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안에 이미 실패란 뜻을 지닌 여자가 있다. 원래는 하얀 난초꽃이라는 이름의 파이란. 머나먼 중국에서 온 여자(장바이쯔)는 자본주의의 땟물에 찌든 세탁물을 들고
좁은 골목길을 누빈다. 순백의 영혼을 수줍게 하늘 가득히 널어 말린다.
그 동네의 서쪽 부두에는 살아가는 것 자체가 실패작인 남자(최민식)가 있다. 빚 수금을 나갔다 동네 깡패와 시비가 붙자 고작해야 손에 드는 흉기가 연탄재인 그런 남자.
어느 날 삼류 양아치 건달인 강재에게 서류상 아내인 파이란은 싸늘한 시체로 돌아온다.
`파이란` 은 멜로영화가 아니다. 멜로로 팔고 `멜로틱` 하게 사람을 울릴지라도 멜로영화가 아니다. 사람들은 왜 파이란이 동물 뱃속에서 기어 나온 것 같은 `국가대표 호구`
강재를 그리워했는지 의문을 던진다. 그리곤 한번도 만나 본 적 없는 남자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느냐고 고개를 젓는다.
맥없이 살다가 말없이 죽어가는 파이란은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보면 남성의 판타지가
투영된 전형적인 백치미인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영화를 보다 보면 `파이란과 강재의 사랑에 논리적 인과관계가 그렇게 중요할까?` 라는 생각이 슬금슬금 들기 시작한다.
`파이란` 속의 도시는 연탄 먼지가 가득한 안개 정글이다. 그 안에 숨쉬는 폭력이란 우리 곁에 너무 가까이 있어서 우리가 깨닫지조차 못하는 미만한 폭력이다. 여자들은 직업소개소 간판 뒤에서 하릴 없이 팔려나가고, 소장이란 작자는 결핵에 걸려 죽어가는
여자를 세워두고도 무심히 무좀약을 바른다.
가난과 결합한 폭력은 생계라는 최면으로 인간들을 무감각하게 만든다. 이러한 측면에서 `파이란` 의 폭력은 `친구` 의 폭력보다 더 잔인하고 섬뜩하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약한 짐승, 파이란이나 강재는 다시는 고향에 돌아가지 못할 도시의 먹이감이라는 것을.
영화 `길` 의 앤서니 퀸처럼, 강재는 파이란의 유골 앞에서 슬픈 짐승의 울부짖음으로
오열한다. 그건 순도 1백%의 연기를 보여준 최민식이란 사람에게서 뿜어나오는 슬픔이다. 그에게 구원은 기적이겠지만, 그러한 구원에 대한 갈망 역시 `파이란` 의 폭력처럼 우리 안에 늘 존재하지 않을까. 가야할 곳이 어딘지 알지만 갈 수 없는 자들에게,
죽음은 그렇게 코앞에 다가와 있고 사랑은 늘 너무 늦게 찾아온다.
심지어 파이란의 유골은 방바닥에 흩어져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인천이란 도시의
먼지 속에 스며든다. 그 순간 구원은 사치가 되고 잔인한 삶의 규칙은 둔중한 무게로
막다른 길을 다시 만들고 있다.
파이란과 강재는 제대로 만나지 못했지만, 이 대상 부재의 나르시즘이 `러브 레터` 의
멜로라기보다 `오발탄` 류의 드라마가 되는 지점. `파이란` 은 현실이 거세되고 장르영화의 판타지에 미혹된 한국 영화계에서 돋보이는 사회파 영화다.
영화평론가의 자존심을 걸고, `파이란` 은 개봉 (지난달 28일) 당시 가장 저평가된 작품으로 우리 영화계에 남을 것 같다는 진한 예감이 들었다.