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 New CatholicEncyclopedia, No 9, pp. 900-904.]
선교학이란 교회의 선교에 대해 그리고 교회의 사명이 수행되는 방법에 대한 조직적인 연구이다. 19세기와 20세기의 세계의 모든 부분에 있어서 선교적 관심의 증대는 교회의 사도적인 면에 대한 적절한 탐구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초세기에 있어서 선교사의 과업은 고독하고 원시적이었으나 그 선교사는 보통 영웅적 소명과 자격을 지닌 잘 교육된 사제였으며, 매일매일 자기 고장과 언어, 습관, 지리 등 자기의 사도직의 고장에 대해 배워야 했다.
이 조건은 그가 해야 할 일로 부과되었는데 그것이 바람직해서가 아니라, 그것은 의사소통(communication)과 운동, 삶의 규준들이 서투르게 발전되었기 때문이며 또한 선교사들은 드물었기 때문이다.
근대적 진보와 인간학, 경제학, 교회법, 행정학, 의학 등의 조직화는 선교적 노력의 장면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선교사는 이제 좀 더 편리하게 일을 한다. 그는 일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혼자 하지 않고 복잡한 조직의 일부로서 일을 수행한다. 자기 과업에 대한 탐험적 성격때문에 아직 그는 고독한 영역과 외국인들에게로 데려가 지지만 그의 노력 배후에는 중앙관리 본부의 지지(support)가 있는 것이다. 그러한 사무실은 차례로 세상의 끝 부분에서 선교적 일을 돕고 방향을 똑바로 가고 조절하기 위하여 풍부한 지식과 그에 대응하는 대책을 세워 갖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본고에서는 (1) 선교의 고유한 범위에 대한 토론과 (2) 선교학문의 역사에 대해 다루어 본다.
제 I절, 선교학의 범위
선교학이 독립된 학문이긴 하지만 학자들 간에는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우리가 사는 이 지구의 문명의 변화율은 되풀이되는 개념들을 분류하여 정리된 결과로서 항구적이며 신속한 재조직이 요구된다. 더우기 다른 영역에서와 마찬가지로 선교학에 있어서도, 그리고 아마도 유사한 이유로서, 학문 자체에 대한 아이디어는 혼돈되어지는 경향이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몇몇의 학자들에 의해 탐구된 것인데 그것은 선교의 기구들과 신앙의 확립을 위해 뒤따라지게 되는 실제적인 규정에 관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 다른 학자들은 선교학의 성격 그리고 교회의 사명 등에 대한 생각에 귀를 기울인다.
두 가지 또 다른 혼돈들은 선교학자들의 논술을 흐리게 만들고 있다. 그 하나의 이유는 즉 어떤 사람은 이 새로운 학문에 대한 성격과 그 범위에 대해 자기들의 연구의 주제를 맞추고 있는 것이다. 반면, 다른 측에서는 주로 선교사의 유용한 지식과 일반적인 정보에 관심을 둔다는 점이다. 그리고 무질서의 또 다른 이유는 한손에는 선교학의 성격과 교회의 사명을 들고 있고, 또 다른 손에는 이 두개의 역사를 들고 있는데 그 양자간의 식별의 부족함 때문이다.
위에 말한 분야들 중 각각이 선교학의 주요 주제들 안에 혼합될 수 없는 이유는 없는 것이다. 이점은 고려해 볼 수 있는 가치를 지닌 논술들이 이에 있어 왔으며, 더우기 각자의 분야를 고려한 것이었다. 폭넓게 고려해 볼때 선교학문은 이론과 역사를 포함한다. 이론이란 말하자면 선교학 그 자체 그리고 선교들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역사는 새로운 학문에 대한 양성에 선행하는 것이며 선교들 자체에 관한 것이다.
제 2절 선교학의 성격
학문으로서 선교학은 체계화된 지식이다. 그 주요 원천은 성서와 전통이다. 교령들, 권고들 그리고 교황의 선교회칙들이며, 포교성의 지침들, 그리고 선교학자들의 저작들인 것이다. 선교학은 때때로 다전공 학문 방법(An interdisciplinary study)의 성격을 띠는데, 그것은 위에 언급된 주요한 원천들에 첨가하여, 선교학은 교회법과 시민법, 지리학, 인간학, 언어학, 정치학, 사회학, 경제학, 역사 그리고 관리학 (행정학, administration)분야의 연구실적을 관련지어 연구하기 때문이다.
선교학 자체와 그 취해진 제제들의 복잡성은 생소하게 어려운 이러한 지식을 체계화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선교학의 과정은 아직도 대단히 다양하게 보인다. 엄격히 말해서, 학문의 목적은 지식을 획득하는 것이며, 선교학자는 본래 선교사는 아닌 것이다. 그러나 선교학자들의 지식은 선교적인 노력의 사도직을 위하여 지식을 획득하며 선교사가 참여하는 실제적인 문제들까지도 취급하는 것이다.
제 3절 선교들에 대한 선교학자들의 관점
선교학은 주로 교회에 관한 교의적인 논술과 관련되는데, 그것은 모든 민족들 가운데 그리고 모든 문화들 가운데 교회의 확산적인 활동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다른 주제들 즉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의지, 세례의 필요성, 은총의 필요성 등과도 관계되는 것이다.
교회 부분과 그 다양한 개별적 구성원들에 대한 선교 규정의 존재는 교회론 주제부터 따라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교회의 발전(진보)의 충만한 성숙성은 선교학자가 의도하는 바의 촛점이 되며, 선교학자는 자기 마음을 가시적 교회의 건설과 또한 그것이 아직 건설되지 아니한 지방에서의 안정된 방법으로의 그 제도들 등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
교회의 선교가 가정 안에서와 그리고 선교들에 관해 수행되는 방법에 대한 실제적인 지식은 또한 선교학의 일부를 적절히 이루는 것이다. 가정과 본당들에서의 선교 협력, 그리고 선교사들의 양성과 훈련들은 주요한 연구의 대상이 된다.
선교의 발전에 대한 질문들은 선교를 설정하는 방법과 선교사들의 작업의 방법들과 관련된다. 후자는 직접적인 사도직이 아니라 신앙 전파의 방법과 같은 활동을 포함한다.
제 4절 선교학과 역사
선교학 학교는 학문의 양성 이전에 사상들의 역사를 그 교과과정 속에 넣고 있는데, 그것은 과거와 현재의 선교의 역사에로 이끌어 준다. 시초부터 교회는 신앙의 전파에 노력을 기울였지만 이 활동에 대한 조직적인 연구는 근대까지도 발전되지 못했다.
1. 콜럼부스 이전
교부들의 작품들은 사도적 직무의 선교활동에 대해 공공연히 기고된 단 한편의 논술도 포함하고 있지 못하다. 하지만 교부학적인 문헌에는 몇가지 중요하고 흥미로운 사상들이 발견되는데, 특히 니케아 공의회 이후의 저작들 혹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이후의 저작들 사이에서 발견된다.
이 작품들은 선교이론과 실제에 관해 빛을 던져주고 있다. 예를 들면, 요한 금구(John Chrtsostom)와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는 선교적 열정에 대한 열광적인 문학작품을 쓴 것이다. 요한금구는 선교적 규정에 관해 강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선교의 의미와 방법들에 대해서도 논의하며 글을 썼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또한 선교활동의 과업과 목표, 그리고 이교인들을 복음화시키는데 있어서 사용되었던 방법은 물론 선교적 규정에 관한 주제들도 다루고 있다. 중세기 초에 선교적 문제에 대한 첫번째 연구가 나타났는데, 즉 익명의 논문인 「모든 이방인들의 부르심에 대하여」2) 였다. 그레고리 대교황의 편지들과 교서들은 5세기부터 13세기에 걸쳐 문학면에서 눈길을 끌고 있다.
그는 「지침서」(Directives)들을 내었는데, 특히 영국으로 보내어진 선교사들에 대한 것이었다. 그의 제안들은 이교도의 풍습과 관습에 현명하게 적응(accommodation) 하도록 권고한 것들이었다. 더욱이 이 시기의 위대한 선교사들, 예를 들면 성 골롬반(St. Columban)과 성 보니파시오 (St. Boniface)와 같은 이들의 작품들은 선교에 관해 그 이름과 방법에 대해 값진 사상들을 담고 있다.
이와 같이 중세 초기에 일종의 실천 선교학(Practical Missiology)과 같은 것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선교 이론이 교부들, 교황들 그리고 선교사들의 여러 다양한 작품들 안에 분산되어 발견된다 하더라도 선교에 관한 체계적인 작품은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중세기의 스콜라 신학도 비록 선교적 교회의 실습에 건전한 기초를 주긴 했지만 선교학적인 문제들에 대해선 특별한 주의를 한 바 있다.
중세기의 괄목할 만한 선교 포교자들은, 도미니코 수도회 소속 페냐포르의 레이몬드 (Raymond of Peñafort), 그리고 프란치스코 제 3회원이었던 레이몬드 륄 (Raymond Lull)3) 이었는데 이 두사람은 선교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몇몇의 대학들을 설립했다. 이 대학들에서 미래의 선교사들이 회교도들, 희랍인, 유대인들의 언어와 문화를 연구했으며, 그들을 복음화시키는데 가장 적절한 방법들을 연구했다.
선교적 과업에 긴 생애를 헌신했던 륄은 네 선교사들의 아프리카 여행과 다른 많은 선교활동들을 참작하여 선교에 관해 313편의 작품들을 썼다. 그는 마땅히 중세기의 '가장 위대한 선교사' 라는 칭호를 받을만 하다. 그 이유는 이 열정적인 평신도의 긴 생애의 많은 부분이 선교들에 대한 실제적이며 이론적인 면들을 연구하는데 헌신했기 때문이다.
2. 콜럼부스 이후
크리스토퍼 콜럼부스4)에 의해 서인도 제도가 발견된 이후 선교에 관한 수많은 저작들이 나타났다. 이 작품들 가운데 우선 콜롬부스 자신에 의해 쓰여진 「예언서」(1502)5) 라는 책인데 여기서 그는 땅을 발견하는데 불가피하게 결합되었던 그의 선교적 열정을 불태운 것은 성서였다고 하며 그것을 인용하고 있다.
선교사적인 노력이 신세계에서 시작되고 발견되었으므로 교회적이며 동시에 역사적인 성격을 띤 선교문학과 상응하는 작품이 있었다.
다음의 예는 이런 류의 문학들이다 : 니콜라스 헤르보른, 「우상숭배하는 인도인들의 가톨릭 교회로의 신앙에의 회개와, 그 최초 발견된 섬들에 대한 약사」6); 토마스 포세빈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공부하는 이들의 이성에 따라 움직이는 선별된 도서 목록」7) ;존 포셔, 「비 신앙자들을 회개시키기 위해 나아가는 가톨릭 개척자들의 여행기」8) 등, 선교 이론에 관해 신앙으로 다룬 첫번째 논술이었다 ; 레이몬드 케이론, 「비신자들의 토론으로 파괴되고... 새로운 방법으로 일곱 언덕에서 승리하는 로마 (1635)」와 그의 다른 작품인 「온 세상을 위한 선교사들의 규칙들의 복음적 사도직(1653)」9); 마테오 다 코로나, 「선교사들의 사도성에 대하여 혹은 거룩한 선교의 유용성, 덕성, 그 특권들에 대한 개론」10); 필립 로베니우스, 「신앙을 다루는 선교사들에 대한 개요」11); 안젤로 마리아 베리첼리, 「사도적 선교에 관한 론」12) 이 작품은 주로 선교생활의 교회법적, 윤리적인 면을 다루고 있다 ; 마지막으로 슬로르자노 페리라의 두권으로 된 「인도인들의 법에 대하여」13)라는 책이 있는데 이 책에서 그는 국가와 식민 정책의 견지에서 선교법에 대한 포괄적인 연구를 하였다.
다음 세 저자에 대해 특별히 언급한 가치가 있다. 호세 데 아코스타는 건전한 선교교리를 위한 이론적이며 실제적인 원리들을 강조하면서 상세하게 쓴 바 있는, 이 영역에 있어서 첫번째 사람들 중의 한사람이었다. 그의 작품 「인도인들의 구원 관리에 대하여」14)는 한편으로는 남아메리카의 인디언들 사이에서의 선교적 과업을 다루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좀더 광범위한 규모로 적용할 수 있는 많은 가치 있는 가르침을 담고 있다. 「모든 이방인들의 구원 관리에 대하여」15) 는 맨발의 갈멜 회원인 '예수의 토마스'의 작품인데 이것은 선교운동에 있어서 광범위하게 퍼지고 영향력있는 것이 되었다. 이 시기의 위대한 선교작가들중 세번째 사람은 브란카티 데 로레아 추기경인데 프란치스코 수도회원이었다. 그는 자기의 작품 「스코투스의 네 책의 판결문들에 대한 주석」16)에서 신앙의 전파에 관한 첫번째 체계적인 논술을 가하고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사도적 선교에 관한 교리적이며 역사적인 문제점들을 다루었다.
선교이론에 관한 대부분의 관심있는 저자들과 그들에 대해 이 시대에 맹렬하게 반응을 보였던 것들과 같은 특별한 질문들을 고려하여, 식민지의 통치자들과 그 예속된 인디언들의 법적인 지위는 16세기 동안 내내 생각해야 했던 분야였으며 17세기에는 교회법에서의 선교들에 대한 위치와 국가법에 대한 문제였다.
16세기 동안에 작가들의 주의를 끌었던 실제적인 문제는 성사들의 집행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17, 18세기에 있어서는 인도와 중국에서 제기된 전례논쟁이었다.17)
18세기에는 선교지와 유럽에 있어서 선교활동의 퇴행을 보게 된다. 그리고 질적으로 양적으로 선교작품들에 있어서도 결과적인 퇴행이 된다. 이 시기에 있어서 선교문학은 그 이전 초기 작품들에 대한 천박한 모방이었다. 중국과 말라바르(Malabar)의 전례논쟁은 그 성격상 비 과학적이며 논쟁적인 것이었다.
19세기는 개신교 선교활동의 시작과 가톨릭측에서의 선교적 관심과 열정의 재생을 보게 된다. 쇄신된 활동으로 가톨릭은 선교 사도직에 관한 좀더 깊은 정보를 요구함에 따라 그 요구를 구현시키기 시작했으며 세상에서 선교들의 현실적 조건을 묘사하는 선교문학이 다시 한번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선교들에 대한 학문적 연구는 19세기에 있어 독일계 개신교측에 의해 처음으로 시작된 것이다. 초기 개신교 개혁자들은 무관심적이거나 아니면 심지어 외국 선교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그 결과 개신교측은 19세기까지 어떠한 전반적 규모의 선교사업도 시작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들 자신들을 위한 새로운 시도가 되었으므로, 그들은 선교를 위한 이유를 설명하기에 정당화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 안에 여태까지 부족한 그 활동을 위한 호교론을 구성하는 성서적이며 신학적인 이유를 찾기 위하여 성서에 눈을 돌렸던 것이다. 그들 중에는 구스타프 바르네크(Gustav Warneck, 1834-1910)가 눈에 띄는데 그는 근대 선교학의 아버지로서 타당하게 여겨질 만하다. 바르네크는 초창기 가톨릭 선교학자들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1867년에 개신교측은 에딘버그(Edinburgh)대학에 첫번째 선교학 강의를 개설했다. 가톨릭 선교학은 개신교 독일 선교학자들의 영향을 입고 있으며, 1880년 이후 독일 제국은 식민지 세력을 지니게 되었는데 그 이후부터 선교활동이 증대된 이유로 해서 독일에 또한 그 기원을 두고 있다. 가톨릭 측에서는 교회의 선교활동에 대한 체계적인 탐구를 위한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선교들 그 자체에 대한 역사는 과거에는 선교지역에 대한 묘사를 포함했는데, 선교사들의 전기들과 그들의 방법들, 상황, 성공과 실패 등과 같은 것이었다. 선교지방에서의 교회의 현재적인 발전에 대한 연구는 복음화와 관련된 지방과 민족들에 촛점이 맞춰졌으며 또한 본방인 성직자를 포함하는 통계수치, 충실성, 외국인 협력자들 그리고 각 지역에 있는 다양한 제도들 등에 대해 다루었던 것이다.
제 5절 선교학의 역사
1910년 1월 22일 베를린에서 열렸던 선교협의회(Missionay Conference)에서 로버트 슈트라이트 (Robert Streit)는 다음과 같은 점들을 제안했다 :
(1) 신학교와 가톨릭 대학들의 교과과정에 선교에 관한 것을 고려할 것.
(2) 선교학 전문가의 양성
(3) 가톨릭 대학에서 선교학 강좌를 설정할 것 등 이었다.
죠셉 슈미들린(Joseph Schmidlin)은 이미 독일의 보호하에 있는 지역에서 가톨릭 선교에 관하여 뮨스터 대학에 있는 강의들의 교과과정(1909-10)을 제공한 바 있다. 1910년 가을에 한 선교학 강좌가 뮨스터에 신설되었고, 슈미들린은 그 강의를 하도록 지명되었다. 슈트라이트와 슈미들린은 가톨릭 선교학의 공동 창시자로 여겨지고 있다.
슈미들린은 선교학의 교의적인 부분을 선교활동을 비추어 주는 교의신학으로부터 취해진 질문들의 모음 그리고 선교사들의 어려움을 이해하기 위해 취해진 것들의 모음일 뿐이라고 간주했었다. 그러나 이후의 선교학자들은 그의 생각을 부적합한 것으로 생각했으며 선교학의 교의부분을 그 자체 고유의 목적 대상으로 요구한 것이다. 슈트라이트는 선교학 전문가들의 봉사에 기여할 훌륭한 참고목록 (bibliography)의 요구를 실현하면서 1916년에 그의 기념비적인 「선교도서목록」18)의 첫 권을 발행했다. 슈미들린은 첫번째 선교학 교과서 「가톨릭 선교학 개론」19)과 가톨릭 선교들에 관한 첫번째 학술적인 역사인 「가톨릭 선교사」20)를 저술하고 출판했다.
브라운씨(M. Braun, SVD)21)는 이 작품들을 각각 다음과 같은 제목으로 영어로 번역했다 ; 「가톨릭 선교이론」22), 그리고 「가톨릭 선교 역사」23) 등이다. 슈미들린은 또한 1911년에 학술적인 선교 간행물인 「선교학을 위한 정기 간행물」24)을 출판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에 『선교학 연구를 위한 국제연구소』25)가 뮌스터에 설립되었다. 이 연구소는 선교학적 저술들을 출판하기 시작했으며 독일의 다른 도시와 대학들, 예를 들면, 벰베르그(Bamberg), 뮨헨(Münich) 그리고 뵈르쯔부그(Würzburg)에서 선교학 과정을 후원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많은 활동들은 제 2차 세계대전에 의해 중단됐으나 전후시대에 분도회의 토마스 옴(Thomas Ohm) 같은 사람이 뮨스터 대학의 선교학 연구소의 새로운 주임으로 임명되어 새롭게 출발할 수 있었다. 1952년에 웨스트팔리아(Westphalia) 정부가 공식적으로 이 연구소의 유지를 위해 저축된 기금을 가결하였다. 독일에서의 이러한 시작 이후 학술적인 선교운동이 유럽의 각 나라에 퍼지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이 운동을 연대적인 순서보다는 차라리 지리적인 순서를 따라 살펴보겠다.
1. 벨기에
독일과 근접한 덕택에 벨기에는 독일의 선교학적 운동의 영향을 느낀 유럽의 첫 국가들 중의 하나였는데 선교학적 연구와 저작들에 대해 처음부터 맨 선두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피에르 샤를르(Pierre Charles, SJ)는 1922년에 루벵에서 일련의 선교학 과정을 시작했으며 그 다음 해에는 「사베리오 총서」(Xaveriana)를 창시했는데, 이것은 선교역사, 선교신학 그리고 선교방법론을 다루는 일련의 짧막한 전공 논문지였다. 비록 이 총서가 전쟁 동안에 중단되긴 했으나, 렛시아눔(Lessianum) 박물관은 그의 다양한 책들 가운데서 몇 권을 선교적인 주제로 다루어 출판하기를 계속했다.
1927년부터 1954년 그가 죽을 때까지 샤를르 신부(Charles)는 루벵 대학에 두 강좌를 마련했는데, 하나는 극동문화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근대 선교들의 역사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아마도 자신이 쓴 「선교학 소백과 사전」26)으로 가장 유명하며, 또한 이것은 그가 「선교활동에 관한 문헌들」27) 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리고 또한 「선교학 주간들」28)의 창시로 잘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루벵에서 1923년부터 단 전쟁 기간을 제외하고, 오늘날까지도 개최되어 왔다. 이 선교학 주간의 회의 진행 보고서들은 풍부한 선교학 연구들을 수록하고 있다. 벨기에의 또 다른 중요한 선교학 연구소는 첼레스틴 루쳉창(Celestine Lou-Tseng-Tsiang) 신부가 선교학의 발전을 도왔으며 미사를 봉헌했던 로펨(Lophem)에 있는 분도회 수도원이다. 그의 업적은 그리스도교와 유교와의 간격에 다리를 놓으려는데 있었으며 대단히 중요한 일이었다.
유명한 잡지인 「선교회보」29)는 1952년에 「세상의 리듬」30)이란 잡지로 교체되었는데 선교적인 적응 분야에 관한 많은 논술들을 다루고 있다.
2. 스페인
스페인은 선교학적인 발전에 특히 그 역사적인 성격에 관해 많이 기여했다. 선교들에 대한 이론적인 연구는 1930년에 첫 「선교학 주간」31)으로 시작됐는데 이것은 「스페인의 선교학 학자들의 양성협회」32)의 후원 하에 개최된 것이다. 이 집회의 의사 보고록들이 「스페인 선교도서」33)의 첫 두권에 발행됐다. 코밀라스 (Comillas)대학에서의 강좌 이외에도 스페인의 많은 신학교들은 그 교과 과정속에 선교학을 포함시키고 있다. 또한 마찬가지로 선교에 대해 기고한 수많은 정기간행물들이 있는데 어떤 것들은 대중적이며, 또 어떤 것들은 학문적인 것들도 있다. 「선교시대」34) 출판사는 선교자료를 보급하고 있다. 부르고스(Burgos)에 있는 「외방 선교 신학교」35)는 유명한 선교활동 연구소이다.
1946년 이래, 연례적으로 「선교에 관한 집중 오리엔테이션 주간」36)을 개최해 왔는데 이때에 선교학 테마에 대한 전공 논문들이 전문가들에 의해 발표된다. 또한 베리쯔(Berriz)에서도 「선교학 주간들」37)이 개최되었다. 교황청 선교 협회들38)이 자신의 작품을 출판했고 많은 선교작품들을 간행했다. 가장 최근의 것이며 중요한 계획들 중의 하나는 안젤 싼토스 헤르난데즈(Angel Santos Hernandez, SJ)신부의 지도하에 이루어진 선교학(Missionologia)에 관한 12권으로 계획된 책이다.
3. 프랑스
선교의 나라로 오래전부터 알려져 온 프랑스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술적인 선교운동에 참여하는데 늦었다. 1923년 파리 가톨릭 대학39)에서 한 그룹이 약간의 선교에 대한 협의를 시작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것은 리용의 가톨릭 대학40) 에서 이와 유사한 협의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그룹은 1924년에 「선교 역사 학보」41) 라는 선교잡지를 발간하게 된다. 성직자 선교연합회42)는 선교학적인 성격을 띤 어떤 선교대회들43)을 조직했다. 1933년 슈트라스브르크(Strassburg)에서 개최됐던 제 2차 전국대회는 선교들의 필요성에 대한 주제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불란서의 선교운동은 제 2차 세계대전 동안과 전후의 여러 조건들 때문에 크게 위축되었다. 불란서가 비그리스도교화 되는 범위에 까지 불란서 지성인들이 이르렀을때, 이제까지 외방 선교에 적용되어 왔던 "선교" 라는 용어는 불란서 내부의 선교(Mission de France)라는 뜻으로 상당히 위축되어 버린 것이다. 외국 선교들의 일은 그러한 비그리스도교화 된 나라를 위한 여분의 활동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반향이 파리에서 성 요한 세자 클럽44) 의 설정으로 시작되었다. 이 클럽의 회원들 중에는 르 브르똥(Le Breton), 다니엘루 (Daniélou), 라궹(Raguin), 드 뤼박(De Lubac), 르티프(Retif) 그리고 꾸튀리에 (Couturier)같은 이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외국 선교에 관한 교의적인 연구들을 출판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다른 그룹들도 선교들에 관한 상당수의 신학적인 작품들을 발행하였다. 이 모든 사업들은 참된 의미의 학술적 선교 연구의 재생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4. 네델란드
이 나라는 그 시초부터 선교운동과 결합되었었다. 한 선교학 강좌가 1930년이래 니즈므젠(Nijmegen)에 있는 가톨릭 대학에서 존재해 왔다. 학구적인 해 (Academic year)인 1948년 초에 한 「선교학 연구소」45)가 설립됐는데, 그 초대 주임은 뮬더(A. Mulders)교수였다. 그는 초기에 「선교학 입문」46)이란 책을 한 권 발행했다. 수많은 선교학 연구물들이 그곳에서 쓰여지고 간행되었다. "Het Missiewerk"라는 명칭의 선교학적 정기 간행물 이외에 성직자 선교 연합회는 선교학에 관한 다른 작품들도 간행하였다. 이 학문은 대학들 뿐 아니라 신학교와 양성소 등 네델란드에서 큰 규모로 발달되었다.
5. 이탈리아
여기서 우리는 국가로서의 이탈리아와 그리스도교의 중심으로서의 로마를 구분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탈리아에서의 상당한 량의 선교학 연구와 활동을 그레고리안의 선교학부와 우르반(Urban)47)대학과 같은 국제 연구소들 안에서 여러나라들에 의해서 운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이탈리아인들이 상당한 공헌을 한 바 있지만 로마의 선교학 연구소들은 국제적이지 이탈리아적은 아니기 때문이다. 근대 선교학의 가장 꾸준한 변호자이며 후원자들 중의 한 분은 이탈리아인인데 죠반니 밥티스타 트라젤라(Giovanni Baptista Tragella)이다. 그는 선교학의 발전에 자기 삶의 많은 부분을 헌신했다. 마찬가지로 이탈리아인 만나 (P. Manna)라는 분은 1916년에 성직자 선교연합회48)의 창시자이였는데, 이 연합회는 이탈리아와 다른 유럽국가들 안에서 많은 선교문학의 출판과 국가적인 선교학 대회를 후원하는데 책임을 지어왔다. 만나는 학술잡지 「선교사상」49)을 창간했는데 이 잡지는 1943년 전쟁때문에 출판이 중단됐다.
이 성직자 선교연합회는 1934년에 「가톨릭 선교 지도서」50)를 출판했으며 또한 매년 포교성(Propaganda)도서관에서 사서들에 의해 마련된 「선교 참고 목록」51)을 보충하고 있으며 그 전 해의 모든 선교문학을 참조한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 이 주제에 관한 이태리 작가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전 포교성 장관이었던 작고한 꼬스딴띠니(Costantini) 추기경이었다. 그는 실천적이며 교리적인 주제들을 내용이 풍부하게 글을 썼다. 그는 본방인 성직자의 발전을 위한 운동의 주창자이며 토착 예술과 건축에 대한 열렬한 주동자였으며 적응의 방법들에 있어서의 혁신가이자 선교들의 사업에 전적으로 헌신했던 분이었다.
로마는 여러 면에 있어 선교학의 가장 중요한 중심지이다. 1919년과 같은 초기에 교황 베네딕도 15세는 교황립 포교성 전문학교에서 선교학을 가르칠 것을 명령했으며 이것은 이제 교황립 우르반 대학으로 유명해졌다.
1932년에 「교황립 선교학 연구소」52)는 그 이듬 해에 선교학 박사학위를 인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고 설립되었다. 이 분야에 있어서 상당수의 박사 논문들이 이미 이 연구소에서 쓰여졌다. 그레고리안 대학53)은 1928년에 선교학 과목을 설정했으며 1932년에 '대학과 신학교 성'은 그레고리안 대학에 별도의 선교학부를 설립하는 동시에 박사학위를 수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이 두 대학들은 오늘날까지 이 학위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기관으로 남아있다. 박사 논문들이 그레고리안 대학에서 산출되는 것 외에 이 대학은 1943년 이래 매년 「선교학 연구」54) 총서를 간행하고 있다. 로마의 많은 고문서실들과 도서관들은 그 시를 선교학의 중심부로 만들고 있다. 포교성의 고문서실들과 도서관은 대단히 중요한데 1622년 그 설립 이래 선교적 문제에 관한 보고서들과 연구 뿐만 아니라 그 공식적인 문헌들도 소장하고 있다. 더우기 포교성은 두가지 선교문헌 총서를 발행하는데, 1893년과 1907년의 발행물들인 「전집」(Collectanea), 그리고 「논단」(Sylloge) (1938)이 있다.
6. 스위스
이 나라는 제 2차 세계 대전 중 중립을 지킴으로써 선교학에 대한 연구를 생생하게 간직할 수 있는 특혜를 받았는데 당시 대전 중에 유럽의 대부분 국가들은 선교학에 있어서 심각하게 쇠퇴의 길을 갔었다. 스위스의 선교학 센타는 1944년 이래 선교학 연구소가 있어 왔던 프리부르그(Fribourg)대학이다. 선교학 연구는 거기에서 그보다 10년 앞서 시작되었다. 이 연구소는 매 2년 마다 몇 주간씩 관심있는 선교사들을 위해 연구회를 개최하고 있다. 또한 쉐넥-벡켄리드 (Schöneck-Beckenried)에 '베틀레헴(Bethlehem) 선교 연구소'가 있는데 이 연구소는 1921년 창립이래 그 구성원들에게 전문적인 선교 양성 교육을 실시해 오고 있다. 벡크만(P. Beckmann)은 「선교학을 위한 새 정기 간행물」55)(1945)의 편집자일 뿐 아니라 오랫동안 그 주임직을 맡아왔다. 이 간행물은 전쟁의 결과로서 유럽에서 출판이 중지 되었던 다른 학술 간행물들을 부분적으로 지원한 바 있다. 그 연구소는 또한 선교학 연구 총서 뿐만 아니라 해마다 참고문헌 목록을 발간해 오고 있다.
7. 미국
학문적 선교 연구 필요성에 관한 슈트라이트씨의 견해가 1909년에 미국 신학잡지에 기고된 바 있긴 하지만, 그리고 슈미들린이 1923년에 미국을 방문하긴 했지만, 선교학이 이 나라에서는 늦게 출발되었다. 1918년에 창설된 「가톨릭 학생 선교 십자군」56)은 선교연구의 증진을 위해 힘써 온 가장 오래된 기구이다. 1921년 이 단체는 학생들을 위한 진지한 선교 정기간행물인 「방패」(Shield)의 출판을 시작했는데 몇몇 훌륭한 선교 작가들이 여러 해에 걸쳐 훌륭한 글들을 이 잡지에 기고한 바 있다. 그것은 또한 많은 학술 프로그램과 그밖의 물질적 정보제공에 관한 것을 발행하였는데 항상 학술적 성격을 띠진 않았지만 교회의 선교에 관한 것이었다. 최근에 이 잡지는 가톨릭 대학들 안에 선교학의 학점제도 설립을 활발히 추진해 온 바 있다. 포교성은 1943년에 신학생들을 위한 연구로서 6년 교과과정의 「선교학원」57) 의 계획을 착수하였다. 50개 이상의 연구물들이 선교 사도직의 모든 면을 거의 취급하여 출판되었다. 이 씨리즈는 계간지 「선교 세계」58) 에 의해 교체되었는데, 이 계간지는 퓰톤 쉰(Fulton J. Sheen) 주교의 편집 지휘하에 성직자와 평신도 모두를 위한 연구 출판물로써 1950년에 시작된 것이다. 메리놀 선교회(The Maryknoll Mission Society)는 「세계 지평 보고서」59) 라는 명칭이 붙은 일련의 전문 논문들을 발간했다. 포르담(Fordham)대학의 선교학 연구소는 1953년에 물론 선교학 강의를 포함해서 선교사 훈련을 위한 여름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이 연구소는 또한 1953년에 선정된 선교 주제들에 관해 이틀 간에 걸친 회의를 개최한 바 있다. 이 회의에 제출됐던 논문들은 매년 포르담 대학 「선교 전문가 협의회 회보」60)라는 제목으로 매년 출판되고 있다. 1958년 가을에는 두 학기로 된 선교 연구 프로그램이 선교사들의 훈련을 목적으로 아메리카 가톨릭 대학61) 에서 시작되었다. 이 프로그램은 두 골격을 갖추었는데 하나는 선교학에 관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사회과학에 관한 것이다.
8. 캐나다
데샤틀레 신부62)는 1932년에 오타와(Ottawa)에서 선교학 강의를 시작했으며 그는 1934년 최초로 「카나다 선교사들의 연구 주간」63)를 조직했다. 그 후 샹파뉴 신부 (J. Champagne, OMI)가 뒤를 이었는데 그는 1948년 오타와 대학의 선교학 연구소의 첫 주임이 되었다. 아주 근간에는 부샤르 신부 (J. Bouchard, SJ)는 미래의 선교사들을 준비하기 위하여 몬트리올에 선교 연구 센타를 창설하였다.
각주 --------------
1) 이 논술은 다음의 글을 번역한 것이다 : R. Hoffman, Missiology, New CatholicEncyclopedia, No 9, pp. 900-904.
2)* Devocationeomniumgentium.
3) Catalan, 시인. 1235-1316.
4) Christopher Columbus (1451-1506), 이탈리아 출신의 항해가.
5)* Librodelasprofecias.
6)* Nicolas Herborn, OFM, EpitomedeinventisnuperIndiaepopulisidololatresadfidem,atqueadEcclesiamCatholicamconvertendis,deinsulisnuperinventis (1532).
7)* Thomas Possevin, SJ, Bibliothecaselecta,quaagiturderationestudiorum...insaluteomniumgentiumprocuranda (1593).
8)* John Focher, OFM, Itinerariumcatholicumproficiscentiumadinfidelesconvertendos(1574).
9)* Raymond Caron, OFM, Romatriumphanssepticolis,quanovamethodo...infideleumargumentadiluuntur (1635) ; Apostolatusevangelicusmissionariorumregulariumperuniversummundum(1653).
10)* Matthew da Corona, OC, Demissionibusapostolicissivetractatusdeutilitatesacrarummissionum,virtutibus,privilegiis (1675).
11)* Philip Rovenius, Tractatusdemissionibusadprocurandamfidem.
12)* Angelo Maria Verricelli, TractatusdeApostolicismissionibus (1656).
13)* Solorzano Perrira, DeIndiarumiure.
14)* José de Acosta, SJ, DeprocurandaIndorumsalute.
15)* Thomas of Jesus, Deprocurandasaluteomniumgentium.
16)* Brancati de Laurea, CommentariuminQuattuorLibrosSententiarumScoti.
17)* ☞ Chinese Rites controversy 와 Malabar rites controversy.
18)* Robert Streit,BibliothecaMissionum.
19)* J. Schmidlin, KatholischeMissionslehreinGrundriss (1919).
20)* J. Schmidlin, KatholischeMissionsgeschichte (1925).
21) SVD : 1875년에 창설된 '거룩한 말씀의 수도회'(Societas Verbi Divini)를 말한다.
22)* M. Braun, SVD, CatholicMissiontheory (1931).
23)* M. Braun, SVD, CatholicMissionHistory (1933).
24)* J. Schmidlin, ZeitschriftfurMissionwissenschaft (1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