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12일 살림교회 주일예배(성령강림 후 열 한 번째 주일)
사랑이 찾은 더 큰 사랑
시편63:1~8/ 요12:1~8
이미 돌아가신 분이지만 우리나라 구약학계의 원로였던 분 중에 김정준 박사님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우리와는 교단이 다른 기독교장로교의 학자이셨고 한신대 학장까지 지내셨던 분이지만 교파와 신학경향을 떠나서 구약학계에서 매우 존경받던 분이셨습니다. 이분은 학자이기 이전에 삶 자체가 매우 드라마틱한 삶을 사셨습니다. 이분의 별칭이 <관에서 나온 사나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이분은 일생을 병마와 싸웠습니다. 젊은 날에 사경을 헤매는 폐병으로 큰 수술을 받아야 했고, 그 후유증으로 각종 질병을 짊어지고 사시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분은 시편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시편에 보면 온갖 질병과 고난 속에서 부르짖는 사람들의 탄원이 많이 나옵니다. 아마도 자신의 경험과 많이 오버랩 되었겠지요. 그런 시편들을 하나하나 묵상하면서 이분은 학자의 지적인 접근을 넘어서 시편 기자들의 마음으로 시편의 하나님을 찾았고 또 만났습니다. 그래서 이분이 시편 묵상을 한 글들을 읽어 보면 머리만이 아니라 가슴으로, 더 나아가 영혼 깊이에서 시편을 읽었다는 느낌이 금방 묻어납니다. 이 분은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63편을 묵상하면서 “영혼의 연애편지”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오늘 시편 63편 1절을 보면 시편기자의 애타는 심정이 절절히 표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주님은 나의 하나님입니다. 내가 주님을 애타게 찾습니다. 물기 없는 땅, 메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님을 찾아 목이 마르고, 이 몸도 주님을 애타게 그리워합니다.”
이 시편에는 “다윗이 유다 광야에 있을 때에 지은 시”라는 표제어가 붙어 있습니다. 이 표제어는 이 시의 배경을 상상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유대 광야는 본래 물이 귀한 곳입니다. 샘도 냇물도 없고 다만 하늘에서 내리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는 곳입니다. 그러나 건조기(4~10월)에 내리쪼이는 뙤약볕에는 광야에 있는 모든 생물이 타 죽게 되고 그야말로 먼지가 폴폴 나는 물기 없는 땅, 메마르고 황폐한 땅으로 변하게 됩니다.
오늘 시인은 바로 이런 목마름으로 하나님을 애타게 찾고 있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찾아 목이 마르고, 이 몸도 주님을 애타게 그리워합니다.” 이런 갈망은 드디어 성소에서 주님을 뵙고 주님의 권능과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주님의 권능과 영광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생명보다 더 소중하다”는 깊은 깨달음을 시인은 얻게 됩니다. 여기서 한결같은 사랑이라고 할 때 쓰이는 히브리어 단어는 헤세드입니다. 신실한 사랑, 끊임없는 사랑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 사랑은 조건을 넘어서고 시공을 초월하는 사랑입니다.
시인은 애타서 하나님을 찾았는데, 하나님이 자신에게 보여주신 사랑은 헤세드의 사랑이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애타게 하나님을 찾은 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먼저 자신을 애타게 찾고 있었다는 깨달음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자신이 큰 잔치에 초대를 받아 간 것처럼, 기름지고 맛깔진 음식을 배불리 먹은 듯이 그 영혼에 큰 만족을 느낍니다. 그는 마침내 주님의 오른 손이 자신을 꼭 붙잡아 주심을 확신합니다. 사랑이 찾은 더 큰 사랑입니다.
오늘 신약의 말씀 속에도 사랑이 사랑을 발견하는 이야기가 그려져 있습니다.
유월절을 엿새 남겨둔 어느 날,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3Km 떨어진 감람산 동쪽 기슭에 베다니라고 하는 마을에서 잔치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거기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마다 즐겨 머무셨던 나사로와 그 누이, 마르다와 마리아가 사는 곳이었습니다.
거기서 예수를 위해 잔치를 베풀었는데, 마르다는 시중을 들고 나사로는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리아가 예수를 향해 걸어갔습니다. 사람들의 모든 시선은 마리아에게 쏠렸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를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은 모든 이가 알고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나드 향유 한 근이 들어 있는 옥합을 들고 있었습니다. 나드 향유는 매우 비쌌기 때문에 그만큼의 양을 사려면 300데나리온 이상의 돈이 들었습니다. 300데나리온은 보통 노동자의 일 년치 연봉과 맞먹는 금액입니다.
마리아는 귀한 나드 향유가 가득차 있는 옥합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가서 예수께서 식사를 하시는 곳으로 다가갔습니다. 마리아는 아무 말 없이 갑자기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발에 붓고 자신의 머리털로 그 발을 닦기 시작했습니다. 엄청나게 비싼 향유가 전부 쏟아져 나왔습니다. 향기가 갑자기 온 집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손님들은 어리둥절했습니다. 누구도 그와 같은 일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차차 정신을 차리고 사태를 알아차렸습니다. 그리고는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요한복음은 불평을 한 사람은 유다라고 말합니다.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고, 왜 이렇게 낭비하는가?” 그러나 다른 복음서에서는 여러 명이 화를 내면서 쑤군댔다고 전합니다. 이런 것으로 보아 다른 제자들도 역시 마리아의 이런 행동을 탐탁하게 생각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자들은 다 알겠지만 알겠지만 향수는 이렇게 뿌리는 것이 아닙니다. 향수는 바른 듯 마는 듯 살짝 뿌려야 은은한 향기가 나게 됩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향유 한 근을 가져다 한꺼번에 부은 것입니다.
방마다 넘쳐나는 엄청난 향유 냄새로 온 방이 채워졌습니다. 냄새 때문에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습니다. 냄새 때문에 더 이상 잔치가 진행될 수가 없었습니다. 마리아의 깜짝 놀랄 행동이 잔치 분위기를 완전히 망쳐놓았습니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이것은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이었습니다. 예수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당황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눈총이 얼마나 심했을지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급기가 예수께서 나섰습니다. “이 여자를 그냥 두어라. 왜 그를 괴롭히느냐? 그는 내게 좋은 일을 했다”(참조, 막14:6)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대로 두어라, 그는 나의 장사 날에 쓰려고 간직한 것을 쓴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지만,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은 아니다.”
자, 우리는 오늘 본문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오늘 제가 본문을 풀어 드릴 때 여러분은 어떤 생각과 느낌으로 들었습니까? 분명 이 본문은 ‘마리아가 예수께 대단한 헌신을 했다. 우리도 마리아와 같은 헌신을 본받자’라는데만 초점이 있지 않습니다.
마리아는 엄청난 사랑을 예수께 보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이 한 행동은 그 행동 자체보다 그 행동이 가리키는 실재가 더 중요합니다.
이 이야기를 전하는 모든 복음서는 오늘 본문이 예수의 수난을 앞두고 일어난 일로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은 바로 앞장인 11장에서 예수를 죽이려는 음모가 시작되고 있으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바로 뒤는 예수께서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예수께서 입성하신 후에 제자들과의 유월절 최후의 만찬을 하루 앞두고 일어난 일로 전하고 있습니다. 조금의 차이는 있습니다마는, 예수께 향유를 부은 이 사건이 예수의 수난과 죽음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거기 있던 모든 사람들은 마리아가 자신의 사랑을 상징하는 값비싼 향유를 부음으로써 예수께 자신의 사랑과 헌신을 선물로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가 한 상징적인 행동의 심오한 의미는 단순히 사랑과 헌신의 선물이라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선물에 담겨 있는 ‘온전함’에 있습니다. 마리아는 값비싼 향유를 예수께 부었을 뿐 아니라 옥합을 부수고 깨뜨려서 그 안에 들어 있던 향유 전부를 예수의 발에 부었습니다. 옥합이 깨뜨려졌다는 것은 이제 이 옥합은 다른 목적으로는 사용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마리아의 놀라운 행동이 지닌 의미였습니다.
마리아의 행동은 예수의 몸이 장차 십자가 위에서 깨어진다는 사실을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분의 육신은 한없는 가치를 지닌 향유, 다시 말해 하나님의 성령으로 가득 찬 옥합입니다. 이 옥합은, 그 안에 머무르고 계신 성령이 이 세상 위에 쏟아져, 온 인류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우기 위해 조각조각 깨어졌습니다. 이 옥합이 조각조각 깨어져 한 방울의 남은 향유까지 쏟아 부어진 것은, 예수의 육체가 십자가에서 깨어져 마지막 남은 한 방울의 피까지 쏟음으로써 예수께서 자신을 온전히 우리에게 선사한다는 십자가의 상징을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값비싼 순 나드 향유의 낭비는 온 세상을 새로운 향기로 가득 채우는, 십자가에서 낭비하고 있는 예수의 사랑을 상징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이 더 큰 사랑을 발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옥합이 깨어지며 향유가 쏟아져 나올 때, 온 방을 가득 채웠던 그 거역할 수 없었던 향기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거역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의 몸이 부서짐으로써,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이 한계가 없이 이 세상을 가득 채울 것임을 이 사건은 미리 보여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의 수난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온전히 내어 놓고 우리를 위해 돌아가십니다.
유다는 마리아의 넘치는 사랑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위해 자신을 바치시는 예수의 심오한 사랑도 느끼지 못합니다. 그는 모든 것을 실용적인 관점으로 보고, 어떤 감정의 낭비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다릅니다. 그분의 사랑은 절제 없는 낭비요, 그렇기 때문에 신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랑은 향기가 되어 온 세상에 퍼져나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3절에서 요한은 마리아가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부었을 때, “온 집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찼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향유가 가득 넘치는 충만은 예수께서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베풀어 주셨던 포도주의 충만을 기억하게 합니다. 혼인잔치에서는 삶의 새로운 맛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여기서는 온 집안에 가득 값진 향기가 퍼졌습니다. 예수의 죽음으로 완성에 이르는 하나님의 사랑은 성령의 은은한 향기를 내며 온 세상에 퍼져나갑니다. 바로 앞 장에 나오는 죽은 나사로의 몸에서 나오는 썩는 냄새(요11:39)와는 반대로 부활은 생명의 향기를 풍기게 됩니다. 요한복음은 이런 상징들을 통해서 말해주려는 바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실재를 모든 감각으로 알아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실재는 바라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맛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체험하고 느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 안에 내재하는 하나님의 흔적은 향기, 새로운 맛, 감미로움, 기쁨 등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사랑으로 내 자신을 긍정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깊게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우리의 영혼 안에 내재하시는 하나님의 흔적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내 존재 깊이에서 경험되는 신비로움, 우리 가운데 샘솟는 감사, 희망 가운데서 느끼는 삶의 기쁨, 또한 고통 가운데서도 느끼는 삶의 희망, 말씀과 기도의 감미로움, 내 안에서 흘러나오는 사랑, 자연과 하나님의 피조물에 대한 경탄 등입니다.
이것은 오늘 시편기자가 “이 생명 다하도록 주님을 찬양하렵니다. 내가 손을 들어서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렵니다.
기름지고 맛깔진 음식을 배불리 먹은 듯이 내 영혼이 만족하니, 내가 기쁨에 가득 찬 입술로 주님을 찬양하렵니다.“라고 노래했던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갈망하기 시작하면 하나님께서는 더 큰 갈망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주님을 찾기 시작하면 주님은 더 큰 사랑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새로운 맛, 큰 감사와 기쁨을 채워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