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의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처음에는 자가 중결(仲潔) 호는 송헌(松軒)이었는데 이것은 이색이 지어준 것이다. 이안사는 이성계의 할아버지에 또위 할아버지
등극 후에 이름은 단(旦), 자는 군진(君晉)으로 고쳤다. 고조부 이안사(李安社)가 전주에서 강원도를 거쳐 동북면(東北面)의 의주(宜州)로 옮겨가면서 그 지역에 정착하였다. 당시 원(元)이 쌍성(雙城) 이북 지방을 차지하는 과정에서 이안사는 따르던 무리 1천여 호를 거느리고 원에 항복하였고, 개원로(開元路) 남경(南京)의 알동(斡東)에서 거주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이안사는 다루가치, 천호(千戶) 등으로 활약 기반을 닦았다.
이공숙(李公肅)의 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이행리(李行里)로 이안사가 죽은 이듬해인 1275년 3월에 아버지의 관직을 이어받았다. 이행리는 원의 세조(世祖)가 추진한 일본 정벌에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의 삼살천호(三撒千戶), 몽골의 대탑실(大塔失) 등과 함께 참여한 바가 있었다. 이후 여러 여진(女眞)의 천호들이 자기를 죽이려 하자 이행리는 알동을 떠나 적도(赤島)를 거쳐 의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 뒤에도 이행리는 쌍성 등지의 고려 군민(軍民)을 다스리는 다루가치 일을 맡고 있었다. 이행리는이춘父
이행리는 등주(登州) 호장(戶長) 최기열(崔基烈)의 딸을 두 번째 부인으로 맞이하였고, 그것을 계기로 등주에 거주하였다. 그리고 두 번째 부인 최씨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으니 그가 이선래(李善來)이다. 이선래가 이후에 이름을 이춘(李椿)으로 바꾸었고, 몽골 이름은 발안첩목아(孛顔帖木兒)였으며 이행리가 죽은 후에 그 관직을 이어받았다.
이춘이 박광(朴光)의 딸과의 사이에서 아들 둘을 낳으니 이자흥(李子興)과 이자춘(李子春)이다. 이춘이 1342년 7월에 죽 자 큰 아들인 자흥, 몽골이름 탑사불화(塔思不花)가 관직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곧바로 탑사불화는 죽고, 그 아들은 아직 어렸다. 이에 이춘의 첩 조씨(趙氏)와 아들 나해(那海)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자 했다. 이것을 막고 이자춘(李子春)관직을 이어받게 되었다. 이자춘이 이성계의 아버지 이선래(이춘은 할배)
1356년(공민왕 5) 공민왕이 기철(奇轍) 일파를 처단하고 기철 일파와 연계되어 있던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였는데, 이자춘, 몽골이름 오로사불화(吾魯思不花)가 이 때 내응하여 쌍성을 쳐부수었다. 이로 인하여 고려는 화주(和州)·등주·정주(定州)·장주(長州)·예주(預州)·고주(高州)·문주(文州)·의주와 선덕진(宣德鎭)·원흥진(元興鎭)·영인진(寧仁鎭)·요덕진(耀德鎭)·정변진(靜邊鎭) 등 여러 성(城)과 함주(咸州) 이북의 합란(哈蘭)·홍헌(洪獻)·삼살(三撒)의 땅을 수복할 수 있었다.
공민왕은 이러한 공을 인정하여 이자춘에게 대중대부(大中大夫) 사복경(司僕卿)의 관직을 내리고 집을 주어 개성에 거주하게 하였다. 이후 이자춘은 1361년(공민왕 10) 봄 삭방도만호겸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로 임명되어 동북면(東北面) 지방의 실력자가 되었지만 그 해 4월 죽었다.
이성계는 1335년(충숙왕 4) 화령부(和寧府)에서 이자춘과 최한기(崔閑奇)의 딸 최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활솜씨가 뛰어났는지 이를 전하는 설화가 상당히 여러 편 전해온다. 이성계는 가문의 배경과 타고난 재능을 바탕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는데, 그 첫 번째가 1361년(공민왕 10) 9월 반란을 일으킨 독로강만호(禿魯江萬戶) 박의(朴儀)를 잡아 목을 벤 일이었다.
그해 11월 홍건적이 침입하여 개성은 함락되고, 공민왕은 남쪽으로 피신하였다. 이듬 해 정월 참지정사(參知政事) 안우(安祐) 등 9원수(元帥)가 군사 20만 명을 거느리고 수도를 탈환하였는데, 이때 친병(親兵) 2,000명을 거느리고 참가하여 큰 전공을 세웠다. 2월에는 원나라 장수 나하추(納哈出)가 삼살(三撒)·홀면(忽面)의 땅에 쳐들어 왔는데 막지 못하게 되자 이성계가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로 임명되었고, 나하추와 맞서 여러 차례 싸워 마침내 물리쳤다.
1364년(공민왕 13)에는 최유(崔濡)와 공민왕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기황후가 원나라 황제를 움직여 공민왕을 폐위하고 덕흥군(德興君) 탑사첩목아(塔思帖木兒)를 고려왕으로 삼으려 하였고, 이를 위해 요양성(遼陽省)의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을 넘어 쳐들어 왔다. 이에 이성계는 최영(崔瑩)이 이끄는 군대에 우익으로 참여하여 수주(隋州)의 달천(獺川)에서 이들을 섬멸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 무렵 이성계의 외종형제이면서 여진 땅에서 나고 자란 삼선(三善)과 삼개(三介)가 이성계가 동북면을 비운 사이 여진족을 이끌고 쳐들어와 함주(咸州)를 함락시키고 화주(和州) 이북 지방을 차지하였다. 이성계는 이들을 무찔러 화주(和州)와 함주(咸州) 등 고을을 수복하였고, 왕은 이성계를 승진시켜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임명하고 단성양절익대공신(端誠亮節翊戴功臣)의 칭호를 내려주었다.
1369년(공민왕 18)에는 기철의 아들인 기새인첩목아(奇賽因帖木兒)가 김백안(金伯顔)과 더불어 망한 원나라의 잔당을 모아 동녕부(東寧府)를 점거하고 고려의 북쪽 변방을 침범하고자 했다. 이에 공민왕은 이성계를 동북면원수(東北面元帥)로 삼았고 이듬 해 이성계는 기병 5천과 보병 1만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넜으며, 서북면원수(西北面元帥) 지용수(池龍壽)와 함께 동녕부로 쳐들어 가 성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1372년(공민왕 21)에는 동북계(東北界)에 침입한 왜구를 방어하라고 화령부 윤(和寧府尹)에 임명되었다.
1377년(우왕 3) 3월에는 왜구가 강화부에까지 나타나니 이성계가 의창군(義昌君) 황상(黃裳) 등과 함께 서강(西江)에서 군사력을 시위하였으며, 5월에는 창궐한 왜구를 지리산에서 섬멸했고, 8월에는 서해도(西海道) 지역에 침입한 왜구를 해주(海州)에서 격퇴했다. 1378년(우왕 4)에도 왜구가 승천부(昇天府)를 통해 장차 개성을 침입할 상황이었다. 최영이 군대를 통솔하여 해풍군(海豐郡)에서 맞서 싸우다 패퇴하였는데 이성계가 합세하여 전세를 역전시키고 적을 섬멸하였다. 1380년(우왕 6년)에는 이전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5백 척 규모의 왜구가 침입해 와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의 피해가 막심하였다. 이성계는 양광도(楊廣道)·전라도·경상도 3도의 도순찰사가 되어 변안열(邊安烈)·왕복명(王福命)·우인열(禹仁烈) 등과 함께 군대를 지휘하였으며 남원(南原)으로 내려가 아기발도(阿其拔都)를 두목으로 한 왜구를 섬멸했다.
이 전투를 황산대첩(荒山大捷)이라 부르는데, 최영의 홍산대첩(鴻山大捷)과 함께 왜구 토벌의 일대 전기를 마련한 사건이었다.
1382년(우왕 8) 7월 여진인 호발도(胡拔都)가 동북면 일대를 노략질하였다. 이성계가 동북면 도지휘사(東北面都指揮使)가 되어 이듬 해 호발도가 다시 침입하자 이지란(李之蘭)과 함께 길주평(吉州平)에서 궤멸시켰다. 이어서 변방을 편안히 할 계책을 건의했는데, 군사 훈련하여 전쟁에 미리 대비할 것과 호(戶)의 크기 대신 경작지를 기준으로 지세를 걷게 하여 군량미 확보를 안정적으로 할 것, 권세 있는 가문이 수령의 자리를 독점하는 대신 공정하게 선출하는 방식으로 하고 장수할 만한 사람을 뽑아 군사를 거느리게 해야 한다는 것 등을 언급하였다.
1385년(우왕 11) 9월 함주(咸州)·홍원(洪原)·북청(北靑)·합란북(哈闌北) 등지에 왜구가 침입하니 자청하여 함주(咸州)로 가서 이지란·고여(高呂)·조영규(趙英珪)·안종검(安宗儉) 등과 함께 적군을 대파했다. 이 공로로 정원십자공신(定遠十字功臣)의 칭호가 더해졌다. 1388년(우왕 14)에는 최영과 함께 임견미(林堅味)·염흥방(廉興邦) 등 이인임(李仁任) 일당을 제거하였고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이 되었다. 이 이후로 임견미나 염흥방이 임용했던 사람에 대한 처리문제나 형살(刑殺)의 중지 문제 등으로 최영과 의견이 갈리기 시작했다.
덕부(沈德符)·정몽주(鄭夢周)·지용기(池湧奇)·설장수(偰長壽)·성석린(成石璘)·박위(朴葳)·조준·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9 공신 중 한 명으로 봉하였으며, 분충정난광복섭리좌명공신(奮忠定難匡復燮理佐命功臣)으로 화령군개국충의백(和寧君開國忠義伯)이 되었다.
한편 이성계는 정치적 권력을 손에 넣어가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살해당할 위기가 있었는데, 이는 기존 세력과의 충돌이었다. 1389년(창왕 1) 토지 겸병이 사회적 문제를 일으킨다고 보고 조준(趙浚)의 건의에 따라 사전(私田)을 혁파를 주장한 것도 사회문제를 인식하고 해결책을 내놓은 것이었는데, 기존 세력은 이에 대해 극렬히 반대하였다. 이러한 논란은 당시 기존 세력과 신흥 세력 사이의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1390년(공양왕 2) 5월 윤이(尹彝)·이초(李初)가 명나라 황제에게 “이성계가 자신의 인척으로 가짜 왕을 세우고 명나라를 공격하려고 한다” 고 무고한 것에서 비롯된 이초의 옥(彛初─獄)으로 이색(李穡)·조민수(曺敏修)·이임(李琳)·변안열(邊安烈)·권중화(權仲和)·우현보(禹玄寶)·우인열(禹仁烈)·정지(鄭地)·김종연(金宗衍)·권근(權近) 등이 옥에 갇히거나 유배되었다. 이 사건의 처리문제를 두고 공양왕과도 마찰이 생기기 시작하였고, 정몽주도 기존과 달리 반이성계 노선을 분명히 하게 된다.
두 진영의 대결은 점차 심화되어 1392년(공양왕 4) 3월 정몽주는 이성계가 낙마 사고로 정치 일선에서 잠시 물러난 것을 틈타 정도전·조준·남은(南誾)·윤소종(尹紹宗)·남재(南在)·조박(趙璞) 등 이성계 일파를 탄핵하여 삭탈관직하거나 유배를 보냈다. 이어 사람을 보내 이들을 처형하고자 했다.
이러한 위기상황은 이성계의 다섯 번째 아들인 이방원(李芳遠)이 정몽주를 살해함으로써 타개하였고, 이후 이숭인(李崇仁)·이종학(李種學)·조호(趙瑚) 등을 조정에서 몰아내었다. 정몽주 일파가 제거된 후에는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공양왕도 병문안을 핑계로 이성계를 찾아오고 이성계와 맹약을 맺겠다고 하면서, 스스로 불리한 상황을 타개해 보고자 하였으나 이미 상황을 되돌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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