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6,29. 마산 불교대학 전공반 참선실수 法門
무상심심 미묘법 이니 백천만겁 난조우 이나-나~
아금문견 득수지 이니 원해여래 진실의 로다-나~
위없는 심히 깊고 미묘한 진리인 부처님의 법을
백천 만겁동안 만나기 어려우나
제가 이제 보고 들어 지니오니
원컨대 부처님의 진실한 뜻 알게 하옵소서.
* 佛敎 그리고 參禪實修를 말하기에 앞서
參禪이 무엇인가? 를 알아야 할 것이며 참선으로 실상을 닦는 실수를 하기위해서는 禪은 무엇이고 敎는 무엇인가 하는 선과 교를 먼저 알아야 할 것이며
그러한 연후에 어떻게 하는것이 바른 實修인가?를 알고 바르게 닦아야 할 것이다.
* 法門이란 무엇인가? 하면 법(法) 문(門)이니 법 즉 진리를 깨쳐 들어가게 해 주는 말인 것이다.
* 佛敎란 무엇인가? 하면 원래부터 있는 그 진실된 실상의 이치를 진리라 하는 것이며, 이 근본 실상의 성품을 불성이라 하며 부처라 이름 하는 것이며, 이 禪이라 하는 실상의 부처(佛)를 깨우친바 그대로 覺人(부처님佛)인 부처님이 되신 분이 차별교문인 말을 통해서 敎說로써 가르쳐 주신 것이 가르칠 敎이니, 합해서 佛敎라 하는 것이다.
다시 간단히 설명하면 인도어 붓다=한자어 佛(불성) =우리말 부처 ---> 이를 깨친이를 覺人 즉 우리말로 부처님이라 존칭하는 것이니, 섬세한 우리말로는 이를 분명히 가려 쓸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 불법은 일체 만유의 진리기 때문에 이것은 종교를 초월해서 절대적인 것이니 이 가운데 종교 철학 과학이 모두 다 포함된 것이다.
이 근본성품인 부처를 증오하시고 이 부처의 나툼이요 작용인 일체의 진리를 깨우치신 분, 그분이 곧 우리 교주이신 석가모니부처님이시다.
따라서 교학으로 익힌 것은 지식일 뿐 일대사 해결을 하지 못하며 또한 남을 제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여분들에게 지극하게 간절한 마음으로 당부하고자 하는 것은 불자로써 불자노릇을 하려면 깨우치는데 신명을 바쳐야 한다하는 것이다.
우리 불교는 실천하는 종교이다. 우리 불교가 실천하는 종교란 것은, 타 종교는 가르친 대로 익혀서 그것으로써 실천하는 것이라 그것은 수동적이며 소극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나
불교의 실천이란 것은 스스로 마음을 닦아 깨우침으로서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에 능동적요 적극적인 실천이 되는 것이다.
* 參禪이란 무엇인가? 하면, 禪은 마음이라 하는 일체만유의 근본 실다운 모습이요 또한 이 만법의 진리이며
參이란? 곧 이 실상인 선을 參究하는 즉 알려고 의심하여 깨쳐드는 공부를 이른 것이며
禪은 고대 말한 것처럼 진리의근본인 마음이며 일체의 실상이며 敎는 이것을 말로써 일러주는 것이니
이 말이라는 것은 실다운 것이 아니기에 무실하다 하는 것인즉
“누런 황엽으로 황금을 일러준다” 하며, “양고기를 걸어 놓고 개고기를 판다” 하는 것이다.
그러나 교가 헛된말씀이 아니기에 無實하나 無虛하다 하며 眞實不虛하다 하는 것이다.
이 실상인 양고기(禪)는 누가 보여 줄수도 가르쳐 주지도 못하는 것이기에 “양고기를 걸어놓고 개고기를 판다” 하는 것인즉 가리킴을 따라
스스로 깨쳐 증득해야 하는 것이다.
*禪門과 敎文(門)이 다같이 불법을 깨치들게 하는 중생제도의 목적은 같으나 부처님의 敎說인 徑의 말씀은 먼저 일체법을 분별해 보이시고,
필경에는 공(빈것)을 설하신 것이며,
조사가 말과 글귀를 보인 것은 자취를 의지(뜻)에서 끊고, 이치를
마음 근원에 나타낸 것이 서로 같고 다른 점인 것이다.
석가세존은 만대의 의지처인 本師 교주인 까닭에 이치를 자세히
보이셨으나, 조사는 直指人心 하여 즉시 도달케 함에 있기 때문에 뜻이 현통하여 오묘하게 통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은 활과 같이 자세히 설명으로 가르침을 일렀주셨으며 조사는 활줄과 같이 곧장 직지인심으로 이르는 것이므로
부처님은 말 있음으로 말 없음에 이르게 가르치셨고
조사는 말 없음으로써 말 없음에 이르게 가리켜 보이는 것이다.
여러분들께서 지금껏 교학에 굳혀져서 禪門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고 멀리 하시려는 마음이나 거부감을 갖는다면
참으로 어리석고 안타까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어 다시 몇말씀 부연해 드리고자 하는 바이니
禪이란 곧 마음 그것이며 일체의 근본실상인 것이며
敎란 이것을 말로써 일러준 것이라
세존께서도 일생하신 설법을 일러 헛된 것이 아니나 실다움도 아니라 하신 말씀의 뜻을 바르게 살펴 알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참다운 것을 직접 살펴 계합하여 깨쳐 알라하는데 어째서 두려워하거나 실천하지 않으려 하시는 것인가?
교를 통하여 익힌 말로는 아무리 맛있는 먹을 것을 말해도 배가 부르지 않는것 같은 것이며
남의돈 십만양을 세어도 내돈 천양을 갖는것만 못한 것이라는 이렇게 간곡한 말씀이 가슴에 와닫지 않는 분들이 계시다면 지금까지 헛공부를 하신 것이라 하리다.
부처님이나 조사가 말씀하신 경의뜻은 그 말씀을 통하여 깨우치라는데 있는것이지, 말을 배우고 익히기를 원하신 것이 아닌 것인즉 말을 익히고 글자풀이나 해서 무엇 하겠는가?
그 말을 익히는 것으로 공부를 삼는다면 그 말은 말한 그분의 깨달은 견처에서 나온 것일 뿐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일러 주신 말뜻을 살피지 못하면 부처님의 말씀이 아무런 소용없는
옛 이야기로 지식을 일러주신 것일 뿐인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많이 알기만 하면 그 아는 것으로 일대사해결을 하실 수 있으며 바른 도리를 알고 살수있으며 죽음에 임하여서 힘이 되겠는가?
불성이니 마음이니 법이니 하는 용어는 곧 근본을 억지로 이름하여 이른 것이며 법성 자성이라 이름하는 것도 마찬가지 假設로 세운 이름인 것이다.
따라서 법이라는 것은 살펴보면 이 근원인 불성으로부터 나툰 작용의 진실된 이치를 이르는 것이며, 곧 이 이치를 깨우쳐 통달한 것을 일체종지라 하며 불지견이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불법을 깨쳐 알고자 하는 것은 이 근원이 되는 법성인 참나를 증오하고 이 근원으로부터 작용하여 나툰 일체만유의 진리인 법의 이치 즉 법리를 깨우쳐 증득하고자 함에 있는 것이다.
* 불도의 성취인 證悟證得하기 위해 깨쳐 들어가는 門은 주력, 염불, 간경과 참선등 여러길이 있으니 따라서 깨달음이란 것은 꼭 한가지 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참선을 해서 깨달아 들수도, 경을 살펴 간경을 해서 깨달아 들수도 있고, 또 주력으로써 깨달을 수도 염불을 해서 깨달을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이 깨달아 드는 4대 門으로써 어느 길이든 바르게만 닦아 들어간다면 “문앞의 길은 장안으로 통한다” 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 참선을 徑截門(지름길로 빠르게 들어가는 문)이라 하는 것이니 참선은 행주좌와 어느때 어느곳이고 가능한 것일 뿐 아니라 지속적으로 끊이지 않게 의심해 가는 것이며
참선은 일체법의 본질을 깨달아 모든 진리인 일체종지를 깨달아 증오하고자 함에 있는 것이므로
따라서 행주좌와 알려고하는 간절함으로써 의심하여 큰 의단 가운데서 몰록 깨쳐들어야 하는 것이다.
참선에는 회광반조하는 묵조선이 있고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이 있으나 구경은 둘아닌 것이다.
마음을 관조해 공안의 도리를 간절히 알려하는 사유로 의심을 집중하여 定으로써 일체와 둘 아니게 되어 고요한 경지에 들어 삼계의 근원과 계합 합일하여 크게 죽어 다시 그 지혜로써 크게 되 살아 나는 깨달음을 성취하여야 하는 것이다.
참선공부는 반드시 선지식을 만나 화두를 간택받아 간절히 실참실구하며, 선지식을 자주 참문하여 지도를 받아가며, 닦아 나가노라면 크게 의단이 생길때 그때 선지식의 법문을 듣거나 한방망이 맞거나 한 할!을 들어 깨치는 기연을 만나게 되어 몰록 확철하게 깨달아 일생일을 마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言下인 말끝에 깨우친다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참선공부는 이론도 아니요, 학문도 아니기 때문에 실지로 의심을 일으켜 그 의심이 진실하고 간절해야만 이룰 수 있는 것이므로 이렇게 닦어들어 깨닫는 것을 實參實悟한다 하는 것이다.
참선공부를 하는 參學인은 모든 견문과 경험, 지식에 대한 알음알이를 모두 놓고 백지와 같이 마음을 비워야 성취 할 수 있는 것이다.
오직 화두가운데 의심을 지어 모르는 것을 알려고 간절하게 의심해나갈 뿐인 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교를 통해 길을 알았으면 선으로 들어가야 한다하여 捨敎入禪이라 하는 것이다.
화두는 말 話字에 머리 頭字로 말의 머리라는 뜻인데,
이것은 말은 입밖에 나왔을 때를 이르는 것이고, 말의 머리는 말을 내어놓기 이전에 한생각 일으킨 것을 말하는 것이니, 말의 머리인 한생각 일으킴을 살펴 그를 쫒아 생각 일으킨 근원에 사무쳐 계합해서 만법의 근본을 밝혀 진리를 깨우쳐드는 것이므로 화두라 하는 것이니 마치 불난곳을 알기 위해서는 연기를 쫓아 불난 곳을 알게 되는 것과 같다 할 것이다.
깨치고 보면 화두가 별개의 것이고 기상천외한 것이 아니라,
곧 이 일상의 진리인 것임을 알게 되며,
화두간택이 중요한 것이라 화두는 선지식을 찾아 간택 받아야 하며 參聞과 점검이 요긴한 것이다.
참선은 간절하고 고요하게 사유로써 깊이 의심하여 일체의 분별이 끊어지고 또렷하여 무심의 경계에 합일하는 것이니
무심의 경계에 이르러 미망의 껍데기가 거두어지게 되면 적나라하게 되어 숨김없고 거짓 없고 꾸밈없는 천연 본연의 본래 모습을 계합하게 되어 발현되는 지혜로써 살게 되므로 번뇌를 여의게되고 일체 경계에 끄달리거나 집착하지 않게 되며 다시 보리를 구하지 않아, 번뇌를 쉬면 곧 보리임을 증오하여 따로 닦을 것이 없음으로 곧 둘아닌 경계가 되는 것이다.
비록 8만 대장경을 설하더라도 견성오도하지 못한 사람은 생사를 면치 못해 삼계를 윤회하는 괴로움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며 자칫 魔說이 될 수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선지식을 찾지 못하면 바르게 지도 받고 알지 못하는 것이니, 선지식의 점검을 받지 않고 스스로 깨쳤다 하고 법을 편다는 자들은 청연외도이며 부처를 비방하고 법을 어지럽히는 것이므로 반드시 무간지옥에 떨어게 되는 것이다.
청산유수로 설법을 할지라도 도를 깨닫지 못한 자의 말은 모두가 마구니의 말이요, 부처님의 말씀이 아닌 것이며, 그 스승은 마왕이요, 어리석은 자들은 그의 지도로 인해 생사고해에 떨어지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옛날 선성(善性)비구가 12부경을 다 외웠으나 윤회를 면치 못했음은 성품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부처를 찾으려면 성품을 보아야하며 자성이 부처요 부처를 이뤘다는 것은 일체 모르는 것이 없으며 자유로운 사람이며 일없고 조작없는 사람이다.
참선하는 방법은 별달리 긴요한 법칙이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니
일체 망상이 고요함을 좌라하고 화두의심이 성성함을 선이라고도 하니 곧 坐禪이 參禪이라는 잘못된 인식부터 고쳐야 할 것이다.
성성함과 적적함을 이같이 한다면 오늘밤이 지나기 전에 참선하는 일을 마쳐 도를 이루어 깨달은 정각인 즉 부처님이 될수 있는 것임을 믿고 실천하시기를 바란다.
따라서 알고 보면 禪과 敎가 둘이 아닌 것임을 이제 아셨으니
지금부터 10회에 걸쳐 선을 논하려니 육조단경을 교재로 하여 敎를 통한 禪(실상)을 일러드리고자,
문자가운데 그 도리를 밝혀 실상의 도리인 禪을 指示하고자 하는 바이다.
본자천연비조작 인데 하용향외별구현 인가- 나!
단능일념심무사 인데 갈즉전다곤즉안 이로다- 나!
본래 천연하여 조작이 아닌데
무엇으로 밖을 향해 달리 현현함을 구하려는가?
다만 마음에 한 생각이라도 일어남이 없을진데
목마르면 차를 달이고 곤하면 잠을 자도다.
자성을 여의지 말라 내 생각 내가 주인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