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 화가 이세현 대문추천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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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느티나무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강마을
[모난돌이 만난 사람] 우리 이야기를 세계에 들려주는 빨강 화가 영국 리즈에서 9번째 개인전… 헤어우드 아트 갤러리서 오는 9월 13일까지 노공이산님 영국 49재 때. 행사 내내 눈에 한가득 눈물을 담고 연신 눈물을 훔치는 선남이 유독 눈에 띄었다. 알고 보니 영국에서 활동하는 화가다. 더 알고 보니 유럽을 무대로 색깔 있는 그림을 전시하면서 세계적인 평론가 수집가들에게 주목받는 반짝반짝 빛나는 한국의 화가다. 더더욱 알고 보니 서구 이론이 한국 그림 세계를 잡아먹고 있는 현실 속에서 자기 그림에 ‘나만의 이야기’로 ‘우리 역사’를 세계인에게 들려주는, 뿌리를 아는 진짜 순 한국 화가다. 노공이산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어쩌면 이렇게 하나같이 다 매력적일까.
화가
그림주제- 빨강 “전방에서 군대생활을 했을 때에요. 밤에 보초를 설 때 야간 투시경을 쓰고 휴전선을 지키곤 했죠. 야간 투시경으로 바라보는 눈앞 모든 풍경은 온통 빨간색인 거예요. 나무와 가지 선까지 뚜렷한 비무장지대의 자연이 온통 빨간색으로 다가서는데 황홀하게 아름다우면서 또 너무나 무서웠어요. 두려움과 공포가 가득한 비현실적 풍경이었고 절대 그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는 풍경이었죠. 분단이 상징하는 DMZ의 우리 국토는 너무 아름다웠고, 또 슬프고 무서웠어요.” “한국에서 빨간색은 편견이 담긴 이미지죠. 빨갱이라는 거. 아버지도 내 그림의 빨강색 산하를 보고 충격적으로 받아들였으니까요. 실제 한국에서 그림에 빨간색을 80% 이상 쓰면 잡혀가던 시절도 있었다고 합니다. 나도 처음에는 빨간색으로 그리면서 불안한 느낌이 무의식적으로 들었죠. 하지만 전 자유를 추구하는 아티스트니까요.” <Between Red-39> 200cm*200cm, 2008, Oil on Linen 그림주제 - 한국 산하 “저는 거제도 출신이에요. 어머님 고향은 통영인데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화장을 한 뒤 통영 고향마을 뒷동산, 이모와 뛰놀던 바닷가를 돌며 유골을 조금씩 흩뿌렸지요. 그런데 그게 한이 맺혀요. 영국 오기 전 다시 통영에 가보니 어머니 재를 뿌렸던 마을 전체가 개발로 깡그리 없어진 거예요. 너무 화가 났어요. 내가 기억하는 모든 것이 현실세계에 더 이상 없다는 게 말이죠. ‘내 기억엔 존재하나 현실엔 존재하지 않는 것이 바로 한국인의 삶’인 겁니다. 증명할 길 없는 풍경을 우리는 다 하나씩 갖고 있어요. 우리는 ‘사이버세계’에 살고 있는 것 걸까요. 내 그림에 사라져가는 해안선 초가집을 그래서 그리는 겁니다.” “백두에서 한라까지 한국의 산과 강 골짜기와 시내를 한꺼번에 담습니다. 무수한 단편을 섞은 거죠. 잃어버린 과거, 사라져가는 풍경, 잠식된 기억을 그려야 했습니다. 더 이상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풍경을 그려야 했어요.” “영국에 오니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생활습관이 너무 다른 거예요. 왜 이렇게 다를까. 저는 그게 ‘자연’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서로 다른 자연 속에서 살면서 그 자연에 적응하며 산 흔적이 곧 문화죠. 문화가 다른 것은 내가 살아온 자연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내 안의 자연은 무엇인가. 그게 곧 내 그림의 출발입니다.” <Between Red-51> 200cm*200cm, 2008, Oil on Linen 영국 유학과 졸업전 “84년 홍익대 미대를 들어갔어요. 당시 우리집은 제가 대학 갈 형편이 못 됐죠. 철없이 대학 간다고 해서 형한테 맞기도 했어요. 장학금을 준다니까 서울까지 유학을 한 겁니다. 학교 다니면서는 계속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벌었고 졸업 후에는 학원강사 생활을 하면서 작업을 꾸준히 했어요. 97년부터 영국 오기 직전까지는 계원예술고등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했지요. 영국에는 2004년에 왔는데 처음엔 어학연수하다가 런던 첼시 대학교에 들어가 석사 과정을 마쳤습니다.” “대학원 졸업 즈음 마련했던 돈이 다 떨어져 실기실에 앉아 그림만 그렸어요. 그런데 누군가 다가와 내 그림 이것저것을 묻더군요. 알고 보니 스위스 취리히에서 온 꽤 유명한 그림수집가였어요. 내 그림을 천만원에 사더군요. 졸업전 때는 유명한 세계 평론가와 수집가들이 작품 고르려고 많이 오는데 제 졸업작품이 모두 팔려나가고 전시 제의도 들어왔죠. 그때부터 영국에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셈이에요.” “첼시 대학원 다닐 때 교수들은 '나'에게 관심을 갖고 '나'를 알려고 하고 나에게서 이야기를 끄집어내려고 했어요. 내 생각의 방향을 함께 고민하고 조언하는 게 인상적이었죠. 물론 제게 방향을 보여주셨던 존경하는 교수님도 계시지만 제가 대학 다닐 때만 해도 대부분 교수님은 그림에 대해 일방적으로 주장하거나 형식적이고 기술적 문제만 지적할 뿐 개개인 학생이 왜 무슨 생각으로 이런 그림을 그렸는지에 대해선 별 관심이 없었어요. 간섭이 많고 표현을 억압하니 낮에는 수업에도 잘 안 들어가고 주로 밤에 학교 작업실에 들어가 혼자 그림을 그린 적이 많았죠.” <Between Red-77> 200cm*200cm, 2008, Oil on Linen 한국 화단, 한국 갤러리 “한국은 잘 나가는 평론가가 대개 유학파죠. 지극히 서구적 관념이나 담론을 이야기하고 그런 이야기를 해야 지식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평론가들이 이런 서구적 사고방식에서 국내 작가를 발굴하기 때문에 그림들이 비슷해요. 하지만 그건 마치 ‘피리부는 소년의 피리 소리에 영혼 없이 따라가는 쥐떼’ 같은 행동이에요. 그런 가운데 묵묵히 자기 길을 치열하게 탐구하고 예술혼을 불태우는 정말 좋은 작가도 많죠. 문제는 그런 분은 잘 조명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지식이 전부인 사람에겐 영혼이 안 보이는 법이니까요.” “한국 갤러리는 그림 팔기에만 급급하고 또 작은 국내시장에만 집중합니다. 국제사회에서 한국 갤러리가 하는 역할, 자리가 없어요. 자기 역사를 돌아보지 않기 때문이죠. 반면 영국 갤러리는 확실한 자기 역사가 있어요. 연속성이 있고 평가 기준이 있고 운영 기술이 있고 국제 네트워크가 형성돼 있지요. 영혼을 만들어 파는 방법이 세련됐다고 할까요.” “한국 미술계가 첨예하게 고민하지 않으면 좁은 테두리에서 벗어나기 힘듭니다. 무심코 사용하는 용어 하나하나마다 신중하게 내 뿌리에서 끝까지 사색하지 않으면 그저 서구의 아류가 될 뿐이에요. 유학 다녀와 지식인을 칭하는 사람들은 자기 역사가 없고 세우려는 생각도 하지 않아요. 우리 것이 아닌 걸 가지고 그 위에 이론을 세우려 하니 헛바퀴 도는 것과 같죠. 한국에서 민중예술 이후 자기 색깔은 사라진 겁니다. 나의 것을 치열하게 생각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따라오면 그것이 하나의 모랄이 되는 겁니다. 무얼해도 자기 역사에서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요?” 내 안에 있는 ‘코리안’ “저도 한국에 있을 땐 서구담론을 이야기했지요. 영국에 오니 그런 내 모습이 너무 웃긴 거예요. 초등생의 언어로 영국인들에게 ‘라캉’이니 ‘데리다’를 이야기하는 게 코미디 아니겠어요. 촌스럽고 우스꽝스러운 거죠. 그래서 ‘내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겁니다. 외국 와서 서로 소개할 때 맨 처음 묻는 말이 ‘웨어 아유 프롬’이잖아요. 거기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잖아요. 어디서 왔냐. 나는 어디서 왔냐는 것이 출발이에요. 어쩔 수 없는 정체성이죠. 한국사람인 겁니다. 한국사람이기 때문에 한국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부터 시작하자고 생각했어요. 내 안에 있는 ‘코리안’은 도대체 뭔가.” 글로벌리즘 “글로벌리즘, 글로벌리즘 하죠. 글로벌리즘은 해외에서 하는 것을 그냥 따라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이야기를 우리의 언어로 만들어 세계에 내놨을 때 그것이 세계에서 관심을 갖게 되면 바로 글로벌리즘이죠. 우리 역사 속에 아무 연속성 없이 뜬금없이 포스트모더니즘, 페미니즘을 이야기합니다. 한마디로 정체성의 고민이 없는 거예요. 한국 화단은 아직 준비가 안 돼 있습니다. 왜냐. 자기 문제를 주체적으로 고민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근본적으로 사색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는 교육도 문제겠죠. 교육은 결국 복지정책, 정치와도 결부되는 게 아닐까요.” 한국에서 활동하는 한국작가 “유럽에서 활동은 계속 하겠지만 영국에만 있지 않고 한국의 내 작업실에서 활동할 겁니다. ‘나의 정체성’과도 연결되는 건데요. 내 작품 주제가 우리나라 풍경, 산과 시골집 같은 것인데 한국에서 작업하지 않으면 뿌리가 없는 거겠죠. 저는 이를테면 ‘영국에서 활동하는 한국작가’라는 꼬리를 바라지 않아요. 우리야 “이제 인생의 중반기쯤에서 다시 내 인생을 생각합니다. 한국에 있는 한국작가로 세계 무대에서 활동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한국에 있는 후배들에게도 본보기가 되지 않을까요. 한국에 돌아가면 경기도 광주 근처에 한옥 작업실을 지을 겁니다. 사실 작업실은 그림을 그리는 곳이기도 하지만 외국 콜렉터들이 많이 찾아오는 곳이기도 하거든요. 한국 내 작업실까지 와서 그들이 보고 싶어하는 것이 꼭 그림만은 아니겠죠. 내 작업실 안에서도 한국의 냄새와 맛을 느끼게 하고 싶습니다.”
런던의 남쪽 서리 지역 킹스턴에 빨강 화가 이세현의 작업실이 있다. 도시락 싸들고 자전거로 매일 아침 9시에 출근해서 밤 11시까지 꼬박 작품에만 몰두한다. 사람 만나는 일은 극도로 절제하고 이메일조차 일주일에 한번만 몰아서 처리할 만큼 그림을 위해 모든 시간을 접어둔다. 가까운 리치몬드 공원에 일주일 서너번 자전거 타기 일주하는 것이 건강 관리 겸 유일한 여가시간인 셈이다. 리즈의 이번 전시회가 개인전으로는 아홉번째다. 앞으로도 9월 이탈리아 밀란 개인전과 내년 한국 개인전, 일본과 미국 등지의 해외 전시 일정이 빡빡하다. 세계 화단이 주목하는 이 화가의 성공은 어느날 갑자기 이뤄진 게 아니다. 나의 이야기를 예민하게 포착하고 내 뿌리를 처절히 고민하며 내가 사는 우리 땅의 현실을 '나만의 방식'으로 증명하느라 하루 12시간 이상씩 그림에 몰두하는 사람에게 돌아가야 할 마땅한 대우다. 마흔 훌쩍 넘은 나이에도 풋풋한 청년의 결기와 순수를 감출 길 없는데 그가 그림에 들이는 열정 또한 빨갛다 못해 얼얼하다. 빨강 화가
이 글은 우안 최영식화백의 홈페이지 중 산막골일기에서 퍼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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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느티나무마을 원문보기 글쓴이: 강마을
첫댓글 잘봤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