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1989년 11월 9일이던가 10일이던가 전국 학술단체 총연합 학술대회에서 리영희 선생님은 기조 발제를 하셨다. 선생님은 자신이 과거에 범했던 오류를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해서 말씀하셨다. 하나는 마르크스의 이상주의를 현실적 실현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고 아무런 비판 없이 수용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이기적 욕망을 사회적 관계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이기심은 극대화하여 인간을 이리떼로 만든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사회주의・공산주의 사회가 되면 인간의 이기적 욕망은 사라지고 인간은 나의 욕망과 타인의 욕망을 동시에 충족하는 이른바 ‘사회주의적 인간형’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는 지나치게 순진무구한 인간 이해였다는 것이 리영희 선생님의 진단이었다. 소련이 되었든 중국이 되었든 현실 사회주의는 이러한 마르크스의 이상이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실증하고 있다.
리영희 선생님이 ‘반성’하는 것 또 하나는 중국의 문화대혁명에 대한 과대평가였다. 선생님은 작고 차분한 목소리로 발제문을 읽어 나가셨다. “나는 문화대혁명에 관한 1차 자료를 갖지 못했다. 부끄럽게도 미국에서 나온 2차 자료만 참조해서 8억인과의 대화를 썼다. 이제 중국 쪽에서 나온 문화대혁명에 관한 1차 자료를 보니 나는 문화대혁명의 실상을 알지 못하고 썼던 것이 분명하다.” 선생님은 잠시 발제문에서 눈을 떼시더니 약간 소리를 높여 말씀하셨다. “문화대혁명에 대한 잘못된 정보가 한국에 유포된 것은 제 책임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께 사죄드립니다.” 그리고는 청중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청중은 웅성거렸다.
학술대회는 어수선해졌다. 연구자들은 주제 발제에 집중하지 못했다. 휴식 시간에는 삼삼오오 모여 리영희 선생님 이야기뿐이었다. 1일 차 회의가 그렇게 끝나고 저녁은 학생식당에서 간단히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들 막창 골목으로 한잔하러 간다고 했다. 지역별로 혹은 전공학회별로 끼리끼리 모여서 막창 골목으로 몰려갔다. 누군가 리영희 선생님께 함께 가시자고 하는 모습이 보였다. 선생님이 손을 저으시더니 천천히 숙소를 향해 걸어가셨다. 나는 선생님을 뒤따라 갔다. 인사라도 드리고 싶어서였다. 숙소에 도착해 보니 선생님과 나는 같은 방으로 정해져 있었다.
나는 선생님께 인사만 드리고 곧바로 막창 골목으로 갈 생각이었다. 인사를 드리고 나는 좀 머뭇거리다가 내가 10년 전에 광주교도소 특사에 있었노라고 말씀드렸다. 선생님은 반색했다. “몇 년도에 있으셨나?” “79년 말에 잠깐 있었습니다.” “김병곤이랑 함께 있었나요?” “예. 이성재, 황현승, 나경일 선생님도 함께였습니다.” “아, 그래요? 나 때문에 고생 많았지요?” 선생님은 약간은 겸연쩍어하셨지만, 반갑게 내 손을 다시 잡아주셨다. 나는 선생님께 많은 질문을 했다. 그리고 오전에 기조 발제하신 내용을 더 상세하게 들을 수 있었다. 한철연 회원 하나가 방으로 와서 다들 기다린다고 어서 가자고 재촉했지만 나는 가지 않겠다고 돌려보냈다.
밤 11시쯤이었을 것이다. 대화가 좀 가라앉자 선생님이 TV를 켰다. TV에서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장면을 생중계로 보여주고 있었다. 선생님은 상당히 놀라시는 표정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동독이 이렇게 빨리 무너지리라 생각은 못 하셨다는 말씀을 한숨처럼 뱉으셨다. 나는 감당할 수 없는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선생님께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요?” 선생님은 이미 준비되었던 듯 망설임 없이 말씀하셨다. “우리 현실에 천착해야지요. 이념이 아니라 현실에 집중해야 합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80년대 한국 사회를 사상적으로 지배한 것은 마르크스주의였다. 한국 지성계는 10년 가까이 “식민지 반자본주의 사회”냐 아니면 “국가독점자본주의 사회”냐를 두고 논쟁을 벌여왔다. 논쟁은 마르크스주의에 바탕을 두고 우리 사회의 사회구성체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를 다투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의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이든 스탈린의 “국가독점자본의사회론”이든 이론적 바탕은 마르크스주의였다는 것이다. 해방 정국 이후 잠깐 4.19 공간을 제외하면 70년대까지 마르크스주의는 금기시되고 심지어 탄압받았다. 막았던 보가 터지듯 갑자기 마르크스주의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서구 사회에서 60년대에 이미 마르크스주의가 지성계에서 거의 사라진 것을 생각하면 이상 증상으로 볼 수도 있을 정도였다. 지금 와서 평가하면 사상과 이념의 균형추를 잡아가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그날 리영희 선생님의 기조 발제는 한국 지성계, 특히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된 젊은 연구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선생님은 마르크스의 인간론에 대한 재고를 촉구하고 마오쩌둥주의의 정치적 실천을 비판적으로 사고할 것을 한국의 젊은 지성인들에게 호소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 이후 리영희 선생님은 한반도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실증적 연구로 방향을 선회하셨다. NNL 연구나 북한 취재 노력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젊은 연구자들은 리영희 선생님의 사상적 전환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리영희 선생님의 그러한 전환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