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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양 감리교회 임용택목사님께서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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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양2동 (구)감리교 안양교회 시절
대교부근
태양공업사 철공소을 운영하셨던
강태현(철희)원로장로님을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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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백문현목사님
안양감리교회 원로목사이자 기독교대한감리회 경기연회 감독을 역임한 백문현 목사(75)가 지난 4일 소천했다.
백문현 감독은 목원대 신학과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필리핀 유니온대학교 목회학 박사를 취득하고, 둔내교회·덕지교회·평촌교회·중촌교회·신홍교회 등을 담임한 후 1980년 안양교회에 부임해 30여년간 부흥을 이끌었다.
이외에도 교단에서 안양지방 감리사를 비롯해 전국 부흥단장, 정책위원장, 해외 관리감독, 감신대 이사, 목원대 이사장, 성자협의회 총재, 중부권 부흥선교협의회 총재, 군선교 이사장, 만나신학원 이사장, 베트남선교회 이사장, 북한선교회 대표회장 등을 지냈다. 북한교회세우기연합 공동대표회장도 역임했다.
유족으로는 김인숙 사모와 1남 3녀가 있다. 입관예배는 5일 오후 1시 분당서울대병원에서, 발인예배는 6일 오전 9시 안양감리교회에서 각각 진행됐다.
♣ ~유원지 석수감리교회에 은퇴하시기 전
예배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께서 몸이 많이 않 좋으셨으니까요.
더우기 말씀도 행동도 어눌하셨었습니다.
은퇴 하시면 어떯한 생활과 신앙으로 살아가실까
궁금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끝 마무리 설교말씀에서
예수님의 온유
예수님의 겸손
예수님의 지혜
성령 충만한 말씀에 은혜을 흠뻑 받았습니다.
【교회에서 은퇴하면 아무도 모르는곳에서
조용히 하나님과 함께 살면되겠지!!】
우렁찬 말씀의 칼 같히 머리을 번뜩이게합니다.
☞ 뒤로 돌아 갔!!~~~~~~~
절대로 안양감리교회에 몸담고 계시질 않켔다는
단호하신 외침의 결단에,,
모든 성도님들이 숙연했던 예배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
~목사님의 영전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시기을 기도하며
삼가 명복을 빕니다. 하늘나라에서 편히 쉬소서.~~
※- http://cafe.daum.net/TGBuchon/98B6/27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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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2019.09.24 지인의 전달로 놀라움을 금치못하여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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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양1동 (남부시장) 안양제일교회의
이형래장로님을 (제일병원원장) 기억합니다.
안양제일교회 간증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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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11.21 ( 박중호장로님 찬양간증집회 ) ◀
※~故 이형래장로님 추후 기재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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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안양제일교회(安養第一敎會)는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안양1동에 위치한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1930년 5월17일 양동익 전도사에 의해 안양청년회관에서 「안양교회」라는 명칭으로 창립되었다. 창립당시 안양지역은 경부선 안양역 개설로 인해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했지만 주변에 교회가 없었기 때문에 신도들이 성경을 개별적으로 공부해야 했다. 그러던 중 조선예수교장로회 경기노회가 신도들의 교회설립 요청을 받아들여 양동익 전도사의 주도로 교회가 창립되었다. 교회 창립당시 동아일보에 보도될 정도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1] 창립초기 10여 가구에 불과했던 교세는 일제 해방직전 115명으로 늘어났으며 당시 청록파 시인 박두진
1951년 한국전쟁으로 예배당이 전소하였으나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와 미8군의 도움으로 예배당을 재건하였다.
1954년 강인병 담임목사가 대한예수교장로회(약칭 예장)를 탈퇴하고 한국기독교장로회[2]
1992년 현재의 본당이 준공되었으며 희년관, 벧엘관, 비전센터, 베데스다관, 가정사역센터 등의 부속성전이 있으며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에 교회묘지가 있다. 부속기관으로는 사론유치원, 경로대학이 있다.
2003년부터 현재까지 홍성욱 담임목사가 사역 중이며 독거노인 돕기, 장애인 이동목욕 봉사와 같은 사회참여적인 봉사활동을 하고 있으며.[3] 네팔, 중동, 동북아에 선교사를 파견하고 있다.
♣~~안양 제일교회 창립82주를 경축합니다
글 이 용 구
위 안양 제일교회는 2012년 5월17일이 창립 82주년이 되는날로
내가 다섯살 때 내고향 당시 경기도 시흥군 서이면 안양리에
세워진 교회로 나하고 같이 살아온 동반자와 다름없는 교회로써
언제나 친근감이 있는 교회이다
또한 나는 안양의 토박이로 중년이 훨신 넘은 1984.4.22 늦게서야
세례를 받아 오랜동안 제일교회에 다니다가 그후 같은 안양인
호계동으로 부득이 이사를 하게되어 이사간 집에서 가까운 같은
장로교회에 나가고 있다
교회는 옮겼으나 이렇게 나와 같이 성장한 교회이고 또한 내
나이와 비등한 옛 친구들이 제일교회에 남아있고 하여 가끔씩
또는 교회 야외예배나 친목단체 모임등 행사가 있으면 꼭 참석
하고 있는 관계로 매월 발행되는 교회신문 월간 "열한시"를 꼭
보내 주어 그나마 교회 소식을 듣고 있으니 실로 감사하다
내가 옛 어려서의 교회의 일이 생각 나 회상하며 몇가지 적어 보겠다
내가 옛 초등학교 당시의 일이다 이미 돌아가신 이형래 원로장로님은
안양 서이면사무소 앞에서 삼성병원을 경영하고 게셨다 간혹 하교
(下校)길에서 이형래 장로님을 만났다 헬멧을 쓰시고 자전거에 큰
왕진가방을 매달고 어디론가 왕진을 다녀 오실때 우리들이 인사를
하면 장로님은 우리들을 귀히 여겨서인지 꼭 자전거를 멈추고 내려서
인사를 받으시고 하시는 말씀이 너히들 주일학교에 나오너라 하시며
공부 열심히 하라는 격려와 당부를 하셨던 모습이 지금도 떠 오른다
다음은 나와 같이 중학교를 같이 안양에서 서울로 기차통학을 하던
친구중의 한 사람이 있었는데 이분 역시 벌써 돌아가신 이태섭 장로님
이었다 물론 그의 동생인 이항섭 장로님과 한정선 장로님도 있었다
당시 안양에서 경기중학교에 입학함은 하늘에 별 따기로 어려웠다
그런데도 이태섭 장로님은 머리도 명석하고 우수 했으니 당시 우리
안양의 자랑 이기도 했었다 그 외에도 이경수.이상윤.남장우. 임칠호
장로님과는 각별히 교분이 두터운 사이로 늘 존경 하고 있다
다음은 돌아가신 김학구 장로님의 이야기다 이 분을 알게된 동기는
철도청에서 나와 같이 근무한 김수남씨가 있었는데 이야기 하다 알고
보니 사촌 매부인 김학구 장로님이 안양 제일교회에 출석하고 계시다
해서 였다 이 장로님은 황해도에서 사시다가 1.4후퇴 당시 남하 하신
분으로 대구에 정착하여 대구시청에 근무중 고위층 상사로 승진할
기회가 있는데도 마다 하시고 안양으로 올러와 비산동에서 양계를
생업으로 하고 게실 때 알게 되었다
신앙심이 깊은 분이라 나는 김학구 장로님으로 부터 많은 성경에
대한 지식을 얻게 되었으니 이것 또한 하나님의 은덕이라 여기며
감사를 드린다 하여간 금년 5월17일이 안양 제일교회 창립 82주년을
축하하며 또한 교회 홍보출판으로 금년 창간 28주년이 되는 월간
교회신문 "열한시"와 함께 앞으로 더욱 발전과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이 있기를 기도한다~~
※= 안양 제일교회 설립자
故 이형래장로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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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0년 9월28일 외할아버님의 유고소식을 접하고 나는 어머니와 함께 몇 시간 후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편에 몸을 담았다. 그는 애국지사도 아니었고 고위공무원직을 지내신 분도 아니었으나, 경기도 안양시 근대사에서 기독신앙인과 의료인으로 남긴 자취는 자못 큰 것이었다. 만 94세로 결혼 81주년을 목전에 두고 만96세이신 외할머님을 홀로 남기시고 돌아가신 외할아버님에 대해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교훈 되는 점이 있어 그의 일생을 재조명하여 보려한다.
나는 학교 갈 나이인 일곱 살 때까지 외갓집에서 자라났다. 어머니의 손을 덜어주고, 손주를 키워보고 싶으셔서 자원하신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방학 때면 늘 외갓집에서 지냈었다. 그 곳에서 보고자란 일들은 후의 내 인생에 큰 도움이 되었다. 외할아버지의 존함은 이형래 이며, 그는 1906년 2월12일 경기도 파장리의 광주 이씨 집성촌의 한 양반집 4남2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할아버지가 3살 되던 해 아버지를 여의시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난 그에게 남겨진 유산은 아주 빈약하였다. 그러한 생활조건 때문에 근검 절약하는 습관을 몸에 익히며 자랐다. 항렬이 높아 동갑내기 조카들이 많았는데 서당 등 일상 생활에서 그들과 선의의 경쟁에서 지지 않으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러한 지기 싫어하는 성격은 그를 자신의 처한 위치에서 더 큰사람으로 만드는 데 한 몫을 했다. 삼일운동이 나던 1919년 만 13살 되던 해 자신 보다 두 살 많은 경기도 남양 홍씨 가문의 홍갑숙 할머니와 결혼하였다. 만13세까지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결혼 후 아내의 조언으로 초등학교에 입학하시었고 보성고보와 세브란스의전을 졸업하였다. 할머니는 학교를 다닌 적이 없는데도 독학으로 언문을 깨우치시고, 성경을 비롯한 여러 고전을 섭렵한 박식하신 분이었다.
1947년 외할아버지는 경기도 안양시 일 번지 안에 있는 전통기와집으로 이사와 삼성병원을개원하셨다. 그 건물은 안양읍사무소가 바로 옆에 새 건물을 지워 이사가기 전까지 사용하던 곳이었고, 할아버지가 이사오셔서는 가정집 외에 병원과 교회로도 쓰였다. 1992년까지 45년간을 사시다가 아파트로 이사가시면서 그 곳을 떠났는데, 안양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기와집이고 읍사무소였던 역사적 가치 때문에 안양문화원에서 구입하여 사적으로 영구보전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 곳은 나를 비롯한 손주 5명이 태어난 곳이기도 했다. 1950-60년대에는 안양에 병원이 두 세 개정도 밖에 없었고, 안양거리는 구시대 촬영 셋 정도로 작았던 때였다. 안양유원지나 인근공장에서 사고가 나면 여러 기관의 촉탁의를 맡고 계셨던 할아버지병원으로 환자들이 실려왔다. 그 당시 안양에서 출산한 아이들의 30-40%는 할아버지가 손수 받으셨다. 병원에는 동네 유지들이 바둑을 두러오시곤 했다. 할아버지의 바둑은 영원한 7급이었으나, 배움에 대한 의지가 강해, 늘 신문에서 고수들의 복기를 연구하시는 분이었다.
1954년 할아버지 안방에서 시작한 안양제일교회는 점점 교인수가 늘어, 옆의 병원건물이층으로 옮겨서 예배를 보았다. 그 후 할아버지가 기증하신 현 위치의 텃밭에 새 성전을 지어 이사와 현재 교인 4천명이 모이는 하나님이 크게 쓰시는 교회로 성장했다. 나는 어렸을 때 주일마다 성가대대원들의 식사를 준비하시고, 귀한 선물이 들어오면 목회자 몫으로 챙기시는 모습을 보며 자랐다. 할아버지가 병상에 누우시기 2년 전까지 만해도 새벽4시에 하는 새벽기도를 거의 한번도 거르신 적이 없으셨다, 할머니가 거동을 하셨던 몇 년 전까지 만해도 노틀담의 곱추같이 완전히 90도로 꾸부러지신 할머니를 한 손에 잡으시고 새벽기도회에 참석하기 위해 다정히 걸으시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어렸을 때 모기장이 쳐있는 안방에서 두 분과 함께 잘 때면 간간한 귀뚜라미소리와 함께 두 분의 정다운 대화가 들리곤 했다.
할아버지가 의사였기 때문에 풍족한 생활을 했었을 것으로 사람들이 생각할지 모르나, 두 분의 생활은 매우 검소하였다. 장지에서 어느 장로님이 기도 중 “10원 한 장 쓰시는 데 벌벌 떠셨지만, 교회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바치신...” 이라고 말씀하신 그 대로의 삶을 사셨다. 요즘은 환경문제 때문에 리사이클을 중요시하는 시대가 됐지만, 두 분은 일찍이 생활 속에서 리사이클을 실천하셨다. 내가 그분들과 함께 한 지난 40여년 동안 한번도 가구를 사신 적이 없으셨고, 음료수는 언제나 끓인 수돗물 또는 산에서 몸소 가져온 약수물을 사용하셨다. 화장실에 놓여있는 비누는 늘 은박지가 한 면을 감싸고 있으며, 옆에 있는 변기 물통에는 빨간 벽돌 하나가 들어가 있고, 화장지는 얇은 일일달력을 1/4로 짤라 대신하였다. 할아버지 댁에는 골동품보다는 다음 사용을 기다리고 있는 고물들이 즐비하였다. 그렇게 절약하는 생활을 하시는 분이었지만, 교회에다가 건축헌금, 장학금, 교회대지, 교회묘지등 재산은 제일 먼저 아낌없이 내놓으시는 분이었다. 안양이 70년대에 개발붐을 타고 땅을 가진 사람들이 부를 누렸지만 살고있는 집과 병원 외에는 가진 부동산이 없으셨다. 땀흘려서 일한 노력의 대가 외에는 어느 것도 바라지 않으시는 분이었다. 떡이나 반찬거리를 머리에 지고 팔러 다니시는 분들이 오시면 절대 값을 깍지 않고 사주시곤 했다. 일사후퇴 때 대전에 피난 가서 떡장사를 하면서 행상의 고달픔을 느끼셨다고 한다. 손자들이 모처럼 오면, 시장에 가서 닭을 잡아오시지만, 평소 할아버지 밥상엔 고기구경 하기가 힘들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자녀들을 훌륭히 키우신 분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점은 할아버지와 함께 산 나도 의문 나게 하는 점이다. 큰외삼촌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신장이식수술을 하셨고 성모병원장을 지내신 이용각박사이고 작은외삼촌은 우리나라 정보통신분야의 리더중 한 사람으로 현재 한국통신 사장인 이용경박사이다. 구시대 사람들인 두 분이 자녀들에게 과학적 육아 방법을 적용했을 리 만무이다. 내가 보기엔 두 분의 생활자체가 교육의 현장이었다. 흐트러지지 않는 생활을 하시는 두 분의 말씀에는 늘 힘이 실려있었고 자손들은 존경하는 마음으로 따랐다. 존경하는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려는 자식들의 노력이 좋은 결과를 낳지 않았나 생각된다. 어린 나에게도 공부하라는 말씀보다는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하셨던 기억이 난다.
워낙 대쪽같은 성격을 갖고 계셔서, 직설적인 발언 때문에 목사님이나 다른 장로님들이 마음 고생하셨던 것이 지금 생각하면 좀 아쉬운 점으로 남는다. 그러나, 그 마음의 중심엔 하나님을 경외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열정이 있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다. 지나친 검소한 생활태도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기도 했으나, 쓰지 않고 모은 재산을 하나님사업에 바치는, 쓸 때 쓸 줄을 아시는 분이었다. 그리고 그는 한 여인과 81년을 살고, 한 교회를 46년간 목숨이 다할 때까지 섬긴, 주어진 것을 소중히 생각하며 그 안에서 행복을 찾을 줄 아시는 분이었다. 일세기를 사시는 동안 우리의 믿음생활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하였고 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변화를 쫓아갔으나, 그러지 않고도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며 살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증인이 되셨다.
2000년 10월 경
박중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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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삼용목사님,김우영장로님 (제:김우경 고려대학 구로병원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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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최채O 권사 여동생 최00 (우유업체 0회장님 여동생의 오빠=민족사관고등학교 최00설립자)
-여동생되시는 최00목사님사경을 헤메고 계십니다. ( 신치순장로, 김정현장로와 유00장로= 차후 공개예정 )
-유승화장로님 (안양여고 영어선생,연세대학 영문과졸) 사진제공
-발췌처: blog.daum.net/worldonepercent/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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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9년 3월 12일자 동아일보 기사 (기장 예장분리시점 )
이 글을 쓰신 이용구 선생은 1926년생으로 제일교회가 창립된 1930년도에는 다섯 살 밖에 안 되는 어린이였지만 교회에서 그리 멀지 않은 안양3동 양지마을에서 소년 시절을 보내며,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들의 생활과 안양의 당시 모습들은 눈썰미 있게 보아 두었다가 그의 책 '양지마을의 까치소리' 등을 통해 안양지역 사회의 과거를 들려주고 있다. -편집자 주-
내가 나가는 안양제일교회 80년사(1930년~2010년)가 발간 되었습니다 여기에 투고한 글이 등재 되었기에 전기 하오니 참고가 되었으면 합니다 (1030.5.17 창립)
1930년 당시 안양은 서울역에서 24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안양역을 중심으로 밀집된 곳에만 겨우 전깃불이 있을 뿐, 그 외에는 밤이면 희미한 석유 등잔불만이 가물거리는 고장… 하루에 기차가 수회 지나며(단선운행) 서울~수원간 경수(京水)버스가 몇 대 지나던 촌락이었다.
행정 명칭은 경기도 시흥군 서이면 안양리였다. 안양역 건물은 까만 기와지붕에 몇평 안 되는 성냥곽 만한 역사(驛舍)에 대합실과 개찰구와 집찰구뿐이었다.
역 앞 국도 건너에는 미륵당(彌勒堂)이 있고, 그 주위에 수백 년 된 노향목(老香木 ) 두 그루가 안양의 내력(來歷)을 다 아는 듯 우뚝 서 있었다. 바로 그 및에 두 개의 목로주점이 있었고, 역광장 구석에는 일본인 담배 가게가 있었다. 그리고 철길과 평행하여 자갈길 비포장 국도가 남북으로 나 있었다.
역 앞 도로변에는 경찰관 주재소, 화물운송부(전 대한통운자리), 경수버스 정류장, 서이면사무소, 안양우체국이 인접해 있었고 좀 남쪽으로 떨어진 곳에 *안양공립보통학교(현 안양초등학교), 북쪽으로 좀 떨어져서 안양철교 옆 *경성기독보육원(구 해관보육원→현 좋은집)과 그 반대편 안양천변에 일본인 오끼이(沖井) 농장과 야스에(安江) 농장이 있었다.
그리고 국도(國道)를 따라 좌우로 연이은 여러 상점과 몇몇 제법 큰 상점도 있었으나 그 외에는 평범한 초가와 그 사이 사이에 포도밭이 많았다. 5일과 10일에 서는 장날에는 촌사람 들이 모여들어 사고 파느라 들끓어 시끄럽고 매우 혼잡했다. 잡화와 우시장이 기찻길 건너~비산동으로 가는 안양천 다리 사이에 있었다.
또한 서이면사무소는 구조선 기와지붕을 가진 옛 *안양옥 자리이며 향나무와 버찌나무로 둘러싸여 있었고, *조한구(趙漢九) 면장이 호계동 자택에서 출퇴근시 타고 다니던 애마(愛馬)가 늘 벚나무에 매여 있는 것도 눈에 선하다.
늦은 봄에는 학교수업이 끝나 집에 돌아 오다가 이곳에 들러 입이 검도록 버찌(벚나무 열매)를 따 먹느라 아이들이 모여 들었었다.
또한 춘추로 시행되는 우두(牛痘)를 맞느라 부모님을 따라간 일과 그때 겁에 질린 어린 아기들의 울음 소리도 귓전에 들리는 듯하다. 그 앞에 윤경섭(尹慶燮)씨가 운영하는 양조장이 있었는데 그 곳을 지나려면 시금털털한 막걸리 냄새가 물씬 풍기고 코에 확 들어 오곤 했다. 그 옆 대흥관(大興館)에서는 장고 소리와 기생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당시 주민들은 대체로 유·불교 사상이 농후하고 미신을 섬겼다. 즉, 병이 나거나 복(福)을 빌 때에는 으레 무당굿, 푸닥거리, 무꾸리 등 미신으로 마음을 달랬다. 이렇게 하나님과 거리가 먼 안양 땅에 천주교는 이조 말 대원군의 쇄국 정치와 천주교도 박해로 수리산 산속 깊숙이(현 안양9동 : 속칭 담배촌) 피신하여 집단 은거하며 화전을 일구고 담배 재배와 숯을 구워 생계를 유지하였다.
당시 안양에는 아직 천주교당이 없어 인근 영등포와 수원지구 교당에서 년 2회 심방 전도로써 촌가에서 집회를 가졌다고 들었다.
안양의 최초 성당인 안양4동 625-75에 있는 중앙성당은 1954년에 설립되었다. 흔히들 천주교와 기독교인들을 가리켜 말하길 ‘천작쟁이’니 ‘예수쟁이’라 부르며 마치 유교와 불교가 으뜸 가는 종교인양 비웃음과 천시(賤視)등 배타적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 이야기와 교회(당시 예배당) 종소리를 들으며 자라왔다. 그러니까 내 나이 5~6세 때였다. 우리집 마당에서 놀다 보면 어느 노파가 구름같이 나타나 지나가는 것이었다 나는 그를 보고 마음속으로 하나님 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백발에다 흰옷을 입고 얼굴은 환하며 번듯하고 걸음걸이가 아주 느리고 점잖게 말도 없이 하늘만 쳐다 보며 걸어가는 것이 어딘지 모르게 위엄이 있어 보였기 때문에 꼭 하나님 같이 느꼈던 것이다. 그후 좀 커서 알고 보니 안양교회에 나가는 건너마을 정씨 댁 할머니 였으며 가끔씩 우리 집 앞을 지나 작은 아들 집에 가는 길이었다.
하여간 그때 나는 하나님을 자세히 몰랐지만 스스로 생각 하길 점잖고 정직하고 위엄이 있으며, 본능적으로 성인(聖人)으로 알고 섬기며 악행을 하지 않고 선행을 하면 죽을 때 하나님이 심판하여 천당과 지옥으로 구별하여 보낸다고 들었기에, 기왕이면 천당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나뿐만 아니라 어려서의 공통적인 우리 세대들의 순박한 마음이었다.
또한 내가 7~8세 때였다. 멀리서 ‘땡그랑 땡’ ‘땡그랑 땡’하고 예배당 종소리가 일요일과 수요일은 물론 매일 새벽 4시경과 저녁에 들려왔다. 예배당은 우리 집에서 동쪽으로 약 1.5km 떨어진 국도변(國道邊)에 자리 잡고 있었다. 현 남부시장 내에 있던 예배당은 학교 교실의 절반 만한 일자형(一字型) 집에 양철 지붕 이라고 기억된다.
예배당 옆에는 목재 종탑(鐘塔)이 있었고 가로수가 나지막하게 있었는데 도로변이라 항상 뿌연 흙먼지에 덮여 있었다. 이 예배당이 지금부터 80년 전에 세워진 안양리교회이고 현 안양제일교회의 모체이다.
그리고 내가 다섯 살 때 교회는 안양에 하나뿐 이고 안양보통학교가 4년제 여서 5~6학년 과정의 학생들은 이 교회를 강습소(講習所)란 이름으로 2~3년 사용 하였다는 이야기도 들은바 있다.
*안양공립보통학교
1929.12.20 개교(4년제)/
1938.4.1 안양공립심상소학교로 명칭 변경
1934.3 - 현 안양제일교회 이경수 원로장로 졸업(1회). 2010년도 93세
1940.3.2 - 6년제로 승격
*경성기독보육원
1919. 선교사요 의사인 오긍선 박사(1878~1963 / 충남 공주 태생) 설립
1949. 이승만 대통령 시설 3개동 기증/ 1950.6.25사변으로 가덕도로 피난
1952. 미8군단 45공병단 지원복구/ 1998. 해관보육원으로 개칭
2007. 좋은집으로 개칭 (원장: 정어진 장로-덕장교회,평강교회 개척에 기여)
*안양옥
안양리 674-271번지, 현 경기도 문화재 제100호 기념물-안양시 소유,
1917.7.6~1949.8.14 면사무소로 사용
*조한구
일제 초부터 해방 전까지 서이면장, 안양면장 직을 밭아 안양 발전에 공이 컸음,
1952년 민선읍장 선거에도 당선
우리 동네 양지마을(현 안양3동)은 밭농사를 위주로 하는 농가와 품팔이를 하는 비농가였다. 그중 기독교 신자는 徐씨와 李씨 두 집안 사람 들이었다. 당시 교회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가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통속적인 개념 이었는데 그게 사실이었다. 처음부터 부유층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니라 당시 일제치하(日帝治下)에서 핍박받던 민족의 서러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달래 보려는 사람들 이었다고 생각된다.
우리 앞집에 사는 서병두(1933. 5 세례, 세례자 명부 등재)씨네 여섯 식구는 수리산(修理山) 에서 나무 장사와 철로 보수용 자갈 캐기, 혹은 품팔이 등의 생업으로 그날 그날을 가난하게 생계를 꾸려 나가고 있었으나 늘 희망과 화기 애애한 분위기 속에 웃음으로 꽃피우며 단란하게 사는 것을 엿볼 수가 있었다. 또한 그 집은 밤낮으로 찬송가 소리가 그칠 날이 없이 울려 나왔고 남보다 더욱 근면해 보였다. 어느해 늦은 가을 그 집 장남이 예배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는데 따라 가서 구경한 일이 있었다.
생후 처음 보는 교회 예식 이었다. 한복 차림의 신랑신부가 가슴에 만든 꽃을 달고 풍금 소리에 맞추어 찬송가를 부르고 주례 목사님의 축복기도가 있었다. 종전에 많이 보던 재래식 혼인잔치 초례(初禮)상에 기러기 안고 올리는 혼례식 보다 경건하고 성스러워 보였다.
또한 그 집에서 우리 집 까지는 좀 거리가 있으나 들려 오는 찬송가 중에서 똑똑히 들리는 구절이 “예수권세 많도다.”와 “날 사랑하심”이었다. 지금 찬송가를 찾아 보니 563장 찬송이 그 가정의 주제가 였다고 보아진다.
지금도 이 찬송가를 듣거나 부를 때면 75년 전 내가 성장하던 아득한 옛 어린 시절에 뛰어 놀던 마을의 산과 들이 생생 하게 떠 오르고 이웃들과 정다웠던 옛 추억이 그립다. 또한 서씨댁 누님 서정희「60년사」.p 89. (1938년 11월 세례. 세례자 명부 등재)씨는 나의 두 누님과 연배 인지라 우리 집에 자주 드나들며 은연중 하나님 이야기와 찬송으로 완고한 우리 집에 복음을 전하려 했으나 유·불교 신봉자인 아버지는 완강히 거부했다. 그러나 누님들은 점점 감화(感化) 되어 아버지 몰래 찬송가를 같이 불렀다. 나도 어깨 너머 공부로 누님 따라 뜻도 모른채 불렀다.
어느 해 여름밤 이었다. 두 누님이 서씨 누님을 따라 북을 치며 동네에 들어온 밤 부흥 집회에 간 것이다. 눈치를 채신 아버지는 그날 따라 누님들을 찾으셨다. 그날 밤 늦게 귀가 하다가 그만 아버지께 들키고 말았다. 호된 꾸지람 으로 다시는 부흥회에 가지 못했으며 찬송가도 부르지 못했다.
이것은 종교적인 문제도 있었으나 당시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란 봉건적 사상으로 혹시나 남녀간 불미(不美) 스러운 일이 생기지나 않을까 하는 노파심에서 였다. 그 일로 그후 서씨 누님은 우리 집에 얼씬도 못하게 되었고 그후 서씨 누님은 가정 형편상 식구 모두 이사를 가게 되어 서운한 마음을 지금도 가지고 있다.
또 한 가지는 우리 동네 기독교 신자인 이흠팽 씨댁 장례식 날이었다. 나는 아버지 몰래 장지인 우리 마을 뒷산까지 따라 가서 장사 지내는 절차를 하나하나 눈여겨 보았다. 발인 때와 하관 할 때 목사님의 간곡한 기도와 위로의 말과 교인들의 적극적인 사랑과 보살핌을 보았다. 상여로 운구 하였으며 상제들은 굴건제복을 하였다.
이것 또한 생후 처음 보는 기독교식 장례식 이었으며 얼마나 엄숙하고 경건 하였던가…… 지금도 생생하다. 종전에 보던 것에 비해 다른 것은 찬송가와 목사님의 기도가 특색이었다. 그때 통합 찬송가 291장 “날빛보다 더 밝은 저 천국”의 곡조와 뜻이 어찌나 애절하고 슬픈지 마음에 파고드는 듯 느꼈으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후 10여 년이 지나 감격의 8.15광복을 맞이 하였고 공산당의 남침인 6.25사변을 겪었다. 처참한 골육상잔의 쓰라림을 몸소 겪음 우리 대소가(大小家)와 동네 사람들은 무엇을 느꼈는지 차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
또한 만세 전에 택 하심으로 우리 형제자매 중 4명이 교회에 나가 주님을 믿게 되었으니 아마도 서정희 누님이 뿌린 씨앗으로 싹이 아닌가 생각 되며 그저 감사할 뿐이다 (끝)
출처: http://anyangbank.tistory.com/2492 [안양지역시민연대/안양지역정보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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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양2동 (만안초 건너편)
안양중앙성결교회의 설립자
김용근원로장로님(작고) 안양읍시절 읍장 사모님이셨던 신도남집사 재정을 오랜동안 맏으셨음
유택윤목사님 손녀 쌍둥이 손녀딸 특송이 유별나셨다함, 안양교회는 포도발으로 이루워짐.
장기완장로님 홍장로님(종축장) 김영오장로님
1976년 안양교회 건너편 개척을 함.
그러나 최태술장로님, 이내천 장로님은 안양교회을 지키고 계심..
(안양성결교회에서 개척=박달동 미곡상)
☞ 2018. 3월=> 유택윤목사님의 손주
유병기집사님 연락오심 (유일한 혈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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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성 예성분리 상황 기록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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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래동소재
안양중앙(기독교)장로교회는
추후계제 예정
-임병조장로님이 기술약속받음-
-박두진시인(청록파 시인)
안양중앙장로교회과
안양 삼덕제지 근무
-박주안장로 (삼덕제지근무)
-새일교회 이탈후 다시 복귀
-안양성결교회 원상희집사 / 윤용녀집사 안양교회 떠남
(차후 기재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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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양시 이필운시장님 인사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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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읍민관( 벽산사거리 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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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방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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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 장래동 성당 전경- 195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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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2동 수압천(화단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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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 구시장 입구(진흥아파트부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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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방직 안양성결교회 부근( 국민은행 뒷편)
-장00권사님 박달동서 자취을 하시면서
-남동생을 학비 뒷바라지을 하시며 금성방직을 다니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