 현장도 볼 겸 집에서 멀지 않은 장안평에 나가서 친구가 구입해 둔 차를 인수받아 인천에 갔다. 1년 전에 친구를 따라서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오늘은 운전을 하면서 찾아가려니 쉽지가 않아 가까스로 도착했다. 강의만 해온 나로서 전혀 새로운 일을 하여 수입을 얻다보니 기분이 생소했고 모레가 아내 생일이니 이 돈으로 꽃과 케익을 사면 더 의미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인천에서 노량진까지 친구 차를 타고 나와서 방배동으로 갔다가 영식이가 주는 동해안 줄돔과 다른 생선을 받아 지하철로 집에 왔다. 오전에 마무리 한 마라톤 원고를 사진과 함께 ‘월간 마라톤’ 편집실에 메일로 보냈었는데 집으로 오는 중에 기자로부터 내용이 좋아 11월호에 올리겠다는 연락이 왔다. 기록은 저조해도 나의 땀과 눈물의 흔적이 있는 가치있고 소중한 오래 기억될 내용들이다
7일 집에서 가장 먼저 자고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나는 어렸을 때부터 부지런한 사림이었다. 추운 겨울에도 눈이 내린 날은 일찍 마을 어귀까지 눈을 치우고 산소를 다녀와서 아침식사를 하는 정도다. 중학교 겨울이나 여름방학 때도 새벽마다 아버지의 묘를 돌아보고 왔는데 우거진 소나무가 도깨비처럼 서려 있는 그 곳을 다닌 시간이 지금도 생생하다. 평소에 먹기도 잘 하고 말괄량이처럼 괄괄한 성격인 딸이 요즈음 수줍음을 많이 타고 말도 부쩍 적어지더니 오늘도 의기소침한 모습으로 등교를 한다. 오전에 체육관에서 운동을 하고 경기학원에 가서 장원장을 만나 학원운영에 관하여 깊이 있게 의견을 나누었다. 40대 초반에 학원을 운영하면서 여러 경험을 한 적이 있는데 이제는 새로운 능력을 발휘해야 할 시기가 다시 왔다. 오후에 요양원에 가서 어머니를 휠체어에 모시고 직접 가위를 들어 머리카락 커트를 내가 해 드렸는데 살다보니 이런 일도 있나 싶었다. 서툰 솜씨로 엉성한 모습이었지만 어머니는 싱글벙글 머리가 잘 되었다고 기뻐하시고 이발사를 해도 되겠다고 나를 칭찬하신다. 오후 4시에 호박죽을 만들어 온 여동생이 와서 먼저 집으로 돌아와 내일 아내 생일이라 케잌을 구입하였다.
8일 어제 저녁에 친구 전화가 와서 나갔다가 새벽에 들어와 잠을 자고 일어나니 머리가 띵하다. 아내 생일이라 아침에 가족이 식탁에 앉아는데 잠이 덜 깬 아들과 딸은 연신 하품만 하여 어쩔 수 없이 나만 노래를 크게 불렀고 미역국으로 식사를 하면서 오후에 외출하여 선물을 사 주기로 약속했다. 오전에 안산을 올라서 걷다가 서대문구청 방향으로 내려가 홍제천에서 한강을 가로질러 동쪽으로 25킬로를 달려 현충원 건너편 동작대교까지 갔다. 임진각 마라톤 이후 10여일 만으로 유유히 흐르는 물줄기와 우뚝 솟은 6,3빌딩 그리고 땀을 흘리는 내가 가장 아름다운 존재로 인식되는 시간이었다. 오후에는 오늘 이사를 가는 3층 때문에 신설동에 가서 마무리를 하고 돌아왔다.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속이 시원했고 이제부터는 세입자도 사람을 보아가면서 아니면 계약서에 구체적인 약정 내용을 일일이 기록하여 임대인으로서 불편하지 않도록 할 것이다. 4시에 집으로 돌아와 아들과 딸까지 태우고 불광동 킴스클럽에 가서 생일선물로 아내의 가방을 샀다. 선물에 인색한 나인지라 작년까지는 현금을 주로 주었고 오늘처럼 함께 아내의 선물이라고 사는 일은 그 동안 거의 없었다.
마흔 살이 지난 아내가 사치를 안하고 씀씀이도 크지 않아 나와 비슷한 면이 있는데 그러다보니 사람은 물론 우리집 거실에 들어가도 화려하거나 치장된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다. 저녁에 외식을 마치고 딸은 엄마 손을 잡고 나는 아들의 어깨를 감싸고 집에 돌아왔다
9일 어제 생일을 잘 보내고 함께 자다가 새벽에 눈을뜨니 아내가 없다. 거실로 나가보니 딸과 나란히 자고 있어 나도 소리없이 옆에 누웠는데 양쪽에서 불편하다고 아우성을 하여 쫓겨나듯 다시 방으로 들어 왔다. 날이 밝아 무국으로 가족이 식사를 하고 신설동에 가서 어제 이사를 하여 지저분한 사무실을 청소하고 당분간 내가 공간을 사용하려고 남아 있는 책상과 집기를 정리했다. 1층 매장 젊은이는 또 물이 넘칠까 봐서 수도를 사용하지 않고 화장실도 다른 곳으로 간다고 오늘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댄다. 일전에 다툼이 없이 조용하게 5백만 원을 건넸더니 이제는 시도 때도 없이 떼를 쓰고 결국은 공과금(수도세)을 내지 않겠다고 억지를 부리는 것이다. 애당초 법정에 서서 시시비비를 가리고 판결을 받아 처리를 했어야 후환이 없었을 것인데 시간이 지날수록 잘못된 판단으로 굴욕스럽기만 하다. 우현이 친구는 오늘도 아르바이트를 부탁하여 지하철로 복정역에 가서 차를 인수받아 인천 북항 사무실에 갔더니 직원도 없고 혼자 정신없이 일을 하고 있다. 너무 바쁜 모습이라 사업이 잘 되는가 생각하는데 어제 차를 주문하여 가져간 외국인이 다시 반품하는 과정에서 늦게까지 실랑이가 벌어진다. 옆에 있는 나도 피곤하고 역시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는 생각을 하며 친구와 목동으로 나와 연포탕으로 식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10일 아침에 얼큰한 콩나물 국으로 식사를 하고 운동을 마친 뒤에 신설동 3층 사무실로 갔다. 임대도 준비하고 학원 계획도 세우며 점심 때가 되었는데 건물 앞쪽에서 조그만 사무실을 사용한다는 사람이 찾아와 마치 임대를 할 것처럼 이야기하고 나를 데리고 내려가 칼국수를 사 준다. 점심은 먹었지만 처음 보는 사람이 자신의 사업을 자랑하며 돈이 많다고 잘난 체를 하는데 사기꾼이라고 생각이 들어 경계심이 생겼다. 오후에 오늘도 아르바이트를 하러 지하철로 북수원에 가서 차를 가지고 외곽도로를 타고 인천항에 들어가니 4시가 되었다. 커피를 마시고 차량 수출에 대한 여러 가지 서류를 접수하러 영등포구청으로 친구와 함께 나와 지켜보는데 여기서도 문제가 있어 시간이 지연된다. 중고차가 외국으로 나가기 때문에 판매를 했어도 서류상 문제가 있으면 보류 또는 취소가 되고 그렇게 되면 현금을 주고 구입한 차를 손해를 감수하고 다시 헐값으로 처분해야 하는 이중의 일을 하게 된다. 중고차 수출이 어떤 과정으로 이루어지고 또 수입은 얼마나 되는지 내가 알아 보기도 전에 보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가 도를 넘는다. 일전에 필리핀 사업을 영식이가 나에게 일임하여 오늘 담판을 짓고 확답을 받아 주려고 방배동으로 가서 이정렬사장을 만났다. 사람을 철석같이 믿고 돈을 투자하고 이후에 진전이 없으니 나보고 처리해 달라는 것인데 언제나 순진한 영식이가 불안하기만 하다. 서래초등학교 근처에서 이사장을 만나 심하게 이야기를 하니 미안하다는 말과 잘 처리하겠다는 말만 되풀이한다. 밤 8시에 감자탕으로 저녁을 먹고 집으로 오는데 이번에는 형준이가 전화를 해서 삶이 힘들다고 하소연 하는데 주변이 온통 어렵다는 사람들뿐이다.
11일 토요일 아침 이보다 더 맑을 수가 없을 만큼 전형적인 가을 하늘이다. 오늘은 인터넷으로 주문한 차를 부산에 가서 두 대를 가져온다고 우현이가 함께 동행을 요구한다.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부산에 가서 회도 먹고 시간을 보내다가 각각 차를 몰고 상경하자는 것이다. 차비나 일하는 비용을 넉넉히 주겠다고 하니 여행도 하고 부산에 사는 영식이 큰형님도 보고 기회가 좋았는데 문제는 구입한 차가 모두 수동이라서 내가 운전을 못해 가지 못했다. 오늘 아내는 부모님 모시는 일로 형제자매간 상의한다고 일찍 청주에 간다더니 결국 전화로 대화를 했다고 하며 토요일 수업을 하러 논술교실에 올라간다. 부모님 사후에 여러 문제 등을 의논하는 것이라 직접 내려가 논의를 하고 가급적 서류를 작성하는 것도 필요할텐데 전화로 다 했다니 어쩔 수가 없다. 오전에 신설동에 나가 시간을 보내고 점심은 경기학원에서 장원장과 토속음식 청국장으로 해결했다. 오후에는 요양원에 가서 4일 만에 어머니를 뵙고 엊그제 머리커트에 이어 오늘은 손, 발톱을 정리해 드렸더니 좋아하시고 말씀도 잘 하신다. 어머니와 시간을 보내는 중에 아내와 아들은 종로 3가 학원에서 토익을 들었다고 전화가 오는데 중학생 아들과 논술을 하는 선생이 무슨 일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중학생이 학교 수업과 교재에 충실 해야지 교육과정이나 범위가 다른 토익을 들어서는 효용성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 동안 아내는 아들이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무조건 등록을 하고 결국 오래 다니지도 못하고 그만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요양원에서 신설동 사무실로 왔다가 가을 햇살을 안고 6시에 집에 들어오니 토익을 했다는 아들은 그 사이에 축구를 하고 들어온다. 저녁에 아내와 아들 딸은 거실에서 TV를 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나는 식사를 마치고 일찍 자리에 누웠는데 내일 북한산에 가자는 동네에 있는 영어선생 전화가 왔다.
12일 일요일 아침 오늘도 어제처럼 맑고 아름다운 하늘이다. 아내에게 산에 함께 가자고 요청하니 1시부터 수업이라 어렵다고 하고 아들에게 이야기하니 오후에 축구 일정이 있다고 한다. 할 수 없이 딸에게 아빠와 서울 근교 여행을 가자고 부탁하니 한사코 거절하여 혼자 집을 나섰다. 등산복 차림으로 홍은동 유진상가를 건너 북한산에 오르니 선선한 아침과는 다르게 기온이 올라 땀이 흐르고 아직도 푸른 숲은 늦여름을 연상시킨다. 정상으로 갈수록 등산객이 많았고 비봉을 거쳐 사모바위에 이르니 마치 시장을 방불케 한다. 집에서 9시 40분에 나와 12시에 도착했으니 2시간 이상을 걸어온 곳, 남북으로 서울과 경기도가 갈라져 한눈에 시원하게 들어온다. 동네에서 영어학원을 운영하는 김명욱 선생이 북한산 대남문으로 온다는 전화가 어제부터 와서 40여분을 걸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모자를 비스듬하게 쓴 그가 먼저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고 함께 대남문 아래로 내려가 가져간 점심을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대성문 보국문을 거쳐 평소에 내가 자주 오르는 칼바위 능선을 넘었다. 오후에 임대문제가 있어 서둘러 반대방향 길음역 서경대 근처로 내려와 버스를 타고 신설동에 가서 일을 보고 집으로 돌아와 자려고 하는데 아들이 들어와 인사를 한다.
13일 어제 5시간을 산에서 보냈는데 다리는 뻐근하지만 머리는 맑다. 식사를 하고 체육관에서 운동을 마친 뒤 대신고등학교에 들어가 체육부장 강선생을 만났다. 학생주임이라 점심시간 질서를 잡는다고 부러진 골프채를 들고 어슬렁 다니는데 한가한 그의 생활이 부럽기도 하다. 식사를 함께 하며 대화를 마치고 신설동에 갔다가 오늘도 아르바이트 수원 영통에 가서 차를 몰고 수인고속도로를 달려 인천에 도착하니 5시가 되었다. 친구와 커피를 마시고 6시경 북항을 나오는데 고등학교 친구 은식이가 사망했다는 문자가 들어온다. 나하고 우현이와 모두 중,고등학교 친구여서 기억이 선한데 젊은 나이에 사망이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5호선 영등포 구청에서 경기도 안산 장레식장으로 간다는 친구를 두고 집으로 와서 저녁을 먹고 나니 뭔가 순서가 바뀌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창의 사망 소식을 듣고 집으로 오다니 마음이 편치 않아 밤10시에 4호선 지하철을 타고 경기도 안산시 상록수역으로 출발하여 12시에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고등학교 당시에 공부도 잘하여 전북대에 들어간 착한 친구였는데 몸도 아프고 돈벌이도 안 되어 방황하다가 고시원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착잡한 시간에 고교동창들이 모였고 모두 영안실을 지키다가 새벽에 포장마차로 이동하여 시간을 보냈다.
14일 새벽까지 동창들과 보내다가 상록수역 앞에 있는 사우나에 들어갔는데 날도 이미 밝았거니와 죽은 친구에 대한 생각으로 잠도 오지 않았다. 오늘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도 있었는데 그 중에서 인식이는 중,고등학교 때 조용하고 공부를 잘하여 명문대를 나왔는데 현재는 전공과는 무관하게 보쌈과 족발집을 운영한다며 소주도 벌컥벌컥 마시어 의아했다. 물론 학교 성적과 직업은 일치할 수는 없고 누구나 자기가 하는 일에 보람을 느낀다면 더 말할 나위는 없다. 사우나에서 일어나 가까운 수원에 가서 오늘 처리해야 하는 차를 가지고 북항 사무실에 들어가니 어제 날을 샌 우현이가 먼저 도착하여 나를 기다리며 잡채밥을 준비해 두었다. 식사를 하고 가까운 영등포에서 다시 새로운 차를 인수받아 들어가니 4시가 되었고 바로 동인천으로 나와 지하철을 타고 집에 도착하니 5시30분이다. 오늘은 아르바이트를 연속 2회 했으니 수입도 2배가 생겼는데 그것보다 차를 운송해 주는 일을 몇 번 하다보니 단순 노동이라 용돈을 버는 것 말고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무슨 일이든 목표가 있어야 하고 현재는 어려워도 미래 가치가 있어야 보람이 생기는 것인데 아마 오늘이 마지막 아르바이트가 될 듯하다. 저녁에 우리 집에서 가까운 친구들 모임이 있어 분위기가 있는 거실에 상을 펴고 아내는 정성을 다해서 식사를 준비한다. 6시가 지나 영식이와 정식이가 왔고 이어 대신고 강부장이 들어왔다. 소고기 토시살을 구워서 안동소주를 마시고 저녁식사도 더불어 하는데 아내의 음식 솜씨가 좋아 모두가 칭찬 일색이라 나도 먹어보니 정말 맛이 있다. 밤이 깊어 모두가 취해서 택시를 타고 자연스럽게 헤어졌고 나도 어제부터 오늘까지 긴 시간을 보내고 잠이 들었다.
15일 자고 일어나니 아침 9시다. 인생이 그렇듯이 즐거움도 지나고 나면 모든 것이 순간이다. 어제 주변에 있는 식당에서 모임을 할 수 있었는데도 구태여 집으로 친구들을 초대하여 아내에게 미안하기도 했지만 기억에 남는 시간을 만들어 좋기도 하다. 아침에 아들과 딸은 학교에 아내도 동사무소 영어를 배우러 나가고 혼자 식사를 조금 했다. 오전에 경기학원에 가서 장원장을 만나 학원의 재정규모와 자금의 흐름을 구체적으로 허심탄회하게 이아기를 나누었다. 규모도 크고 시설도 좋은 대형학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매출과 수입인데 현재는 임대료가 비싸고 불필요한 스쿨차량과 높은 강사료 등으로 이익을 만들 수가 없는 형편이다. 임대료를 조정하고 차량을 줄이고 강사를 일부 교체하면 월 1천만 원은 절약이 되어 지금보다는 훨씬 수월하게 운영이 가능할 것 같다. 일단 출근한 차량 기사들을 불러 모두 함께 가는 것이 마땅하지만 배가 가라앉는 상황에서 이대로는 어렵다고 입장을 이야기하고 면담을 마쳤다. 늦은 오후에 요양원으로 어머니를 4일 만에 뵈러가니 오랜만에 나타난 나를 반기시고 여동생한테서는 어머니께서 하혈이 있어 금요일에 병원으로 이동하여 진단을 받는다는 전화가 왔다. 잔잔하다가 파도가 치는 것처럼 어머니의 상태도 편안하시다가 병이 생기는 일이 연속으로 반복되고 있다. 저녁에 집에 들어오니 아들과 딸이 싸워 험악한 분위기로 공기가 냉냉하여 아무 말도 안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돈을 조금 벌어도 아들 딸과 많은 시간을 갖고 화목한 분위기로 살아가는 것이 가장 큰 행복임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밤이다.
16일 어제 무슨 일로 다투었는지 아들과 딸이 아침까지도 말을 안하고 인상만 쓰고 있다. 자라면서 형제나 남매간 다투다가도 성인이 되면 대체로 잘 지내듯이 아들과 딸도 유일한 혈육이니 나중에는 서로 의지하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아들은 훗날 내가 세상을 떠난다고 해도 엄마와 딸을 잘 챙기는 든든한 울타리가 될 수 있음을 나는 믿고 있고 반드시 그래야 할 것이다. 오늘 아침에도 같은 시간에 서로 화장실을 먼저 사용하겠다고 티격태격하는 아들과 딸인데 내일부터는 안방 화장실 사용권을 아들에게 먼저 주는 것으로 정리를 하고 학교에 보냈다. 아침 TV에서 행복전도사라고 별칭을 얻은 최윤희 선생이 신나고 재미있게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방법을 강연하여 들으면서 청국장으로 식사를 했다. 체육관에서 운동을 하고 신설동 3층 계약으로 갔더니 월세와 보증금 일부를 먼저 주고 11월15일에 나머지 보증금을 입금하겠다고 한다. 사정이 그럴 수 있다고 여기고 계약을 완료한 뒤에 제기동 경동시장을 방문하여 영식이 어머님께 드릴 한과를 구입하였다. 아내는 매월 모이는 신사임당 팀들과 남이섬으로 여행을 갔는데 깊어가는 아름다운 가을에 즐거운 시간이 될 것 같다. 늦은 점심을 사 먹고 요양원에 들렀다가 저녁에 남영동에 가서 대일학원 선생님들을 오랜만에 만났다. 형문태, 장성남 선배는 나와 질긴 인연으로 장선생은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말도 많고 사람들을 웃긴다. 오늘 우리나라 주식이 사상 최고의 기록 126 포인트가 폭락했다. 주식에 별로 관심을 두지는 않지만 일백을 넘어 일백이십육 포인트 낙폭이라니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다. 선생들 모임에 늦게 나온 영식이를 만나 어머니에게 드리라고 오늘 구입한 한과를 전하고 집에 돌아왔다.
17일 금요일 평소처럼 여전히 일찍 일어났다. 신문을 보고 새벽부터 아들과 딸 화장실 교통정리를 했다. 어제 아들과 딸에게 서로 싸우지 말고 잘 지내달라고 문자를 보낸터라 오늘은 서로 조심하고 각각의 화장실을 이용한다. 아침식사를 하고 어머니 병원 검사일이라 아내를 태우고 부지런히 요양원으로 가서 가까이 있는 병원에서 진단을 마치고 담당 의사와 면담을 하니 원인을 모르겠다고 귀찮은 표정으로 이야기를 하여 심히 불쾌했다. 가족들의 초조함이나 걱정은 아랑곳하지 않고 무신경으로 이야기하는 그가 서울에서 인기 없는 이 병원의 현주소다. 할 수 없이 1년 전에 진찰을 받았던 상봉동 송도병원으로 갔더니 친절하게 맞이하여 위생병원과는 대조적이었다. 진단을 하고 결과를 설명하는 과정은 긴장감이 있었고 결과적으로 항문 안쪽에 덩어리(암으로 인한 혹)가 직장을 막고 있고 거기에 상처까지 있어 하혈이 된다는 것이다. 결코 간단하거나 경미한 수준이 아니라며 원자력병원에 가서 일단 방사선치료부터 하라고 안내를 해 준다. 그 무서운 암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힘든 과정이고 어머니의 수명이 길지 않을 것 같아서 착잡하기만 했다. 일단 어머니를 요양원에 모셔 드리고 경기학원에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와 발가락이 아프다는 아들과 동네 병원에 갔더니 아무 문제가 없다는데 아들은 내일 축구를 한다고 계속 치료를 요구한다. 밤 9시에 논술학원에서 돌아온 아내와 가뜩이나 오늘 암 진단으로 심난한데 어머니 옷 문제로 심하게 다투어 아들과 딸에게도 미안한 저녁이다.
18일 어제 싸워 편하지 않은 밤을 보내고 새벽에 아침도 거르고 집을 나왔다. 신설동에 가서 이번에는 1층 임대 현수막을 설치하고 해장국을 먹는데 급한 사정을 이야기하며 아르바이트를 부탁하는 우현이의 전화가 와서 막역지우莫逆之友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았다. 지하철로 수원역에 가서 차를 인수받아 북항에 갔다가 점심을 먹고 다시 서울로 나와 두 번째 차를 가지고 사무실에 들어서니 오후 4시가 되었다. 마음의 우울함이 있어 쉬지 않고 일을 해 보려고 또한 친구의 부탁이라서 그 동안 몇 번을 다녔는데 오늘도 시간 낭비가 많고 돈을 버는 것 외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친구와 목동으로 나와 아르바이트 비용을 정산하고 경기학원으로 이동하여 장원장과 학원운영에 대하여 구체적인 이야기를 나누고 식사를 함께 했다. 금방 저녁이 되었고 집에 들어가기가 싫어 다시 신설동 3층 사무실에 가서 파전과 라면을 배달시켜 소주를 마시며 보냈다. 밤이 깊어 지하철도 끊기고 춥고 피곤하여 동대문구청 주변에 있는 찜질방으로 들어가 잠을 잤다.
19일 일요일 아침 신설동 찜질방에서 자고 일어나 해장국으로 식사를 하고 서울에서 지하철이 닿는 동두천에 도착했다. 지하철역 앞이 바로 그리 높지 않은 소요산 입구라서 자재암을 거쳐 하백운대 중백운대 상백운대를 거쳐 나한봉 의상대 정상까지 갔다. 교통이 좋아 사람들이 많이 오고 사찰 뒤편으로 올라 성곽같은 길을 한 바퀴 도는 코스인데 큰 구경거리도 없고 등산로조차 불편하여 매력이 있거나 자주 찾고 싶은 산은 아니다. 10월 중순답게 정상 주변은 단풍이 들어 여기에도 가을이 왔음을 알리고 나한봉 아래에서는 40킬로 무게의 막걸리를 지고 올라온 젊은이가 술잔을 권한다. 선 채로 막걸리 한 잔을 마시고 몇 시간을 걸으니 마음도 편하고 머리도 맑아져 꺼 두었던 핸드폰을 켜니 딸한데 아빠 어디냐고 문자가 와 있다. 날이 흐리고 안개 때문에 시야가 흐림에도 떠오르는 딸의 얼굴은 선명하기만 하다. 의상대 고개를 넘어 공주봉으로 가다가 중간에 샘골길로 일주문에 내려오니 일요일 등산객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입구 식당가에서 따뜻한 순두부로 늦은 점심을 하고 1호선 지하철로 아침에 왔던 코스를 따라 서울에 왔다. 오늘 남영동에서 과거 대일학원 선생들 모임이 있어 참석했더니 선배들 중심으로 25명쯤 나와 반갑게 만났다. 지난간 시간을 이야기하며 저녁을 먹고 이틀 만에 집에 들어오니 아무도 안 사는 집처럼 휑하고 적적하다.
20일 산에서와 달리 집에서는 기분이 나지 않아 늦게까지 누워 있었다. 아침에 혼자 밥을 먹고 오전에 원자력병원에서 진단을 받는다는 어머니에게 갔다. 1년 전 방사선 치료를 담당했던 여의사를 만났는데 이번에는 훨씬 부드러운 인상으로 작년보다 상태가 좋아졌다고 어머니를 반긴다. 지난 금요일에 송도병원에서 말한 것처럼 직장 안쪽에 혹(암세포)이 있어 변비와 하혈이 생긴다는 같은 설명을 한다. 그러면서 복부쪽으로 인공 장루를 만들어야 하는지 방사선 치료를 해야 하는지 29일 이후 CT촬영을 해 보자고 한다. 문제는 방사선 치료를 하면 1년 후에 재발될 가능성이 있고 인공항문을 만들면 치료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말을 한다. 선택이란 조금이라도 긍정의 항목이 있어야 하는데 두 부분이 절망의 상황이라 선뜻 답을 주지 못했다. 누구나 삶의 종점이 있다고는 하지만 바라볼수록 어머님의 모습이 안타깝고 어떤 선택을 해야하는지 심난한 시간이었다. 형이 어머님을 모시고 요양원으로 돌아가고 나는 학원으로 이동하여 선생들과 구체적인 여러가지 발전 방향을 논의하였다. 초저녁에 집에 들어와 어머니 상태에 난감해 하고 있는데 아들과 딸은 아랑곳하지 않고 TV를 보며 즐겁게 보내고 있다.
21일 어제 늦게까지 학원운영 서약서와 강사채용 서류 등을 만들고 새벽에 잠이 들었다. 당연히 아침이 피곤하여 늦게까지 누웠다가 9시에 혼자 식사를 마치고 10시경 체육관에 나가 운동을 했다. 요즘 거의 1년 만에 본격적인 강의를 하고 거기에 운영까지 맡게 되어 물을 만난 고기처럼 마음의 자유가 생기기는 했는데 이럴수록 엄격하게 나를 통제하고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운동을 마치고 학원에 가서 장원장과 어제 만든 계약서를 점검하고 구체적인 항목까지 추가하여 최종 합의를 하고 내가 운영자로 정식 출발을 하였다. 오후에 강사들과 정식 인사를 하고 수강료가 연체된 선생들을 만나 월말까지 처리해 준다고 하니 일부는 수긍을 하고 일부는 아직도 불신이 여전하다. 자존심이 상하긴 했어도 내가 운영하는 새로운 체제에 가급적 따라 주고 새로 출발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수업을 하자고 부탁을 했다. 평소 나의 어려움에 조언을 많이 해준 윤재하 선생과도 의견을 나눈 뒤에 삼선교 골목에서 호프를 마시고 집에 돌아왔다.
22일 밖으로 나오니 밤새 비가 왔는지 도로가 촉촉이 젖었고 떨어진 은행잎이 도로를 덮고 있다. 잔뜩 찌푸린 하늘에 불어오는 가을 바람이 오늘은 오히려 상쾌하고 시원하다. 차를 몰고 모래네 설렁탕에 가서 아침을 사 먹고 집으로 7시40분에 돌아오니 아들이 학교에 간다. 공부 열심히 하고 잘 다녀오라는 이야기를 하니 인사는 커녕 대답도 없이 현관문을 나선다. 대체적으로 사람들은 부모의 마음을 모르고 자라다가 성년이 되면 약간의 미안함이 생기고 자녀를 낳고 자신들이 부모가 되면 고마움을 느끼다가 세상을 떠난 후에 후회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 아들은 어떤 마음으로 부모의 존재를 느끼고 있고 또 미래에는 어떻게 변하여 갈까. 훗날 나의 부족함을 참고하여 아들은 더 나은 삶을 살아 갔으면 좋겠고 나는 그런 아들을 변함없이 지켜보고 싶다. 세월이 흐르면 누구라도 현재의 자리를 떠나고 그러다 더 시간이 지나면 존재도 잊혀진다. 눈과 진흙에 남은 기러기의 발톱자국, 기러기가 날아가면 남는 것은 발자국이고 그것마저도 시간이 흐르면 흔적이 사라진다는 설리홍조(雪泥鴻爪), 노자의 이야기가 불현듯 떠오른다. 체육관에 가서 운동을 한 뒤에 학원으로 들어가 일정을 정리하고 오후 교무회의에서는 프로의식을 가지고 강의에 임하라고 선생들에게 당부했다. 저녁에 홍대 근처로 가서 영식이를 비롯하여 친구들을 만나 저녁식사를 했는데 넉넉하고 훈훈한 밤이었다.
23일 늦게 자고 일어나 아침에 혼자 식사를 하는데 아내는 보이지 않고 어제에 이어 오늘도 비가 계속 내린다. 경기학원에 가서 장원장을 만나 그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려고 을지로 입구 장교빌딩 노동청으로 함께 갔다. 강사료 때문에 젊은 선생이 고발을 했다고 억울해 하면서 그 동안 성의껏 넉넉하게 대하고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는데 결과적으로 고발까지 당했다는 것이다. 가까이서 본 장원장은 대학교수나 형제들이 하고 있는 성직자가 적격인데 현재는 학원사업자로 어려움에 직면해 있어 김치찌개 점심을 사 주고 위로를 했다.
오후에 학원으로 들어가 내가 사용할 대표실을 정하고 과목별 선생들을 면담하며 새로운 운영을 계획을 논의하였다. 오늘도 강사료를 제대로 받지 못한 선생들은 장원장에 대한 불만이 많아 결국 착한 심성의 그도 금전적인 어려움 때문에 무능력자로 전락해 간다. 저녁에 집으로 가면서 아내와 딸에게 외식을 하자고 전화를 하니 벌써 밥을 먹는 중이라고 하여 그대로 들어갔다. 식탁에 앉아 최근의 학원 상황을 아내에게 보고하듯 이야기하니 나도 궤도에서 이탈한 기차가 오랜만에 가까스로 틀을 맞춘 느낌이었다.
24일 아내는 오늘도 딸과 함께 거실에서 자고 있다. 싸우고 화가 나더라도 잠은 함께 자는 것이 좋은데 사람마다 생각과 입장이 다르니 어찌할 수가 없다. 새벽에 산에 갈까 하다가 신문을 보면서 아침을 맞이했고 식사는 구수한 된장국으로 맛있게 먹었다. 학교에 가는 아들이 오늘 짱 춥다고 하며 동복을 입었는데 작년에 큼직했던 옷이 작아 보일 만큼 부쩍 자랐다. 오전에 체육관으로 가서 운동을 하고 영식이 배 사업에 다시 투자하기로 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통보를 하니 먼저 형이 2천5백만 원을 입금하였다. 운동을 마치고 집에 와서 점심을 먹으며 아내에게 연락을 하니 산에 다녀왔다가 친한 동학이 엄마가 와서 또 올랐다며 안산을 두 번 오른 하루라고 한다. 오후에 장원장에게 미지급 강사료 노동청 고소 금액을 해결하라고 우선 4백만 원을 입금시키고 요양원에 가서 빵과 과일을 사 가지고 병문안 온 영식이와 어머니를 뵈었다. 9시에 집으로 오면서 삼겹살을 사고 가을이 왔는데 아직도 극성인 모기 때문에 약도 구입했다. 저녁에 어제에 이어 오늘도 주식이 대폭락이라고 나라의 경제를 걱정하는 뉴스가 나오는데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25일 아들과 딸이 휴일 토요일이라 늦게까지 잠을 잔다. 아내는 주말 논술 수업으로 일찍 나가고 나는 TV를 보다가 오전에 산도 가고 달리기도 할 참으로 준비를 하여 안산에 올랐다. 정상을 돌아 서대문구청으로 내려가 홍제천에서 양화대교를 돌아오는 15킬로를 목표로 출발했다. 하지만 모래네 다리를 지나 한강 입구에 다다르자 맑은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면서 비가 내리고 중국산 운동화를 오늘 처음 신었더니 딱딱하여 금방 물집이 생겨 결국 달리기를 멈추고 내부순환 고가 아래로 비를 피하면서 걷다시피 돌아왔다. 다행히 비는 많이 오지 않아 신연중학교 언덕을 넘어 한양아파트 후문을 통과하여 상가에 이르니 수업을 마친 아내가 서 있고 아들이 우산을 들고 엄마 마중을 나오고 있다. 함께 집으로 내려와 라면으로 점심을 먹고 쉬다가 오후에 학원으로 나가 장원장의 금전 현황을 세부적으로 알아보니 해결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지금부터라도 긴축으로 운영하여 학원을 살리는 것은 전적으로 나의 어깨에 달려 있는 셈이다. 어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금전이 전부는 아니라고 하지만 그것은 가진 자의 여유로운 말씀이고 순간순간 돈으로 인하여 울고 웃고 나아가 능력자와 무능력자까지 가늠하는 현실을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된다.
26일 요즘 단풍이 절정이라 일요일인 오늘 아들과 딸을 데리고 가을산에 가려고 일정을 물으니 아들은 약속이 있다고 하고 딸은 특별한 일은 없는데 그냥 집에 있고 싶다고 한다. 산에 가는 일이 힘들어서 그럴 수 있다고 여기어 잠실에 디자인 전시하는 구경을 가자고 해도 역시 반대하는 딸이다. 아빠랑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내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추억을 만들면 좋을텐데 하지만 어린 딸이 어찌 내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겟는가. 할 수 없이 혼자 정릉으로 가서 등반을 시작하여 1시간 30분을 걸어 대성문에 도착하여 땀을 식히고 다시 한 고개를 넘어 대남문 문수봉 정상에 섰다. 북한산에서는 가장 멀리 위치한 백운대를 제외하고 문수봉과 칼바위 정상이 경관으로 으뜸인데 작년에 비하여 올해는 그다지 화려함이 없어 실망스럽고 다른 산에 비하여 분명히 아름다움은 덜하다. 칼바위로 1시간 이동하여 점심을 먹고 시간을 보내다 하산하여 요양원에 가서 어머니를 뵈었고 다시 집으로 와서는 옷을 갈아 입고 건강이 좋지 않다는 부천에 사는 고모님을 뵈러 출발했다. 병문안을 간 것인데 들어서면서 한눈에 봐도 얼굴이 노랗고 눈은 황달이 와서 삶의 끝에 와 있다는 느낌이었다. 자신의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고모는 오히려 조카인 나를 반기고 닭백숙을 만들어 가져온다. 부잣집으로 시집을 가서 어린 날에 고모집이라고 가면 나에게 많은 것을 챙겨준 기억이 있는데 오늘은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어 아들인 동생 정환이만 붙들고 탄식을 하다가 밤 11시에 나왔다.
27일 어제 산에 다니고 부천까지 갔다가 늦게 돌아와서 피곤하고 오늘은 날씨까지 쌀쌀해져 몸이 움츠려 든다. 아들은 학교에서 동복 착용을 아직도 금지시켜 춘추복을 입고 등교하는데 기온이 낮아 내복이라도 입어야 할 처지다. 아들을 배웅하고 감기몸살 기운이 밀려와 누워서 오전을 보내다가 영식이 운반선 투자금 3천만원을 통장에 입금시키고 12시에 영어를 마치고 돌아온 아내와 삼겹살을 준비하여 함께 점심을 먹었다. 오후 3시에 차를 몰고 경기학원에 들어가 또 선생들 개인별 면담을 시작했다. 초중고 담당 선생과 직원까지 20여명이 되니 적은 숫자가 아니고 어느 조직이든 새로운 리더가 나타나 일을 시작하게 되면 기존 세력들의 불만이 있는 법이어서 여러 의견이 공존하게 된다. 선박사업으로 부산에 내려간 영식이는 자갈치시장에 있다고 전화가 와서 냉철하게 일을 처리하라고 당부했다. 밤 9시에 집에 오니 아들은 컴퓨터에 집중하고 있고 30분이 지나자 딸이 학원에서 돌아온다. 5학년 초등학생이 무엇을 배우고 오는지 이렇게 열심히 하면 나중에 중,고등학교에 가서 공부는 잘하고 좋은 대학은 들어갈 수 있을까, 거실에 선 딸과 저녁을 함께 먹었다.
28일 화요일, 오는 계절은 어찌할 수 없다. 하루가 다르게 낙엽이 물들어 가고 이른 아침에는 기온이 많이 내려가 쌀쌀하다. 아침 식사에 어제 먹던 꽁치찌개도 맛이 있고 새로 만든 무국도 시원하다. 식사를 마친 아들과 딸을 학교에 보내고 학원에서 사용할 시간표와 예비고1 강의 안내서를 만들어 놓고 체육관에 나가 운동을 열심히 했다. 요즘은 낮의 길이가 어느새 짧아져 금방 점심시간이 돌아오고 저녁에도 6시만 되면 해가 보이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고 오후에 학원에 나가 장원장과 미팅을 했지만 결론은 돈이 없어 고민을 하고 쩔쩔매는 모습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내가 있는 대표실로 선생 3명이 찾아와 강사료 조정에 불만을 표출하고 퇴원을 결정하여 아쉽기는 해도 운영의 책임이 있으니 충분히 이해를 하라고 일렀다. 곧바로 인터넷에 구인광고를 올리고 이어서 차량 기사들을 불러 현재 학원의 실정을 솔직하게 전했다. 핵심은 11월부터 5명의 기사를 3명으로 줄일테니 기사들끼리 조율하여 두 분은 물러나 주시라고 이야기를 했다. 별 차이도 없는 같은 사람으로서 먹고 사는 일자리를 제거하는 이런 일이 가장 힘든 일이 아닐 수 없고 학원을 나오면서 남아 있는 영어와 수학선생을 만나 각각 과목 팀장을 맡기어 주니 고마워한다.
29일 새벽에 일어나 경기학원 자료를 점검하고 광고 문안도 작성하였다. 아침에 된장찌개가 시원하고 칼칼하여 다른 반찬은 모두가 외면할 정도였는데 알고 보니 청양고추를 넣었고 물에 비하여 된장의 농도를 짙게 한 결과다. 엊그제 산 두툼한 옷을 입고 등교를 하는 딸은 좋아하며 나가고 아내도 영어를 배운다며 동사무소에 올라간다. 무엇을 배운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가급적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을 배워야지 대학까지 나온 사람이 기초회화를 배운다고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환영할 일은 아니다. 무슨 일이 있는지 얼굴이 굳어 있는 아들은 소리 없이 그것도 늦은 시간에 현관을 나서 말도 붙이지 못했다. 오전에 체육관에 나가 운동을 하고 오후에 지하철로 학원에 나가 있으니 광고를 보고 연락을 해 오는 사람들이 많았고 오늘도 몇 명 면접을 보고 나니 오후 7시가 되었다. 저녁에 어머니 CT촬영을 오늘 했다고 여동생 전화가 왔는데 학원 일에 신경을 집중하다보니 날짜를 잊어 버려 미안했다.
30일 아침에 식사를 마치고 아들과 딸이 학교에 간 뒤에 아내는 대학교 동창 모임으로 청주에 사는 은미네 집에 간다고 준비를 한다. 오후 6시에 수업이라고 부지런히 다녀 온다지만 모처럼 만난 친구들과 모교까지 올라가 가을도 만끽한다는데 내 보기에는 저녁 수업이 어려울 것 같다. 오전에 체육관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와서 점심을 먹고 3시경 경기학원에 나가 오늘도 계속 새로운 면접을 실시했다. 과목당 한 사람을 선택해야 하는데 아무리 봐도 겉포장이 잘 된 젊은 사람들이고 거기다가 학력도 좋고 말도 잘하여 판단이 쉽지 않았다. 아내에게 전화를 하니 친구들을 만나 모교 캠퍼스를 거닐고 동동주까지 마셨다며 기분 좋은 목소리가 들린다.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과거로 돌아가 아름다운 가을을 즐기고 하루를 보내는 시간은 의미가 있고 내일을 위한 활력도 될 것이다. 오늘 수업은 내가 예상한 대로 연기를 하였고 저녁에 청주에서부터 친구 유미의 차를 타고 화정역에 도착하여 지하철로 집에 돌아왔다.
31일 금요일 새벽에 일찍 일어나 밝아오는 창밖을 보니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다. 아내가 어제 고향 여행으로 피곤한지 늦게 일어나 아들이 학교에 가는 시간에 식사준비가 늦어 밥만 덩그렇게 있고 반찬이나 국이 없어 답답했다. 가까스로 대충 밥을 먹고 가는 아들을 차에 태우고 학교까지 함께 갔다가 돌아와 식사를 했다. 오전에 체육관에 가려고 밖으로 나오니 비는 그쳤고 대신 기온이 내려가 날씨가 쌀쌀해졌다. 운동을 마치고 곧장 요양원에 1시에 들어가 식사를 마친 어머니를 휠체어에 모시고 로비에 나와 오랜 시간 함께 있으면서 이 시간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그리고 어머니께서 세상을 떠나면 어느 기준으로 살아가야 할 것인가 계산을 하는 중에 간병인이 다가와서 목욕하는 시간이 되었다고 어머니를 모시고 들어간다. 요양원을 나와 늦은 점심으로 김치찌개를 사 먹고 학원에 도착하여 오늘도 면접을 실시하고 월요일부터 시작하는 고등부 시간표를 정리하며 하루를 보냈다. 영식이 연락이 와서 방배동으로 갔더니 낮부터 술을 마셨다고 취해 있고 옆에는 마흔 살이 넘어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한 인간승리의 주인공 변호사 원용이도 나와 있다. 자주 가는 중국 레스토랑으로 장소를 이동하여 술과 안주로 해삼송이를 주문하니 가격은 6만원인데 소주 두 잔 마실 정도라 황당하여 주인을 불러 항의를 했더니 더 가져와 덮밥처럼 만들어 주었다. 752번 버스를 타고 10월의 마지막 밤 집에 들어오니 거실에 있던 아들이 일어나 꾸벅 인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