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후와 호우로 각지피해 불소 : 정읍천 범람으로 시민 일시 불안 / 정읍을 중심으로 각지교통 두절/ 고창군 큰비, 일시 교통두절
(怪候와 豪雨로 各地被害 不少; 井邑川 漲溢로 市民 一時 不安//井邑을 中心으로 各地交通 杜絶//高敞郡 大雨 一時 交通杜絶//遂安洪水로 自動車不通行 四日부터나 復舊?//洪水의 氾濫으로 交通一切杜絶 公州, 錦山, 沃川, 報恩間//大川橋破潰保寧大川에 浸水//이번 暴雨로 農作被害莫甚 裡里는 百五十미리//全州地方에 浸水十餘戶//大田川汎濫 六歲兒溺死)
[원문] 전북 정읍지방에는 십여일을 지리한 장마가 계속되더니 지난 3일 밤부터 갑자기 우량이 더하여 4일 오전 3시반 경에는 정읍천의 물이 창일하여 높이가 10척 가량되는 제방에까지 물이 범람하여 전시민은 깊은 잠에서 속속 피란중이었으며 소관 정읍서 정읍소방조원까지 총동원하여 철야 경계하였는데 피해는 적은 모양이라 한다.
[해설] 신문기사의 헤드라인에는 '괴후와 호우'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는데, 괴후란 이상기후를 말하고 호우란 한꺼번에 내리는 무더기 비를 말함이다.
1931년 8월 3일 전라도, 충청도 일대에 내린 집중호우로 인해 적지않은 피해를 입었던 상황을 보도한 기사이다. 특히 전라도의 경우 정읍 고창에 내린 강수량이 많아 피해가 컸었던 것 같은데, 정읍 시민의 경우 새벽잠을 설치고 피난을 갈 정도로 정읍천이 범람할 위기에 놓였던 것 같다.
정읍시내 남쪽을 흐르는 정읍천은 당시 직강화 공사를 한 지가 얼마되지 않았던 때이고, 지금보다는 훨씬 하상이 높고 제방은 낮았던 상황이라 항시 집중호우만 되면 불안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땐 시내를 통과하는 정읍천의 제방을 방천이라하여 우마차가 다닐정도의 좁은 길이 있었으며, 이후 1970년대 벚꽂길이 개설되면서 확장되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원래 장마철은 보통 6월 하순에 시작하여 7월 하순에 끝나고 8월부터는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되는 시점이다. 당시 8월3일에 내린 비가 장맛비의 연장선상에서 내린 비인지 아니면 8월에 흔히 내리는 국지성 집중호우(게릴라성)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때는 장마시즌이 다소 길어지면서 발생한 무더기비였던 것 같다.
당시 집중호우로 인해 도로가 유실되고 외곽으로 연결되는 도로교통이 두절될 정도였으니 큰 비였음에 분명하다. 하지만 지금처럼 배수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았고 아스팔트로 포장되지않은 비포장 자갈길이 대부분이었기에 큰 비에 더욱 쉽게 도로가 유실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지금의 정읍천은 모래 자갈 등 퇴적물을 꾸준히 준설하여 하상이 깊어졌고 제방도 높이며 호안시설도 콘크리트와 자연석으로 튼튼히 하였기에 왠만한 여름철 홍수에도 마음이 놓인다. 하지만 자연재해란 예상치못한 상황에서 인간을 위협할 수 있기에 항시 대비해야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